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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이몽규李夢奎 1510 ~ 1563 천휴당 이공의 행장-율곡 이이
천휴당 이공의 행장(天休堂李公行狀)
선생의 성은 이씨, 휘는 몽규(夢奎), 자는 모(某), 경주(慶州) 사람으로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좌명공신(佐命功臣)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예이다. 6대조는 지인주사(知仁州事)인 휘 원보(元普)인데 이분이 판관(判官) 휘 승(昇)을 낳았고, 판관이 공조 참판 휘 연손(延孫)을 낳았고, 참판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휘 숭수(嵩壽)를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선생의 증조부이다. 조부의 휘는 성무(成茂)로 벼슬이 판관에 이르렀는데 뒤에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고 아버지의 휘는 인신(仁臣)으로 벼슬이 주부(主簿)에 이르렀는데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광주 반씨(光州潘氏) 절도사 휘 휘(熙)의 딸이다.
정덕(正德) 경오년(1510) 2월초 6일에 선생을 서울 백악산(白岳山) 아래서 낳았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보통 사람과 달라 풍골(風骨)이 뛰어났다. 그래서 태어난 지 몇 살이 되지도 않아서 이모부인 종실(宗室) 흥녕부정(興寧副正)이 적자가 없으므로 선생을 데려다 어루만져 길러서 후사를 의탁하려 했다. 그런데 말을 배울 적부터 바로 글을 읽을 줄 알아 나이 겨우 10세에 이미 대강의 뜻을 통하니 벼슬하는 선배들이 와서 보고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13세에 입학을 했는데 눌재(訥齋) ※박선생(朴先生)이 당시 학관으로 있으면서 깊이 감탄하고 칭찬하여 이르기를 “뒷날 반드시 나라를 다스릴 그릇이 될 것이다.” 하였고, 김상공(金相公) 모(某)도 선생의 이웃 집에 우거하고 있다가 한 번 보고 그 하는 짓을 기특하게 여겨 사위를 삼았으니 이때 나이 16세였다. 약관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했는데 상례를 일체 주문공(朱文公) ※의 「가례(家禮)」대로 하고 3년 동안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경인년(1530)에는 양모가 돌아가자 선생은 길러준 은혜를 생각하여 재최복(齊衰服) 3년을 입고 고양에서 묘소를 지키며 정성껏 애모(哀慕)하니, 사재(思齋) ※김상공(金相公)이 때마침 한 마을에서 묵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탄복하여 찾아가 이야기를 해보고는 더욱 공경하고 중히 여겨 왕래가 끊이지 않았는데, 언제나 당대의 학자를 논할 때면 반드시 선생을 일컬어, “기국의 넓은 것으로나 천품의 높은 것으로나 사람마다 미칠 바가 아니다.” 하였다. 복을 벗고 나자 또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연거푸 큰 상사를 당하고 보니 기력이 쇠진하여 사람들이 일어나지 못할까 우려했는데 다행이 부지하여 무사히 탈상을 하게 되었다. 형제간에 재산을 나누게 되었는데 이때에도 꼭 많은 것을 사양하고 적은 것을 취하였다. 한 형이 실가(室家)가 없이 지냈는데 선생은 자기가 차지하고 있던 전답을 나누어 주면서, “형님은 형제 중에서 가장 궁하고 또 실가도 없으므로 이것으로 옹색함을 도와 드립니다.” 하였다. 그리고 완상(玩賞)할 만한 것을 얻었을 적에도 형제 중에 욕심을 내는 사람이 있으면 달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선뜻 내주고 조금도 아까와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리고 양부를 섬기는데도 성효가 곡진하여 이목(耳目)의 즐기는 것이나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것을 반드시 마련해드리니 남들이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경자년(1540) 생원시에 합격했는데 반궁(泮宮) ※에 있을 적에 명성이 크게 나서 동료들에게 추중(推重)을 받았다. 그리하여 관중(館中)의 의논은 반드시 선생의 주장을 기다렸다가 정해지니, 일시의 명사들이 집에 밀려오므로 거마(車馬)가 언제나 문앞에 가득하여 빈 날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았다. 인묘(仁廟) ※초기에 관중(館中)의 연소배들이 서로 다투어 높은 의론을 벌이므로 선생은 그것을 근심하다가 마침내 반관(泮館)에 있지 않았는데, 높은 의론을 하던 선비들은 뒤에 모두 패하고 말았다.
