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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8일 한길교회 오후예배 특강>
동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본문: 창세기 1:20-30; 2:19; 9:3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담임)
문제 제기
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늘고 있다. 2020년 기준 대한민국의 애완동물 양육 가구 비율은 27.7%로, 638만 가구에서 1,530만 명이 602만 마리의 개와 258만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1] 《동물 농장》을 비롯해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와 같은 TV 프로그램이 인기를 끈다. 기독 신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동물을 집안에서 기른다.
동물을 기르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사람이 동물을 기르는 일은 인류 역사에서 오래되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축(家畜, livestock)이라 하여 집에서 말, 소, 돼지, 개, 닭, 양 등을 기르는 것은 일반적이었다. 그 이유는 대개 이동, 생산, 소득, 식용, 의복 등을 위해서였다. 말을 길러 이동했고, 소를 길러 밭을 갈았다. 개를 키워 집을 지키게 했고, 닭을 길러 알과 고기를 얻었다. 젖소를 키워 우유나 치즈를 먹었다. 양을 키워 털을 깎아 옷이나 이불을 만들었다.
그런 것을 문제 삼으려는 건 아니다. 오늘날에는 가축의 정도를 넘어섰다. 단순히 집이 아니라 집안에서 키운다. 사람과 생활환경을 같이 한다. 키우는 용도가 애완으로 바뀌었다. 심지어 같이 자기도 한다. 종류도 다양해져서 개, 고양이, 금붕어는 물론이고 새, 기니피그, 토끼, 햄스터, 도마뱀, 이구아나, 사슴벌레 등을 키우는 경우가 흔하다.[2] 집 안으로 들어온 동물을 애완동물이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이 정착된 지 오래다. 심지어 동물을 위해 장례식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풍토가 교회 안으로까지 들어와서 교인 중에 자신이 기르던 애완동물의 장례식을 목사에게 부탁하는 경우도 생기고, 애완동물 때문에 예배 출석을 못한다는 교인이 생기기도 한다.
이런 일이 설마 일어날까? 이 세상에는 워낙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니 무시할 정도의 소수가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필자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무시할 만한 소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청어람ARMC에서 일하는 모 목사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남겼다. “동물이 예배할 수 있는지, 구원받을 수 있는지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예배할 수 있고, 구원받는다고 생각하지만 누구도 확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반려’라는 말은 사람에게만 붙여야 성경적 용례에 맞다느니, 성찬을 동물에게 나누면 모독이라느니 하는 생각들까지 존중하기는 어렵다. 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확신을 말하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위 글을 쓴 이가 속한 청어람ARMC는 홈페이지에 “청어람은 2005년 한국교회와 사회의 다음 세대를 위한 인재발전소를 자임하는 아카데미 운동 단체로 창립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게다가 기독교계에서 영향을 끼치는 단체다. 이런 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이 이런 입장을 갖고 있음을 통해 우리는 동물에 대한 문제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박현철 목사(청어람ARMC)가 2024년 7월 26일(금) 자신의 페이스북에 쓴 글. 전체공개로 올린 것이기에 누구든 볼 수 있다.
▲ 박현철 목사(청어람ARMC)의 페이스북에 있는 자기소개
▲ 박현철 목사(청어람ARMC)가 2024년 9월 14일(토) 자신의 페이스북 쓴 글. 전체공개로 올린 것이기에 누구든 볼 수 있다.
우리 한길교회 교인 중에는 애완동물을 데리고 와서 예배한다든지, 애완동물의 장례식을 치른다든지 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지극히 적지만, 미연에 방지한다는 측면에서 이 주제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본론
I. 사람과 동물에 대한 기본 이해
사람과 동물의 차이
이 주제를 살피면서 가장 먼저, 성경이 말하는 동물의 위상(位相), 동물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정리해 보자.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빛에서부터 시작해 식물, 동물, 사람도 창조하셨다. 동물도 사람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성경은 창세기 1장에서 여러 피조물을 언급하지만, 창세기 2장에서부터는 사람에게만 주목한다. 하나님은 자기 피조물 가운데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신다. 신앙고백서와 요리문답서 역시 창조를 다루는 항목에서 동물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4장,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12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6문은 창조를 다루면서 동물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경우 제9문답에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다룬 뒤 제10문답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일을 다룬다.
동물과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공통적이지만, 동물과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동물은 사람만큼 존귀하지 않으며, 동물은 사람의 위치에 이를 수 없다. 동물과 사람이 구분되는 특징은 다음의 몇 가지를 통해 알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은 제일 마지막에 사람을 지으셨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아주 질서 있고도 분명한 계획에 따라 하셨다. 하나님은 하루에 아니 한순간에 모든 것을 다 창조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6일 동안 세상을 지으셨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4장 1절). 이때 아무렇게나 창조하지도 않으셨고, 질서 있게, 순서대로 창조하셨다. 그리하여 첫째 날에는 빛을, 마지막 여섯째 날에는 동물에 이어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 순서는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존재임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맨 마지막에 있게 될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여러 가지를 지으셨는데, 그것들 대부분은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들이다. 하나님은 다른 모든 피조물을 사람보다 먼저 창조하심으로써 사람이 살 만한 조건, 즉 삶의 터전을 마련하셨고 그 후에 비로소 사람을 창조하셨다. 동물 역시 사람의 필요를 위한 조건이다.
