‘隣(Rhin)-曲線美의 讚歌(Hymn to the Curvilinear Beauty)’을 그리는 임무상 화백
2023-02-01 오후 3:51:30마포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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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상 화백 작품
어린 시절을 벽촌에서 자라난 탓으로 흙냄새 풍기는 토속적 풍물과 서정적 분위기를 사랑하고 수려한 경관도 좋지만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고향 산천과 농촌의 정취를 남달리 좋아했다. 특히 벽촌 오지의 어설프고 거칠거칠한 맛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여 그 내면세계를 보다 가까이 다가갈 것인가, 어떻게 그림으로 그려낼 것인가는 나의 숙제일 따름이었다.
방문을 열면 메케한 메주 내음이 코를 찌르지만 그래도 싫지 않은 그곳, 하늘만 보는 초가지붕에 박 넝쿨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뒤뜰엔 붉은 감이 탐스럽게 열릴 때면 추수가 끝나 앞마당엔 노적가리가 가지런히 쌓이는 그곳, 우리는 아직도 그 애틋한 고향집을 생각하면 눈물 날 정도로 찡하게 다가온다. 구수한 된장찌개 고추장 맛 새큼한 김치 깍두기 맛,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속에 아낙네의 밥 짓는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는 정겨운 풍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느 하나 우리다운 맛과 정취가 아니 깃 던 곳 없으며 뛰어놀며 자라던 그곳은 마음 놓고 물을 마시고 숨을 쉬어도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잘살아 보자던 농촌의 새마을 운동으로 초가집은 자취를 감추고 시멘트 블록에 슬레이트 지붕이 등장하고 각가지 도료와 페인트까지 난무하더니 급기야는 땅을 팽개치고 도회지로 떠난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면서 농촌은 노인들만 남아 빈집만 쓸쓸히 지키고 묵정밭 일굴 젊은이들은 찾아볼 길 없다. 이쯤 되고 보니 고향의 옛 정취는 간데없고 금방이라도 유령이 나올듯한 텅 빈 집들만 늘어나고 삭막한 분위기로 탈바꿈해진 현장을 볼 때마다, 분명 내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고향은 아니었다. 이렇게 황폐해진 농촌을 마음 아파하며 안타까운 심정을 그림으로 담아내기도 했다.
모든 예술가와 작가는 창의성이 가장 큰 덕목이며 궁극적으로 자신의 깊은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감성을 형상화 시키고 표현하는 창조자이다. 진솔하고 꾸밈없는 내면의 기억을 하나씩 들추어내어 맑은 영혼으로 우려내고 승화시켜 나감으로써 작가로서의 주목과 평가를 받게 되는 것이다.
유년 시절부터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소박한 성정의 화의는 억누를 수 없는 욕구가 남다른 집착과 내면적 심상의 표현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해서 생득적 귀소의로 얻어진 소재들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본다. 이것이 나의 주된 작업의 모티브가 됐으며 몸소 체험을 통하여 본능적으로 감흥과 심미감을 끌어내는데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이러한 감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농촌의 순박한 정서를 진솔하게 그림으로 표상했으리라 본다. 따라서 감히 한국적이라고 일컬을만한 삶의 자국들과 흔적, 농촌 고유문화에 대한 다양한 뉘앙스를 탐구하고 모색하는 작업에 천착하게 되었다. 무국적 그림이 난무하는 상황에 자기의 미적 정서를 생득적으로 싹틔워준 고향의 추억과 향수, 그리고 농촌의 자연이 내게 심어준 정서와 이웃 간의 나누던 정을 시각화함으로써 우리의 아름다움을 관찰하고 탐구하는데 혼신으로 경주했다. 본격적인 산업사회가 전개되면서 급격한 농촌의 변화에 따른 탈바꿈되는 현장을 그리면서(이농 후 연작) 조형적 질감과 다른 작품과의 차별성 내지는 이러한 토속적인 특성을 살린 나만의 독창적인 그림들이 나오게 된다.
