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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만난 불교(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제3장 비전秘傳 불교도, 합리적 불교도, 낭만적 불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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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미국불교 (4)
북가주 만불사 중국불교계 지도자 선화선사
1960년대에 미국에서 활동한 스님들은 일본 스님들이 많았다. 그러나 일본 스님들 못지않게 많은 활동을 하고 성과를 이룬 스님 중의 한 분이 중국인 선화선사이다. 나는 미주한국불교계 스님들에게는 선화선사가 좋은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계율을 잘 지키는 율사였고, 경전에 깊은 이해가 있었으며, 원력을 크게 새워 그것을 실현시켰다. 선화선사는 최근 한국에서는 선화 상인(宣化 上人, 1918~1995)
으로, 능엄경 책 저자로 많이 알려져 있다.
1962년 선화宣化선사 는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선종, 천태종, 율종, 밀교, 정토종의 다섯 종파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미국 불교활동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이 시기는 1959년에 도착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을 한 스즈키 순륜과 1962년에 미국에 입국한 일본의 야스타니 스님과 비슷한 시기이다. 만불사가 있는 유키아는 미국의 대표적 불교도시로 이 안에는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와 대학교가 있다.
선화선사의 이력
선화 선사는 1918년 중국의 동북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11살 때 동네 근처 들판을 걸어가다가 어린 아이의 시체가 짚에 덮여 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는 그때까지 시체를 본 적이 없었으므로, 자기 어머니에게 저 시체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는 모든 인간은 언젠가는 죽게 된다고 말하였다. 선화는 죽음에서 탈출하는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우연히 그곳을 방문 중이던 한 낯선 사람이 “오직 한 가지 방법은 도를 수행함으로써 마음을 깨우치고 내면의 자아를 파악하는 길뿐이다”라고 말했다. 선화는 그때 승려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기뻐하면서도, 아버지와 자신을 돌보기 위해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12살에 진정한 영적 스승님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는데 부모님의 허락을 받았다. 그는 15살에 처음으로 학교를 갔다. 그리고 16살에 글을 읽지 못하고 불교 가르침을 배우기를 원하는 동네사람들을 위해 불경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는 성실할 뿐만 아니라 정확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유교 사서오경을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동양의학, 음양오행설, 복술, 관상, 여러 큰 종교들의 서술들을 공부하였다. 그는 17세에 혼자 교사 역할을 하며 무료 학교를 설치하여, 빈곤 아동과 어른들을 30여명을 가르쳤다. 그의 나이 18세에, 2년 반의 학교 교육만 받고, 병든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학교를 떠났다
그의 부모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는 효행의 본보기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수행승의 서약을 하고 어머니의 묘 곁에 있는 오막살이에서 3년간 앉아서 명상하였다. 그는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않았고, 절대로 누워서 자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동네 사람들은 선화의 오두막에서 환한 빛이 비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물통을 들고 묘소로 달려갔지만, 불이 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곳에는 오로지 선화가 조용히 앉아서 깊은 명상에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동안 법화경을 읽고, 그는 깊은 깨달음을 경험하였다. 그 뒤에 앉아 참선하면서, 육조 혜능 스님(638–713 CE)의 비전을 가졌다. 이 비전에서 혜능 스님이 그를 방문하여, 서양 세계로 불교를 가져가야 한다는 미션을 주었다.
선화 상인은 삼년상을 마치고 챵쯔선사 (상지 常智 또는 ChangZhi)를 은사로 출가하여, “삼연사 三緣寺” 또는 “Three Conditions Monastery”에 사미승으로 들어갔다. 챵쯔선사는 이어서 그에게 “Jinding Pilu Chan lineage”의 법을 전해주었다. 그 동안, 선화 상인은 참선 뿐 아니라 불경 전통공부와 중국불교 주요 종파의 교리도 통달하였다.