둘째,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른 존재와 달리 창조하고자 하는 의지를 미리 표현하신 뒤에 비로소 창조하신다. 하나님은 다른 것을 만드실 때는 그냥 만드셨다. 빛을 창조하실 때에 “내가 빛을 만들겠노라”라고 말씀하신 뒤에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이 아니다. “내가 땅의 짐승을 만들겠다”라고 말씀하신 뒤에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에 대해서는 달랐다. 창세기 1:26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라고 말씀한다. 이렇게 창조 의지를 미리 천명하신 뒤, 27절에서 그 의지에 따라 사람을 창조하신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는 사람만 아니라 그 어떤 것이든지 모두 다 영원 전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긴 하지만, 사람을 창조하실 때만 다른 것들을 창조하실 때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대로 어떤 목적을 위해 창조하실 것인지를 천명해 주시는 표현을 기록하고 있다.[3] 이런 점에서 사람의 창조는 다른 피조물들과 구별된다. 이런 점에서 사람과 다른 피조물은 다르다. 동물과 사람은 같은 피조물이라도 그 위치가 다르다.
셋째, 무엇보다 동물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의 관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창세기 1:26-27에 의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 창세기 1:26은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말씀한다. 창세기 1:27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말씀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을 피조물에 언급한 것은 사람뿐이다. 동물에 대해서는 그런 언급이 없다. 동물은 “그 종류대로” 지음 받았다는 표현만 나올 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언급은 없다(창 1:21, 24-25). 하나님의 형상이란 진리, 의, 거룩함인데(창 1:26-28; 골 3:10; 엡 4:24;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0문답), 동물에게는 그것이 전혀 없다. 있을 수도 없다. 동물을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이유다.
넷째, 동물과 사람은 ‘생기’의 측면에서도 차이가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땅의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심으로 ‘생령’(生靈, a living soul)이 되었다(창 2:7). “생기를 불어 넣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호흡, 곧 하나님의 생명의 힘이 사람 속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몸’(σῶμα)을 지으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므로 ‘영혼’(נֶפֶשׁ)을 창조하셨다. 이로 인해 사람은 몸(body)과 영혼(soul)으로 이루어진 ‘영육 통일체’(psycho-somatic unity)다.[4] 몸이 있기에 물질적인 존재지만, 영혼이 있기에 영적인 존재(spiritual being)다.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물질적이지만 않다. 영적이기도 하다. 영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지으셨다(창 2:19). 그러나 동물에게는 생기를 넣으셨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렇기에 동물은 영혼이 없다. 오직 사람만이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될 수 있는 영적 존재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근거해서, 사람과 동물이 구분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은 바 된 사람은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영적 생명력을 지니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지만,[5] 동물은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과 교제할 능력이 없다. 동물은 영적 생명력은 없고 육체적 생명력만 지닌 존재다.[6]
사람과 동물은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이지만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다. 사람만이 지성적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 영혼과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아름답게 되는 몸을 가지고 있다.[7]
그렇기에 사람을 가리켜서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창조의 면류관”(the crown of God’s handiwork)이라고 한다.[8] 이처럼 사람과 동물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사람의 동물 지배권
하나님은 자신이 특별하게 지은 사람에게 동물에 대한 지배권을 주셨다. 창세기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에 의하면 사람은 동물을 다스리는 주체다. 이 구절에 근거해 정통 신학은 사람을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vice-regent)라고 표현한다.[9] 사람은 모든 피조물을 자신의 뜻과 목적에 복종시킬 의무와 특권을 부여받았다.[10]
사람은 동물을 다스린다. 동물은 사람의 다스림 아래 있다. 이는 아담이 동물의 이름을 지은 장면을 통해 구체화된다. 하나님은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의 이름을 짓게 하셨다(창 2:19-20). 성경에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에 대한 통치권을 의미한다.[11]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낮, 밤(창 1:5), 하늘(창 1:8), 땅(창 1:10)과 같은 이름을 부여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더이상 자신이 직접 동물의 이름을 짓지 않으시고 동물을 사람에게 이끌어가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이름을 짓게 하셨으니(창 2:19) 곧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했다.
대리 통치자로서의 사람은 동물을 포함한 피조물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돌보고 다스려야 한다. 동물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닮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을 학대하거나 괴롭혀선 안 되며, 하나님이 피조물을 기뻐하시고 아끼시는 것처럼 동물을 대할 의무가 있다. 피조세계에서 살아가는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고 기뻐하며, 생명을 잘 보존하고, 혹 식용을 위해 이용할 때도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 한다.[12]
동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기본 태도
기독교 신자는 모든 삶에서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동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동물도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섭리가 동물에게도 미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이 세상 전체에 미친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셨을 뿐 아니라(마 10:30), 참새 한 마리도 섭리하신다(마 10:29).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은 동물이 사람과 같은 수준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과 동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만약 사람 이외의 피조물에 대한 가치를 사람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면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왜곡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른 여러 피조물 중에서 사람의 가치가 남다르다는 것을 무시하는 일이다. 사람이 아닌 존재를 사람과 동등한 수준으로 존엄하게 여기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된다.[13]
성경이 가르치는 신자가 사랑해야 할 대상
동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나쁘게 볼 수 없지만, 지나친 것은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명령했다. 그런데 만일 이 사랑을 하지 않고 동물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큰 죄악이다.[14] 동물에 대한 애정 때문에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 자녀를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죄다.
동물에 대한 지나친 사랑과 애착은 우상숭배가 될 수 있고, 동물을 자식처럼 대하면서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서 결국 제6계명을 어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15]
참고로, 선교사, 의사, 음악가, 철학자이면서 루터교 출신 자유주의 신학자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1875~1965)는 여름에 아무리 더워도 문을 닫고 일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모기나 파리가 들어와 전등 주변에 모여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16]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동물의 생명을 사람의 생명처럼 여기는 것으로서 바람직하지 않다.[17]
II. 구체적인 적용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에 기초해서 그리스도인이 동물과 관련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적용을 생각해 보자.
