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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8:1-7) 스테이크와 철판구이
오늘 읽은 이사야 18장 말씀중심으로 <스테이크와 철판구이> 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 스테이크와 철판구이는 불이나 열로 익혀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 불에 익히는 시간과 모습에서 차이가 나요.
제가 프린스턴에서 1년 머물 때에 일입니다. 프린스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속도로에서 빠져서 1번 국도로 나와야 하는데 1번국도 상에 스테이크 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분의 초대를 받아서 식사를 하는데 정말 거짓말 안하고요. 제가 고기량이 비교적 평균보다는 커요. 그런데 스테이크를 먹다, 먹다 다 못 먹고 남겨서 집에 가져갔더니 집 사람이 스테이크 사왔네 하더라고요. 제가 먹다, 먹다 정말 못 먹겠어서 남겨 갔는데 한 덩어리 새로 사온 줄로 아는 거예요. 그 두께와 크기가 이루 말 할 수가 없어요.
또 어떤 경험이 있는가 하면 한국에서 강남에 유명한 해물을 중심으로 하는 철판구이 집이 있습니다. 비싼 집이죠. 거기도 두서너 번 초대를 받아서 먹었는데, 스테이크를 익히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요리사에게 들은 건 아니고 저를 안내해 주는 분이 스테이크를 먹을 때 우리가 주문을 하면 웰던, 미디움, 레어, 미디움 중에서도 미디움 웰던도 있습니다. 그 때마다 다 불의 강도가 다르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미디움을 한다면 강한 불에다가 겉 표면을 빨리 익혀야 한다는 거예요. 웰던은 겉을 익힌 다음에 좀 약한 불로 그 열이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이 때 주의할 것은 뒤집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주 뒤집게 되면 육즙이 다 빠져나간다는 겁니다. 완전히 아래가 코팅이 될 정도로 익힌 다음에 육즙이 위에서 보글보글 일어나다가 그 일어난 육즙이 스며들면 뒤집어서 육즙을 안에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강남에 있는 철판구이 집을 갔더니 익히는 모습이 전혀 달라요. 요란하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하자면 촐싹거린다고 할까요? 칼을 돌려 대면서 이렇게 하고 하는데 그 작고 얇은 해물들을 익히는 시간이 짧아요. 해물은 더구나 살짝살짝만 익히면 되니까 요란합니다. 뒤집고 좀 갖다 댔다하면 배식을 해주고 하는데 분위기가 다릅니다. 그 크고 두꺼운 스테이크는 불에 넣어서 가만히 익도록 기다려야 합니다. 잘 익어가는 동안에는 다른 액션이 필요가 없는 거예요. 아무런 행동도 나타나지 않지만 스테이크는 익어가고 있는 거죠. 철판구이처럼 요란스럽게 칼을 두드려대며 챙챙 소리가 나고 놓자마자 뒤집어서 얹어주고 스테이크하고는 완전히 다르잖아요. 스테이크와 철판구이는 익히는 모습이 너무나 많이 차이가 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에도 그대로 이 경우가 비유적으로 적용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은 이사야가 구스, 지금으로 말하면 에티오피아입니다. 구스 나라에 대해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도 에티오피아 내시가 나오잖아요. 왕의 국고를 담당하고 있는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다가 이제 그것에 대한 설명을 빌립 집사님에게 듣지 않습니까? 그 구스에 대해서 지금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스가 B.C. 1000년경에서부터 시작해서 B.C. 715년경 지금 이사야가 예언을 하고 있을 이 당시에는 그 이집트인 애굽을 점령하여 다스리고 있을 때입니다. 애굽을 점령하여 다스리고 있을 때 역시 북 왕국과 아람이 앗수르에게 망했을 때 이제 남 왕국 유다 하나가 멸망하면 완충지역이 사라지면서 앗수르의 힘이 지금 구스와 이집트로 몰려올 기세입니다. 이 상황에서 구스가 궁여지책으로 자구책을 마련하느라고, 온 사방 인근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때에 남 왕국 유다에도 이 사신들이 왔던 것이에요. 그때 이사야가 이 사신들을 보면서 구스에 대한 예언을 합니다.
