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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1월 24일 목요일 맑음.
우리는 지금 베트남의 후에(Hue)에 와 있다. 후에는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딴 호아(Than Hoa)로 불렸으며,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1802~1945)의 수도가 된 이후부터 현재의 지명이 되었다. 그러나 1968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남베트남 정부군과 과 해방전선, 북베트남의 최대 격전지가 되어 1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고, 왕도 대부분이 황폐해졌다. 1990년대 들어 지방 정부가 후에의 가치를 자각하기 시작해 관광지로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1993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1687년 후에에서 5km 북동쪽에 있는 바오 빈(Bao Vinh) 마을에 도시의 성곽이 건설된 이후 1744년 응우옌 씨(阮氏)를 가문으로 하는 남베트남의 수도가 되었다. 1802년 프랑스의 도움으로 응우옌 왕조를 건국한 쟈롱 황제가 후에를 수도로 정하였다. 1885년 프랑스는 통킹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왕실로부터 거부당하자 후에를 포위했다. 프랑스 측 자료에 따르면 3일간 지속된 후에 공격에서 왕궁 장서각을 파괴했고, 고가의 귀중품을 훔쳤다고 한다. 또한,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차례로 후에를 탈환하면서 무고한 국민들이 살해되는 살육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후에는 베트남에서 유일하게 유적지 관광이 가능한 도시이며 그래서 입장료가 가장 많이 들어가는 도시이기도 하다. 후에는 흐엉 강(Song Huon)을 사이에 두고 북쪽의 구시가지와 남쪽의 신시가지로 나뉘며 짱띠엔 다리와 푸쑤언 다리가 양쪽을 잇는다. 구시가지에는 왕궁 등 응우옌 왕조의 유적지가 있고 동 바 시장이 있다. 신시가지에는 호텔, 레스토랑, 토산품점, 여행사가 밀집되어 있다. 흐엉 강을 따라 남쪽으로는 역대 황제들의 무덤이 있는데, 후에의 여행사 투어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보트를 타고 이곳을 쉽게 둘러볼 수 있다. 또는 자전거를 타고 둘러볼 만한 거리이다.
이곳은 베트남의 고도, 한국으로 말하면 경주와 비슷하다.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까지는 형식상 베트남의 수도였다. 우리가 만난 이곳은 너무나 조용하고 멋진 전원 도시 같은 풍경이다. 왕궁을 중심으로 번영된 이 도시의 역사가 시가지 도처에 남아있다. 순박한 사람들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별로 익숙하지 않은 듯하다. 후에는 구왕궁이 구시가지와 강을 끼고 그 동족에 있는 신시가지, 그리고 황제 묘가 점재해 있는 남부의 구릉지대로 세 곳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은 신시가지로 향 강과 가깝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낙엽이 쌓인 지붕이 보이고 지붕 밑에는 LG 에어컨이 보인다. 아침도 숙소에서 컵라면으로 해결했다. 카운터에 내려가 뜨거운 물을 구했다. 직원들이 모두 친절했다.
시내 구경하기 위해 카운터에 큰 가방을 맡겨놓고 작은 가방을 맸다. 오후에는 택시를 대절하여 멀리 떨어진 곳을 둘러보려고 차를 부탁해 두었다. 운전사 포함 16달러에 예약을 했다. 숙소를 나와서 구 왕궁이 있는 구시가지로 걸어간다. 향 강 위의 다리를 건넌다. 초가을 날씨에 걷기는 적당하다. 조용한 곳이다. 향 강은 유유히 흐르고 유리같이 말고 잔잔하다. 다리를 건너서 신시가지를 돌아보니 파리의 에펠탑을 흉내 냈다는 엉성해 보이는 철 구조물이 보인다. 왕궁이 있는 구시가지는 공원으로 잘 조성되어있다.