동물을 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음
오늘날 ‘채식주의자’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베지테리언(vegetarian)이라고 한다. 고기는 물론이고 계란, 우유, 생선 등 동물성 식품까지도 먹지 않는 비건(Vegan)도 있다.
채식주의자가 되는 동기는 다양하다.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기호나 건강 등의 이유로 채식주의자(vegetarian)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동물에 대한 지나친 사랑으로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창세기 9장 3절을 보면 노아 홍수 직후에 하나님께서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고 하셨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육식(肉食)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먹어도 된다고 했는데, 동물을 먹으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채식주의가 되는 것은 비신앙적이다.
살생을 금하고 육식을 금하는 불교와 달리 기독교는 살생과 육식을 금하지 않는다. 제6계명이 “살생하지 말라”가 아니라 “살인하지 말라”라는 사실은 중요하다.[18]
애완동물을 키우는 문제
신자가 애완동물을 키우는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람이 동물을 키우는 것은 오래된 일이다. 가축(家畜)을 길러 이동, 생산, 식용, 의복에 이용했다. 현대에 들어서 애완을 목적으로 키우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애완을 목적으로 키우는 것을 무조건 나쁘게 말할 수 없다.
성경에도 보면 애완동물과 관련한 표현이 나온다. 사무엘하 12:1-3에 보면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꾸짖기 위해 비유를 든다. 그 내용을 보면 “(1)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2)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3)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이라고 한다. 3절에 나오는 가난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처럼 사람이 가정에서 동물을 기르면서 보호하고 위로를 받는 것은 다윗의 시대에도 존재했다. 그런 사람의 동물을 약탈하여 빼앗는 것은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는 중대한 범법행위였다(삼하 12:6).[19]
위 구절이 애완동물을 키워도 되느냐를 말해 주는 구절이 아니고, 또한 나단이 비유로 언급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므로 성경이 애완동물을 키우는 행위 자체를 금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단, 애완동물을 키우면서 지나친 애착으로 이어지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오늘날 세상에서 그런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동물을 자식처럼 대하고, 동물에 대해 자신을 아빠나 엄마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기독교 신자는 애완동물을 키우더라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동물은 동물일 뿐이다. 동물을 인격화해서는 안 되고, 동물을 사람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서는 안 된다.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의 사용 문제
2010년 전후로 애완동물(愛玩動物, pet)이라는 표현 대신, 반려동물(伴侶動物, companion animal)이라는 표현이 들어오더니, 이제는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을 보편적으로 사용한다.[20] 대한민국 법률 동물보호법은 제1장 총칙 제2조 정의 제7항에서 “반려동물이란 반려(伴侶)의 목적으로 기르는 개, 고양이 등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는 동물을 말한다”라고 규정한다. 동물보호법에는 ‘애완동물’이라는 표현이 없다. 원래 언어란 사회성을 띠고 있다. 그렇기에 사회 구성원의 인식에 따라 언어는 변한다. 애완동물 대신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이 보편화된 것은 자신이 키우는 동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인식과 감정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대변한다.
일상화되었고 무심코 쓰는 말이라도 기독 신자는 늘 조심해야 한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드러내며, 우리의 가치를 반영한다. 그리스도인은 언어생활에서도 성경적이어야 한다.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이 나타난 이유는 동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에서 비롯되었다. 애완을 목적으로 키우다가 지나친 애착으로 이어지면서 결국 동물을 인생의 반려자로 생각한다. 반려자로 생각해서 반려동물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반려동물이라고 부르다 보면 반려자로 생각하게 되기도 한다.
반려(伴侶)라는 말은 짝 반(伴), 짝 려(侶)로 구성되어 있어 ‘짝’이라는 뜻이다. 주로 부부가 상대방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반려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동물을 사람의 위치에 올려놓는다.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의 사용은 동물의 가치를 지나치게 높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훼손하는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반려동물’이라는 표현을 쓰더라도, 그리스도인은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해야 한다.
동물도 구원받는가?
“동물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너무나 어이없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수 있다. “동물에게 복음을 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 구원의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은 당연하다(롬 10:13-15).[21]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동물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성경은 동물의 구원이나 영생에 대해 전혀 말씀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직 사람에 대해서만 구원과 영생을 약속한다.
성경은 창세기 1장에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해 언급한 뒤, 창세기 2장에서부터는 오직 사람에게만 집중한다. 하나님은 구속사에 있어서 사람에게 초점을 두신다. 하나님은 사람과 언약을 맺으셨고(창 3:1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1-2절), 사람에게 율법과 약속을 주시고,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빌 2:7).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구원은 첫째 아담(아담이라는 히브리어의 본래 뜻은 사람이다.) 아래 있는 사람을 구원하신다(롬 5:12-21).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구원 얻는데(딤전 2:5), 동물에게는 그들을 위한 중보자가 없다. 만약 하나님이 동물을 구원하시려 했다면 예수님은 동물이셔야 한다.
구원이 단순히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성화도 포함한다는 점을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온다. 동물은 믿지 못하며 회개하지 못하며 성화되지 못한다. 특히 성화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감으로써 회복하는 것인데(롬 8:29; 골 3:10;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5문),[22] 동물은 애초에 그게 가능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창 1:28; 9:6)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만이 성화될 수 있다(롬 8:30).
