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영화
사람은 언제 공포(恐怖)를 느낄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할 수 없는 경우 두렵다. 의지할 상대가 없을 때, 나 홀로 있을 때, 나의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를 때, 그 기억이 건너편에 있을 것이라 느껴질 때,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무섭다. 그때, 공포를 느끼고 나아가기를 주저한다.
DMZ에서 매복(埋伏) 작전을 수행할 때 공포를 느낀 적이 있다. 피아(彼我)의 포구(砲口)는 나를 향해 있다. 간혹 귀에 익숙한 유행가(流行歌)가 친근한 밤인 것처럼 포장하지만 동부 전선 매복 작전은 그 계곡의 깊이 만큼이나 신병에게는 두렵고 숨쉬기도 힘든 경험이다. 첫 밤을 꼬박 새우면서 풀잎에서 떨어지는 이슬 소리에 공포감을 느꼈다면 많은 사람이 웃을 것이다. 그렇다. 그 첫 작전은 무서웠고 두려웠고 떨렸다. 횟수가 늘어나면서 그 분위기에 익숙해졌고 DMZ의 밤은 내게 더는 공포의 재료로 사용되지 않았다. 불편함 뿐이었다.
공포 영화로 분류되는 영화가 있다. 그중에는 그냥 불편하기만 한 영화가 있다.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여기저기 핏물이 튀는 영화가 대표적이다. 대상이 나쁜 사람들일 수도 있고 외계인일 수도 있고 인간이 아닌 다른 대상, 즉 영적인 존재이거나 동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영화를 보면 기분은 나쁠지언정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피 흘리는 것을 보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어렸을 적에 보았던 영화, “죠스Jaws(1975)”는 공포 영화의 대명사로 불리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 해변에 서 느꼈을 감정은 나와는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방이 바다인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바다에 몸을 쉬 담그지 못하는 것은 몸을 담근 후 뒤처리가 불편한 것도 이유이겠지만 어릴 때 보았던 영화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죠스와의 관계는 익숙해질 수 없는 일이다.
공포 영화에서 보던 비슷한 장면이 앞에 펼쳐지면 두려움이 앞선다.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두렵고 무서운 감정, 공포가 남는 경우는 어떨 때인가? 거의 모든 공포 영화는 결말이 없다. 죠스는 지금도 바다에 있으며, 영화의 장면들은 현재진행형이다. 밤이 되고 눈앞에 입김이 서리고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날 때, 영화 “컨저링The Conjuring(2013)”을 본 사람이면 닭살이 돋는 것을 느낀다. 영화에서 발생한 일들이 지금 내가 사는 현실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구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두려움을 갖는가?
사람은 현재에 서 있지만 단지 그 현재가 그 사람이 서 있는 모든 것이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온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는 장소가 현재라는 곳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현재를 통해 펼쳐질 또 다른 현재가 미래라는 이름으로 그 사람이 처한 곳에 함께 있다. 우주에 홀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과거 현재 미래를 구별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공포 영화를 보고 일상생활에서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현재가 지나온 과거를 근간으로 미래를 단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행복할 것이라는 현재의 기대감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름답고 푸른 바다에 내 몸을 띄우고 싶지만, 반드시 식인 상어가 아니더라도 다른 어떤 존재 때문에 내 미래에 대한 기대와 현재의 안정 그리고 과거의 추억이 전부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것,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이 공포로 다가오는 것이다.
최근에 접한 영화 “겟 아웃Get Out(2017)”과 “보통 사람(2016)”이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무서웠다.
"겟 아웃"은, 아리따운 여인(로즈)이 흑인 청년(크리스)을 사랑하여 집으로 데리고 온다. 로즈는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크리스를 소개한다. 로즈의 집에서 파티가 열린다. 백인들로만 이루어지는 파티라고 한다. 그런데 크리스는 반갑게도 흑인 한 명을 발견하고 그와 접촉을 시도하지만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그 흑인 남자의 사진을 찍어 친구에서 전송한다. 친구는 인터넷을 통해 그 흑인 남자가 몇 년 전에 실종된 사람인 것을 알려준다. 크리스는 사진을 찍을 때 터진 섬광(후레쉬) 때문에 그 흑인 남자가 한 말, “GET OUT!”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상하게 느낀 후, 그 집을 떠나려고 하지만 크리스는 이미 여자친구 어머니의 최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정신을 되찾지 못한 그는 의식 불명의 세계에 갇히고 만다.
영화는 육체가 허약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에 자신의 정신을 이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근간으로 한다. 그 집에 있었던 파티는 크리스를 쇼윈도에 올리는 행사였다. 한 사람이 그를 산다. 정확하게 그의 몸을 산다. 로즈의 집에서 일하는 흑인은 그녀의 할머니였고 할아버지였다. 미래 소설의 대표적이라는 <1984>나 <멋진 신세계>의 이야기는 이 영화에 비하면 그리 두려운 것은 아니다.
