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태스님은 부처님의 일대교설을 그 설법의 내용에 따라 분류하고 화법사교(化法四敎)라 하였는데 그 사교(四敎)는 장교(藏敎)·통교(通敎)·별교(別敎)·원교(圓敎)입니다. 이들 사교의 내용은 특히 고(苦)·집(集)·멸(滅)·도(道)의 사제(四諦)를 설하는 방법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
장교는 소승교(小乘敎)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이승(二乘)인 성문(聲聞)과 연각(緣覺)을 위하여 생멸사제(生滅四諦)를 설합니다. 세간의 인과(因果)인 고·집이나 출세간의 인과인 멸 · 도의 사제가 모두 변이하여 생멸하므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통교는 대승의 초문(初門)으로 그 가르침이 삼승(三乘)에 모두 통하여, 둔근기(鈍根機)의 보살은 이승과 같고 이근기(利根機)의 보살은 별교나 원교와 같습니다. 통교에서 설하는 사제는 무생사제(無生四諦)라 합니다. 즉 일체공(一切空)의 이치에 따라 고(苦)의 무생(無生)이 고성제(苦聖諦), 집(集)의 화합상(和合相)없음이 집성제(集聖諦), 제법의 생(生)이 없고 멸(滅)이 없음이 멸성제(滅聖諦), 불이상(不二相)을 관함이 도성제(道聖諦)라는 것입니다.
별교는 이승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오직 보살에게만 적용되는 가르침인데, 별교에서는 고 · 집 · 멸 · 도의 사제에 무량한 모습이 있어 제한이 없다는 무량사제(無量四諦)를 설합니다.
이상의 장교 · 통교 · 별교의 삼교는 방편가설이라고 하며, 부처님의 근본 뜻은 중도실상(中道實相)에 있는데, 이것을 바르게 설한 것이 곧 원교이며, 원교만이 부처님의 진정한 설법이고 일승이라고 주장합니다. 원교에서 설하는 사제는 무작사제(無作四諦)인데, 여기에서는 끊어야 할 고제와 집제도 없고 현실을 떠나서 닦아야 할 도제도 없으며, 또 나타낼 열반도 없습니다. 그래서 생사가 곧 열반이고 번뇌가 곧 보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천태스님은 원교를 최상의 이근기(利根機)를 지도 교화하기 위한 법문으로 규정하고, 그 원융함을 교원(敎圓)·이원(理圓)·인원(因圓)·지원(智圓)·단원(斷圓)·행원(行圓)·위원(位圓)·과원(果圓)으로 상세히 설명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원교는 교리와 관법에서 원융함을 설하며, 특히 삼제원융을 가장 중요한 원리로 삼기 때문에 원융사상이 철저하게 적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원용 사상을 표방한 원교는 유와 무, 선과 악등 상대볍을 차단하고 이들의 원융한 도리를 설파하였기에 또한 중도이기도 합니다. 이 까닭에 원교를 중도라 설하는 것입니다.
원교란 바르게 중도를 나타낸 것이다. 두 변을 차단하여 공(空)도 아니고 가(假)도 아니며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니라. 십법계의 중생을 바라보되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 속의 달과 같아서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느니라. 필경에 실제는 아니지만 삼제의 도리가 완연히 구족되어 있느니라.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으며 한 마음 속에 있어 하나에 즉하여 셋을 논하고 셋에 즉하여 하나를 논한다.관하는 지혜가 이미 그러하고 제(諦)의 도리도 또한 그러하여 일제가 삼제에 즉하고 삼제가 일제에 즉하니라.
圓敎者는 此正願中道니 遮於二邊하여 非空非假며 非內非外니라. 觀十法界호대 如鏡中像水中月하여 不在內不在外하고 不可謂有며 不可謂無라 畢竟非實이나 而三諦之理가 宛然具足하니라.無前無後하며 在一心中하여 卽一而論三하고 卽三而論一하니 觀智?爾에 諦理亦然이라 一諦卽三諦요 三諦卽一諦니라. (觀音玄義; 大正藏 34.p.886 中)
원교란 중도를 바르게 나타낸 것으로 양변을 다 차단합니다. 유.무(有無)도 차단하고, 고.락(苦樂)도 차단하며, 선과 악, 생사와 열반, 마구니와 부처등 상대적인 것은 무엇이든지 차단해 버립니다. 상대적인 어느 한 쪽을 집착하게 되면 변견으로서 불법이 아니고 중도도 아닙니다.
이와같이 원교는 중도를 표방한 것인데,양변을 떠난 동시에 양변에 원융하여 공도 아니고 가도 아니며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닙니다. 이러한 원교의 중도관에 따르면 십법계의 중생을 보되 거울 속의 모습과 같고 불 속의 달과 같아서 있다고도 말할 수 없고 없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밝은 거울 속의 사람을 볼 때 그 안에 분명히 사람이 있기는 있지만 실제로 사람이 아니며, 물 속에 달이 비치어 달이 물 속에 있기는 있지만 실제로 달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중도라는 것도 이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 속의 달과 마찬가지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거울 속의 모습과 물 속의 달은 예로부터 중도를 나타내는 비유로 자주 사용되어 왔습니다.