오늘 18장 2절을 보면 말입니다.
1절에는 “슬프다 구스의 강 건너편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여”라는 말이 나옵니다.
‘날개 치는 소리 나는 땅’이라는 것은 애굽이 습한 곳이 많다고 합니다. 나일강 지류들이 있어서 습한 곳에서 곤충들이 떼를 지어 다녔기 때문에, 날개 치는 곳이라고 말을 하고 이건 지금 비유적으로 앗수르가 남하해 오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서 군사를 모으는 것을 얘기한다고도 말을 합니다. 그런데 2절이 우리가 좀 이해하기 어렵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갈대배를 물에 띄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곧 시초부터 두려움이 되며 강성하여 대적을 밟는 백성에게로 가라 하는 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나일강 변에 왕골 있지 않습니까?
‘큰 갈대로 배를 만들어서 사방으로 사자를 수로로 보내는 나라여’ 여기서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본문에 맞게 해석이 되는 거예요.
‘민첩한 사절들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강이 나뉘어서 흐르는 땅’은 구스 본국을 말합니다. 큰 나일강이 있고 여러 가지 지류가 있는데 그 강이 나누어져서 흐르는 그 땅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장대하고 준수한 백성’ 이들은 구스 사람들을 말합니다. 흑인인데 그렇게 피부가 부드럽고 잘 생겼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에티오피아가 어떤지 모르겠어요. 식량난에 허덕이고 있지 않습니까? 기아에 빠져서 어려운 형편인걸로 알고 있는데, 하여간 그 당시에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그렇게 잘 생겼었던 모양이에요. 돌아가라는 겁니다. 돌아가는 이유가 뭡니까? 그렇게 지금 무서워하고 있는 앗수르는 남 왕국 유다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아예 끝장이 날 테니 염려하지 말고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예언은 또 앗수르의 침략이라고 하는 계기를 통해서, 구스가 하는 행동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신앙생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스가 어떤 모습인가를 확연하게 인식하기 위해서 그 기준은 또 누가 됩니까? 역시 남 왕국 유다의 히스기야 왕과, 그 왕의 인도를 받고 있던 유다나라 백성들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놓고 구스사람들의 행동을 보는 겁니다. 거기에 앗수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겹쳐서 삼각점을 통해서 볼 때, 우리 신앙인들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앗수르를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느껴지는 걱정거리를 앗수르로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 앗수르가 내 마음의 평강을 깨는 이유, 아니면 부담스러운 과제로 이건 꼭 해야 되는데 일이 안 되는 것들, 그리고 내 생애 행복을 위협하는 요소들, 가지가지 문제들, 짜증나게 하는 것들을 다 앗수르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 앗수르에 대해서 인생의 문제들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신앙인이냐를 구스나라가 앗수르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오늘 이사야 18장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구스가 어떻게 합니까? 온 사방으로 갈대로 만든 배를 띄워서 지중해를 통해서 어디로 갔던 모양입니다. 온 인근나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사신을 보냅니다. 남 왕국 유다에게 제일 먼저 보냅니다. 그러면 북 왕국 이스라엘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앗수르라고 하는 세력 앞에서 아람과 손잡고 자구책을 강구한 것 아닙니까? 북 왕국 이스라엘과 다를 게 없는데 구스는 일시적이지만 구원을 받고 보존을 받습니다만 무슨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까?
