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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둥지 증후군
경술회 등산모임에 참석했다.
생각해보니 금년 들어 동기회등산모임에 처음 참석한 것 같다.
지난 3월부터 시작한 등산모임이 상가문상일과 겹쳐서 일정을 취소하였던 일이며 내가 또 시골 내려가는 일 때문에 불가분하게 불참하는 등 이유야 어떻든 간에 여러 가지로 사정들이 많았던 것 같다.
오늘도 과천대공원 전철역 2번 출구 만남약속시간에 나온 사람이 다섯 명뿐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7~8명은 나오기로 내약을 하고서도 간밤에 사정이 생겨서 못 나온다고 연락받은 친구들이 몇 사람 된다고 등산대장이 말했다.
하기야 개인들 사정도 있겠지만 내심으로는 요즘 유행하는 메리스(중동호흡기증후군)사태로 선 듯 나서서 지하철이며 대중교통에 오르고 싶은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경우도 친구들 모임이며 정기모임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었던 차에 괜히 설치며 나섰다가 재수 없으면 옴이라도 올라붙지나 않을까 두려움의 심정에서 지하철 내에서도 가급적
손님이 적은 공간을 찾아서 서 있곤 한다.
어떻든 간에 용기 있게 나서서 자연바람 쏘이면 두려웠던 마음은 훌쩍 떠나고 하루가 즐거운 시간으로 시작된다.
사전답사를 끝낸 허헌구 등산대장을 따라서 과천대공원의 놀이공원 주차장 뒤편 산길로 접어들면서 우리는 등산 일정이 시작되었다.
나는 오늘 이 길이 처음 이였지만 완만한 능선 및 작은 계곡길이 어쩌면 둘레길보다도 더 편하고 쉬운 길이라고 생각하면서 청계산 옥녀봉을 향하고 있었다.
평년 같으면 지금쯤 계곡물이 흘러서 녹음의 그늘 속을 시원하게 할 것인데도 몇 십 년만의
가뭄으로 물줄기 바윗돌에 먼지만 부스스... 왜 이렇게 비가 귀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도 계곡 가에 밤나무는 알 밤톨을 꿈꾸며 지렁이 머리털 같은 밤꽃을 열심히 피어내고 있었다.
그래 6월이면 피기 시작하는 밤꽃향기는 남자들에게는 느끼한 향으로 다가오지만 그 특이한 냄새는 여자들에게는 또 다른 갈망의 향기로 달려든다.
옛날에는 남자들의 정액냄새와 비슷한 이 냄새를 양향(陽香)이라 불렀다.
이 냄새에 취하여 부녀자들의 자세가 흔들릴까봐 밤꽃이 필 무렵이면 부녀자들은 외출을 삼갔고 과부는 몸가짐을 더욱 조신하게 처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아마도 6월은 남자들의 계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옛날 남자들은 이맘때면 들판에서 모를 심고 과수원에서 거름을 나르면서 땀을 펄펄 흘려야만 남자로서 대접을 받곤 하였었다. 그런데 우리들 노장들은 이 작은 능선 길을 오르면서도 땀을 흘리고 있다. 많은 것들을 세월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우리들이 만나면 언제부터인지 이야기 중심에 가족이며 가정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사실 젊어서는 직장에 다니느라 새벽같이 집에 나와서 통행금지 시간에 쫓기면서 집에 들어갔으니 가정사(家政事 )에 관심을 가질 만한 시간조차 없이 살아왔었다.
그런데 퇴직이후 지금은 눈을 뜨고서부터 하루 종일 울타리가 가정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정이 전부였고 또한 그 것 뿐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가정의 중심에서 역할이 크고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실상은 가정에서 자꾸만 소요되고 가고 고독해지고 있다.
우리말에 가족과 식구라는 단어가 있다.
가족이란 부모형제, 배우자, 자식, 그리고 손자들 같은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를 뜻한다.
식구란 한 집에서 밥상을 마주하면서 밥을 먹는 가족을 말 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소가족제가 활발해 지면서 가족과 식구는 같은 개념의 단어가 아니고 별도의 개념에서 분리되어가고 있다.
나의 경우에도 부친은 시골에서, 미혼의 아들은 분당에서, 결혼한 딸들이야 별도 가문의 식구가 되었으니 구지 가족에 넣지 않아도 되지만 가족과 식구를 공유하는 사람은 오직 아내 한 사람 뿐이다.
