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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20일 주일메시지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20:17~34
요절 / 마태복음 20:28
사람의 위대함은 어떤 것으로 알 수 있습니까? 천안시민들이 잘 아는 어떤 분은 직위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경북 도민들이 잘 아는 어떤 분도 그런 경향을 보입니다. 그의 직업과 직위를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을 볼 때 보통사람들은 답답합니다. 부담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위대함의 새로운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준을 영접하고 예수 안에서 진정한 위대함을 갖기를 기도합니다.
17~19절을 보십시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세 번째 고난 예고입니다. 이번 예고에서는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이 땅에 오신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야의 중요한 사명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엄중하게 보시고 철저하게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극한 사랑으로 죄인들이 심판 받지 않고 구원받을 길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번제단에서 숨통이 끊어지고 그 살과 뼈는 태워 없어지는 어린 양과 같이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는 화목제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대속의 길을 가고자 하십니다. 메시야로써 받으실 고난을 세 번 반복하여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들의 마음을 준비시키십니다. 예수님이 어떤 메시야인지 메시야로써 무슨 일을 하시는지 계속 가르쳐 주십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받으실 고난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는데, 제자들에게는 기대한 것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청탁이 들어왔습니다. 청탁하는 사람은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였습니다. 이름이 살로메인데, 많은 신학자들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 살로메가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와 자매지간인 것으로 봅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혈연관계를 동원하여 인사청탁을 한 것입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어찌하여 이렇게까지 하여야 했는가? 생각 듭니다. 그들은 12제자 중에서도 예수님께 사람받던 사람들입니다. 변화산 사건 때 산에 올라갔던 세 사람 중에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어머니까지 동원하는 인사청탁 한 것은 한 사람 베드로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No.2, No.3가 된다 해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No.1 되기 원하였습니다. 케네디가 형제들의 모토가 ‘2등은 패자다, 1등이 되라’입니다. 세베대 집안 형제들도 2등과 3등은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1등을 원하였습니다.
요한과 야고보 형제들은 1등에게 모든 영광을 주고 1등만 기억하는 역사를 알았던 것 같습니다. 21세기 IT업계에서도 그런 원칙은 작용하고 있습니다. 1등이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요한과 야고보는 1인자를 강렬하게 원하였습니다. 명예욕은 남자들의 간절한 열망입니다. 실제로 보면 더 높은 직위를 통한 권력욕이 남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자기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언제든지 하고자 하는 마음,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든 그것을 존중받고 싶은 마음은 남녀 불문하고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모두 존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는 내가 어떤 말을 하든지 비판 없이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받들어지고, 자기의 모든 것이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되지 않으니 답답한 것입니다. 1등이 되면 이 문제가 해결됩니다. 높은 자리에 앉으면 어떤 말을 하든 사람들이 들어줍니다. 가장 높은 top of the world에 오르면 내가 어떤 생각을 하든 존중받고 내가 어떤 말을 하든 사람들이 들어주며 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 따릅니다. The winner takes it all!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높은 직위를 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직위를 주는 분이 아닙니다. 잘못 알고 있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1등 직위가 자기존재를 위대하게 할 줄 알고 있습니다.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잘못 알고 예수님께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받는 잔은 그들이 기대하는 영광의 잔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에 가셔서 하시는 일은 예루살렘 안토니오 요새에 주둔한 로마군대를 쳐부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오르시는 곳은 왕의 자리, 제국의 황제 자리가 아니라 인류의 죄 대속 위한 십자가입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 역시 십자가의 자리인데 그 자리에 요한과 야고보고 앉을 수 있는가? 물으십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대답합니다. “할 수 있나이다” 요한과 야고보는 엄청난 대답을 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영광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다고 하는 요한과 야고보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의 고난의 자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대답하였지만, 그들도 나중에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고난의 자리에 참여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영광의 자리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앉을 만한 사람에게 주실 것입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나머지 열 제자도 요한 야고보와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하고 싶었는데, 선수 친 요한과 야고보가 미웠습니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실 줄 알고 있습니다. 