북 왕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계시하셨고 선택해 주셨는데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 어긋나 버렸습니다. 어떻게 했다고요? 북 왕국 이스라엘은 핸들링을 해버린 것입니다. 어제 우리가 함께 보았던 것처럼. 신의 손이 내려와서 신의 손으로 이 문제를 경영하고 만질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자기가 핸들링을 해 버립니다. 선민의 삶은 축구장이라고 했어요. 절대 내가 손을 대면 안 됩니다. 신의 손이 내려와야 합니다. 마라도나가 자기가 손으로 볼을 쳐 넣고 신의 손이 했다고 했던 것처럼, 우리 인생의 모든 골은 신의 손이 넣었어야 했는데 북 왕국 이스라엘은 핸들링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구스는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인데 남 왕국 유다에 와서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다. 남 왕국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뜻이 그대로 흘러가고 있는 겁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를 대적하고 남 왕국 유다를 침범하려고 했었습니다. 반면에 구스는 하나님을 모르고 자기 손으로 하는 겁니다. 자기 손으로 한다고 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 와 닿고 신의 손이 와 닿고 있는 남 왕국 유다에 도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가 하는 말이 줄을 서려면 잘 서라는 겁니다. 하늘이 통해서 흐르고 있는 자 옆에 서있어야 국물이라도 얻어먹고 콩고물이라도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스의 태도는 바른 것이냐? 바른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보여주는 겁니다. 본문에 특별히 이런 단어가 나옵니다. '갈대배를 물에 띠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며 이르기를 민첩한 사절들아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너희는 강들이 흘러 나누인 나라로 가되 갈대배를 물에 띠우고 그 사자를 수로로 보내는 나라여.’라고 끝냅니다. 그리고 ‘그 나라의 민첩한 사절들아.’라고 해야 됩니다.
‘민첩한 사절들아’
철판구이를 하는 요리사의 민첩한 칼놀림을 한번 연상해 보세요. 앗수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민첩하게 움직입니다.반면에 남 왕국 유다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히스기야는 성전에 들어갑니다. 모든 백성은 입을 다뭅니다. 행동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고 있습니다. 이게 뭐예요? 이러다가 진짜 앗수르한테 망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우리가 성경에 쓰여 있으니 ‘아, 그렇구나.’하고 있지만 진짜 여러분이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 다다랐을 때 생각을 멈추고, 말을 멈추고 히스기야가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있듯이 구스 사람들처럼 민첩하게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 대신에 그렇게 멈춘 상태로 있겠습니까? 그러실 수 있겠어요? 그러다가 망하면 어떻게 하실래요? 그러다가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이 진짜 기독교에서 하는 말이었으면 어떻게 하실래요? 하나님이 안 살아계시고 그냥 사태는 염려하는 대로 진전이 되어 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하실래요? 그런데도 생각을 멈추고 있고, 말을 멈추고 성전에 앉아서 하나님을 대면하면서 기도하고 있겠습니까? 이게 지금 보통 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보통일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히스기야는 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고, 남 왕국 유다는 입을 다물고 말을 멈추고 생각을 멈춘 채로 액션이 끝난 상태로 있었을까요? 기가 막힌 거예요. 오늘 본문 4절과 5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라고 하십니다. 어쩌면 이런 표현이 나오는지 몰라요. 아직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그리고 5절에 “추수하기 전에 꽃이 떨어지고 포도가 맺혀 익어갈 때에 내가 낫으로 그 연한 가지를 베며 퍼진 가지를 찍어 버려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드디어 앗수르를 멸망시키는 하나님의 액션이 5절에 나오는데 ‘포도가 익어갈 때’ 라는 말이 이게 키워드예요. 이 말이 앞에 4절에서 ‘내가 나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함이 쬐이는 일광 같고 가을 더위에 운무 같도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요? 앗수르가 쳐들어 왔습니다. 지금 코앞에 있어요.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백성들이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습니다. 앗수르를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액션이 지금 익어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185,000명. 그 당시 중동 지역 전체를 사시나무 떨게 하듯 세력을 확장하던 앗수르입니다. 그런데 이 앗수르가 하루아침, 하룻밤 사이에 185,000명의 주력부대가 완전히 멸절을 당합니다. 히스기야는 지금 성전에 들어가 있고 유다 백성들은 입 다물고 생각 멈추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왜 이런 행동이 나와야 맞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액션이 두껍고 큰 스테이크처럼 익어가고 있기 때문에. 철판구이에서 요란을 떨 듯이 구스처럼 민첩한 사신들을 사방에 보내는 철판구이 식으로는 하나님의 큰 스테이크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예요.
왜 성전에 들어가 있어요? 지금 대책을 강구하고 밤새철야를 하면서 작전을 짜도 부족할 때, 성전에 들어가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하나님의 액션이 익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야 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구원의 액션이 익어가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익어갈 때는 아무런 액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철판구이 익히듯이 작은 생선 조각, 새우 한 조각 익히듯이 그렇게 익혀서는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일어나지 못해요. 익어가는 거예요. 포도가 익어가듯이.