우리가 정열적으로 살아온 50년 동안 가난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래도 많이 부자가 된 셈인데도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행복하지 못하다고 한다.
그토록 가난해서 못 산다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우리보다 훨씬 높다고 한다.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가난한 나라에는 학원도 없고 많은 것을 얻으려고 경쟁하지도 않고 그저 끼니를 걸리지 않고 함께 모여서 밥을 먹는 것으로도 만족하기 때문에 행복지수가 높다는 것이다.
온 가족이 함께 밥 먹는다는 단순한 일이 행복지수를 결정한다니 의아하게 생각할 일이나
결코 그냥 무시해 버리고 말일이 아닌 것 같다.
요즘 젊은 아빠들은 학원비 버느라고 직장생활에 지치고, 학원비 만드느라 살림에 쪼들린 엄마, 학원에 다느라 지친 아들, 딸, 누구를 위한 공부이고 무엇을 위한 돈벌이며 희생인가?
세상살이 지친 젊은 남자들이 아내 곁에 가는 것이 두렵다는 웃으게 이야기도 있다. 이렇게 열심히 살면서도 행복하지 못 하다니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듯싶다.
그렇다고 나이 들어 부부가 함께 있다고 해서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결혼의 주목적 가운데 하나가 자녀 출산이다.
구약성경을 보더라도 아담과 하와, 아브람과 이삭, 야곱의 족보는 모두가 자손번성 이야기다.
소돔사람들이 벌 받아 유황불에 모두 타죽고 남자라곤 롯 밖에 남지 않아 대를 이를 아들이 없자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씨를 받아 대를 어어 주었다.
옛날 우리도 아내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쫓아내거나 첩을 얻었으며 심지어 씨받이까지 들이기도 했다. 이런 것들을 봐서라도 부모가 자녀의 존재만으로 힘겨운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충분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녀의 성공이 곧 부모의 성공이라 착각하고 자녀의 삶을 엄마가 대신 살아주려는 지나친 욕심까지 부린다.
부모가 이루지 못한 검 판사, 의사의 꿈을 자녀가 이루어 주길 바라는 마음에 자식의 본심에도 없는 길로 몰아넣기만 한다.
아이들이 중학교에 올라가면 오로지 공부만 시키려는 엄마에게 더 이상 자기인생에 끼어들거나 참견하지 말라고 냅다 소리 지른다. 이토록 상황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몰아붙이면 아이들은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이렇게 자식들이 대학에 졸업하기까지 자녀만을 위해 살았는데 자녀가 엄마의 사랑과 관심을 거절하면 엄마는 갑자기 실직한 기분이고 할 일도 없어지고 외로워진다.
엄마들은 이때부터 인생의 위기를 맞는다.
자녀가 떠난 자리를 남편이 채워주면 좋을 텐데 자녀교육에 정신 빼앗겨 살다보니 부부가 서로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린다.
다른 한편에서는 자녀교육에만 미쳐 있으면 남편이 외로운지 직장생활을 힘들어 하는지 중년위기를 잘 넘기고 있는지 도통 관심조차 없어진다.
아내의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남편은 자신이 돈 버는 기계일 뿐이라는 자괴심에 사로잡힌다.
자녀에게 거부당하고 난 뒤에서야 뒤돌아보면 비로소 부부사이가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깨닫게 된다.
이 때 정도 나이되면 아내는 갱년기가 시작되어 여자로서 매력이 사라지면서 남편은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려한다. 그래서 남편은 부하 여직원이 예뻐 보이고 아내에게 느끼지 못한 매력에 빠져 가정에서 밖으로 돌면서 불륜도 생기고 가정에 파탄을 자초하는 일도 생긴다.
이토록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 자녀는 대학졸업하고 취직도 못하고 하루 종일 컴퓨터게임하고 아내는 텅비어버린 마음의 외로운 공간을 채우기라도 하려는 듯 고등학교 대학 동창모임에 열중하며 실직한 남편은 남자로서의 매력도 없어지고 관심 밖의 사람이 되고 만다.
육십 평생 뭐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 없이 나이만 먹었다고 생각하면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더욱이 품안의 자식인줄 알았던 아들이 결혼하고 나서는 사돈네 팔촌정도로 멀어져 살다가
자식 낳으면 애들 돌봐달라고 부모 집 이웃으로 아파트전세 들어온다.