그들도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청탁한 것처럼 왕이 되실 때, 가장 높은 자리를 자기에게 주기를 바랐습니다. 베드로도 그랬고, 빌립도 그랬고, 안드레도 그랬으며, 나다나엘도 그랬습니다. 다 그렇게 바랐습니다. 높은 자리, 강한 권력자의 자리에 그들의 마음이 향해 있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권력자에게는 인사권이 주어집니다. 과장 시킬 수 있고 부장 임명할 수 있으며 국장을 세울 수 있습니다. 권력자에게는 법과 정책을 만들 수 있고 법과 정책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권력자에게는 사람을 징집하여 군대를 조직할 수 있으며, 그가 명령하면 군대는 복종합니다. 이렇게 하라 하면 사람들이 이렇게 합니다. 저렇게 하라 하면 사람들이 저렇게 합니다. 권력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면 사람들은 명령 내리기 전에 미리 복종하겠다고 와서 맹세하며 자기의 충성을 나타냅니다. 밥을 사고 돈을 주며 기분 맞춰 줍니다. 권력을 한 번 맛보면 그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권력은 옳은 일을 위하여 사용하면 세상에 유익이 있으나, 권력은 통제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력이 사람을 타락시킵니다. 타락한 사람이 권력을 가지기도 합니다. 권력 있는 곳에는 권력을 지키려는 자와 권력을 빼앗으려는 자의 끝없는 다툼이 발생합니다. 비방하고 비난하고 시기하고 배반합니다. 타락한 권력, 타락한 사람의 권력은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권력은 생명을 주지도 않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집권자들과 고관들이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 부리는 것을 제자들이 알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지금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하는 짓을 제자들도 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26, 27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의 제자들은 달라야 합니다.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 부리는 것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야 하는 사람의 마음은 괴롭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권세자처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평화를 주지 않고 생명을 주지 않는 권세를 희망하지 말고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마음대로 이때는 이랬다가 저때는 저랬다 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권력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위대해지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하게 만들어 주시는 길, 하나님 안에서 위대해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섬기는 사람이 되면 위대하게 됩니다. 종이 되면 으뜸이 됩니다. 종은 단순히 시키는 일을 복종하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섬기는 자는 다른 사람의 심부름 해주는 사람, 다른 사람을 받들어 주는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유익을 주어야 좋은 종입니다. 주인을 영광스럽게 하는 종이 그저 시키는 일만 하는 종보다 훨씬 유익한 종입니다. 고려시대 척준경은 여진족의 공격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한 재상 윤관을 두 번이나 구해냈습니다. 불리한 전쟁을 승리로 반전시키기를 반복하였고 윤관에게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었습니다. 섬기는 사람은 함께 한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입니다. 종이 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울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높여 주고 존재감을 높여 주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편리를 보장하는 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더하여 주는 일,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일, 그리하여 그 사람과 함께 하면 자랑스러워지고 그 사람과 같이 일하면 하나님의 충만한 복이 임하는 그런 사람이 섬기는 사람, 종이 되는 사람입니다.
함께 하는 사람을 높여주고 영광스럽게 해주고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위대한 사람으로 높여주십니다. 함께 한 다른 사람들도 그를 마음으로 존경하고 인정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쾌락과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영광과 자기의 소유에 대한 욕심과 자기가 집착하는 작은 쾌락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대함과 위대해질 수 있는 기회와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는 큰 행복을 모두 상실합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서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는 이 진리를 제자들이 어떻게 영접할 수 있습니까? 큰 소리 잘 치는 베드로가 나이도 어리면서 지지 않고 혈기 부리는 요한을 섬기고 야심 찬 야고보가 엉뚱하고 이상한 안드레의 종이 되는 것이 위대해 지는 길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섬기는 사람, 종이 되는 사람이 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밥은 해주겠는데,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살려주고 그를 영광스럽게 하는 일은 맞지 않습니다. 말로 칭찬은 해주겠는데, 진짜 형편없는 모습을 보고도 그런 사람을 마음으로 존중하는 일은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28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배우면 우리도 섬기는 사람, 종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따라 함으로써 위대한 인생, 으뜸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섬김 받으러 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극치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심으로써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내어 주셔서 우리는 죄의 수치에서 벗어나고 모욕당하는 운명에서 벗어났습니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정죄 받을 일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죄 값을 치루어 주심으로써 나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으시고 사랑하는 아들로 대하십니다.