또한 이 말은 천태스님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화엄종의 청량국사도 황태자가 질문한 심요(心要)에 대하여 대답할 때, 이 거울 속의 모습과 물 속의 달로 비유하여 불법이 중도라는 것을 표명했습니다. 이는 거울 속의 모습이나 물 속의 달이 결국 실제가 아니면서도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듯이 삼제의 이치가 완연히 드러납니다. 실제가 아니기 때문에 유가 아니면서 유고, 무가 아니면서 무이므로 묘법(妙法)이라 말합니다.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공 · 가 · 중이 원융함을 비유로 말하는 것입니다.
'관하는 지혜'라는 것은 차(遮)면에서는 공(空)이라 하고, 조(照)면에서는 혜(慧)라 하며, 중(中)을 등지(等持)라 합니다. 즉 쌍차면은 공이라 하고 쌍조면은 혜라 하며 쌍차쌍조는 중이라고 합니다. 중도실상은 원융하여 공혜(空慧)라 하든지 등지(等持)라 하든지,또는 차조니 공 · 가 · 중이니 하여 서로 표현하는 것은 달라도 그 내용은 같습니다. 셋이 즉 하나고 하나가 즉 셋이며, 하나 밖에 셋이 따로 없으며 셋 밖에 하나가 따로 없습니다.
'제의 도리'는 일체(一諦)내지 삼제(三諦)의 도리로서 정(定)과 혜(慧)를 구족하여 등지가 되면 공 · 가 · 중의 삼제가 원융한 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체(體)면에서는 공(空) · 정(定)이라 하고, 용(用)면에서는 가(假) · 혜(慧)라 하는데, 체와 용은 본래 같은 것입니다. 불과 빛이 똑같은 것이어서 불을 제외하고 빛이 없고, 빛을 제외하고 불이 없는 것과 한가지입니다. 그래서 삼팔선을 분별지어 놓으면 삼제원융이라 할 수 없고 변견(邊見)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일체만법의 근본 자체가 원융하여 자성이 원래 공한 데에 일체 현상이 나타나고 일체 현상이 나타난 곳에 자성이 공해 있습니다. 연기하는 이대로가 공이고 색이지 색 밖에서 공을 따로 찾고 공 밖에서 색을 따로 찾으면 이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이것이 우주법계의 근본원리로 이 법은 부처님이니 조사스님이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깨치고 바로 알아서 중생에게 소개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을 불법이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원교라는 것은 중도를 근본으로 삼아 삼제가 원융하여 쌍차쌍조하며 차조동시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실제로 천태지자스님이 주장하는 법화경의 근본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심삼관(一心三觀)이나 일념삼천(一念三千)같은 불교의 도리들은 실제로 깨쳐야 알지 깨치기 전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원교에서의 수행방법을 지관(止觀)이니 선(禪)이니라고 부릅니다만, 결국 화두를 들어서 일심삼관을 실제로 보고 일념삼천을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입이 아프도록 밥 이야기를 해보았자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천태스님의 모습을 보면 머리 위에 혹같이 솟은 것이 있습니다. 천태스님이 생전에 얼마나 정진을 열심히 했던지, 졸리면 머리 위에 커다란 물건을 만들어 얹어서 앉아계시곤 했는데 그 때문에 살이 부풀어 올라 육두(肉頭)가 생긴 것입니다. 그것이 공부를 성취한 뒤에도 평생토록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머리 위에 얹는 것을 가리켜 선진(禪鎭)이라 합니다. 정상적인 육계가 아니고 선진을 올려 놓고 정진을 하다보니 살이 부풀어올라 육두같이 생긴 혹을 가지신 분이 천태스님입니다.
그런데 혜사(慧思)스님은 정말로 정상적인 육계가 솟아 있었습니다. 천태스님이 화엄종과 다른 점은 교리면에서 뿐만 아니고 실제 정진하여 깨치는데 치중한 것입니다. 천태스님은 스스로 자기는 선종이지 교종이라 하지 않았습니다.부처님의 정법이 28대를 내려오면서 천태로 계승되고 달마스님이나 육조의 선종은 실제로 선종이 아니고 천태종만이 선종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주장할만큼 천태종에서는 교리보다 실천적인 선정을 익히는 것이 보다 근본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중도를 관하면 일체 원교를 종횡으로 분명히 보느니라.