나무와 잔디가 제법 깨끗하다. 구시가지에는 높이 솟은 국기봉에 대형 베트남 국기가 높게 펄럭인다. 밑에 ‘HUE’라고 씌어있다. 고궁 앞의 거대한 축조물은 공산주의 냄새가 나는 규모가 크고 직선적인 축조물이다. 층계를 다라 올라가니 옛날 대포도 있다. 고궁의 광장과 뒤로 향 강이 보인다. 천안문 광장 같은 넓은 곳은 없ㄱ지만 중국 북경의 자금성 모양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모습이다. 왕궁 앞에서 사진을 찍고 해자 위에 있는 다리를 통해 건너 궁전으로 향했다. 국내인은 5,000동, 외국인은 입장료가 55,000동이다. 엄청 올려 받는다. 입장권을 사가지고 들어갔다. 무너지기 전의 궁전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당시의 모습을 상상한다. 자금성과 모양이 비슷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보존 되어있는 해자와 담, 그리고 몇 가지 건축물이 보인다. 내려와 더 들어가니 연못에 잉어들이 헤엄친다. 태화전이라고 한문으로 된 현판이 보인다. 태화전 안에는 당시 사용하던 황금 의자와 신발, 복장, 소품 등이 보존되어있다. 마당에는 대형 청동 항아리가 놓여있다. 그 외에 뒤에 있어야할 건축물은 무너지고 터만 남아있다. 자금성으로 보지 않았다면 놀랬어야 할 규모다. 자금성보다 모습이 비슷하고 규모가 좀 작아 보인다.
정원을 예쁘게 꾸며 놓은 건물에 들어서니 꽃과 분수로 잘 가꾸어져 있다. 소리는 단소인데 모양은 대나무 플릇이다. 연주를 영감님이 구성지게 불고 있다. 자금이 부족하여 다시 복원하지 못한 빈터만이 눈에 들어온다. 걸어서 정문 왼쪽인 현인문으로 간다. 해자 위의 다리가 있다. 연꽃이 예쁘게 피어있다. 후에 박물관이 보인다. 넓게 분포되어있고 이 왕궁주변에는 바둑판 모양으로 되어있어 걷기에 편리하다. 시클로를 하나씩 잡아타고 구시가지를 산책해 본다. 시클로를 운전하는 아저시가 친절하다. 걸어 다니다가 자전거에 올라타니 재미있다.
호치민 가족이 살았다는 집에 잠시 들렀다. 베틀도 그대로 있고 나무 기둥에 소박하고 단순한 집이다. 다시 나와 거리를 달려가니 양 옆의 가로수 나무 그늘이 지붕을 만든다. 고궁의 해자에서 사람들이 고기잡이를 한다. 거리에는 차 보다는 오토바이가 많고, 오토바이 보다는 자전거가 많다. 시클로는 우리를 동바 시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시장에는 각종 물건이 쌓여있고 규모도 크다. 향 강을 기고 있는데 채소와 과일 그리고 가축을 파는 곳이 재미있다. 길에 줄지어 양쪽으로 앉아있는 아주머니들은 모두 베트남 모자를 쓰고 있어 정겨워 보인다, 벌써 오전이 다 갔다. 촐교 다리를 건너 숙소로 걸어온다. 조용하고 깨끗한 향 강이 맘에 든다. 점심 식사를 했다. 신시가지를 걷다가 발견한 중국집에 가서 먹었다. 음식 값도 싸고 맛있다. 숙소로 바삐 왔다. 오후에 차를 대절해서 멀리 있는 관광지를 돌아볼 계획이다. 왕릉들과 사원들이다. 기사가 달린 오래된 자가용이다. 오후에 4곳을 둘러보는데 16달러를 주기로 했다.
맨 처음 방문한 곳이 티엔무사다. 향 강을 앞에 둔 조그만 사원이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니 8각의 7층탑이 눈에 띈다. 이 사원은 덕쾅덕(틱 쾅 둑) 스님이 수도하던 절이다. 이 분은 디엠 정권에 항거해 민주화를 위해 분신자살한 유명한 승려다. 1963년 사이공 중심가 한가운데서 73살의 노 승려가 가부좌를 틀고 두 손을 모으며 안자 다른 승려가 온 몸에 석유를 부어 주었다. 불이 당겨지고 노승려의 몸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카톨릭 신자였던 디엠 대통령이 석탄일에 불교 깃발 게양을 금지하도록 지시하였단다.
