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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쪽
나는 어릴적에 뉴욕시 브루클린의 벤손허스트 구역에서 살았다.
331쪽
생물학에는 반복설이라는 것이 있다. 반복설의 핵심 내용은 개체 하나의 발생과정이 해당종이 겪어 온 진화의 전과정을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나는 개개인의 지적 성숙과정에서도 반복설이 성립한다고 믿는다
339쪽
보츠와나 공화국 칼라하리 사막에 있는 !쿵!kong 족도 은하수를 그들 나름대로 설명할 줄 안다. 그들이 사는 위도에서는 은하수가 사람의 머리 위에 떠 있다. 그들은 하늘이 거대한 짐승이고, 우리는 그 짐승 뱃속에서 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머리 위의 은하수는 그 짐승의 등뼈이다.
340쪽
그래서 그들은 은하수를 '밤의 등뼈'라고 부른다. 하늘의 모닥불이나 은하수 등뼈 같은 비유적 해석들은 대부분의 인류 문화에서 점차 다른 생각들로 대체 되어 갔다.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 그 막강한 존재들이 다양한 이름의 신으로 승격됐다.
341쪽
헤라의 유방에서 힘차게 뿜어져 나온 젖이 밤하늘에 흘러서 빛을 내는 띠가 됐다고 한다. 서구인들이 은하수를 부를 때 쓰는 '젖 길 Milky way'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어쩌면 이 신화에는 하늘이 지구를 기른다는 통찰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342쪽
오랫동안 자연에 대한 종교의 피상적인 해석이 자연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가로막아왔다. 수천년 동안 인류를 억눌러 온 생각은 이 우주가 눈에 보이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신 또는 신들이 실을 당겨 조종하는 꼭두각시 연극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2,500년 전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깨달음의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이 깨달음의 진원지는 사모스섬이었다. 그리고 동부 에게 해 주변의 섬과 해안가에서 번성하기 시작한 그리스령의 식민지가 이 깨달음의 진앙이었다. 배들의 왕래가 활발한 무역의 중심지에서 모든 것이 다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생각나기 시작했다. 인간과 다른 동물이 원래는 아주 단순한 형태에서 발생했다는 생각도 태동했다. 질병은 악마나 신이 만든것이 아니고 지구는 단지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사고의 혁명을 통해서 사람들은 혼돈에서 질서를 읽어 내기 시작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태초에 '형태가 없는 '혼돈이 있었다고 믿었는데 그 내용은 창세기의 구절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343쪽
변덕스러운 신들이 다스리는 예측 불허의 세상이 자연이라는 그들이 사상과 일치했다. 하지만 기원전 6세기에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사조가 등장했다. 고대 이오니아인들은 우주에 내재적 질서가 있음으로 우주도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자연현상에서 볼 수 있는 모종의 규칙성을 통해 자연의 비밀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연은 완전히 예측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자연에게도 반드시 따라야할 규칙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이렇게 훌륭하게 정돈된 질서를 "코스모스"라고 불렀다.
하지만 왜 이오니아에서 특별할 것도 없는 동부 지중해 구석의 전원적인 해협과 섬에서 시작되었단 말인가?
344쪽
이오니아는 섬들을 중심으로 발달한 세계로 섬마다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섬생활에서 겪게 되는 고립은 비록 불완전할지라도 다양성을 가져다 주었다. 섬들의 사회적, 지적 다양성은 자유로운 탐구를 가능케 했다. 이오니아인들은 한 문명의 중심지가 아니라 여러 문명이 교차하는 길목이었다.
345쪽
동부 지중해 연안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위대한 문화를 포함하여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의 문화가 한데 만나서 교차 배양되던 곳이었다. 그리고 각종 편견, 다양한 언어, 각기 다른 문화에 배경을 둔 사상 그리고 수많은 신들이 각축하여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주고 있었다.