이와 같이 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버리시고 고난 받으셨습니다. 일생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으며, 병든 자, 연약한 자들을 위하여 수고하셨습니다. 죄 없이 체포되셨으며, 거룩하신 분이 죄인들에게 모욕당하고 고문 당하셨습니다. 순결하신 주님께서 더러운 죄인처럼 채찍질 당하셨으며 아프고 괴로운 가시관을 쓰셨습니다.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매달려 죄인으로 정죄 받으셨으며 피흘리고 고통받고 버림받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아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이 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수님을 주의 주, 만왕의 왕으로 모든 피조물들 위에 세워주셨습니다. 세상의 죄문제를 해결하시고 최후의 원수인 사망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로 세우시고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주 예수 앞에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배울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낮아지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존재를 귀하게 여기며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일을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섬기는 본이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2.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 때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님께서 지나간다 함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일제히 힘껏 소리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의 소리가 너무 크게 지속되자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며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맹인들은 굴하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께서 가던 길을 멈추셨습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들을 불러 물으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께서는 간절하게 계속하여 예수님을 부르고 간구하는 맹인들이 원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물어보셨습니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이 사람들은 앞을 보지 못하면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앞 못보는 운명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앞을 볼 수 있지만, 예수님을 왕이 되려고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기대하는 제자들과 앞을 보지 못하면서도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고 간구하는 맹인들이 비교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눈을 만져주셔서 그들의 눈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대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구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이십니다. 위대한 인생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의 인생을 위대하게 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위대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하게 만들어 주시는 인생은 섬기는 사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위대하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위대한 인생으로 복주실 것을 믿는다면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후배들에게 밥을 사주는 것이 섬기는 것 맞습니다. 친구의 이사 짐을 옮겨 주는 것도 섬기는 것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섬김을 자기중심적으로 감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섬김을 자기의나 자기 자랑의 수단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갈 곳 없는 사람에게 잠 잘 곳 마련해주고 식사도 같이 하였습니다. 직장도 알선해주었습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 저 사람이 지금은 저모양이어도 대학 때는 차석 하던 사람이었다. 저 사람이 지금은 저렇게 되었어도 일본 여자와 교제 했었다. 계속 말하고 다닙니다. 누가 묻는 것도 아닌데 이 사람에게 말하고 저 사람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도움 받은 사람이 이 사실을 듣습니다. 그는 자존심이 상하여 만사 제치고 공격을 시작합니다.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심각한 상처가 남고 관계는 파탄 났습니다.
섬김은 받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여러모로 포함되어야 합니다. 섬김은 물리적인 것이 전부가 아니며 배려와 존중까지 동반하여야 합니다. 먹을 것을 담아 그릇만 채워 주는 것이 아니라 명예와 자존심까지 채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학생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앞으로도 새로운 후배들을 만날 것입니다. 우리가 학생들을 섬기고 학생들이 후배들을 섬길 때 예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섬기셨는지 연구하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 배운 것을 실천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섬기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도 요한을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38년 병자는 어떻게 도우셨으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와는 어떻게 대화하시며 자존심을 살려주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다양한 섬김을 모두 연구하고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울 때 가장 좋은 섬김을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자존감이 높아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서로 존중히 여기며 우리 모임에서는 누구나 존중 받고 있음을 느끼는 곳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존중히 여기는 섬김, 전인격적인 섬김을 감당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대하게 해주시고 으뜸이 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