우리나라 말에도 '포도 순절'이라고 절기를 표현하는 말이 있어요. 양력으로 9월 8일부터 9월 22일 추분까지 15일 동안을 '백로(白露)'라고 '하얀 이슬'이라는 뜻이에요.
오늘 본문에도 가을 더위에 이슬, 운무가 나오잖아요? 가을 더위가 어떻습니까? 낮에는 덥다가 밤에는 차가워집니다. 운무가 다 이슬로 변해버려요. 이 가을 더위에 곡식이 익어가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처소에서 조용히 감찰하시면서 쳐다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상하지요. 왜 익어 갈까요? 하나님의 시선이 음식을 익히는 불이고 열이고 전자파예요.
우리가 돈 문제가 있다면 그 돈 문제를 하나님이 이렇게 쳐다보고 계십니다. 액션은 없어요. 아무런 액션이 나타나지 않아요. 아무런 변화가 눈에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히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은 믿어지십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사실은 뭐냐? 하나님의 시선은 지금 익히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행동이 나타날 때를 익히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액션이 없고 변화가 없다고 해서 아무 것도 안 일어나는 게 아니라. 지금 내 자식 문제, 건강 문제, 경제 문제, 내가 하는 일, 교회 목회 문제, 이런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보고 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시선에 의해서 이 땅의 내 문제, 앗수르와 같은 문제들이 익어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그저 구스처럼 민첩한 사신들을 보내듯이 민첩하게 내 마음을 이곳저곳으로 사방팔방으로 보내며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예를 들어 목회 하시는데 목사님이 김 장로님하고 틀어졌어요. 회의를 하다가 서로 삐쳐버렸습니다. 아무래도 마음이 켕기고 불안해요. 그래서 전화를 겁니다. 사과합니다. 해결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지 마세요. 먼저 히스기야 왕이 성전에 들어갔었던 것처럼 성전에 들어갑니다. 말을 멈춰버리는 겁니다. 생각을 멈춰버리는 겁니다. 그 장로님에 대해서. 그 장로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은 그냥 보시는 게 아니에요. 구스가 사신을 보내듯이 앗수르를 대처하는 방법으로, 철판구이 식으로 요란 떨지 않고 그저 성전에 들어가서 묵묵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문제를 펼쳐놓고 있으면 하나님의 시선이 보고 있는 동안에 조용합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늘 전화하던 김 장로님이 전화도 안하십니다. 그러나 익어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을 보며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일마다 익어가고 있는 겁니다.
내 자식 문제 때문에 걱정이 많으시지요? 그 자식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내가 구스처럼 달려들어서 내 자식을 이렇게 뒤집고 저렇게 뒤집고 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하나님의 액션이 나타나질 않아요. 결국 북 왕국 이스라엘이 핸들링을 범해서 레드카드로 퇴장당하는 것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우선, 급하세요? 구스처럼 아무리 급하다고 민첩하게 움직이지 마세요. 문제 해결을 위해서 입 다물고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선이 보고 있는 동안에 이 땅의 나의 앗수르와 같은 문제들이 잘 익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가 그 익는 시간을 제일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뭐예요?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것이에요. 히스기야가 성전에 들어갈 때 그냥 들어갔겠습니까? 성전은 그냥 그렇게 막 들어가서, 그 하나님의 지성소 앞에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거기에는 번제의 절차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열왕기하 19장에 히스기야가 성전에 들어갔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런 절차를 보냈다는 얘기는 하지 않지만 성전은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나 그냥 세상 문제 붙잡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히스기야의 기도를 잘 보면, 하나님께서도 이미 앗수르가 나를 모욕했다고 말씀하셨고, 히스기야 왕의 기도도 그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이 모욕 받으신 그 이름을 영광 중에 나타내라고 하는 내용을 가지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면, 우리에게 임하는 앗수르를 향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달라는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 삶을 다 보고 계십니다. 