346쪽
이런 의심을 바탕으로 신을 가정하지 않고 세상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깨달음이 바로 이 지역에서 일기 시작했다. 과학은 이오니아에서 태어났다. 인류 사상사에서 위대한 혁명이 기원전 600년과 400년 사이에 일어났다. 혁명의 열쇠는 손이었다. 이오니아의 뛰어난 사상가들 중에는 항해사, 농부, 직조공의 자식들이 있었다.
347쪽
이오니아에서 첫번째 과학자는 밀레투스의 탈레스였다. 탈레스는 피라미드 그림자의 길이와 수평선 위에 떠오른 태양의 고도를 이용하여 피라미드의 높이를 쟀다. 오늘날에도 달 표면에 있는 산들의 높이를 잴 때 똑같은 방법을 쓴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을 먼저 증명한 인물로 통한다. 예를 들어 이등변 삼각형의 두 밑각이 같다는 정리들 말이다.
348쪽
따지고 보면 탈레스는 유클리드로 연결되고, 유클리드는 아이작 뉴턴으로 이어진다. 왜냐 하면 뉴턴이 1663년 스투어 브리지 박람회에서 구입한 책 중에 뉴클리드의 '기하학원론'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스투어브리지에서 산 책이 뉴턴과 탈레스를 이어지고 결국 현대 과학기술을 탄생시킨 중대한 계기를 낳았다. 탈레스는 신들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세상을 이해하혀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바빌로니아인들처럼 그도 세상이 한때 물이었다고 믿었다.
349쪽
신들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물리적 힘의 결과로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이야말로 당시 사고의 근본을 뒤흔드는 발상의 대전화이었다. 탈레스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에서 이오니아로 가져온 천문학과 기하학등의 새로운 씨앗이 그곳의 비록한 토양 덕분에 튼실한 싹을 틔우고 과학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350쪽
탈레스의 친구이자 동료인 밀레투스의 아낙시만드로스는 연구에서 실험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수직으로 세워놓은 막대의 그림자가 이동하는 것을 관찰하여 1년의 길이응 정확하게 측정했고, 계절의 시작과 끝도 정확히 알아냈다. 그는 그리스에서 최초로 해시계를 만든 사람이었고 당시까지 잘 알려진 세상을 지도로 표현하고 별자리의 모양을 나타내는 천구도를 만든 최초의 인물이기도 했다. 생명 자연발생설을 제창했다.
351쪽
생명은 진흙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했으며 최초의 동물들은 가시로 덮힌 물고기라고 말했다. 이 물고기의 후손 중 일부가 물을 버리고 뭍으로 올라오고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변이를 통해 다른 동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주장을 보고서 "아낙시만드로스는 탈레스 이상으로 이끊임없는 활동들이 신성한 분의 뜻에서 비롯됐음을 생각지 못했다."라고 슬픈듯이 탄식했다.
352쪽
수도 주위 6km 성벽, 요새구축, 1km 터널구축, 수로 확보, 토목기술 우수성, 이오니아인들의 실용적 능력, 해적선이 잡아온 노에로 공사
당시는 테오도루스의 시대였다. 테오도루스는 그 시대 공학기술의 거장이며, 열쇠와 자물쇠, 자, 목수용 곱자, 수준기, 지렛대, 선반, 청동주조기술, 중앙난방법 등의 발명가로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널리 존경받는 인물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근처의 코스cos섬에서는 히포크라테스가 그의 의학전통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의술이 물리학과 화학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353쪽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이오니아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은 실험의 기법들과 함께 그리스 전역을 거쳐 이탈리아, 시칠리아섬까지 퍼져 나갔다. 아무도 공기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바람이 신의 숨소리라고 생각했지, 공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적인 물질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공기에 대한 실험을 최초로 했다는 기록에 나오는 인물ㅇ느 기원전 450년경에 활약했던 엠페도클래스라는 이름의 의사이다.
354쪽
엠페도클래스는 아낙시만드로스와 데모크리토스와 같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다윈의 위대한 생각의 일면을 다윈보다 앞서 구상할 수 있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앰페도클래스가 사용한 실험도구는 일상에서 수세기동안 사용해 오던 가재도구였다. 물시계 또는 물도독(국자대용으로 쓰던 부엌용구)실험에서 공기의 존재를 설명했다. 대롱끝을 손가락으로 막은채 물도독을 물에 넣으면 그 안에 들어있던 공기가 물이 용기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다.