챵바이 산맥에서 홀로 참선 수행한 후, 1946년 선화 상인은 중국 남쪽 지방으로 긴 여행을 시작했다. 1947년 중국 불교 명산의 하나인 푸퉈산(普陀山)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1948년 2,000 마일이 넘는 긴 여행을 하여, 선화 상인은 남화사(南華寺)에 도착하여, 중국에서 가장 널리 존경받는 깨달은 선사로 알려진 허운 화상 (虛雲 和尙)에게 절을 올렸다. 허운 선사로부터 그의 깨달음을 확인하는 전심을 받고, 그 후 위앙종 법맥을 잊는 더욱 공식적인 전수를 받았다.
그때의 일을 선화 대사는 시로써 표현했다.
고매한 대사께서 나를 보고 말하였다. “이와 같노라.”
나는 고매한 대사를 보고 확인했다. “이와 같습니다.”
고매한 대사와 나는 이와 같이
온갖 존재가 또한 이와 같음을 언명하는 바이다.
1949년 선화 상인은 중국을 떠나 홍콩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참선을 가르치고, 불경을 강설 그리고 불경 인쇄를 지원했다. 또한 그는 불 보살들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지원하고, 중국 본토로부터 승려들의 망명을 도왔다. 그는 또한 서낙원사 (Western Bliss Garden Monastery), 불교 강당 (the Buddhist Lecture Hall), 자흥 선사 (Flourishing Compassion Monastery)를 짓고, 설립하였다
1959년, 고매한 스승 허운 대사께서 중국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때 대사의 나이는 120살이었다. 선화 대사는 홍콩을 떠나 먼저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서 그곳 대학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다가 미국으로 왔는데, 1958년에 중국인 제자들은 그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불교 강의실’을 마련해 놓았다.
그는 1962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미국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와 ‘조건’이(즉 인연이) 맞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를 끈질기게 기다리면서. 그는 처음에는 중국인들 사이에서만 알려졌으나, 점차로 도를 깨친 대사가 중국인 동네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미국인들 사이에 퍼지면서, 중국어를 전공하는 대학원 학생을 비롯한 미국인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대사는 그때 웨이버리 플레이스 예전 도교道敎 사원 4층의 ‘불교 강의실’ 작은 방에서 생활하며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1968년 여름에 그가 최초로 96일에 걸친 능엄경 법회를 연 곳이다.
샌프란시스코의 그룹이 그 크기와 다양성이 커지면서, 그 이름도 바뀌게 되었다. 먼저Sino-American Buddhist Association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 후, 1984년 법계불교총회(法界佛教總會) 또는 Dharma Realm Buddhist Association로 다시 이름을 바꿨다. 1970년 차이나타운으로 옮긴 선화상인은 새로이 금산사를 샌프란시스코 미션 디스트릭에 설립하였다. 1975년 선화상인은 엘에이에 첫 분원 사찰인 금륜사를 설립하였고, 1976년 첫 본사인 만불성성을 캘리포니아 우키아 도시에 설립하였다.
1968년 여름, 대부분 대학생으로 이루어진 그룹을 집중적으로 수행 트레이닝을 시작하였다. 선화 상인은 이들 중 미국 여자 둘과 남자 셋을 사미승으로 받아들인 후 1969년 이들을 구족계를 대만으로 보내 대만의 승가 커뮤니티를 놀라게 하였다. 이들이 그때 당시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비구계와 비구니계를 받은 승려들이였다.
그들이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삭발한 머리에는 계를 받을 때면 으레 하는 예식인 향을 피운 흔적이 다섯 군데 있었으며, 정통 중국 승려들이 입는 당나라 풍인 갈색의 펄럭거리는 승복을 입고 있었다. 그 이후로 20년 동안 미국에서는 법계불교총회 센터에서 구족계 수계식이 열렸다.
그 이후, 선화 상인은 수백명의 동양인과 서양인들을 비구계와 비구니계를 받도록 그들의 수행을 총괄하였다. 이들 중에는 선화 상인과 공부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캘리포니아로 온 사람들을 포함한다. 지금 이들 승가 제자들은 선화 상인과 제자들이 설립한 미국, 캐나다, 호주 그리고 여러 아시아 국가들의 23개의 사찰과 선원에서 가르치고 지도한다.
