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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6일
카이펑과 운대산 유람기
왕따끄 싱쿨라
아침밥을 먹으며 김 총무님이 간밤에 내가 잠자지 못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룸메이트를 자기와 바꿔 드릴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에 여행 중인데, 밤마다, 끼니때마다 그렇게 독한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 좀 절제를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오늘도 여덟 시에 차는 호텔을 나선다. 카이펑 시가를 지나니 대학도 보이고 상가도 가득하다.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왕사장이 마이크를 잡고 작별의 인사를 한다. 시간은 8시 41분이다. 여러분들 하시는 일 모두 잘 이루어지고 남은 여행 잘 하시라고 한다. 우리는 외쳤다.
“왕따끄 싱쿨라!”
삼거리에 버스가 서고 신호등에 파란불이 켜지자 횡단보도를 건너 포공사로 들어갔다. 신호등에 녹색불이 들어와도 좌회전하는 차들이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간다. 버스들은 교통신호를 받지도 않고 아무데서나 도로 한 가운데에서 차를 돌렸다. 우리와 신호등 체계나 교통문화가 달랐다.
포청천
包公祠는 1987년 시민들의 노력으로 판관 포청천의 사당을 확대하여 짓고 공원으로 만들었다. 버스에서 내리며 오늘은 마스크를 단단히 찼다. 도로가 있는 입구문은 녹색 유리기와지붕의 문이다. 안으로 들어가 먼저 괴석을 쌓고 그 위에 정자를 만들어 놓은 石假山, 百龍亭으로 올라가 내려다보았다. 하늘의 아침 해가 달보다 더 흐리게 보인다. 미세먼지와 안개와 스모그가 복합되어 사방이 온통 뿌옇다. 마치 러시아에서 볼 수 있다는 백야 같다. 포공호라고 하는 호수가 남북으로 길게 있고 건너편 호반에는 버드나무가 열 지어 서 있다. 정자 아래에는 유람선 선착장도 보이고 호수 둘레는 도로와 건물들이 있다. 멀리 호수 가에는 송도어가의 높은 기와지붕도 희미하게 보인다.
사당 중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집안 내부가 외부인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마당에 照壁이 있다. 그 뒤쪽에 검은색 목판에 금색으로 ‘초직청렴’이라고 쓴 편액이 문 위에 걸렸고, 문 좌우의 기둥에는 ‘峭直傳古今, 淸廉著史乘’이라는 대련이 붙은 二殿이 있다. 안에는 포청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안내문을 읽어본다.
포청천은 이름이 포증(包拯)이고, 송 眞宗 咸平 2년(999)에 안휘성 合肥에서 출생하였고 송 仁宗 嘉祐 7년(1062)에 64세로 죽었다. 어릴 때 집이 가난하였고 28세에 진사가 되었으며 강서 건창현 지현을 시작으로 지현, 지부, 안찰어사, 西北轉運使, 天章閣待制, 開封府知府, 樞密副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뒤에 龍圖閣直學士가 되었다. 사후에 孝肅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청렴하고 유망한 관리인 그를 민중은 ‘靑天’이라고 불렀다.
그는 얼굴에 철판을 두르고 인정사정없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 집행을 엄하고 분명하게 하였다. 백성의 고통에 관심을 기울여 백성을 이익 되게 하고 폐단을 없애도록 건의하였고, 탐관오리를 엄하게 처벌하였다. 이는 근본적으로 송 왕조를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데서 출발하였지만 계급모순을 완화시키고 통치를 공고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당시의 상황에서 그가 한 주장과 법집행은 어느 정도 진보적인 의의를 가진다.
포증과 관련된 고사와 전설은 원나라 때 민간에 퍼져나간 이래로 오늘날에는 다채롭고 풍부한 문학예술로 포공 이야기 만들기에 이르렀고, 민중들의 넓고 깊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본전(本殿)과 이 정전(正殿)에는 역사자료를 진열하고, 동전과 서전은 민간의 전설과 역사고사를 진열하는데, 잘못된 점이 있으면 지적하여 바로주시길 바랍니다.