이를테면 아름다운 유년 시절의 흔적이 고즈넉이 스민 고향의 풍광을 시어로 그려내기도 하고 점차 사라지고 훼손되는 아픈 흔적들을 고스란히 담아내어 농촌의 변모를 실감 나게 표현한 작품들로 옛이야기, 초저녁, 모정, 망월, 땅거미 질 무렵, 기원, 무상. 이농 후 연작을 작화(作畵)함으로써 좀 더 심정적, 서정적 의식으로 다가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림은 담백하고 간결하게 마음의 무게 추를 감각적으로 담아낸 형상의 윤곽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독일 불교미술사가인 “제켈” 박사가 말하기를 한국미술의 특징을 가리켜 미완성의 완성, 비 계획의 계획이라고 했다. 이 말은 우리 땅속에서 출토되는 공예품 혹은 초가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특징으로 매우 합리적이고 획일적인 사고에 젖어있어 과히 충격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어쩌면 나의 초가와 초가마을에서 발견하는 응축된 곡선 미학이 바로 다름이 아님을 알고 『린(隣)-곡선공동체의 미曲線共同體의 美)』라는 회화 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조형 표현은 화선지와 색이라는 전통적인 재료와 기법을 통해 실천하고 있다. 먹과 종이는 “제켈”이 지적했듯이 비 계획의 계획이라고 할 수 있는 미묘한 조형감각을 구현해 낼 수 있으며 바로 이 미묘한 조형 논리 속에 공동체 의식이 내포되어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직선은 목적을 나타내지만 두루뭉술한 곡선은 목적이면서도 목적이 아닌 것을 나타내주기 때문이다. 분명히 동양인의 선(禪) 사상에서 곡선이나 원은 양보이고 자기해방으로 이해된다고 했다. 모름지기 그림은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이 녹아내려야 하는 까닭에 작가는 이 범주를 벗어나서는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없으리라 여겨진다.
일본학자 야나기(柳宗悅)는 “한국의 초가집 모양에서 조선 시대 백자에서처럼 후덕한 모성애와 평화를 느낀다”고 했다. 모름지기 초가와 초가마을에서 볼 수 있는 두루뭉술한 선, 너그럽고 자유분방한 선, 걸림이 없는 선, 여유로움이 넘치는 선, 포근하고 정감 어린 선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선 안에는 우직하면서도 천박함이 없고 질박하면서도 간사함이 없고 꾸밈이 없는 소박하고 단아한 우리 고유의 맛과 멋이 넘치고 해학이 있고, 따뜻한 이웃이 있고, 훈훈함이 있다. 초가는 자연과 조화를 잘 어우러진, 즉 인간과 자연을 조화시키려 했던 우리 민족 전통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조상님의 지혜가 담겨있고 어머니의 탯줄을 묻고 살았던 우리 고향의 진면목이며, 요람이며, 겨레의 얼과 애환이 깃 던 진솔한 삶의 표상이기도 하다. 참으로 초가의 원형 보존은 어떤 문화재 못지않게 중요함은 아무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급변하는 세태에 어쩔 수 없이 밀려나기도 하고 우리 것을 마구 버리는 작금의 풍토 때문에 이젠 거의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오늘날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급격히 밀려오는 서구문화의 유입으로 우리의 의식구조는 서서히 외세에 잠식되고 말았다. 분명히 생활의 편리함을 느끼고 물질적 풍요로움을 가져왔지만 반면에 정신적 결핍과 갈등, 모순으로 이어져 급기야는 공동체 문화는 무너지고 이기주의 개인주의 팽배로 정서는 메마르고 감성마저 고갈되어 비정한 사회로 추락하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의 전통문화는 서서히 퇴색되고 국적 없는 문화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서구문화를 직선 문화라고 한다. 빌딩, 아파트, 고속도로 등 그 예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곡선 문화에 익숙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딱딱하고 완벽하고 획일적인 직선에 비해 곡선은 부드럽고 우연하며 관용이 있으므로 해서 예로부터 우리 겨레는 유달리 정이 많고 이웃사랑과 공동체 의식이 투철하여 어려움과 위기가 닥쳤을 때 서로 도와주고 나눠주고 이끌어주는 인간애와 협동심이 스스로 우러나게 되어있다. 이것이 우리의 미덕이기에 지금도 재난을 당하거나 어려움에 처해 있는 불우이웃돕기에 많은 사람이 성금에 힘을 모우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우리의 자부심이요 내 세울만한 한국인의 긍지라 아니할 수 없다.