또한 하나님의 구원은 예정에서부터 중생, 믿음, 회개,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까지 연결되는데(롬 8:30; 엡 1:3-6), 동물에게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동물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셨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그런 말은 성경은 물론이고 교회역사의 가르침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2문: 하나님의 작정(作定)decrees이란 무엇입니까? (소 7문) 답: 하나님의 작정은 그분의 뜻의 경륜에 따른 지혜롭고 자유로우며 거룩한 사역인데,1) 영원 전부터 자기 영광을 위해 시간 세계에서 일어날 모든 것, 특히 천사들과 사람들에 관하여, 변치 않게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2) 1) 엡 1:11; 롬 11:33; 9:14-15, 18 2) 엡 1:4, 11; 롬 9:22-23; 시 33:11 88문: 부활 직후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답: 부활 직후에 천사들과 사람들에 대한 전체적이고 최종적인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1) 그날과 시간은 아무도 알지 못하기에, 모두 깨어 기도해야 하며, 항상 주님의 오심을 준비해야 합니다.2) 1) 벧후 2:4; 유 1:6-7, 14-15; 마 25:46 2) 마 24:36, 42, 44; 눅 21:35-36 |
영혼이 없고 자유의지도 없으며 육체적 생명력만 지닌 동물은 식물 등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생명이 다하는 그 순간 소멸한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다.
이와 같은 이해만 분명해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동물과 예배드리는 교회, 동물을 위해 장례식을 해 달라는 교인 등이 생긴다.
예배의 자리에 동물을 데리고 와도 될까?
예배의 자리에 동물이 함께 할 수 있을까?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주제다. ‘바늘 끝 위에서 몇 명의 천사가 춤출 수 있나?’(How many angels can dance on the head of a pin?)[23] 라는 중세 스콜라학파의 쓸모없는 논쟁보다 불필요한 주제다. 그럼에도 교회가 타락하니 별의 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진다.
2022년 10월 15일 오전 11시 성공회대학교 주최로 반려동물과 드리는 예배가 있었다. 이 예배에서는 반려동물 축복식이 있었다. 2023년 5월 6일(토) 오후 1시 대한성공회 분당교회에서 반려동물 축복예배가 있었다.
대한성공회 광명교회(민숙희 관할사제, 광명시 노온사동 소재) 주일예배에는 개 두 마리가 성도와 함께 온다. 영등포구 당산동에 위치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 성문밖교회(담임 김희룡 목사) 역시 애완동물을 데려와서 예배드리는 성도가 있다. 이 교회는 5월 첫째 주일을 가족주일로 지키는데, 이날 예배 때는 성도들이 애완동물을 데려올 수 있다. 이 교회 담임목사인 김희룡 목사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동물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며 “기니피그를 데려온 중학생도 있었다”고 했다.[24] 교인이 동물을 가족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할 교회와 목사가 오히려 가족주일에 동물도 데리고 와도 된다고 말하는 말도 안되는 일이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다.
▲ 대한성공회 광명교회에 반려견과 함께 예배드러 온 가족 모습. 국민일보 기사에 실린 사진으로 해당교회가 언론에 제공한 것이다.
강원도 홍천에는 교회 이름 자체가 “동물과함께하는교회”(담임 임소연 목사)도 있다. 이 교회는 2021년 6월에 개척했다.[25] 기독언론 뉴스앤조이는 이 기사를 실으면서 단순히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긍정하고 있다.
▲ 동물과함께하는교회의 예배 장면 (2021년). 뉴스앤조이 기사에 실린 사진으로 해당교회가 언론에 제공한 것이다.
미국 뉴저지주 세인트조지스바이더리버 성공회교회는 1년에 6~7차례 미리 정한 날에 동물 동반 예배를 개최한다. 이 교회는 “교회가 동물을 사랑하고 아끼는 등 높은 ‘동물 감수성’을 보여줄 때 새로운 전도의 길이 열릴 수도 있다”고 말한다.[26]
▲ 미국 뉴저지주 세인트조지스바이더리버 성공회교회에서 연 ‘펫프렌들리’ 예배 장면.
꿈의교회(담임 김학중 목사, 안산시 사동 소재)는 2021년 4월부터 ‘드림펫 사역’(Dream Pet)을 시작했다. 펫(pet)이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애완동물을 위한 사역이다. 이 사역팀은 주일 오전 10시, 12시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의 애완동물을 돌봐준다. 20여 명이 활동하는 드림펫 선교회 회원이 교회 내 공간에서 개와 놀아주거나 함께 주변 산책을 한다. 평균 10여 마리가 이들 봉사자 손에 맡겨진다.
드림펫 사역은 담임인 김학중 목사가 서기선 드림펫 사역 팀장에게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김 목사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반려동물을 키우진 않지만 이미 반려동물이 성도의 일상에 있고 세상은 함께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고 있는데 교회는 아직 진입장벽이 높다고 느꼈다”며 “성도들이 예배에 집중할 수 있으려면 교회가 이런 부분에서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신학적으로 여러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피조물인 생명체에 대한 존중이 하나님의 뜻이란 점에서 필요한 사역”이라고 덧붙였다.[27]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하기보다 세상의 흐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이 교회의 평소 스타일을 닮았다.
▲ 안산 꿈의교회 드림펫 사역 봉사자들이 교회에서 성도들이 맡긴 반려견을 돌보고 있다. 국민일보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
▲ 꿈의교회 담임 김학중 목사. 김목사는 기독교TV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꿈의교회는 1993년 ‘새안산교회’로 시작해서 ‘새안산레포츠교회’(2002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2007년에 ‘꿈의교회’라는 이름으로 바꿨다. 이 교회는 그 시작부터 성경의 가르침보다 세상의 변화에 민감한 교회다.