觀心中道하면 見一切圓敎 橫竪分明하니라(維摩經玄疏5 ,p.549中)
양변을 여의는 것이 중도로서 차별의 양변을 완전히 여의면 모든 것이 다 융화하여 원융하게 됩니다. 삼제가 원융한 도리를 일체만법의 근본으로 삼은 것이 원교인만큼, 중도를 깨쳐서 양변을 여의어 원융자재한 도리를 알면 이에 모든 원교의 도리를 분명히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단지 원돈교 하나만이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중도로서 바른 관법이니 오직 이것이 실제의 관세음이요 나머지는 모두 방편설이다.
故知하야 但一圓頓之敎가 一切種智中道正觀이니 唯此爲實觀世音이요 餘此方便設也니라 (觀音玄義;大正藏 34, p.887 上)
참으로 성불해야만 불지(佛智)인 일체종지를 얻으며,이때에 비로소 중도의 정관(正觀)을 성취하게 됩니다. 이러한 중도정관은 천태종의 교리에 의하면 오직 원교에서만 가능한데, 원교를 알려면 중도를 알아야 되고 중도를 알려면 원교를 알아야 됩니다. 원교와 중도는 둘이 아니어서, 교리적으로 표현할 때는 원교이지만 그 내용은 중도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실제의 관세음보살입니다. 관세음이라 해서 어디 다른 곳에 관세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중도를 깨칠 때 그때 관세음을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방편설에 불과합니다. 곧 중도만이 실제로 부처님의 바른 사상이며 그 이외는 전부 다 방편적 가설(假說)입니다. 따라서 원융한 중도정관 이외에는 다 방편설인만큼 그 방편설을 실제의 불교인 줄 알아서는 안됩니다.
일체제불 · 일체조사 · 일체보살이 중도를 바로 깨친 사람들이고 중도를 바로 깨쳐야만 불보살(佛菩薩)을 볼 수 있습니다. 성불하여야만 중도를 안다고 했는데 왜 보살을 들먹이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관세음보살은 과거에 이미 성불하고 난후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 보살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현세에 나오신 분입니다. 중도를 깨친 입장에서는 석가불과 똑같습니다. 중도를 깨달으면 보살이라 해도 되고 아라한이라 해도 되고 조사라 해도 무방합니다. 중도만 바로 깨치면 그만입니다.
오직 원교의 교(敎)와 관(觀)만이 실상법문이다. 능히 십법계와 천가지 성상(性相)에 두루하여 삼제가 일시에 원만하게 통하니 원만하게 통한 중도가 이제를 쌍조하여 홀로 넓은 문(普門)이라 부른다.
唯圓敎敎觀이 實相法門이가 能遍十法界와 千性相하여 三諦一時圓通하니 圓通中道가 雙照二諦하여 獨稱爲普門也니라(觀音玄義;大正藏 34, p.888 上)
일체법을 분류할 때 실상(實相)과 가상(假相)으로 나누는 데서는 실상을 알고 보면 가상이 따로 없습니다. 실상이라고 따로 내세운 까닭은 가상만을 보는 중생, 피상적인 모습만 보는 중생, 즉 만법의 근원을 보지 못하는 중생을 위하여 실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지만 실상을 바로 알면 일체가 실상 아님이 없습니다.
원교의 교와 관은 실상법문으로 제법의 실상은 십법계와 천가지 성상(性相)에 보편적으로 두루하여 삼제가 일시에 원만하게 통해 있으니 한 군데로 치우치거나 막힌 곳이 없습니다. 삼제가 원융하게 통한다는 것은 공이라면 가고, 가라면 중이며, 중이라면 공 · 가가 다 들어가고, 가라 하면 공 · 중이 다 들어가서 하나를 들면 나머지가 전부 다같이 통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한 가지만 집착하게 되면 실제로 중도와 실상을 모르는 것이고 삼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삼제가 원만하게 통하면 이에 따라 원만한 중도가 이제(二諦)를 쌍조(雙照)하며, 나아가 유무를 쌍조하고 선악(善惡)을 쌍조하고 시비(是非)를 쌍조하고 마불(魔佛)을 쌍조하게 됩니다.
'넓은 문'이라 표현한 것은 시방세계의 미진수 불찰(微盡數 佛刹)에 중도가 통하지 않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원교의 중도가 곧 실상이니라.
圓敎中道가 卽是實相이니라.(觀音玄義;大正藏 34, p.890 上)
거듭 원교를 들먹이는 까닭은 중생이 변견으로써 중도를 모르고 자주 오해를 하기에 원융한 원교를 표방하여 중도를 내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전에 연기와 중도를 잘 몰랐을 때에는 불교를 실상계통과 연기계통의 두 가지로 나누어, 실상계통은 법화고 연기계통은 화엄으로서 실상과 연기를 대립적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중도라는 것을 알고 보면 실상이 곧 연기고 연기가 곧 실상입니다. 그래서 지금에는 실상과 연기를 대립적인 두 가지로 나누지 않습니다.
이 중도는 소승이나 삼승의 교리가 아니고 일승원교라는 것을 말하는데 양변을 여읜 중도사상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후대에 발달된 사상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초전법륜할 때에 말씀하신 중도인 것입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