갑진년(1544)에 흥녕정(興寧正)이 돌아가자 선생이 집상(執喪)하기를 마치 친자식과 같이 하니 조객으로 온 사대부가 골목을 메웠다. 처음 흥녕이 서자가 넷이 있었지만 모두가 불초하였으므로 흥녕이 자식으로 여기지 않아 문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는데, 선생이 항시 조용하게 규간(規諫)하여 천성의 친(親)임을 말씀드리니 흥녕의 뜻이 조금 풀어졌다. 이 때에 선생은 양부모도 나에게는 은혜가 생부와 똑같으니 상장(喪葬)과 제사를 마땅히 성의를 다하여 만에 하나라도 갚아야겠지만, 그러나 이성(異姓)으로 승중(承重)을 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서자에게 맡겨야겠다고 생각하여, 서자들을 불러 타이르기를, “양부께서 평소에 너희들을 버리시고 나로 하여금 승중을 하게 하셨으니 이제 그 뜻을 저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다만 성(姓)을 이어갈 자식을 두고 이성으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한다는 것은 의리상 편치 못한 일이니 너희들은 마땅히 행실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제사를 공경히 받들고 선인으로 하여금 지하에서 원한을 품게 하지 말라. 그리고 제수(祭需)나 그릇같은 것은 내가 의당 모두 마련할 것이요 너희들을 힘들게 하지 않겠다.” 하니 서자들이 모두 감읍(感泣)하여 함께 묘의 곁에 여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다. 3년이 지난 뒤에는 전장(田庄)이나 노비를 국법의 분수(分數)에 의하지 않고 서자들에게 넉넉히 주고 그 재산에 대해서는 그들 마음대로 쓰게 하고 일호도 취하지 않으면서, “너희들이 굶주리고 추우면 내가 누구와 풍요를 누리겠느냐.” 하니 온 집안이 모두 따르기 어려운 일이라고 탄복하였다. 그런데 서자들이 처음에는 그 의리에 감복했으나 차츰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여 자꾸만 다투고 절제없이 낭비를 하다가 혹은 옥에 갇혀 죽기도 하고 혹은 떠돌이가 되어버리기도 하여 선생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선생의 처가의 기업(基業) ※이 보령(保寧)에 있었는데, 선생은 본시 도시를 싫어하던 터라 드디어 과업(科業)을 버리고 호연히 전원(田園)으로 돌아가니 때는 정미년(1547)이었다. 사는 곳에 원림(園林)과 수석의 좋은 경치가 있었으므로 서실 하나를 지었는데 아주 조촐하고 시원했다. 편액을 천휴(天休)라 붙이고 인하여 자기 호로 삼았다. 당의 앞에는 작은 연못을 파고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았으며 화초를 많이 심고서 그곳에 우두커니 홀로 간혹 밤중까지 앉아 있기도 했다. 언제나 흥이 나면 곧 가영(歌詠)으로 나타냈고, 도원도(桃源圖)를 모사(摸寫)하여 걸고 또 청송(聽松) ※이 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좌우에 걸어놓고 바라보며 한가로이 즐기곤 하였다. 항상 소부(巢父)·허유(許由)가 〈천하를 주겠다는 요임금의 말에〉 귀를 씻은 일 ※과 〈무왕(武王)이 은(殷)을 멸하자〉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서 고사리를 캤던 일 ※과 도원량(陶元亮)이 팽택령(彭澤令)을 버리고 돌아와 삼경(三逕)을 열어놓고 친구들과 즐기던 일 ※을 사모하여 먼 전세와 서로 감응하는 뜻이 있었다. 지은 가사는 격이 높고 뜻이 심원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 곡을 전한 것이 많다.