선화선사는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미국인 제자로 유명한 스님은 행주스님이다. 그는 선화선사 스승이 1880년대 허운대사가 세 걸음에 한 번씩 절을 하며 6년을 걸쳐 중국을 가로지르는 9,600 킬로 미터 순례을 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행주 스님은 1973년 가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까지 절을 하며 순례를 하였고, 행요 스님은 음식과 짐을 메고 그 뒤를 따랐다. 9달에 걸쳐 1,600 킬로미터 순례를 완성하였는데 이 순례를 하는 동안 신문과 텔레비전에 자주 기사와 뉴스가 실렸다. 한인 불교커뮤니타와 관련된 제자는 현재 로스 엔젤레스에서 활동하는 베트남 스님인 영화선사이다. 베트남 스님이지만 로스엔젤레스 지역의 위산사와 노산사를 거점으로 한인타운에서 설법도 하고 수행지도를 한다. 또 한국에 가서 수행지도를 한다. 한국인 샤나 한 등 신도들이 이 스님을 보좌한다.
애초부터 선화선사는 승가 계율이 영적인 생활의 토대로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이 점이 반문화 세대의 무절제한 태도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많은 제자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0년 겨울, 선화 대사와 중미中美불교연합은, ‘불교 강의실’이란 원래 명칭을 변경해, 샌프란시스코의 미숀 디스트릭트에 있는 옛날 매트리스 공장이었던 큰 붉은 벽돌집을 수리하여 금산사원(Gold Mountain Monestry)이라 명명했다. 금산金山은 중국에 있는 사원의 이름일 뿐 아니라, 초기 중국인 이민자들이 미국을 칭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금산은 매우 전통적인 중국 사원이었다. 바로 여기에서 1972년 6월 7일, 선화 대사와 미국인 비구 다섯 명은 미국에서 최초로 수계식을 거행했는데, 108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마하밤사Mahavamsa(스리랑카의 대 연대기)에 의하면 “그 나라의 남자가 그 나라에서 난 사람에 의해 자기 땅에서 계를 받기 전까지는, 불교가 그 나라에 진정으로 뿌리를 내렸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마하나마 왕이 말했다고 한다. 이제 그 요건이 충족된 셈이었다.
1975년 선화상인은 로스 엔젤레스에 첫 분원 사찰인 금륜사를 설립하였고
1976년, 중미불교연합은 캘리포니아 유키아 시의 외곽에 있는 237에이커(약 1km²) 넓이의 멘도치노 주립병원(범죄성 정신병자를 치료하던 곳)을 구입했다. 그들은 그곳을 ‘일만一萬의 부처 도시’라고 불렀다. 그들은 5미터가 넘는 높이의 관세음보살상을 명상실에 세우고, 캘리포니아 주 최고 보안감옥인 멘도치노의 280개 방을 여래사원(Tathagata Monastery)의 스님들을 위한 방으로 바꾸었다. 또 그 맞은편에 있는 건물은 ‘기쁘게 베푸는 수도회(Joyous Giving House Convent)’가 되었다. 그들은 또한 ‘법계法界대학(Dharma Realm University)’도 세웠는데, 이 대학은 초종파超宗派 교육기관으로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하거나 중국 고전을 공부하거나 상관하지 않고 불교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금산에서는 중국 불교의 다섯 개 종파가 다 가르쳤다. 율종은 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250개의 계율과 재가신도의 오계를 강조했다. 천태종은 경전 공부와 암송을 중요시했다. 밀교파는 만트라와 다라니의 활용을 포함시켰다. 정토종은 누구나 아미타불을 염송하는 사람은 정토에 재생한다는 믿음을 근거로 하여 염불을 통해 수련시켰다. 선종은 좌선과 공안을 사용했다.