‘宋丞相孝肅包公墓’라고 새겨진 묘비, 묘비명, ‘齊山’이라고 쓴 포증의 웅장한 대자 탁본을 본다. 송나라 개국이래 148년 동안 개봉부 부윤을 역임한 183명의 이름이 새겨진 ‘開封府題名記’ 비석에는 포증의 이름에 얼마나 많은 손길이 닿았는지, 비석이 움푹 패여 있다.
‘宋包孝肅公遺像’비 탁본에는 작은 키에 네모 각이 지고 날개가 좌우로 길게 나 있는 관을 쓰고 관복을 입은 포증이 손에는 엄청나게 큰 홀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얼굴은 마른편이고 청렴결백하게 생겼다. 포증은 실제로 키가 165센티미터 정도의 백면 서생이었다고 한다.
포증이 단주(端州) 군수 시절 군의 서재 벽에 쓴 시도 있다.
단주군의 서재 벽에 쓴 글(書端州郡齋壁)
淸心爲治本 맑은 마음은 사회를 다스리는 근본
直道是身謀 곧은 길은 몸을 바로 하는 책략
秀幹終成棟 빼어난 줄기는 마침내 들보가 되고
精鋼不作鉤 정련된 강철로 갈고리를 만들지 않는다.
倉充鼠雀喜 창고가 차면 쥐와 참새가 기뻐하고,
草盡兎狐愁 풀이 다하면 토끼와 여우가 걱정한다.
先哲有遺訓 선현들이 가르침을 남겼으니
勿貽来者羞 후세에 수치스러움 남기지 말라.
포증이 남긴 가훈을 예서체로 쓰서 전시해 놓았다. 포증이 얼마나 청백리였던가를 잘 보여준다. 유학으로 수신하고 과거제로 선발된 사대부 문신들이 통치한 문치주의 국가, 송나라는 관리들의 도덕성이 국가를 바르게 통치하는 관건이 되었을 것이다.
포증의 가훈
후손들 중에 관직 생활하면서 도적질하고 낭비를 하는 자가 있으면 종가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죽은 뒤에도 선영이 있는 묘역에 장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라. 나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나의 자손이 아니다. 내 아들 공은 돌에다 이 말을 새겨서 우리 집의 동쪽 벽 앞에 세워서 후손들에게 알리어라.
(包拯家訓 后世子孫仕宦,有犯賊濫者,不得放歸本家;亡殁之后,不得葬于大塋之中。不從吾志,非吾子孫。仰珙刊石,竪于堂屋東壁,以詔后世.)
사당의 뜰에는 랍매가 꽃을 활짝 피우고 진한 향기를 뿌린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차가운 날씨를 이기고 샛노란 꽃을 피우는 랍매가 포청천의 청렴하고 강직한 인품을 닮았다. 여선생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꽃가지 아래서 어린아이처럼 환한 얼굴로 사진을 촬영한다.
본전의 처마에는 검은 목판에 금색으로 ‘公正廉明’이라고 쓴 편액이 걸렸다. 그 안에는 1장이 넘는 포증의 좌상이 있고, 그 위에는 ‘正大光明’이라고 쓴 편액이 보인다. 좌상 좌우에는 포증이 권간들을 처벌하기를 주장하는 장면,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모습을 담은 벽화가 있다.
‘鐵面無私’라는 편액이 걸린 東配殿 안으로 휘장을 걷고 들어갔다. 안에는 포청천이 용, 범, 개 머리의 3개의 작두들을 진열해 놓고, 백성을 괴롭히는 권귀들을 끌고 와 엄히 처벌하는 드라마의 모습을 밀랍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유리 상자 안에는 포청천을 소재로 하는 원나라 때의 가곡, 희곡 등에 관한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白簡凝霜’이라는 편액이 걸린 서배전 안에는 포청천의 초상, 드라마에서 입었던 관복, 송나라 때의 개봉부 관아 미니어처 등이 전시되어 있다.