집에 있을 때 간혹 군색스러운 때가 있어도 태연하게 개의치 않았고 아내 김씨도 안을 다스림이 법도가 있어 그 뜻을 잘 받들어주니 선생이 조심하고 아껴주었으므로 규문(閨門)의 안이 매우 화평하고 정돈되었다. 어떤 사람이 재산을 모아 자손의 계책을 세우라고 하자 선생은,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고 임천(林泉)에 한가롭게 누워있는 사람은 다만 욕심을 줄이고 정신을 길러 편안히 일생을 보낼 뿐이다. 옛 군자는 종신토록 가난하여 기한을 면치 못하여도 천명을 즐기고 살았던 분이 있었는데, 나같은 사람은 비록 넉넉하지는 못해도 흉년만 안들면 조석 끼니는 걱정하지 않을 만한데 어찌 다시 재물을 늘리려고 내 마음을 번거롭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 자손이 만약 불초하지 않다면 나만큼만 살면 될 것이고 만약 불초하다면 전답이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계해년(1563) 봄에 맏형이 서울에서 작고하자 선생이 마침 병을 앓던 중에 분상(奔喪)하여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기력이 갑작스레 떨어져 장사지낸 뒤에 곧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 해 여름에 병이 발작하여 6월 모일(某日)에 작고하니 향년이 54세였다. 그러자 한 고을 사람들은 존비노소(尊卑老少)를 막론하고 모두 달려와서 상에 임하기를 마치 기·공복(期功服)이라도 입게 되는 처지처럼 하여 여러 날을 가지 않았고, 소먹이는 아이나 하인들까지도 차마 고기를 먹지 못하면서 모두가 ‘현인이 가셨다.’고 하였으며, 방아를 찧으면서도 소리를 하지 않고 들에도 농가를 부르지 않기를 한 달이 넘도록 그러하였다. 선생은 천자(天資)가 뛰어난 분으로 풍채가 훤출하며 부귀 영달이 그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젊었을 때에 장인[外舅]인 김공이 벼슬을 시키려고 하자 선생이 거절하여 받지 않고 그 형을 벼슬시켜달라고 하니 김공이 의(義)롭게 여겨 허락하였다. 그뒤에 이조(吏曹)에서 선생을 현(賢)으로 천거하려고 하자 선생의 친구로서 낭관(郎官)으로 있는 사람이 동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 사람의 마음을 아는데 결코 굽히지 못하고 한갓 이름만 더 드러나게 할 것이니 이름이 드러나는 것은 그가 싫어하는 바이다. 무엇하러 그가 싫어하는 것을 더해줄 필요가 있겠는가.” 하므로, 그 의론이 그쳐버렸다. 당시 사람들은 선생의 지조를 높이 여기고 그 친구가 선생의 마음 아는 것을 감복하였다.
선생의 자녀가 자라나자 귀현(貴顯)한 집에서 많이 구혼을 해왔지만 선생은 좋은 말로 사양하여 끝내 응락하지 않고 항상 말하기를, “거실(巨室) ※과 혼인을 맺는 것은 분수를 지키고 천명을 아는 자의 일이 아니다.” 하였다. 큰 아버지가 일찍 작고하고 과부로 가난하게 살고 있었는데 선생이 그의 자녀를 마치 자기의 자식처럼 돌보아주고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데려다가 혼수감을 마련해서 때를 놓치지 않고 혼인을 시켜 자리 잡게 해주었다. 빈객을 대접할 때에는 간혹 술과 성색(聲色)으로 즐기어 마치 흥치를 돋구고 방탕한 듯하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술도 끊고 여색도 삼가서 종일토록 담담하게 지냈다. 보령(保寧)으로 돌아갈 때에도 아내 김씨는 그 모부인이 늙고 병들어 차마 함께 떠나지 못하고 선생보다 훨씬 뒤에 돌아왔는데 선생은 혼자서 12년간이나 있으면서도 첩을 들이지 않았다. 친구 중에 상사(上舍) ※로 이파남(李巴男)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서녀를 사랑하여 선생에게 맡기려고 울면서 청했지만 선생은 굳이 사양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대답하기를, “그가 만약 착하면 모르지만 만약 착하지 못하여 버리게 되면 친구를 저버리는 것이 되고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 가도(家道)를 상하게 될 것이니 내가 그녀의 현부(賢否)를 알지 못하므로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선생은 가슴 속에 경위가 매우 분명하여 좀처럼 남을 허여하지 않지만 말과 기색에 나타내지는 않았다. 사람을 접할 때에는 귀천과 현우를 가리지 않고 지성으로 응수하며 말하고 웃고하여 친절미가 넘쳤으므로 빈객이 항상 자리에 가득하여 모두 환심을 가졌다. 고을사람이 다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간곡하게 잘 타일러서 말리므로 사람들이 그 성의에 감동하여 감화되는 사람이 많았고 비록 어리석고 완악한 자라도 감히 그 흉악을 부리지 못했다. 간혹 풍속을 망치는 행위를 하는 자들도 선생을 생각하고서는 반드시 두려워하며 ‘이 생원이 혹시 나의 한 짓을 알지나 않을까.’하였다. 그리고 잔약한 백성들이 만약 죄에 걸려들거나 혹시 환란을 당하게 되면 반드시 힘껏 구해주어 살 곳을 얻게 해주니 그래서 선한 사람도 좋아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도 선생을 미워하지 않았다. 위로는 사대부(士大夫)로부터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맛있는 음식만 생겨도 반드시 먼저 선생께 드렸고 서로 다투어 주사(酒食)를 갖추어 놓고 한 번 왕림해주기를 바랐으니 그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은 것이 이러하였다.