목회데이터연구소(대표 지용근)가 2024년 1월 23일 발표한 ‘반려동물 실태와 인식’에 따르면,[28] 2023년 11월 초 이 연구소가 목회자 구독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넘버즈폴에서 ‘교회에서 성도와 반려동물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별도 공간 마련’에 대한 인식을 물었는데, 반대하는 목사는 65%였지만, 찬성이 무려 27%로서, 목회자 4명 중 1명은 ‘교회에서 성도와 반려동물이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별도 공간 마련’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목회데이터연구소 [넘버즈 225호] 반려동물 실태와 인식 7쪽에 실린 도표
이러한 분위기로 인해 2020년 제70회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총회에는 ‘반려동물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을 정리해 달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이에 대해 총회 신학위원회는 굳이 이런 주제를 다룰 필요가 없다는 판단으로 기각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인 2021년 제71회 총회에 다시 ‘애완동물에 대한 신학적인 입장 정리 청원’이 올라왔고, 총회 신학위원회는 “직전 총회에서 기각된 건과 유사한 건이므로 기각하기로 가결”했다. 한 해를 걸러 2023년 73회 총회에 ‘동물 장례에 대한 질의’가 올라왔고, 73회 총회는 목회 현장에서 동물에 대한 장례예식은 할 수 없다고 가결하면서 동시에 반려동물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은 신학위원회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 맡겨 1년간 연구하여 차기 총회에 보고하기로 했다. 결국 2024년 74회 총회는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를 받았다. 동일한 청원이 반복적으로 계속 올라왔기에 다룬 것도 있지만, 짧은 기간 동안 세상과 교회의 변화가 크게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70회 총회를 비롯해 총회에 상정된 안건의 제안설명에 보면 “교회 안에서도 반려동물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과 문화로 인해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 사이에도 갈등이 예견되고 있습니다.”(70회 총회 상정안건 제안설명), “요즘 세태는 사람과 동물을 동등하게 여기며 애완동물을 반려동물이라 부르는 문화가 형성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성도들 중에 애완동물의 장례예배를 부탁하는 경우도 생기고, 애완동물 때문에 예배에 출석할 수 없다는 교인들이 생기기도 합니다.”(71회 총회 상정안건 제안설명)라는 표현이 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예배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한다. 좀 더 확대해서는 복음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나 복음을 듣기 원하는 사람이 예배에 참여한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며,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고, 성도와 교제하는 시간이다. 그것을 목적하고 목표할 수 있는 대상만이 참여할 수 있다. 이는 오직 사람에게만 해당한다.
그렇기에 동물이 예배에 참여할 수 없다. 영혼이 없는 동물은 예배에 참여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말씀에 반응할 수 없고, 찬송과 기도 행위에 전혀 참여하지 못하며, 성도와 교제할 수 없는 동물이 예배할 수 없다.
안산 꿈의교회가 하는 드림펫 사역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애완동물을 맡아보는 일은 교회가 할 사역이 아니다. 교회는 동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는 교인들을 말씀으로 바르게 가르치는 신적 기관이지, 교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서비스 기관이 아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애완동물 때문에 예배 참석을 어려워한다면 애완동물을 기르지 않게 하거나 애완동물과 예배는 비교 불가능한 것임을 가르쳐야 한다.
혹여나 시각 장애인이 ‘안내견’을 동반하여 예배를 드리러 왔을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는 특수한 상황이므로 논외로 하자.
애완동물이 아프다는 이유로 예배에 빠지는 문제
주일 아침에 교회당에 가려는데 마침 애완동물이 아프다. 어떻게 해야 할까? “목사님~ 오늘은 강아지가 아파서 교회를 못 가요.”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단순하게 획일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다. 이런 경우도 상정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소를 키우는 집이 있다. 이 소는 그 가정의 중요한 재산일 뿐 아니라 주 소득원이다. 마침 주일 오전 10시 즈음 소가 송아지를 낳는 상황이 생겼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예배시간의 문제가 아닌 주일 하루 전체와 관련해서, 즉 주일성수 문제와 관련해서는 성경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마태복음 12:9-12을 보자.
(9)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10)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마태복음 12장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안식일 논쟁을 하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대해 획일적으로 적용하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를 비판하신다. 그러면서 예를 드신다. 위 본문은 10절과 12절이 말하는 대로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11절에서 동물을 예로 드신다.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이 본문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의 내용을 악용하거나 잘못 적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위 구절은 안식일 하루 전체에 대한 내용이기에, 주일성수 문제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인데, 한편으로 예배에 적용할 수도 있겠지만, 예배 자체에 대한 언급은 아니므로 잘못 적용해서는 안 된다. 즉 예배시간과 무관하게 주일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으나 예배시간에 일어난 일을 그대로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애완동물 때문에 예배 참석을 못한다는 문제를 획일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신자 개개인이 양심적으로 잘 생각하되, 애완동물 때문에 예배를 빠지게 될 때, 동물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는 심각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으며, 제1계명을 어길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나아가 애완동물이 자신의 신앙에 큰 방해가 된다면, 애완동물을 키우는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도 있다. 물론 애완동물만 아니라 그 어떤 것이라도 신앙에 지장을 주는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항상 고려해야 한다.
동물을 위해서 축복할 수 있을까?
어떤 교인은 동물을 위해 축복해 달라고 한다. 과연 동물을 축복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했지만, 2022년 10월 15일 오전 11시 성공회대학교 주최로 반려동물과 드리는 예배가 있었다. 이 예배에서는 반려동물 축복식이 있었다. 2023년 5월 6일(토) 오후 1시 대한성공회 분당교회에서 반려동물 축복예배가 있었다.
천주교는 반려동물 축복예식을 말한다. 그들은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Assisiensis (1182년-1226.10.3.))가 인간에게는 자연과 동물을 사랑할 의무가 있다고 한 말에 의거하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동물축복예식 지침” 712항에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섭리대로 많은 동물들은 인간생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어떤 것은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어떤 것은 사람에게 위로가 되기도 하며, 어떤 것은 인간의 양식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적절한 기회에, 예컨대 어떤 성인 축일에 동물들을 축복하는 관습이 있다면 이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표명한다.
