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에 바나나를 올리게 된 사연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 무려 9km의 거리를 걸어서 통학하였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2시간이 넘었다. 무료함을 달래려고 유행가를 공책에 잔뜩 적어놓고 부르면서 걸어오곤 하였는데, 그때 남진의 ‘어머님’이라는 노래가 유행하였던 때가 있었다. 가사가 너무 좋아서 즐겨 불렀으며, 어머님의 회갑 잔치가 되면 부르려고 연습을 많이 하였다.
어머님의 회갑을 일 년 반 정도 남겨놓고 속이 불편하시다면서 대전에 있는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싶다고 하여 고향에 가서 어머님을 모시고 대전으로 왔다. 오던 길에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아들을 따라서 대전에 가서 병을 고치고 온다고 인사를 하면서 은근히 아들 자랑을 하기도 하셨다.
대전에 와서 그 당시 내과로 유명하여 내가 단골로 다니던 곳에서 진찰도 받고, 그 권유에 따라 위내시경 시설을 처음으로 갖추었다는 신경외과에 가서 내시경 진찰을 받았다. 그 내시경 검사 결과 악성종양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을 받고 눈앞이 깜깜하고 다리에 힘이 빠지는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은 의술이 발달하여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으나 그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겨우 몸을 가누고 어머님께서 눈치채지 않도록 억지로 태평한 표정을 짓고 병원을 나섰다.
당시에 대전천을 복개하여 지은 중앙상가와 홍명상가가 목척교의 좌우에 있었는데, 홍명상가 앞에 바나나를 팔고 있는 노점상이 있었다. 어머님은 처음 보는 과일에 호기심을 보이시며 한번 드시고 싶은 표정이 역력하였다. 얼마인가를 물어보니 한쪽에 800원이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에 쌀 한 되 값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호주머니를 뒤져보니 준비해서 가지고 왔던 돈을 모두 병원비에 쓰고 집에 돌아갈 차비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사드리지 못하고 문화동의 자취하는 집으로 모시고 올 수밖에 없었다.
집에 모셔두고 무너지는 억장을 감당할 수 없어서 혼자 보문산 골짜기로 들어가 한 시간을 울고 돌아왔다. 별다른 방법이 없어 소화제나 사서 시골로 가실 수밖에 없었다. 가난하고 고아나 다름없었던 아버지를 만나서 7남매를 낳고 키우시는 데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호강 한 번 못하시고 이제 살 만한 때가 되어 못된 병에 걸리신 것이다. 1년 남짓한 투병 끝에 회갑을 몇 달 앞두고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 아들은 남진의 노래 ‘어머님’의 가사에 나오는 ‘오래오래 사세요, 편히 한 번 모시리다’라는 노래도 부르지 못하고, 어머님은 불효한 아들의 효도 한번 제대로 못 받으시고 저세상으로 가셨다.
쌀 한 되 값의 바나나를 못 사들인 한이 가슴에 남아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15년 넘게 바나나를 입에 대지도 않았으며, 제사 때에 꼭 바나나를 사 가지고 제사상에 올렸다. 내가 불효하고 어리석음은 회갑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그때는 못 사드렸어도 일년 동안 살아계실 때 사서 가지고 갔더라면 이런 한은 남지 않았을 텐데 가신 뒤에 제사상에 올려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인가?
樹欲靜而風不止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子欲養而親不待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