서양인들은 선과 정토사상의 융합에 대해 가끔 놀라곤 했다. 이 두 가지 방식은 논리적으로 모순되게 보였기 때문이다. 정토는 믿음과 ‘타력他力’에 의한 수행이고, 선은 큰 의심과 ‘자력自力’에 의한 수행이었다. 그뿐 아니라 정토교리는 불교보다는 그리스도교에 더 가까운 듯이 보였다. 한 제자가 선화 대사에게 말했다. “마치 동화 같아요. 단순히 아미타불에게 의지하는 수행으로 우리의 문제가 저절로 풀리거든요.”
그러나 중국 선의 대가들에게 일심一心으로 하는 아미타불 염불수행은 수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토는 곧 자신의 본래성품本來性品임을 깨닫게 해 주는 유익하고 신속한 방법이었다. 선과 정토사상은 모순된다기보다는 서로 보완관계였다. “염불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망상을 녹여 없앰으로써 염불하는 사람이 눈처럼 순수하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선화 대사는 미국 제자에게 말했다. 금산의 수련에는 자주 아미타불의 이름(나무아미타불; namo-om-i-t'o-fa)을 중국식으로 노래하듯이 암송하는 과정이 포함되곤 했다.
‘금산사원’과 ‘일만 부처의 도시’에서의 생활은 모든 미국 불교 수행처 가운데서도 가장 엄격한 수행 생활이었다. 비구와 비구니는 따로 떨어져서 살며 계율(비나야)을 철저하게 지켜야 했다. 그들은 아침 3시 40분에 일어나서 절, 염불, 예불, 명상, 어학공부(표준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유럽 언어)와 일을 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들은 채식주의 음식을 하루에 한 끼 먹었고, 많은 문하생들이 밤에도 명상 자세로 잠을 잤다. (Heng Lai 비구 스님이 말했다. “처음 한두 해는 다리가 무척 아파요. 그렇지만 참 좋지요. 머리가 밤새도록 깨끗하거든요.”) 그들이 “쓰디 쓴 수행(bitter practices)”이라고 이름 붙인 이 수행은 선화 대사 밑에서 하는 공부의 중요한 일부였으며, 선화 대사는 그 가치를 “쓰디 쓴 수행, 달콤한 마음”이라고 간결하게 표현했다. 처음에는 불가능하게 보였지만, 그 수행을 거친 사람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수행이 퍽 자연스럽게 되는 체험을 했다.
다시 설명하면 선화 상인은 모든 승가의 출가인 제자들로 하여금 오후 불식하게 하였고, 본인도 이를 지켰다. 또한 채식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승가의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금욕 수행인 일일 일식과 장좌불와를 권장하였다. 그는 그의 승가 제자들로부터 엄격한 청정한 생활을 기대하였고, 일반인 제자들에게는 평신도 오계를 충실히 지키도록 권장하였다.
선화 상인은 불교의 정법을 서양에 전파한다고 굳게 결심하였고, 중국에서 이미 널리 퍼진 타락한 수행이라 판단되는 것들은 명확히 거부하였다. 불건전한 문화에 결착된 미신적인 의식 절차와 수행자들에게 유용하고, 상식적인 진실하고, 불경에 기반을 둔 수행을 구별하여 제자들을 이끌었다.
선화 대사는 불경 공부를 강조했으며, 일만 부처의 도시에서 1년 내내 매일 경전 강의를 했다. 어떤 때는 상급반 문하생들이 강의를 하기도 했는데, 중국어와 영어로 동시에 통역되었다. 금산의 비구, 비구니 스님들은 번역 사업도 활발히 했다. 화 대사가 1970년에 설립한 ‘불경번역회’는 모범적인 번역본을 다수 발행했다. 이 번역은 학구적이고 정확함에 있어서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 번역이 적어도 4개의 다른 위원회를 거치면서 검열되고 또 검열되었기 때문이다. 번역회의 목적은 삼장(Tripitaka) 전부를 영어와 유럽에서 쓰는 중요한 언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꼭 필요할 때는 영어로 이해하고 말할 수 있었지만, 선화 상인은 거의 모두 중국어로 설법하였다. 그의 목표는 모두 함께 도와 불경이 여러 언어로 번역되도록 서로 도와 그의 희망을 이룰 수 있도록 서양인 제자들에게 중국어를, 중국인 제자들은 영어를 배우도록 권장하였다. 현재까지 선화 상인이 설립한 the Buddhist Text Translation Society은 수 백 권의 번역물이 출판되었고, 이에는 선화 상인의 강설이 포함된 여러 주요 대승 불경도 포함되어 있다.