그리고 이단(異端)의 글에 대해서는 반드시 깊이 배격하였는데 항상 풍수설(風水說)을 논하기를, “사람이 죽으면 정신이 흩어지고 혈맥도 말라버려 남은 뼈는 마른 나무나 사윈 재와도 같은 것인데 어떻게 산천의 길흉으로 인해서 자손에게 화복을 끼친단 말인가. 어버이가 죽은 뒤에 정성을 다할 곳은 오직 제사 뿐이다. 장지(葬地)는 다만 그 집 뒷산을 잡아서 쓰는 것이 좋다. 생전에 여기서 살았으니 죽어서도 여기에 장사지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하니, 아는 사람들은 확실한 의론이라고 했다. 중이나 무당들의 하는 짓을 가장 미워하였고 마을 안에서도 음사(淫祠) ※를 끊게 하여 요사스런 중이나 괴상한 무당이 그 동네에 발붙이지 못하게 했다.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일찌기 엄하게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아버지를 우러러 뵙기만 해도 스스로 방심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아들이 일찍이 말하기를, “평생을 곁에 모시고 있어도 큰 소리 한번 못들었지만 그 위의(威儀)에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하였다. 인묘(仁廟)가 승하하였을 때에는 문을 닫고 객을 사절하고 여러 달 동안 하늘을 쳐다보고 가슴을 치며 비통해하며 시를 지어 슬퍼했는데 그 시 속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동방 일천년만에
하늘이 순우(舜禹)같은 임금 내시어
조야가 모두 기뻐하며
지치(至治)를 조석간에 기대했더니
큰 부음이 갑자기 전해지니
그 병환이 애모로 말미암았다네,
즉위하신 지 한 해도 못 넘겼으니
하늘의 뜻은 알 수가 없구려
기쁜 마음이 슬픔으로 변하여
백성은 아비를 여윈 듯하네
선비가 살아서 무얼 하리요
훌륭한 사업을 볼 수가 없으리니
모월 모일에 모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선생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 희삼(希參)은 현감 신모(申某)의 딸에게 장가들어 모와 모를 낳았고 딸은 선비 조남(趙擥)에게 시집가서 모를 낳았다. 아! 선생은 천품이 매우 높아 일찍부터 원대한 식견이 있어 기국과 도량이 세속을 초월했고, 고관을 우습게 보았으며, 죽음에 임해서도 느긋하였고, 성기(聲氣)를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생각하는 것이 남들의 뜻을 뛰어넘었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한 번도 규각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세상을 가볍게 여기고 풍속을 걱정하는 뜻은 있으면서도 한 번도 시사를 말하지 않았다. 유별난 행동으로 세상에 알려지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탁한 이름이 가해지지도 않았다. 살았을 적에는 온 고들이 존경하였고 작고했을 적에는 온 고을이 슬퍼했으니 그 겉을 보아 그 속도 알 만하다. 선생의 아들 희삼(希參)이 나와 함께 종유하였으므로 삼가 그 들은 것을 이와 같이 기록하는 바이다.
[역주:18권131] 눌재(訥齋)
박상(朴詳)의 호
[역주:18권132] 주문공(朱文公)
문(文)은 주희(朱熹)의 시호.