요컨대 내 그림의 바탕은 온고지신에 있다. 치즈 버트 맛이 아닌 된장국, 고추장 맛 이 나는 신토불이의 그림을 그리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농촌 민초들의 삶을 통한 역사성과 시대성이 접목된 한국성을 추구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며, ‘린 隣(Rhin)’ 사상과 곡선 미학을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린 사상은 공동체 문화의 근간이며 린(隣)은 원융한 것이어서 하나가 모두요 모두가 하나됨을 뜻하므로 우리의 이웃 간의 성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대적 소명과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여 우리 문화에 소중함을 일깨워 보려 함이다. 무분별하게 범람하는 콘크리트 문화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더욱 우리의 것에 대한 고마움과 편안함을 느끼는 까닭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우리 것에 대한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잊고 사는 것 같다. 백범 선생께서도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부강한 나라가 되기보다는 우리 것을 이끼고 가꿀 줄 아는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우리 것에 소중함은 수백 번 강조해도 무리함이 없을 것이다. 내 그림을 통하여 잊혔던 향수와 이웃사랑을 함께 나누며 어려운 시대를 살아 온 우리 모두에게 위안이 되고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빛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더불어 우리다운 맛과 빛깔이 내가 추구하는 한국성 이즘이 조금이라도 빚어 나올 수 있다면 다시없는 보람이라 하겠다.
결론적으로 나의 화화(繪畵)의 근간(根幹)은 곡선미(曲線美)의 조화이다.
내 그림의 테마가 되었던 곡선 공동체 정신과 곡선 미학은 금강산이라는 대명제를 만나 일대 변혁기를 맞는다. 나의 조형 언어인 곡선 화법으로 금강산 작업에 접목하여 새로운 산의 형상을 발현하므로 써 나의 회화에 새로운 이정을 열게 된 것이다. 곡선의 심미감은 금강의 진면목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었고, 산세의 새로운 운필을 표출할 수 있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어떤 이는 “대부분 비슷비슷한 산수화풍인 북한 작가들은 금강산 그림을 실패했는데, 임무상은 곡선 화법으로 풀어낸 새로운 금강산을 창출했다”고 극찬까지 하여 격려와 박수를 받기도 했다.
자고이래(自古以來)로 우리 민족은 딱딱하고 획일적이며 완벽함을 추구하는 서구의 직선 문화에 비해 부드럽고 유연하며 넉넉함이 있어 곡선 문화에 동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어눌하고 투박하고 두루뭉술한 곡선 속에는 포근한 정감이 서려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하고 질박한 미완성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이 바로 한국미의 표상이라고 여겨왔으며 이는 나의 회화의 근간(根幹)이 되어왔고 ‘隣(Rhin)’ 또한 다름 아닌 것이다.
“자연은 직선이 없으며 곡선이다”라고 했다. 대자연은 곡선미의 조화라고 할 수 있음에 따라서 자연스러움은 작화作畵의 기본 요건이기도 하다. <산, 소나무, 달 그리고>는 지금까지 추구해 온 방법에서 일정부분 소재나 틀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유희(遊戱)하고 관조(觀照)한다고 할까? 오랫동안 많은 스케치로 얻어진 풍광이나 형상들을 탐구하고 재해석하여 탄생 된 작품들이다. 하나의 테마나 어떤 유형의 방법이나 아류에 국한되지 않고 보다 자유롭고 자연스러움에 접근해 보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곡선으로 본 자연의 아름다움을 오랫동안 추구해 온 나의 조형 언어인 곡선 화법으로 다양하게 풀어 본 것이 곧 나의 작업이다.
작품소재로는 고향마을의 초가집, 금강산과 백두산, 소나무와 달 등 지극히 한국적이다. 한국적인 빛깔과 질감으로 표현되는 자연 친화적 광물성 석채 안료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그림은 마음의 영혼을 표출하는 것이다.
임무상 화백의 작품세계는 대자연의 곡선미의 조화를 이루면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대자연을 관조하면서 자신의 내면세계를 깊숙이 수용하여 자연의 대상물을 통해서 작품세계를 표출하고 있다.■김선일(한국화가)
| ◆ 임무상 · 경상북도 문경 태생(1942년생) · 분야: 회화/판화/평면 · 수상: 1985년 중앙미술대전 입선, 1985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 경력: (현)한국미술협회 고문, (현)한국전업미술가협회 고문, 한국전업미술가협회 부이사장 역임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