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전"(思政殿) 뒤로 돌아가면 임금의 처소인 "강녕전"(康寧殿)으로 들어가는 "향오문"(嚮五門)이 있다.
"향오문"(嚮五門)은 "다섯가지(오복 : 五福)를 향하는 문"으로,
오복(五福)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덕을 베품), 고종명(考終命, 편안한 죽음)을 말하는데.
여기에서 "강녕"(康寧)은 오복(五福)의 중심(中心)이라고 한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 서면 넓은 월대(月臺)위에 "강녕전"(康寧殿)이 있다.
강녕전(康寧殿) 지붕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지붕이다.
"용마루"가 없는 이유는 용(龍)으로 표현되는 임금 위에 또 용(龍)이 있을 수 없다는 의미인데 정설은 아니라고 한다.
강녕전(康寧殿)은 경복궁(景福宮) 창건 당시인 1395년(태조 4)에 지어져, 1433년(세종 15)에 고쳐 지었다.
1553년(명종 8)에 불탄 것을 그 이듬해 중건하였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전화(戰禍)로 불타 없어진 후 방치되었다가
1865년(고종 2) 경복궁(景福宮)의 중건과 더불어 다시 영건(營建)되었다.
1920년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1917년에 화재로 불타버린 창덕궁(昌德宮)의 내전(內殿) 재건을 위해 해체, 철거되었다.
이후 줄곧 복원되지 못한 상태로 터만 남아 있었으나 경복궁(景福宮) "복원사업"(復元事業)의 일환으로
1990년부터 발굴조사를 하여 1994년 12월 12일 복원공사가 완료되어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강녕전"(康寧殿) 지붕의 잡상(雜像)
"강녕전"(康寧殿) 서쪽에 있는 "경성전"(慶成殿)
서쪽의 "경성전"(慶成殿)은 "가을에 한 해 농사의 결실을 맺는다"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경성전"(慶成殿) 뒤에 있는 "응지당"(膺祉堂)
"응지당"(膺祉堂) 옆에 있는 어정(御井)
"응지당"(膺祉堂)
강녕전(康寧殿) 동쪽에 있는 "연생전"(延生殿)
"연생전"(延生殿)의 "연생"(延生)의 뜻은 "생명(生)의 기운을 맞이한다(延)" 라는 것이라고 한다.
동쪽은 전통적으로 봄을 의미하고, 만물이 싹트는 봄이기 때문에 동쪽은 생명, 탄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연생전"(延生殿)뒤에 있는 "연길당"(延吉堂)
"연길당"(延吉堂)과 "응지당"(膺祉堂)은 그 용도를 모르고 있었으나,
2019년 6월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소장중인 "경복궁중건일기"(景福宮營建日記)에 의해 정확한 용도가 알려졌다.
이 두 곳은 왕의 식사를 데워 수라상에 올려 들이던 중간 부엌이라고 한다.
음식을 만드는 "소주방"(燒廚房)과 "강녕전"(康寧殿)사이의 거리가 꽤 있어 음식을 가지고 오는 동안
음식이 식을 수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음식을 한 번 더 데울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강녕전"(康寧殿) 동쪽의 행각(行閣)인 "계광당"(啓光堂)
행각(行閣)에는 굴뚝을 별도로 만들지 않고 지붕위로 만들었다.
"응지당"(膺祉堂)뒤쪽으로는 "흠경각"(欽敬閣)이 있다.
"장영실"(蔣英實)이 완성해 놓은 "흠경각"(欽敬閣)과 "옥루"(玉漏)는 적어도 6년 이상 걸려 계획되고 만들어진 것으로,
그 경위와 이 장치의 교묘한 작용에 대한 설명은 김돈(金墩)의 "흠경각기"(欽敬閣記)에 남아 있다.
"옥루"(玉漏)는 "흠경각"(欽敬閣) 안에 "호지"(糊紙)로 높이 7척 가량 산을 만들고, 금(金)으로 태양의 모형을 만들어,
오운(五雲)이 태양을 에워싸고 산허리 위로 가며, 낮에는 산 위에 뜨고 밤에는 산중에 지면서 일주(一周)하는데,
절기에 따라 고도(高度)와 원근(遠近)이 태양과 일치한다.”고 그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김돈(金墩)에 의하면, 중국 물시계의 여러 장치들은 모두 사람의 손이 조금씩 필요하지만,
옥루(玉漏)는 사람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작동하였다고 하므로
장영실(蔣英實)의 독창적 고안과 개량이 이 궁정시계에서 잘 조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흠경각"(欽敬閣)이라는 이름은 세종(世宗)이 직접 지엇다고 한다.
"흠경각"(欽敬閣) 뒤에는 "함원전"(含元殿)이 있다.
궁궐 안에 있는 "내불당"(內佛堂)이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정책을 펴는 조선의 궁궐(宮闕) 안에 "불당"(佛堂)이 있다는 것은 특이한 일이다.
세조(世祖)9년(1463)에 조카 단종(端宗)을 죽이고 심리적인 불안감으로 부처님을 모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세종(世宗) 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단종(端宗)이 거처했던 곳으로 전해지며 후에는 불상을 모셔두고 주로 불교의식과 행사를 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소실(燒失)되었다가 1867년 (고종 4년)에 경복궁 중건 때 재건하여 복원되었다.
1876년(고종13년)에 발생한 화재로 또 다시 소실(燒失)된 것을 2년 뒤에 복원되었다.
일제강점기 창덕궁(昌德宮) 화재로 사라진 희정당(熙政堂)의 복원하려고 해체되었다가 1995년 경복궁 복원사업으로 복원되었다.