개보사탑
포공사를 나와 시가지를 지나고 버스가 철탑공원 앞의 광장에 섰다. 철탑공원이라는 편액이 걸린 정면 3칸 측면 2칸인 문의 기와지붕 위로 석주가 높이 솟아 있다. 높이 솟은 탑이 있는 곳임을 표현한 설계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화강암 돌다리가 나온다. 다리 위에서 보니 인공으로 판 물길로 보이는데 갈색으로 마른 연잎과 연밥이 많다. 그 사이로 몇 사람이 탈 수 있는 작은 거룻배가 떠 있다.
공원 안내도를 보면 물길은 공원 동쪽을 에워싸며 철탑 북쪽의 너른 호수로 통한다. 여름이면 연꽃이 만발하여 극락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을 연상하게 할 것이다. 연꽃 사이로 노를 저으며 철탑을 보며 가노라면 서방정토의 구품연화지 속에서 노닐 것이다.
다리를 건너자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이다. 앙상한 가지에는 분홍색 조화가 달려 있고, 춘절을 맞이하는 홍등이 좌우의 가로수를 연결하여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서 겨울의 스산한 분위기를 녹인다. 가로수 길을 지나자 까만 돌에 금색 글씨로 ‘天下第一塔’이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 여기서도 ‘천하’ 두 글자는 미불의 달필을 가져왔다.
다시 안으로 더 들어가니 희뿌연 미세먼지 안개 속에서 접인전 건물 뒤로 높이 치솟은 철탑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한참을 걸어가서 마침내 탑 앞에 섰다. 고개를 들고 위로 올려다보니 까마득하게 공중에 솟아 있다. 녹색이 섞인 고동색 유리벽돌로 8각의 13층탑이다. 탑의 층마다 지붕 모서리에 풍경이 달려 있고, 28종의 윤기 나는 유리벽돌 한 장 한 장 마다에는 삼존불, 오존불, 비천상, 동자상, 팔부중상, 제자상 등 50여 종의 존상, 다양한 당초문 등의 무늬가 양각으로 들어 있다.
탑의 높이가 55.08미터이고, 유리벽돌에는 50여 종의 불상이 들어 있다고 한다. 탑은 송나라 황실의 사원인 開寶寺塔이다. 본래 989년에 지은 목탑이 있었지만, 1044년에 벼락으로 불타고, 1049년에 이 탑을 다시 세웠다. 탑의 색이 녹슨 철색이라서 사람들은 흔히 철탑이라고 부른다. 카이펑의 고적과 문물을 기록한 常茂徠의 <<如夢錄>>에서는 卞京의 동남쪽에 있는 이 탑을 ‘천하제일의 탑’이라고 하였다.
청명상하도
탑을 바라보다가 곁에 있는 기념품 가게로 이 회장님과 같이 들어갔다. 허름한 건물 안에는 서화, 조각 등의 많은 기념품들이 있다. 송나라의 관료 화가 張擇端이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의 가격을 물으니 200위안 넘게 부른다. 이회장님이 50위안으로 에누리하고 나에게도 하나 사서 건넸다.
역사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이 그림은 북송 말기의 개봉의 모습을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담아내어 당대의 모습을 잘 전한다. 청명절의 화창하고 따뜻한 봄날에 카이펑의 교외에서 상하를 건너 시장 거리로 들어오는 사람, 번화한 시장에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둘러싼 청중, 다리 아래에서 노를 젖는 모습, 낙타를 몰고 성문 밖으로 나가는 사람, 갓을 쓰고 성안의 상점가를 말 타고 지나가는 고려의 상인, 수레바퀴를 고치는 장인, 이층 누각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하는 사람,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나선 여인, 수레를 끌고 짐을 진 소, 우물가에서 물을 마시는 말, 가마를 타고 밖을 내다보는 남자, 다리 위에서 지나가는 배를 구경하는 사람들......
카이펑의 시장통에서 와글와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그림의 제목은 송말원초의 유명한 서화가 한림학사 조맹부가 썼고, 화제는 양주태수 양여수가, 발문은 어제 공부에서 본 ‘성인지문’ 편액을 쓴 명나라의 한림원 시강학사 운양 李東陽이 썼다.