그러나 동물을 종교적으로 축복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동물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을까?
동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떤 내용의 기도냐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농촌에서 가축을 키워 생계를 이어가는 교인이 자신의 가축을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목회자 역시 그 교인의 가축을 위해 기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 이때 기도의 내용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과는 본질상 다르다. 이때의 기도는 소유, 직장, 재산을 위한 기도이다.
애완동물의 경우는 애매하다. 이 부분 역시 획일적으로 생각하기보다 신자 개개인이 잘 판단할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과연 애완동물을 위한 기도가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안녕,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선에 일치하는지를 잘 생각해야 한다(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184문답). 목사나 다른 교인에게 자신의 애완동물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삼가야 할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83문: 우리는 누구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답: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를 위해,1) 위정자들과2) 목회자들을3) 위해, 우리 자신과4) 우리 형제들5) 뿐만 아니라 우리의 원수들을6) 위해, 살아 있는7) 혹은 앞으로 살게 될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8)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나9) 죽음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됩니다.10) 1) 엡 6:18; 시 28:9 2) 딤전 2:1,2 3) 골 4:3 4) 창 32:11 5) 약 5:16 6) 마 5:44 7) 딤전 2:1,2 8) 요 17:20; 삼하 7:29 9) 삼하 12:21-23 10) 요일 5:16 184문: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답: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1) 교회의 안녕과2) 우리 자신과3)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4) 그러나 무엇이든지 불법적인 것을 위해 기도해서는 안됩니다.5) 1) 마 6:9 2) 시 51:18; 122:6 3) 마 7:11 4) 시 125:4 5) 요일 5:14 |
동물 장례식?
2024년 현재, 애완동물 장례식장이 전국에 70여 곳 이상 설립 운영 중이다. 심지어 애완동물을 화장한 뒤 유골로 납골당을 만든다든지 메모리얼 스톤(memorial stone)을 제작해서 주인에게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29] 상술(商術)에서 기인한 발상이다.
이런 문화로 인해 교인이 자신이 키우던 애완동물이 죽었을 때 장례식을 해도 되는지 질문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목회자에게 장례식 집례를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애완동물을 반려동물로 생각하는 문화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만들었다.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애완동물이 죽었을 때 슬플 수 있다. 수년을 기르던 동물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다. 애완동물이 아니라 가축으로 키우는 소나 돼지가 죽어도 여러 가지 이유로 다양한 감정이 생길 수 있다. 그렇기에 슬픔을 해소하는 일은 할 수 있다.
다만 동물의 죽음 때문에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까지 이르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 동물이 우상이 되지 않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인이 동물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동물을 위한 장례식은 교회 사역의 범주를 벗어나는 일로서, 이를 교인이 교회에 요청하는 것은 부당하다.[30] 교회는 동물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는 동물을 위해 사역하는 기관이 아니다.
참고로, 개혁주의 교회는 신자의 장례식조차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개혁교회는 장례가 교회의 일이 아니라 가족의 일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장례식은 교회가 해야 할 예식이 아니라 유가족의 일이라고 보았다. 그 이유는 사망자는 사망과 동시에 교회의 회원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도르트 교회정치(1619년) 제65조는 “교회의 공식적인 장례 예배는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목사와 장로가 유족의 초청으로 장례식을 주관한다고 할지라도 주일 공예배에서 선포되는 설교와 같은 식의 설교는 금지하였다. 이때 목사가 전하는 것은 설교라기보다는 일종의 위로와 권면이나 교훈이라고 하였다. 도르트 교회정치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개혁교회(해방파) 질서(1982년판)에는 제71조에서 “장례 예배는 없음”이라는 제목으로 “장례 예배는 드리지 않는다.”라고 명시되어 있으며, 캐나다 개혁교회 질서에는 제65조에서 “장례식은 교회적인 사안이 아니라 가정 사안이며, 그러므로 그에 맞게 행해져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장로교회에서도 비슷하다.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장례’와 관련한 조항을 표현할 때, ‘죽은 자의 매장에 관하여’(Of the Burial of the Dead)라고 표현할 정도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결혼의 경우 결혼 예식에 관하여(Of the Solemnization of Marriage)라고 표현하는 것에 반해 ‘예식’(Solemnization)이라는 표현은 전혀 없고 단지, 죽은 자의 매장에 관하여(Of the Burial of the Dead)라고 되어 있다. 또한 이 조항에 있는 내용을 보면,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시신은 매장하는 날에 집에서부터 공적으로 정해져 있는 매장지까지 정중하게 옮겨가고 다른 의식 없이 즉시 묻는다.”라고 되어 있을 정도다.[31] 사람에 대해서도 이러할 진데, 동물에 대해 장례식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동물이 죽었을 때 그리스도인은 세상법(동물보호법 제46조, 폐기물관리법 제2조, 제65조)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되, 장례식이나 신앙적인 의식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동물을 대할 때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비춰볼 때 맞지 않기 때문이다.
2024년 현재, 동물의 사체는 생활폐기물에 해당하여 지방자치단체의 조례로 정하는 바에 따라 생활쓰레기봉투 등에 넣어 배출하면 생활폐기물 처리업자가 수거하여 처리한다. 동물병원에서 죽은 경우 의료폐기물로 분류되어 동물병원에서 자체적으로 처리하거나 폐기물처리업자 또는 폐기물처리시설 설치·운영자 등에게 위탁해서 처리한다. 또한 동물 사체는 함부로 매장할 수 없다. 감염이나 토양 오염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한편, 한국반려동물산업경제협회 동물장묘분과 전문위원인 전용인 씨는 2023년 6월 15일 국회의원회관 제9간담회의실에서 열린 ‘반려동물 장묘업 실태 및 활성화 토론회’에서 현재 반려동물 사체 처리 방법 중 합법적인 방법은 생활폐기물 매립, 의료폐기물 소각, 장묘업체 화장, 수분해장이 있는데 이 중 생활폐기물 매립 방법은 삭제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더불어 장묘업 활성화 방안으로 동물장례 의무화를 제안했다.[32] 이러한 주장은 애완동물을 ‘반려동물’로 이해하는 인식 변화에 기초한다. 인식의 변화와 여론의 변화가 결국 법의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측면에서 앞으로 어떤 법개정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앞으로 이러한 변화가 있더라도 동물 장례가 하나의 의식(심지어 예식)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동물신학?