[역주:18권133]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의 호
[역주:18권134] 반궁(泮宮)
성균관
[역주:18권135] 인묘(仁廟)
인종
[역주:18권136] 기업(基業)
토대, 터전
[역주:18권137]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의 호
[역주:18권138] 귀를 씻은 일
중국 소부(巢父)는 도당씨(陶唐氏)때 사람으로 산에 살며 세리(世利)를 도모치 않고 나무에 둥지를 짓고 그 위에서 살면서 소부(巢父)라 호하였다. 요(堯)가 천하를 내어주마 해도 받질 않았다. 허유(許由)는 중국 상고시대 사람으로 자는 무중(武仲)이며 패택(沛澤) 중에 숨어 살었는데 요(堯)가 천하를 내어 주려니까 물러나 영수(潁水) 북쪽 기산(箕山) 아래 숨어 살았다. 또한 구주장(九州長)으로 부르자 듣기도 싫다고 영수가에서 귀를 씻었다 한다.
[역주:18권139] 백이(伯夷)…캤던 일
은 나라때 고죽군(孤竹君)의 두아들. 마음이 청백하기로 유명하였다. 주무왕(周武王)이 은 나라를 멸하고 천하를 차지하자 그들 형제는 의리상 주 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고 살다가 굶어 죽었다. ≪史記 伯夷傳≫
[역주:18권140] 도원량(陶元亮)이…즐기던 일
도원량(陶元亮)은 진(晋)나라 때의 고사(高士) 도잠(陶潛)을 말한다. 원량은 그의 자(字). 도잠은 일찍이 팽택령(彭澤令)이 되었는데 그 고을의 독우(督郵)가 새로 부임하자 아전이 와서 그를 배알해야 한다고 하자, 오두미(五斗米)의 녹봉을 위해 그런 사람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다 하고는 즉시 인끈을 풀어 던지고 전원으로 돌아가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짓고 한가로이 전원생활을 즐겼던 고사이다. 삼경(三逕)은 뜰안의 세 갈래 오솔길을 말하니, 한(漢) 나라 때 은사(隱士)인 장후(蔣詡)가 뜰에 오솔길 셋을 내고 거기에 송(松)·국(菊)·대[竹]를 심었던 고사에서 온 말로, 은사의 문정(門庭)을 뜻하는데 도잠의 귀거래사에 이것을 인용. “세 갈래 오솔길은 묵어가고 있으나 소나무 국화는 그대로구나[三逕就荒 松菊猶存]” 하였다.
[역주:18권141] 거실(巨室)
대신가(大臣家)
[역주:18권142] 상사(上舍)
진사(進士)
[역주:18권143] 음사(淫祠)
부정한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일.
(天休堂)(李公)行狀 ※
先生姓李, 諱夢奎, 字某 ※
, 慶州人。 新羅始祖赫居世佐命功臣李謁平之後也。 六代祖知仁州事諱元普, 生判官諱昇, 判官生工曹參判諱延孫, 參判生僉知中樞府事諱嵩壽, 卽先生之曾祖考也。 祖諱成茂, 官至判官, 後贈吏曹參判; 考諱仁臣, 官至主簿, 後贈吏曹判書。 妣光州潘氏, 節度使諱熙之女也。