보고 계시는 동안에 조용하게 내 삶의 문제들을 하나하나 보고 계시는 동안에 그 문제들이 잘 익어갑니다. 큰 역사가 나타나려고 이렇게 기다리는데 액션이 안 나타나는 거예요. 액션이 안 타난다고 변화가 없는 게 아니거든요. 잘 익어가는 겁니다. 자꾸 내 마음이 구스처럼 민첩하게 움직이려고 그래요. 십자가 붙잡고 기다리는 겁니다. 요리사이시고 조리사이신 하나님께서 스테이크를 언제 뒤집어야 할지 제일 잘 아세요. 우리는 구스 같이 철판요리를 하듯이 그저 챙챙 거리고 소리가 요란하고 빨리빨리 뒤집어야만 직성이 풀리는데 맨 날 새우 조각 같고 조갯살 같은 작은 것들만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에요. 그냥 먹어도, 먹어도 남은걸 싸가지고 집에 가져가면 스테이크를 새 것으로 테이크아웃 해온 줄 알 정도로, 큰 스테이크의 역사가 일어나려면,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의 액션이 나타날 때 까지 기다리고, 그 일만 기다리지 말고 십자가 붙잡고 그 일에 대해서 죽어버리면 하나님이 임하셔서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하는 거예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는 겁니다. 하나님 때문에 감사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께 취해 있노라 보면 ‘어? 자고 일어나서 눈 비비고 봤더니 185,000명, 천하를 두렵게 떨게 만들었던 앗수르의 주력 부대가 완전히 멸절 당해서 오늘 본문에서처럼 새의 먹이가 되고 들짐승의 먹이가 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저는 생각을 해봐요. 온 세계가 벌벌 떨고 있던 앗수르의 주력 부대 185,000명이 히스기야와 맞서 있다가 하루 아침에 멸절을 당합니다. 히스기야는 성전에 들어가고 유다 백성들은 침묵하고 생각을 멈추면서, 하나님의 시선이 앗수르를 보고 있는데 그 앗수르라고 하는 스테이크가 잘 익을 때까지 기다린 것 밖에는 없어요. 그런데 185,000명이 싹- 사라져버린 겁니다. 그리고 산헤립은 본국으로 줄행랑을 쳤다가 신전에 들어가서 신하들에게 살해를 당합니다. 죽고 맙니다.
히스기야 왕의 명성이 어떻게 되었겠어요? 열왕기하 19장에 보면 오늘 7절에 뭐라고 나옵니까? 주변 국가들이 히스기야 왕한테 예물을 가져 옵니다. 지금 안 그렇게 생겼습니까? 히스기야는 힘이 하나도 없어요, 남 유다도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185,000명 앗수르가 망했다는 얘기가 온 사방에 퍼지니까 예물을 들고 오는 거예요. 오늘 7절에도 “구스 사람들이 여호와께 나와 예물을 드릴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철판구이 먹듯이 세상을 살지 말아요. 그렇게 민첩하게 뒤집으며 난리를 치지 맙시다. 크고 두꺼운 스테이크 먹고, 먹어도 또 포장해서 가지고 가면 새로 사온 줄을 아는 그런 큰 스테이크와 같은 역사가 이 땅에서 일어나려면 익어가야 됩니다. 익어가려면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동안에 쬐이는 일광처럼 가을 햇볕에 포도가 익어 가듯이 익어가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 땅에서는 이유가 없는 마음의 기쁨과 평강과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신의 손으로 등장하셔서 이 세상에서 크고 두꺼운 스테이크 역사를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철판구이처럼 촐싹대지 맙시다. 묵묵히 기다리다 보면 잘 익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익어갈 동안에는 액션이 필요 없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구스의 사신들처럼 민첩하게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에 의해서 스테이크 같은 역사를 행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께 호흡과 숨을 맞추지 못한 채 내 멋대로 구스의 사신들처럼 동서남북으로 분주했던 과거를 이제 청산하게 해주시고 그러기 위해 오늘도 영원한 번제이신 십자가에 연합하여 죽는 자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십자가 붙잡고 철판구이식의 삶에 대해 죽고 두꺼운 스테이크의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아버지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