清明上河图乃宋代翰林画史张择端所作之神品也,择端字正道东武人,幼读书游学於京师后习於绘事,本工於墨划尤擅於市桥、邑屋、舟车、山村、草树、以及马牛、人物衣冠之出没,远近无一不臻其妙自成一家之体也。
<청명상하도>는 송나라 시대의 한림화사(궁중화가) 장택단이 그린 작품이다. 택단의 자는 정도이며 동무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독서하였고 서울로 유학하여 그림 그리는 일을 익혔다. 본래 시장의 다리, 읍내의 가옥, 배와 수레, 산촌, 풀과 나무, 말과 소, 인물 의관의 출몰 등을 먹선으로 잘 그렸다. 원근에 하나도 그 오묘함을 따를 자가 없어서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清明上河图乃描绘北宋之都城,以及汴河两岸清明时节之市俗人事而故名也。其画面之幽雅写景之生动逼真,城郊及农村清明时节之田野景色,疏林落雾村舍渔家,阡陌纵横田亩井然。
<청명상하도>는 북송의 도성, 변경(汴京)에 있는 변하(汴河) 양안 청명절의 도시인 모습을 묘사하여 <청명상하도>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림에서 그윽하고 단정한 풍경 묘사는 생동하고 핍진하다. 도성과 청명절을 맞은 농촌 들판 풍경, 성근 숲과 옅은 안개 속의 시골집과 어촌, 논두렁과 밭두렁, 밭이랑의 모습이 우물 정자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村头之大道上人员簇拥,有骑而奔驰驰有踏青扫墓而归者,此处乃以拱桥为中心桥上行人
熙熙攘攘拥挤不堪,并见商肆林立有驻足而观景,桥下舟楫川流不息街上市容繁盛,行人往来之人物则有士农工商医卜僧道胥隶骑。
촌의 큰 길에는 조릿대를 안고 가는 사람이 있고,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 답청을 하며 성묘하고 돌아오는 사람, 그림의 가운데에 다리가 놓여있고, 다리 위에 행인들이 번잡하게 오간다. 상점들이 숲처럼 늘어서 있고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구경한다. 다리 아래의 배에는 노 젓고 강물은 쉼 없이 흐른다. 거리에는 시장 모습이 번성하다. 행인들에는 선비, 농부, 장인, 상인, 의사, 점치는 사람, 승려, 도사 등이 있으며, 걷거나 말을 타고 오고 간다.
而赶集有载货之货车,以多匹之马力而拖曳者,妇幼乘轿有以物易物之货郎担困而睡者,以板为舆者驴赢马牛汇跑之属。屋宇则官府之街市廛之居庄寺观 卢屏障离尘之制。店肆有名人题匾并有鬻名人之字画,人与物多至不可指数。其笔势雅意逸趣 此图之妙实为希世之神品也,凡获得者宜於珍藏而宝之。
몰려드는 화물 수레를 여러 필의 말이 끌고 간다. 아녀자, 어린이가 가마를 타고 지나가고, 물건을 사고파는 사내가 짐을 지고 있고, 피곤하여 잠들어 있기도 하다. 나무판자로 만든 수레를 끌고 가고, 지나가는 나귀, 말, 소 무리들이 있다. 가옥은 관청 거리, 시장의 가게, 시골의 별장, 사찰, 도관이 있고, 그릇, 병풍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상점에는 유명한 사람이 쓴 편액과 상인의 이름 글자가 보인다. 사람과 물건이 많아서 다 꼽을 수가 없다. 그림의 붓놀림이 단정하고 그림의 뜻은 속기를 벗어났다. 이 그림의 오묘함은 실로 세상에 드문 신품이다. 무릇 획득한 것은 마땅히 진기하게 갈무리하고 보배로이 여기어야 할 것이다.