교육자로서 선화 상인은 쉴 틈이 없었다. 만불성성에서, 그는 승가와 평신도들을 위한 공식적인 수행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 법계불교대학을 세웠다. 1968년부터 1990년 초까지 선화 상인은 직접 하루에 적어도 한번씩 불경 강설을 했고, 널리 여행하며 여러 법문, 설법 투어를 하였다. 세계의 여러 불교인들의 요청에 따라, 선화상인은 홍콩, 대만, 인도, 동남아, 유럽으로 대표단을 이끌어 불법을 펼쳤다. 그는 또한 미얀마, 태국, 말레이지아, 호주 및 남미에도 방문하였다. 그가 방문한 모든 곳에서 그의 존재는 많은 대중 수의 신앙인들을 따랐다. 그는 또한 많은 대학교와 학회에도 자주 초청되어 강설 하였다.
전통적인 불교 가치와 혁신적 교육을 융합시킨다는 그의 비전은 법계불교총회(法界佛教總會)를 고무하여 불교도뿐 아니라 더 광범위한 미국 사회에도 봉사하도록 학교를 짓고 또 교육가를 배출하도록 했다. 선화선사는 종교 간 대화를 크게 강조하기도 했는데, 이 점은 법계불교총회(Dharma Realm Buddhist Association. 法界佛教總會)가 현재 타종교인 및 자연과학 분야의 비판적 사상가들과 더불어 추구하고 있는 목표이기도 하다.
선화 상인은 여러 다른 불교 커뮤니티 사이에 다리들을 짓는 선구자였다. 오랜 세월 동안 나뉘어진 대승불교와 소승불교 사이를 치료한다는 소망으로, 그는 유명한 소승불교 승려들을 만불성성으로 초청하여, 양쪽 전통에서 함께 가지고 있는 비구계와 승가 계율의 전수의 의무를 나누게 하였다. 그는 종교들 사이에 존경을 주장하고, 종파를 초월한 대화를 활발히 촉진했다. 그는 여러 종교 전통들의 공통성 중에서도 특히 바르고 자비로운 행동을 강조하였다. 1976년 그의 친구인 난징의 카톨릭 대주교이며 대만 카톨릭 푸런 대학 총장인 Paul Cardinal Yubin과 함께 세계 종교를 위한 기관에 대한 계획을 세워, 1994년 버클리에서 열매를 맺었다.
선화선사는 그의 긴 교화의 삶 동안 줄곧 동양과 서양 양편에서 제자들을 끌어들였다. 광범위한 문화•종교적 배경을 지닌 제자들은 현재 법계불교총회의 기관들에서 함께 살면서 협력하고 있다. 이 기관들에는 미국과 캐나다에 10개의 사원, 초•중등학교 한 곳, 법계불교
대학, 그리고 캘리포니아 버클리의 법계종교연구원法界宗教研究院이 포함되어 있다. 만불성성에는 계율을 지키며 사는 150명의 남녀 승려, 가족들, 그리고 미국, 유럽, 아시아 태평양연안에서 온 입주학생들을 포함하여 350여 명이 상시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환경은 아시아인과 서양인, 승가와 재가 사이의 직접대면 관계와 창의적 교류를 촉진해준다.