“보통사람(2016)”은 우리나라의 이야기이다. 형사가 있다. 특정 범죄자를 검거하는 것이 그가 속한 경찰서 서장의 관심 사항이고 반장의 관심 사항이다. 형사는 검거를 앞두고 용의자를 놓친다. 그리고 지능이 약간 모자라는 듯한 한 사람을 연행한다. 반장은 그를 용의자로 삼자고 한다. 공작이다. 그렇게 진행하기로 합의하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며 형 동생 사이로 지내던 기자에 의하여 진행하지 못한다. 다행히 진범을 검거하나 공로는 반장의 것이 된다. 이렇게 경찰서 내의 공작은 끝나는가 싶었다.
전두환 정부가 호헌을 발표한 후, 나라는 어수선하다. 남산 정보기관의 사주 하에 형사는 지능이 모자라는 용의자를 전국적인 연쇄 살인범으로 삼는 공작을 진행한다. 형사와 친형제처럼 지내던 기자는 정부의 각종 공작을 폭로하려고 외신과 접촉을 시도하다가 기관에 발각되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된다. 기자가 형사의 집에 몸을 숨기러 방문한다. 형사는 자신의 상관으로 있는 남산 직원에게 기자가 자기 집에 있음을 알리면서 사지 멀쩡하게 나올 수 있도록 부탁한다. 그 직원은 검사로 활약하던 중에 기관의 눈에 들어 남산 부서를 옮겨 활동하는 두뇌가 뛰어난 자다. 기자는 형사 앞에 죽음으로 돌아온다. 형사가 신문사와 함께 모든 것을 폭로하기로 한 날 저녁, 아내는 죽고 아들은… 형사는 복수하기로 한다.
기관의 그자가 가장 많이 반복했던 말은 “국가와 민족” 그리고 “원칙과 소신”이었다. 지금도 이 말은 진리처럼 사용된다. 너무 익숙하다. 진리의 말로 익숙한 단어들이다. 이 단어들 앞에서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형사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베트남에서 피를 흘렸던 참전 용사이며, 그때 흘린 피는 그에게 자랑이었다. 그의 자랑은 기관과 연결고리가 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대가로 가족의 아픔은 치유하고, 잘못된 행위는 미화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던 형사에게도 개인의 원칙과 소신이 있었다. 형사에게는 남산 직원과 다른 “원칙과 소신”이 있었고, 그것을 되찾는다. 그리고 지능이 모자라 연쇄 살인범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용의자에게 간다. 수갑을 풀어준다. 음식을 제공하고 편히 먹을 수 있도록 하고 사죄한다. 그리고….
남산 직원의 진급을 축하하는 자리에 형사가 총을 가지고 나타난다. “빵!” 총소리가 들린다. 화면이 바뀌고, 화면은 경찰서. 형사는 남산 직원을 살인 미수와 살인 교사 혐의로 조사한다. 이어서 남산에 의해 경찰서는 쑥대밭이 된다. 형사는 간첩 협의가 씌워져 조사를 받는다. 끝까지 저항하던 그는 검찰이 보여주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어야 빨리 끝나요”라고 친구들에게 말하던 절름발이 아이의 독백을 기반으로 혐의를 인정하는 종이에 지장을 찍는다…
30년 후, 형사는 재심 공판에서 무죄를 확정받는다. 그런데 상석에 앉은 재판장은 다름이 아닌……………. 30년 전, 검사 출신의 잘 나가던 바로 그 남산 직원이었다. 공작을 일삼던 바로 그자다. “착각하지마 세상을 바뀐 적이 없어 단 한 번도, 이렇게 보일려는 것뿐이야.” 그의 말과 중첩되어 그의 얼굴이 보이는 듯하다. 공포다. 공포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다. 나의 과거와 현재가 무너지고 앞으로 벌어질 미래도 무너질 것으로 생각하고 믿어지는 순간 느끼는 것이 공포다.
그 참담한 곳에서 공포에 당당하게 맞선 이가 있었다. 기자, 추재식이다.
"알아 성진아, 세상 당장 안 바뀐다는 거... 근데 지금 안 하면은 나중에도 못 해".
“상식이 통하는 시대에 살고 싶은 보통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하지 않으면 할 수 없기에 지금 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기자에게 공포는 존재할까?
그가 고문을 받으면서 한 말이 또 있다. “내가 쓰러지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쓰러트릴 수 없다”
공포 속에서 사느냐 공포 Free Zone에서 사느냐는 각자가 정할 몫이다. 현재의 삶이 비록 나락으로 떨어진 삶이라도, 고통 속에 머무르는 삶일지라도, 칠흑같이 어두움에 갇혀 있을지라도, 내 몸이 썩어져 갈지라도, 지금 이 순간이 지나고 머지않은 장래에 밝은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내 마음에 깃들인 공포를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억지일까?
“겟 아웃”에서 몸을 빼앗긴 흑인이 말한다.
떠나! 나가! 벗어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무리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왔을지라도 내 몸을 내 것이 아닌 채로 살아야 하며, 배부른 식인 상어와 함께 하는 물놀이 시간이 영원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기자, 추재식이 머무르고 싶지 않았던 곳, 형사, 성진이 잠시 머물렀다 떠난 곳, 상어는 언제나 배부른 것처럼 보이고 이빨은 보이지 않는 곳을 박차고 나와야 할 것이다. 밝게 보이는 것이 다 선한 것이 아니고 익숙한 것이라고 다 참은 아니다. 크고 작은 일에 나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지금 하자. (2017.7.6 평상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