성경시대에는 물론 교회 역사에는 항상 이상한 가르침과 거짓 사설이 등장했다(신 13:1-3; 18:22; 렘 5:31; 14:14; 23:25-26; 슥 13:2; 마 24:24; 벧후 2:1; 요일 4:1). 20세기 이후에는 해방신학, 여성신학 등이 등장했다. ‘동물신학’이라는 것도 등장했다.
잉글랜드 국교회 사제이자 신학자이면서 옥스퍼드 동물윤리센터(Oxford Centre for Animal Ethics)의 설립자인 앤드류 린지(Andrew Linzey, 1952년~현재)는 다양한 저술을 통해 ‘동물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동물권』(Animal Rights: A Christian Perspective, 1976), 『동물신학』(Animal Theology, 1994)이라는 책을 내었고, 그의 저서 가운데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동물신학의 탐구: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원제: Creatures of the Same God, 장윤재 옮김, 대장간, 2014)이 있다.
앤드류 린지는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동물의 의미를 반대하며 동물권(animal rights)이란 용어 대신 ‘신적 권리’(theos-rights)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어떤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동물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린지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고 그 차이를 이성적 능력의 유무에 기초하여 이성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학을 인간중심주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린지는 인간중심주의적 창조론에 반대하면서 동물권을 주장한다. 동물에게 권리가 있으며, 그 권리의 원천은 하나님이라고 한다.[33] 린지에게 동물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대상으로서 인간과 동일한 가치를 가진다.[34]
린지는 동물을 물건이나 사물이 아닌 인간의 ‘동료 피조물’(companion)이라 주장하며, 동물과의 실제적인 평화를 이루기 위해 식습관조차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린지는 동물을 지배와 다스림의 대상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이며 인간의 동료 존재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물에게 ‘반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맞지 않다. 하나님은 공중의 새와 들짐승을 먹이시는 자비로우시고 전능하신 분이지만(마 6:26), 동물에 대한 다스림의 의무(창 1:28)와 동물을 먹을 수 있는 권한(창 9:3)을 사람에게 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동물에 대한 권리를 가지셨다는 말은 성경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35]
앤드류 린지는 동물 성경과 동물 예전(禮典)까지 도입하자고 주장한다.
앤드류 린지의 책을 번역한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 장윤재 교수는 “무지개의 하나님, 푸줏간의 그리스도, 그리고 동물신학의 탐구”(신학사상, 171 [2015]: 67~104)라는 논문에서 린지의 동물신학을 소개하고 신학적 타당성을 개진한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김진혁 교수는 미국 루터교신학교 실천신학 교수인 앤드류 루트(Andrew Root)가 쓴 『강아지가 알려준 은혜』(서울: 코헨, 2020)[36]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나는 하느님의 피조물, 개입니다.”라는 제목을 달았다.[37] 이 서평에서 김 교수는 “‘개는 인간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다’ 혹은 ‘개는 원죄가 없기에 구원의 은혜를 받을 대상이 아니다 라는 식의 주장은 인간중심주의에 오염된 신학이다’”라고 주장한다.[38] 또한 하나님이 모든 동물을 사랑하시고, 또 하나님은 사랑하는 그 어떤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분이시기에, 확언할 수 없다 하더라도 천국에서도 영적인 존재인 개를 볼 수 있다고 믿을 이유가 있다고 주장한다.[39]
안타깝게도 이렇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전개하는 이들이 있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
동물에 구원이 있다느니, 동물도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느니 하는 말이 없다면 굳이 이런 주제를 다룰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다뤄야 하는 현실을 우리가 살고 있다. 이런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 시대를 살고 있고, 이런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지적하면 비판적이라는 비난을 듣는 시대를 살고 있다. 분별력이 필요한 시대다.
동물보다 사람을
그리스도인은 동물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 인해 신앙이 왜곡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동물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일이 결코 발생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동물에 애정을 쏟기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족과 이웃을 더 사랑해야 한다(마 22:40).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치를 넘어서는 동물 사랑은 신앙에서 벗어난 삶이다. 세상 사람들이 자녀를 키우기보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데서 만족을 얻으려는 모습을 그리스도인은 본받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서 동물과의 애착에 힘을 쏟기보다는,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며(창 1:28), 가족을 사랑하고(딤전 5:8), 성도의 교제에 더욱 힘쓰고(시 133; 롬 12:15; 고전 12:26),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마 22:39).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은 동물도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대리 통치자(vice-regent)로서 사람은 동물을 포함한 피조물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게 돌보고 다스려야 한다(창 1:26, 28). 그렇기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을 학대하거나 괴롭혀선 안 되며, 하나님이 피조물을 기뻐하시고 아끼시는 것처럼 동물들을 대할 의무가 있다(참고. 욥 38:39-39장; 시 104장; 욘 4:11). 피조 세계에서 살아가는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고 기뻐하며, 생명을 잘 보존하고, 혹 식용을 위해 이용할 때도 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40] 동물을 학대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고, 세상법도 금하고 있다(동물보호법 제10조).