癸亥之仲春月 琼州太守 杨如寿
계해 중춘(2월) 경주태수 양여수
탑돌이
가게에서 나오니 일행 중에 몇 분이 홍 가이드와 같이 합장을 하고 탑돌이를 하고 있었다. 나도 합류하여 한 바퀴를 돌고는 탑 안으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장 선생님을 따라 들어갔다. 안에는 갈색의 도자기로 구운 입불이 서 있고 그 앞에 향로가 있어서 겨우 한 사람이 서서 향을 올릴 수 있다. 탑을 감으며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좁은 통로를 따라 한 층을 올라가니 작은 창은 나 있지만 답답하여 더 이상 올라갈 수는 없었다.
탑에서 나와 다시금 탑을 우러러보고 섬세한 문양이 들어있는 유리벽돌탑을 보다가 돌아나왔다. 한참을 걸어서 접인전 안을 보니 금대의 구리로 주조한 아미타불 입상이 노란 휘장 안에 모셔져 있다. 불상의 머리 위에는 검은색 목판에 금물로 ‘光明無量’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있다. 법당 앞에는 장방형의 커다란 철제 향로에 향연이 오르고 중년의 부인이 합장하고 참배한다. 극락전이 아니라 接引殿이라고 하는 점이 우리나라와 다르다. 무량광, 무량수 아미타불이 중생들을 극락세계로 영접하여 이끈다는 뜻이다.
철탑공원 광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강샘에게 군고구마, 군밤 따위를 얻어먹었다. 그곳에서 강샘은 중국인 여인들과 베드민턴을 치기도 하며 망중한을 즐긴다. 차는 출발하여 카이펑을 떠나서 운대산으로 향한다.
황하
교외에는 다른 도시와 연결되는 고가도로, 고속도로, 새파란 싹이 나 있는 드넓은 밀밭 가운데에 있는 농촌마을이 차창너머로 보인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굵고 싱싱한 딸기를 샀다. 먹어보니 단단하고 단맛은 없고 싱겁다. 달리는 버스 속에서 박 단장님이 접인전의 의미를 설명해주고, 이사장님도 질세라 염불정토 수행에 대하여 설명을 해준다.
나는 운대산이 태항산맥의 산이라서 조선의용군의 태항산(太行山) 항일전과 김학철 선생, 그 아드님 김해양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은 이야기를 말 했다. 홍 가이드도 태항산 십자령에서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고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탈출구를 마련하다 전사한 용맹한 조선의용군 진광화, 윤세주 선생 이야기를 곁들였다. 가이들에게 물으니 태항산 십자령은 베이징 부근에 있다고 하였다.
긴 다리를 지나가는데, 누군가 외쳤다. ‘우와! 황하다!’ 나도 반가워서 버스 좌우의 창 밖으로 보이는 항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강물은 누렇고 강 가운데에는 흙이 퇴적된 섬도 보인다. 그런데 강물 가운데에 두 사람이 나룻배를 타고 있는 모습이 점처럼 작게 보인다. 황하에서 그물을 던지며 등용문을 향하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잉어를 낚기라도 하는 것일까. 희뿌연 미세먼지 속에서 황하는 넓디넓은 들판 가운데를 파헤치며 흐르고 있다.
운대산 홍석협
마침내 운대산 입구에 버스가 주차했다. 표를 끊는 산의 출입구 광장도 정말 넓다. 여름, 가을이면 인산인해를 이룰 것이다. 표를 사고 입장을 기다리는 곳도 마치 공항처럼 넓고 크다. 카드처럼 생긴 입장권을 제시하고 안으로 들어가니 셔틀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미세먼지가 더 심한 것 같다. 산봉우리가 희뿌옇게 윤곽만 보인다. 나는 마스크를 단단히 끼고 차에서 내렸다. 홍석협(紅石峽)이라는 붉은 글자가 새겨진 바윗돌 표지석이 보인다. 주변의 엄청난 크기의 백색 암봉이 높이 치솟아 있지만 시야가 흐려 잘 보이지를 않는다. 이렇게 미세먼지가 심하면 나는 억만금을 줘도 중국에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홍석협 깊은 계곡의 벼랑 속으로 뚫어 놓은 가파른 길을 내려갔다. 겨우 사람이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벼랑길은 좁고 위태로웠다. 온통 붉은 색의 협곡은 깊이가 68미터라고 한다. 벼랑 옆으로 난 잔도를 지나니 바위를 뚫어 동굴이 생겼고, 그 동굴을 지나자 난간 밑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데 물소리가 협곡에 공명을 하여 쟁쟁하게 들려온다.