부모는 자식들 도움요청에 거절할 수도 없고 손자손녀 귀여움에 관절이 이며 뼈가 다 아스라 저도 귀찮다는 말도 못하고 노년의 생활이 더 고달 퍼진다.
이렇게 한 10년 손자 녀석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뻐꾸기가 종달새 둥지에 알을 낳았다가 그 알이 깨어나고서 날게 되면 그 새끼를 데리고 함께 날아가듯 아들 며느리는 손자손녀들 데리고 멀리 다시 이사 가고 만다.
새가 알을 낳아 까고 새끼가 나르면 그 새끼를 데리고 멀리 남쪽나라로 날아가 버린다.
그러면 알을 까고 지켰던 둥지는 이제 비어서 빈 둥지로 남게 된다.
그래서 인간에게서도 자식을 어렵게 키우고 대학 보내서 시집 장가들어놓으면 새들처럼 멀리 다 떠나고 노부부만 덩그러니 빈 집에 남게 된다.
자식들과 뒤엉켜 희로애락 함께하다가 너무나 조용하고 할 일도 없어지니 꿈도 희망도 없는
삶이 애처러워 질뿐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노후에 오는 증후군을 “빈 둥지 증후군”이라 명하였다.
이런 빈 둥지 증후군을 앓고 있는 노인들에게 다시 찾아오는 무서운 것이 생을 포기하는 자살까지 연결된다는 것이다.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
“부부가 진정으로 사랑하면 칼날 같은 좁은 침대에도 누워도 잘 수 있지만
서로가 미워하면 6미터 되는 침대도 비좁다“
지금 이 나이에 부부가 무슨 사랑 운운하면서 칼날 같은 침대는 쓰겠는가? 6미터 침대는 고사하고 10평짜리별도 독자 방에서도 비좁다는 생각이 든다.
젊어서는 방을 따로 쓰면 무섭다고 달려들던 아내가 이제는 다른 방에서 남편이 숨넘어가 죽어도 모르고 잠만 잘 잘 것 같다.
우리속담에 “소 닭 처다 보듯”이란 말이 있다. 소와 닭 사이에 무슨 감정이 일어나겠는가?
TV에서 슬픈 사연 연속극 보면서도 눈물한방을 흘리지 않는 남자보다 더 비정한 남자가 되어가는 아내 곁에서 오히려 남자인 내가 눈물 흘러내릴 때 계면쩍어 진다.
그래도 어찌하겠는가?
이제는 남아 함께 사는 사람이 오직 아내뿐인 걸,
사랑이 아닌 반려자로, 아니 가장 가까운 이웃으로도, 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아내란 것을 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더러는 내 자신보다 더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내이다. 보잘 것 없는 나 하나를 믿고 따라와 우리가문에 거름이 되었으니 어찌 가련타 하지 않으리까?
한편으로 아내가 먼저 죽으면 나는 어떻게 하지? 쓸데없는 두려움을 가질 때가 있다.
아직도 홀로 살아 외로우신 노부(老父)를 보면서 나만은 아내보다 먼저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어떻게 내 마음대로 될지가 걱정이 된다.
그래서 만약 내가 먼저 죽는 날에는 홀로 살아가는 아내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돈 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돈을 남겨야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갖은 돈도 많지 않은데 아내는 자꾸만 생활비를 많이 주지 않는다고 늘 타박을 한다.
내가 돈을 많이 쓰지 않으려함이 다 아내를 위함인 것을 아내는 아는지 모르는지 항상 철없는 아이같이 투정만 부린다.
그러나 이런 속마음을 지금부터 아내에게 털어 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죽어가는 날 아내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남길 말인데 말이다.
아직도 아내는 외손녀 돌보미로 딸네 집에 가 있다.
아마도 내가 저녁을 혼자 먹은 후에나 집에 들어올 것 같다.
집에 들어와도 아내의 방이 따로 있고 내 방이 따로 있으니 아내가 지금 없다고 해서 큰 불편도 없다.
그래도 이 작은 둥지를 아내와 함께 오래토록 지켜야 할 텐데? 그런 걱정으로 하루를 보낸다.
오늘 하루 친구들과 함께 땀 흘리며 산 능선을 넘어서 멀리보이는 우리들만의 천국으로 향하고 있다.
과천 대공원에서 청계산 옥녀봉을 넘어서 원터골까지 내려와 시원한 냉 콩국수 한 그릇으로
오늘의 우리들 천국은 마감된다.
2015. 6. 22. 금 치
첫댓글 공감이 많이 가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