로스엔젤레스에서 선화 상인은 1995년 6월 7일 77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살아 있었을 때, 그는 아무 것도 갈망하지 않았고, 명성, 부 또는 권력을 찾지 않았다. 그의 한 생각과 모든 행동은 모든 중생에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마지막 지시사항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떠난 후, 원하는 만큼 여러 날 동안, 7일 또는 49일 동안, 너희는 화엄경과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외울 수 있다. 내 몸을 화장한 후, 남은 모든 것을 공기에 뿌려라. 나는 너희들이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원한다. 나를 위해 탑이나 기념비를 세우지 말아라. 내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이 왔으니, 내가 떠날 때,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 공에서 내가 왔으니, 공으로 돌아간다.”
최근의 법계불교대학교 소식
중국 임제종, 조동종, 위앙종, 법안종, 운문종 등 선가 5종의 법맥을 이은 허운선사(虛雲禪師)의 법손인 선화스님이 미국에 캘리포니아주에 설립한 법계불교대학(DRBU : Dharma Realm Buddhist University)이 WASC로부터 4년제 정규대학으로 정식인가를 받았다.
법계불교대학은 교내 뉴스를 통해 2018년 “4월 16일 WASC (Western Assocaition of Schools and College : 미국 서부교육연합회)로 부터 최대 6년간 인가자격이 인정되는 4년제 대학 인증을 받았다”고 밝혔다.
법계불교대학(DRBU)이 정식대학인가를 받음에 따라 티벳 쵸감 트룽파가 설립한 나로파대학과 서래대학에 이어 3 번째로 정식인가를 받은 불교대학이 등장했다.
이번 인증은 4년제 정식대학으로 필수적인 교육조건과 기준이 충족됐다는 것을 의미하며 해당 대학이 각 전공별로 국내외에서 더 많은 학생을 받아들일 수 있음을 뜻한다. 또 재학생들은 학자금 마련을 위한 연방대출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게 돼 우수 신입생 유치와 대학의 외형적 성장을 위한 기본조건이 갖추어졌음을 의미한다.
법계불교대학(DRBU)에는 현재 학부과정으로 리버럴 아츠칼리지 과정과 대학원과정으로 불교고전(Buddhist Classics MA)과정이 운영되고 있으며 전체 재학생은 학사과정 18명, 석사과정 16명 등 모두 34명이다. 하지만, 이번 4년제 정식대학 인가를 받음에 따라 학생수는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법계불교대학은 작고 강한 불교공동체 대학을 표방하며 1976년 선화상인에 의해 설립돼 운영되어 왔다. 이들은 일반적인 대학의 전공별 교육이 아닌, 불교전통의 자유주의 교육이념에 입각해 아시아 핵심 고전을 중점으로 한 고전읽기 교양수업을 특화해 운영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WASC의 4년제 정규대학 인가 심사는 매우 까다롭기로 정평이 나 있으며 한번 인가를 받았다고 영구적으로 학교운영이 가능한 것이 아니고 6년에 한번씩 재평가를 받아 다시 인가를 받아야 한다.
법계대학을 설립한 선화스님 혹은 선화상인(宣化 上人, 1918~1995)은 1959년 미국에 중미불교총회(법계불교총회의 전신)을 세우고, 1962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불교학당을 설립하여 불법을 전하기 시작했다.
1968년 시애틀 워싱턴대학 학생의 요청에 응하여 “능엄경 하계연수반”을 만들어 96일간의 강의와 연수를 실시해 많은 미국인이 귀의하여 수계를 받았으며, 그 가운데 5명의 미국인이 발심 출가하여 미국불교사상 처음으로 스님이 되었다.
1973년에는 국제역경원을 설립하여 역경의 인재를 양성하고 지금까지 1백여 종의 영어 불교서적을 출판하였으며, 스페인어, 베트남어로도 불교경전을 번역하여 출판하고 있다.
197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유키아에 만불성성(萬佛聖城)을 건립한 후 1976년 유키아에 법계불교대학을 설립했다.
선화 스님은 국내에서도 불광출판사가 펴낸 <능엄경 강설>과 <허공을 타파하여 마음을 밝히다> , <부처님 말씀 그대로 행하니> 등의 책이 번역되어 소개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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