以正德庚午二月初六日, 生先生于京都白岳山下。 生而異凡, 風骨秀爽。 生未數歲, 母之私【姊妹之夫】宗室興寧副正無嫡子, 取以撫養, 將託後事。 習語之時, 卽知讀書, 年甫十歲, 已通大義, 搢紳、先進來見者, 皆奇之。 十三歲, 入學, 訥齋朴先生時爲學官, 深加嘆賞曰: “他日必爲國器。” 金相公某, 寓于先生比舍, 一見而異其爲, 以其子妻之, 時年十六。 弱冠, 丁外憂, 喪制一遵《朱文公家禮》, 廬墓三年。
庚寅歲, 養母卒, 先生念保育之恩義, 服齊衰三年, 守墓于高陽, 哀慕以誠。 思齋金相公適家食于同里, 聞而嘆服, 就與之語, 尤加敬重, 因與往來不絶。 每論當代學者, 必稱先生曰, “氣宇之宏, 天分之高, 非人人所及”云。 服闋, 又丁內憂。 連遭大喪, 氣力柴盡, 人恐其不能起, 幸得支持, 以至免喪。 與兄弟分財時, 必辭多取少。 有一兄未有室家, 先生分與以所占之田曰: “兄於昆弟中最窮, 且無室家故, 以此周急爾。” 凡得玩好, 昆弟有欲者, 則不待發言而先與之, 無一毫吝惜之意。 其事養父, 誠孝備至, 耳目之娛, 心志之樂, 必爲之致, 人以爲難焉。
庚子歲, 中生員試, 其在泮宮, 聲譽甚盛, 爲儕輩所推重。 館中之議, 必待先生主張乃定。 一時名士, 輻輳于家, 車馬盈門, 無虛日, 非其所樂也。 仁廟初, 館中年少, 爭相高論, 先生憂之, 遂不居泮。 高論之士, 未幾皆敗。
甲辰歲, 興寧正卒。 先生執喪如親子, 士大夫弔者, 塡溢街巷。 初, 興寧有庶子四人, 皆頑嚚無狀, 興寧不子之, 使之足不及門。 先生常從容規諫, 諭以天性之親, 興寧意稍解。 至是, 先生以爲養父母於吾, 恩同所生, 喪葬祭祀, 固當盡誠, 以報萬一, 但以異姓不合承重, 當屬庶子。 乃招庶子而勖之曰: “養父平日, 不有汝輩, 使我承重, 今雖不可相負。 但旣有繼姓之子, 而使異姓奉祀, 於義未安。 汝宜改行易慮, 敬主其祀, 毋使先人含恨於地下。 若其粢盛器皿, 則我當辦具, 不煩於汝。” 庶子皆感泣, 同廬墓側。 三年之後, 田庄臧獲, 不依國典分數, 而優給庶子。 至於財産, 則任其自用, 一毫不取曰: “汝等飢寒則吾誰與足?” 一門咸嘆其不可及。 庶子輩始則感其義, 旣而溪壑無厭, 紛爭不已, 糜費無節。 或死於桎梏, 或至於流離, 先生亦無如之何。
先生聘家之業在保寧, 先生素厭城市, 遂棄科業, 浩然歸田, 時丁未年也。 所居有園林水石之勝, 闢一書室, 極其蕭灑。 扁曰“天休”, 因以自號。 堂前開小池, 受山泉, 多栽花草。 嗒然獨坐, 或至夜深, 每有意會, 輒發於歌詠。 摸寫桃源圖及以聽松所書《歸去來辭》, 掛之左右, 翫賞之餘, 悠然自怡。 常慕巢、許之洗耳, 夷、齊之採薇, 元亮之三逕, 有曠世相感之意。 其作歌詞, 格高意遠, 時人多傳其曲。
居家日用或窘, 而恬不介意。 妻金氏亦治內有法, 克順其志, 先生敬重焉, 閨門之內, 甚和且整。 或勸殖貨爲子孫計, 先生曰: “不求聞達, 閒臥林泉者, 只爲省慾頤神, 安過一生而已。 古之君子, 終身貧窶, 不免飢寒, 尙有樂天知命者。 如我則雖不優足, 苟非凶年, 不憂朝夕。 豈可更以殖貨, 煩吾慮耶? 吾子孫, 若非不肖, 則如我足矣, 如其不肖, 多田何益?”