<미주>
[1] 2020년 동물보호 국민의식조사.
[2] 대한민국 법률 동물보호법은 반려동물의 종류를 농림축산식품부령으로 정하고 있다. 법으로 규정한 종류와 실제 사람들이 키우는 반려동물의 종류는 다를 수가 있으므로 일상생활에서 반려동물은 이를 넘어서 다양한 동물에게 사용할 수 있다.
[3] 이승구, 『기독교세계관이란 무엇인가?』(서울: SFC, 2004), 125; John Murray, “The Origin of Man,” in Collected Writings of John Murray, vol 2. (Edinburgh: The Banner of Truth Trust, 1977), 박문재 역, 『조직신학 Ⅱ』(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1), 14; Anthony A. Hoekema, Created in God’s Image (Grand Rapids: Eerdmans, 1986), 류호준 역, 『개혁주의 인간론』(서울: CLC, 1990), 25.
[4] Hoekema, 『개혁주의 인간론』, 360; Murray, 『조직신학 Ⅱ』, 33.
[5] 김의원, 『창세기 연구: 문예접근법에 따른 창세기 연구』(서울: CLC, 2004, 20132), 80.
[6] 이신열, “동물”, 『개혁신앙으로 시대읽기』, 황원하 편집 (서울: 담북, 2023), 203.
[7]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동물 장례에 대한 질의’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 제74회 고신총회 보고서, 125.
[8] Murray, 『조직신학 Ⅱ』, 13.
[9] Robert L. Reymond,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Nashville: Thomas Nelson, 1998), 416; Murray, 『조직신학 Ⅱ』, 15; Gordon J. Wenham, Genesis 1-15, WBC 1 (Waco: Word, 1987), 박영호 역, 『창세기 1-15』(서울: 솔로몬, 2006), 126, 128; William J. Dumbrell, Covenant and Creation: A Theology of Old Testament Covenants (Nashville: Thomas Nelson, 1984), 최우성 역, 『언약과 창조: 구약 언약의 신학』(서울: 크리스챤서적, 2001), 53; 김의원, 『창세기 연구: 문예접근법에 따른 창세기 연구』(서울: CLC, 2004, 20132), 64;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서울: 생명의 양식, 2009), 70-75,
[10]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권수경, 이상원 역, 『조직신학 (상)』(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0), 393; Murray, 『조직신학 Ⅱ』, 15.
[11] Wenham, 『창세기 1-15』, 185; Murray, 『조직신학 Ⅱ』, 19; 기동연, 『창조부터 바벨까지』, 58.
[12]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동물 장례에 대한 질의’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 제74회 고신총회 보고서, 122.
[13] 이런 관점으로 ‘국기에 대한 경례’ 문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잊혀진 역사,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한 전통” https://cafe.daum.net/hgpch/LENW/153
[14]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동물 장례에 대한 질의’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 제74회 고신총회 보고서, 142.
[15] 손재익, 『십계명, 언약의 10가지 말씀』(서울: 디다스코, 2016), 276.
[16] 강영안, 『강영안 교수의 십계명 강의』, 218. 슈바이처는 ‘생명에 대한 경외’라는 그의 고유한 철학이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7] 손재익, 『십계명, 언약의 10가지 말씀』, 277.
[18] 손재익, 『십계명, 언약의 10가지 말씀』, 234.
[19]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동물 장례에 대한 질의’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 제74회 고신총회 보고서, 139.
[20] 반려동물을 뜻하는 companion animal은 서구에서 1970년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외국에서 말하는 companion animal은 친구동물이라는 의미이며, 개는 사람의 오래된 친구라는 의미로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단어였다.
[21] 지적장애인이나 신자에게서 태어난 영아의 죽음의 경우는 논외로 한다.
[22] 손재익, 『성화, 이미와 아직의 은혜』(서울: 좋은씨앗, 2019), 41-44.
[23] 안보윤은 이에 착안하여 「바늘 끝에서 몇 명의 천사가」라는 단편을 썼고, 이 단편은 2023 제68회 현대문학상 수상 소설집에 실려있다.
[24]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331842
[25]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4368
[26]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331842
[27] https://www.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196501
[28] http://mhdata.or.kr/mailing/Numbers225_240123_A_Part.pdf
[29] 이 정보는 우리교회에 반려동물학과에 재학중인 고등학생을 통해서 들은 내용이다.
http://www.rememberpark.kr/kor/main/
[30]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동물 장례에 대한 질의’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 제74회 고신총회 보고서, 139.
[31] 손재익, 『특강 예배모범』(서울: 흑곰북스, 2018), 332.
[32] https://www.dailygaewon.com/news/articleView.html?idxno=13799
[33] Andrew Linzey, Creatures of the Same God: Explorations in Animal Theology (Lantern Books, 2009), 장윤재 옮김,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 동물 신학의 탐구』(서울: 대장간, 2014), 64-65.
[34]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동물 장례에 대한 질의’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 제74회 고신총회 보고서, 132.
[35]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동물 장례에 대한 질의’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 제74회 고신총회 보고서, 141.
[36] Andrew Root, The Grace of Dogs: A Boy, a Black Lab and a Father’s Search for the Canine Soul (New York: Convergent Books, 2017), 정의원 옮김, 『강아지가 알려준 은혜』(서울: 코헨, 2020).
[37] 김진혁, “나는 하느님의 피조물, 개입니다”, 『신학의 영토들: 서평으로 본 현대 신학』(서울: 비아, 2023), 738-772.
[38] 김진혁, “나는 하느님의 피조물, 개입니다”, 743.
[39] 김진혁, “나는 하느님의 피조물, 개입니다”, 751.
[40]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동물 장례에 대한 질의’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보고서, 제74회 고신총회 보고서, 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