"함원전"(含元殿)의 후원(後園)
화계(花階)의 석연지(石蓮池)는 아래쪽은 거북이가, 윗쪽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
"교태전"(交泰殿)과 "양의문"(兩儀門).
"양의문"(兩儀門)은 다른 문과 달리 여섯짝으로 되어있다.
아마도 여인들이 관리하므로 여닫기 쉽게 하기 위함 인듯하다.
"교태전"(交泰殿)은 "중궁전"(中宮殿)으로 왕비(王妃)의 침전(寢殿)이자 왕비(王妃)의 사무실이다.
"교태전"(交泰殿)은 용마루가 없다.
이렇게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건물을 "무량각"(無梁閣)이라고 한다.
"경복궁"(景福宮)의 "강녕전"(康寧殿), "교태전"(交泰殿) 외에도
"창덕궁"(昌德宮)의 "대조전"(大造殿)과 "창경궁"(昌慶宮)의 "통명전"(通明殿)도 용마루가 없다.
이처럼 용마루가 없는 전각(殿閣)은 왕이나 왕비의 침전(寢殿)으로 쓰이는 곳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寢殿)에 용마루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說)이 있다.
왕은 용인데 왕이 자는 침실에 용이 또 있는 것은 한 집에 두 마리의 용이 있는 격이라 용마루가 없다는 설(說)과,
왕과 왕비가 장차 왕이 될 왕자를 생산해야 하는데 용마루에 이미 용이 있으면 새로운 용이 태어날 수 없다라는 설(說)이다.
"교태전"(交泰殿)의 잡상(雜像)
"교태전"(交泰殿)의 중앙 대청마루의 뒤편은 병풍식 문과 또 하나의 문이 있다.
겨울에는 모두 닫아서 저와 같은 모양을 보여준다.
함홍각(含弘閣)
"함홍각"(含弘閣)은 "교태전"(交泰殿) 서쪽에 있는 "부속 전각"(部屬 殿閣)으로 왕비가 일상생활을 하는 곳이라고 한다.
"원길헌"(元吉軒)은 교태전 동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部屬 殿閣)으로,
이름의 뜻은 주역의 "태괘(泰卦)와 '곤괘(坤卦)"에서 유래했으며, "크게 선하여 길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곳은 왕과 왕비가 합궁(合宮)할 때 사용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경복궁(景福宮)을 처음 지을 때는 없었고, 1867년(고종 4년) 경복궁(景福宮) 중건 당시 처음 지어진듯하단다.
교태전(交泰殿)후원의 아미산(峨嵋山)은 경회루의 연못을 파낸 흙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담장 아래로 화계(花階)를 만들어서 후원을 구성하였는데,
화계(花階)의 석축은 2단으로, 각 단은 장대석을 쌓았다.
화계(花階)에는 석분(石盆)과 석련지(石蓮池)를 여러 개 배치하여 괴석(怪石)을 놓고,
주위에는 여러 가지 화초를 심었는데 특히 덩굴류의 화초를 많이 심었다.
또한 교태전(交泰殿)과 연결된 굴뚝은 모두 네 개로 아미산(峨嵋山)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끝에 보이는 건물은 교태전(交泰殿)에 이어진 "건순각"(健順閣)으로 이곳은 왕비의 전용 해산실(解産室)이라고 한다.
교태전(交泰殿)쪽에서 바라보는 "아미산"(峨嵋山).
뒤쪽에 담이 보이지 않아 멀리 산이 정원에 같이 있는듯한 차경(借景) 효과를 가져온다.
교태전(交泰殿)의 "아미산"(峨嵋山) 굴뚝(보물 제811호)은
교태전(交泰殿) 온돌방 밑을 통과한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지금 것은 고종(高宗) 4년(1867) 경복궁(景福宮)을 다시 지을 때 새로 만든 것이다.
"아미산"(峨嵋山)과 "건순각"(健順閣)
아미산(峨嵋山)굴뚝은 땅 밑으로 연기 길을 내어 후원으로 뽑아낸
꽃무늬가 들어간 붉은 색의 4개 굴뚝이 6각형 모양으로 서 있다.
굴뚝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를 배치하였다.
각 무늬는 벽돌을 구워 배열한 위에 회(灰)를 발라 만들었다.
위와 아래쪽에는 화마(火魔)와 악귀(惡鬼)를 막는 상서로운 짐승들이 표현되어 있다.
굴뚝의 위쪽 부분은 목조건물의 지붕형태로 만들고 그 위로 연기가 빠지는 작은 창을 설치하였다.
"함월지"(涵月池) : 달을 머금은 연못이라는 뜻.
"낙하담"(落霞潭) : 노을이 내려앉은 연못이러는 뜻.
"괴석"(怪石)
"괴석"(怪石)
"아미산"(峨嵋山)쪽에서 보는 "교태전"(交泰殿)
무량각 건물의 지붕에는 용마루 부분에 양쪽을 넘어가는 특수한 모양의 기와가 사용되었다.
이를 "곡와"(曲瓦) 또는 "안장기와"라고도 한다.
이 기와들은 양쪽 지붕이 만나는 지붕 꼭대기 부분을 비가 새지 않게 덮어 막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기와인 "평와"(平瓦)와는 전혀 다르다.
곡와(曲瓦) 중에 암키와는 말안장처럼 생겼으며, 수키와는 소의 목에 거는 멍에처럼 생겼다.
"건순각"(健順閣)쪽으로 돌아나가는 곳의 담장.
안과 밖의 문양이 다른데 잘 알지못하고 사진을 찍어서 후일 공부를 더 하고 살펴봐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