癸亥春, 伯兄卒于京城。 先生適抱疾奔喪, 傷慟之餘, 氣力頓憊, 葬後還鄕。 至夏疾作, 六月某日卒, 享年五十四。 一鄕之人, 無尊卑、無少長, 匍匐臨喪, 如服期功, 累日不去。 只 ※如牛童走卒, 亦不忍食肉。 皆曰: “賢者逝矣。” 舂不相杵, 野無農歌者踰月。 先生天資夷曠, 風神高亢, 富貴榮達, 不動其心。 其少也, 外舅金公欲官之, 先生拒不受, 請官其兄, 金公義而許之。 其後, 銓曹欲薦其賢, 有執友爲郞者, 言于同僚曰: “我知某之心, 必不肯屈, 而徒益其名。 名者, 彼之所惡也。 何必益其所惡哉?” 議遂沮。 時人高先生之志操, 而服其友之知心也。
先生之子女旣長, 權貴多有求婚者, 先生善爲之辭, 終不應諾。 常曰: “連姻巨室, 非安分知命者也。” 父 ※兄早逝, 孀婦食貧, 先生撫其子女, 無異己出, 取一女一子, 辦其裝資, 及時婚嫁, 使得其所。 其待客也, 或以麴糵聲色爲娛, 若託興放意者, 而至於獨處時, 則止酒簡色, 終日湛然。 其歸保寧也, 妻金氏以其母夫人老病, 不忍別, 故後先生歸。 先生獨處十二年, 不畜姬妾。 有故舊李上舍巴 ※男, 愛其庶女, 欲託于先生, 垂泣請之。 先生固辭, 或問其故, 答曰: “如其善則固好, 如其不善, 棄之則爲負故人, 不棄則傷我家道。 吾不知賢否, 故不敢許也。”
先生胸中, 涇渭甚明, 少所許可, 而不形於辭色。 其接人, 不擇貴賤、賢愚, 應酬不倦, 言笑可親, 賓客常滿座, 各得其歡心。 鄕人有爭鬪者, 必開陳善誘, 懇懇不已, 人感其誠, 多有化者, 雖冥頑者, 亦不敢肆其惡。 或作傷風敗俗之行者, 若念先生, 則必惕然曰: “李生員無乃知吾所爲耶?” 小民或陷於罪罟, 或濱於患難, 必盡力營救, 使之得所, 以故善者好之, 不善者不惡之。 上自士夫, 下至編 ※氓, 得一美食, 必先來獻, 爭具酒食, 冀其一臨, 其得人愛敬如此。
其於異端之書, 必深排之。 常議風水之說曰: “人之死也, 精神已散, 血脈已渴, 所遺形骸, 若枯木死灰耳。 安得以山川之吉凶, 爲禍福於子孫哉? 親死之後, 所可致誠者, 惟祭祀耳。 若葬地則但卜其家後山, 可也。 生於是乎居, 死於是乎葬, 不亦宜乎?” 識者以爲確論。 最惡佛氏及巫覡事, 里中亦絶淫祠, 妖僧、怪巫, 不得接迹於其閭。
只有一子, 未嘗嚴誨, 而觀瞻之際, 自不得放心。 其子嘗曰, “生平侍側, 不聞厲聲, 而其威儀不敢仰視”云。 仁廟之昇遐也, 杜門謝客, 仰天搥胸, 悲痛者累月, 作詩傷之。 詩中有曰:
“東方一千載,
皇天生舜、禹。
朝野共傾歡,
至化期朝暮。
大訃一夕播,
厥疾由哀慕。
御極未踰年,
天意終難曉 ※。
歡心變惻慟,
臣民如喪父。
士生欲何爲,
盛事無由覩。”
以某月日, 葬于某坐某向之原。
先生有一男一女: 男曰希參, 娶縣監申某女, 生某某; 女適士人趙擥, 生某。 嗚呼! 先生天品旣高, 早有遠識, 氣度超俗, 藐視大人。 臨死從容, 不動聲氣, 而思慮出人意表。 有好善嫉惡之心, 而未嘗露其圭角; 有輕世傷俗之意, 而未嘗言及時事。 不爲皎皎之行見知於世, 而濁名自不加焉。 其生也一鄕尊之, 其死也一鄕哀之, 因其外, 亦可想其中矣。 先生之子希參與珥遊, 故謹志其所聞如此 ※。
[교주:18권92] (天休堂)(李公)行狀
초1·초국2·중규1·중공2에는 〈李上舍行狀〉.
[교주:18권93] 某
초1·초국2·중공2에는 공란으로 두었음.
[교주:18권94] 只
두주에 “只疑至”.
[교주:18권95] 父
두주에 “父疑誤”.
[교주:18권96] 巴
두주에 “巴疑己”.
[교주:18권97] 編
초1·초국2·중공2에는 “徧”, 중규1에는 “編”. .
[교주:18권98] 曉
두주에 “曉疑喩”.
[교주:18권99] 此
초1·초국2·중규1·중공2에는 뒤에 “李珥謹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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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