베트남 주요 불교 역사 도시인 후에 시의 승려들이 심한 모욕감에 일제히 반발하게 되면서 학살을 당하여 5월 8일은 불교도 학살의 날이 되어버렸단다. 이로 인해 디엠 정권은 무너졌다. 나트랑의 롱선사도 이분으로 인해 유명하다. 이 사원은 향 강을 마주보는 언덕위에 있는데, 유명세와는 달리 조용하다 못해 여행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원의 언덕에서 유유히 흐르는 향 강을 바라보는 시원함은 잊을 수 없다. 향 강이라고 누가 이름을 지었는지 모르지만 너무 어울리는 이름이다. 나중에 돌아보아도 이곳에서 보는 향 강은 후에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 같다. 불교 사원에서 소리를 내는 북, 목어, 철판(편승)을 살펴 보았다. 사천왕의 모습이 우리나라와 비슷해 보인다.
사원을 나와 향 강에 내려가니 맑은 물속에 빈 배 두 척이 관광객을 기다린다. 다시 차에 올라 향 강을 건너고 철길을 마주한다. 기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왕릉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간다. 시골의 좁은 길을 꼬불꼬불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다가 도착한 곳이 투둑 왕릉이다. 투둑 왕릉도 입장료가 외국인은 55000동이다. 자국민은 5000동이다. 그래도 들어가기로 했다. 투둑 왕릉은 1864년 약 3000명의 병사들이 3년간 노역하여 완성된 능으로, 능의 건설을 위해 엄청난 비용과 많은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당시 왕조에 대한 반란이 계획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는 끝에 건설된 왕릉이다. 왕릉의 전반적인 모습은 우리와 비슷하다. 낯설지 않지만 왕의 시신이 안치된 무덤이 건물 외부에 있다.
팔각 담장을 두른 채 석관을 놓아 둔 것이 특이하다. 화장실에 급히 다녀왔다(유료). 예쁜 연못, 물 위의 건축물, 정원 다리 등이 보인다. 건축물 대부분이 나무와 벽돌을 이용했다. 위패가 있는 곳의 천장에는 별자리가 그려져 있고 황금빛 의자가 빨간색과 조화를 이룬다. 오솔길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니 이름 모를 꽃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 옆에 아들의 석관묘가 함께 있다. 시원해서 산책하기에 좋은 길이다. 기념비와 모든 글씨가 한문으로 씌어져 있어 당시는 한문 문화권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왕릉의 주인공인 투둑 왕은 이렇게 멋지게 무덤을 만들었음에도 그의 무덤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이란다.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왕을 매장한 시종들은 모두 죽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보물과 함께 묻힌 그의 무덤이 어딘지 알 수 없단다.
돌아나와 차를 타고 카이딘 왕릉으로 갔다. 카이딘 왕이 살아있던 1920년부터 시작해서 1931년까지 건설한 무덤이다. 투둑 왕릉에 비해 규모는 작다. 또 구조는 동양식이지만 프랑스 식민지의 영향을 받아 유럽 건축 스타일이 곳곳에 보인다. 색다른 모습으로 언덕 위에서 근엄한 자태로 내려다보고 있다. 아내는 입장료가 비싸다고 밖에서 구경하고 나만 들어왔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왕릉에 들어간다. 계단을 숨차게 올라가면 중앙에 왕을 기리는 전적비가 있고, 그 양 옆에 우리나라 왕릉에서 볼 수 있는 기마병과 병사들의 모습이 있다. 이곳의 석상과 건물이 돌로 만들어져서 그런지 모두 우중충한 검은 색이다. 층계도 3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모든 글씨가 한자로 되어있다. 건물 내부에는 황제의 흑백 사진 초상화와 동상이 화려한 색 타일과 함께 있다. 맨 뒤에 그의 석관묘가 보인다. 가파른 경사 끝 계단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이 좋다. 높은 산은 없고 낮은 산이 겹겹이 보인다.
밖으로 나와 프렌시스코 성당에 도착했다. 규모는 큰데 형태가 서양과 베트남 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현대식인데 깔끔하다. 화려함 보다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모습이다. 5시가 다 되어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주인에게 16달러를 주니 주인이 택시 기사와 해결했다. 여기서도 남겨 먹는 것 같다. 이곳에서 라오스 국경가지 가서 라오스의 사바나켙까지 이동시켜주는 상품이 곳곳에 있다. 경비는 두당 16달러다. 나중에 알겠지만 신카페에서 상품을 이용하면 밤을 노지에서 세우는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호텔에서 이 상품을 예약했다. 오후 6시에 이 호텔에서 출발한다기에 돈을 지불하고 차를 기다렸다. 이 호텔에서 타는 사람은 우리와 김00 이라는 한국 아가씨다. 김양은 베트남에서 거의 한 달을 보내고 이제 라오스로 가는 아주 야무져 보이는 아가씨다. 거의 우리의 동행이 되었다.