협곡의 벽이 좁아서 마치 동굴 속을 걷고 있는 것 같다. 이윽고 협곡에 가로 놓인 다리가 보인다. 협곡 사이의 허공에 가로 놓인 다리에 서서 저 깊은 계곡의 바닥을 내려다보니 벽옥처럼 파란 물이 흐르고 있다. 건너편 절벽 가운데로 난 잔도를 지나서 다시 가파른 벼랑길을 내려갔다. 작은 폭포가 있고 그 위로 돌다리가 놓여 있다.
돌다리 위에 서서 왔던 길을 올려다보니 협곡 중간에 다리가 있고 그 위로 다시 다리가 놓여 있다. 옥수처럼 맑은 물결에 손을 담그니 냉기가 전해온다. 새파란 수면에 사람들의 모습이 투영된다. 물속을 들여다보니 헤엄치는 물고기는 보이질 않는다. 사진이나 영상으로만 보았던 이런 협곡을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가 없다. 복사꽃잎이 떠내려 오는 계곡을 거슬러 오른 어부가 찾은 무릉도원의 입구가 여기인 것만 같다. 기이하고 신비로운 이곳에서 오래 머물고 싶다.
다시 가파른 절벽 사이로 뚫어 놓은 조도의 수백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산길을 돌아서 계곡을 막아 놓은 높은 댐의 둑 위로 난 길을 걸어서 나왔다. 부옇게 보이는 계곡 사이의 저수지와 바위 봉우리가 어울려 한 폭의 수묵화를 펼치니 아득하고 신비롭다.
목은 따갑고 잇몸은 붓고
표를 받는 터미널을 빠져나와 버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데 고압 전류를 보내는 철탑 너머로 기울어가는 해가 달처럼 보인다. 목은 부어 따갑고 기침이 나며 잇몸도 부어올랐다. 몸에는 열이 오르고 날씨는 옷을 모두 껴입고 모자를 쓰고 장갑을 껴도 춥기만 하다. 미세먼지라는 복병과 예민하여 남들처럼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지도 못한다. 입이 짧아서 기름기가 너무 많은 음식은 나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더구나 사람들이 그렇게도 즐겁게 마시는 술을 입에 대지 못하니 술꾼들과도 어울리지 못하여 더욱 괴롭다.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나는 오늘밤에 또 잠을 설치고 남은 여정에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버스로 다가가며 미련 없이 말했다. 김 총무님과 서로 방을 바꿔달라고 하였다. 의리나 상대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으려는 생각은 그때 나에게는 한갓 고집이고 사치이고 어리석은 짓일 뿐이었다. 룸메이트 윤 선생님께도 내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러니 혹여 기분 나쁘게는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드렸다. 그날 밤엔 처음으로 술자리가 없었고, 나는 권 선생님과 룸메이트가 되어 안락하게 잠들었다.
숭산이 있는 등봉으로 2시간 남짓 버스가 달렸다. 그 사이에 박 단장님은 강사를 물색하더니, 과학 교사인 유 선생님께 홍석협의 지질에 관하여 설명을 해주는 강의를 요청하였다. 유 선생님의 차분하고 체계적인 강의 속에 내 고향, 영천의 지질을 말하는 대목이 나와 강의 내용을 더욱 주목하여 들었다.
다시 심마니 강샘이 마이크를 잡고 약초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정보를 알려준다. 갱년기 증후군이 나타나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약초의 효능이 또 내 귀에 쏙 들어온다. 역시나 성공적이고 효과적인 강의가 되려면 듣는 사람의 동기를 자극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