6시에 출발한다는 차는 오지 않고 9시에 온단다. 환불해 달라며 항의 하자 차가 6시에 왔다. 조그만 봉고차다. 신시가지 식당 앞에 차를 세우더니 또 출발하지 않고 머물러 있다. 김양이 담당자와 다투어 보니 또 타야할 사람이 있어서 조금 늦는단다. 이 보고차가 어디 업체 소속이냐고 물으니 김카페 소속이란다. 어려운 영어로 다투다가 결국 차는 출발하고 한 호텔 앞에서 일본인 3명과 본토인 2명이 또 탔다. 차는 포장이 엉망인 도로를 급하게 달려간다. 깜깜한 밤길이라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다. 동하 마을에 잠시 쉬어 용무를 본 후 또 차는 달려서 밤 11시 30분이 되어서 국경인 베트남의 라오바오에 도착했다. 희미한 가로등만 있고, 다 쓰러져 가는 초가가 서너 채 길 밑에 보이는 산골 오지다.
가로등 밑에는 국경이니 더 이상 걸어가면 안 된단다. 낯선 곳이라 겁을 먹고 봉고차 안에서 일행은 추위에 떨면서 설 잠을 청한다. 국경은 아침이 되어야 열린단다. 산간이라 제법 밤 기온이 차다. 운전기사가 잠자는 낡은 숙소에 잘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해서 갔다. 누워보니 모기장 속에 잔뜩 구부려도 발이 나온다. 쳐있는 모기장도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도저히 누울 수 없어 밖으로 나와 다리 위에서, 나무를 주워 와서 불을 피웠다. 모닥불에 둘러 앉아 아내와 김양 그리고 일본 아이들과 함께 밤을 새운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고 가끔 멀리서 개 짓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날 밤을 새우는 것도 기억에 남는 추억이 될 것 같다.
약간 춥다. 거의 1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다는 일본 아가씨와 순박해 보이는 두 총각이 지겹지 않게 한다. 모두 주어진 여건에 약간의 불만은 있으나 별로 상관없이 현재를 즐기고 있다. 여러 번 여행하는 중에 밖에서 불을 쬐며 밤을 새우기는 처음이다. 저녁도 먹지 못했다. 비상식량으로 준비한 빵이 도움이 된다. 신카페를 이용한 사람들은 동하에서 하루를 자고 새벽에 온단다. 리더를 잘못만나 고생하는 아내가 불쌍해 보인다. 좀 더 많은 정보가 있었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미안한 마음이 든다. 베트남의 처음은 좋았는데 끝이 고생이구나. 그러나 이 고생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라오스에서의 고생의 예고편인 것 같다. 1월 25일 금요일. 날이 샌다. 모두 타버린 모닥불 재만 당위에 남아 있다. 사람은 흔적도 없다. 몇 채 있는 집에서 새벽에 무엇을 준비하는지 불이 켜진다.
개 짖는 소리도 많아졌다. 라오바오라는 글씨도 보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게 문이 열린다. 차가 한 대 오더니 우리 봉고차 뒤에 서고 서 너 명의 도시 풍 차림의 아가시들이 내려서 우리 차로 온다. 환전해 주는 아가씨 들이다. 아가시들 수다에 차에 있던 우리 일행도 일어나 나온다. 어제 저녁도 굶고 오늘 아침도 굶었다. 한 사람이 라오스 쪽에서 오더니 우리를 안내한다. 걸어서 국경으로 가서 출국 수속을 한 후 라오스 국경으로 걸어간다. 이렇게 우리는 캄보디아에서 베트남으로 들어왔다가 이제 베트남에서 라오스로 넘어가게 되었다. 고생 끝에 라오스의 사바나켙에 도착한 이야기는 라오스 여행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