356쪽
원자의 존재에 대한 이러한 낌새와 단서가 데모크리토스에 와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그는 북부 그리스, 이오니아의 식민지인 아브데라출신이었다. 데모크리토스에게 삶은 세상을 즐기고 온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해는 곧 즐거움이었다. 그는 '축제없는 인생은 여관이 없는 긴 여정과 같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수많은 세계들이 우주에 두루 퍼져 있는 물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태어나 진화를 거쳐 쇠퇴하게 된다고 믿었다.
357쪽
우주의 어둠속을 홀로 헤매는 세계들이 있는가 하면 여러 개의 태양이나 달을 동반한 세계들도 있다고 상상했다. 우리가 무엇을 지각하는 것도 순전히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다. 데모크리토스가 만들어낸 '원자 atom'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자를 수 없다'라는 뜻이다. 그는 물체도 복잡하게 얽힌 원자의 집합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그렇다는 것이다. '원자와 빈공간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했다.
358쪽
원뿔 또는 피라미드로비 계산방법 고안, 그는 은하수가 수많은 별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별들의 집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359쪽
이 사실을 1705년에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된 토머스 라이트는 데모크리토스의 혜안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여자, 아이,성과 담을 쌓고 독특하게 살았다. 그러나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즐거움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으며 열정의 정체와 기원에 관한 철학적 고찰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소크라테스를 만나러 아테네까지 갔지만 부끄러운 나머지 자기 소개도 못했다. 히포크라테스와 절친한 사이였으며 물질계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경외했다. 그는 독재 아래의 부유한 삶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가난한 삶을 택하겠노라 했다. 자신의 시대를 지배하던 종교를 모두 악이라 판단. 불멸의 영혼이나 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360~361쪽
오늘날 그리스 100드라크마 지폐에 그의 초상인 인쇄-높이 평가, 그가 살았던 당시에는 그의 통찰은 억압당했고, 그후 역사에서도 과소평가됐다. 신비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낙사고라스는 기원전 450년경 아테네에서 활약했던 이오니아 출신의 실험가였다. 그의 삶은 열정으로 가득찼다. 인생의 목적이 '태양, 달, 하늘에 관한 탐구"라고 했다 철저한 물질주의자- 물질이 세계를 지탱하는 근본이다. 원자의 존재는 믿지 않았다. 인간이 손 때문에 다른 동물보다 더 현명하다. 달이 밝게 보이는 것은 반사된 빛 때문이라고 이야기한 최초의 인물로 달이 차고 기우는 위상변화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었다. 자구, 달 그리고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 이 셋이 이루는 상대 배치에 따라서 달의 위상이 바뀌고 월식 현상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당시 사람들은 태양과 달이 신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태양과 별이 불타는 돌이라고 생각했다.
362쪽
펠리폰네소스 전쟁을 일으킨 페리클래스는 아낙사고라스와 절친, 철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페리클래스는 그 전쟁으로 인해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붕괴하기 시작했고, 그의 정적들에 의해 아낙사고라스는 불경죄로 투옥되었다.
이오니아인의 위대했던 전통은 그나마 200년쯤 뒤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다시 꽃을 피우게 된다. 역사나 철학 책을 보면 탈레스에스 데모크리토스와 아낙사고라스로 이어지는 그리스의 위대한 과학자들을 '소크라테스'이전의 철학자들 이라고만 간단하게 언급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363쪽
사모스와 관련된 인물들 중에서 후세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피타고라스일 것이다. 지구가 공처럼 둥글다고 추론한 역사상 첫번째 인물이었다.
364쪽
직각삼각형의 두 짧은 변의 길이의 제곱을 합한 값은 빗변의 길이의 제곱과 같다는 피타고라스의 법칙도 피타고라스 또는 그의 제자들이 발견. 현대의 모든 과학연구에서 필수적인 필수적인 수학적 논증의 전통은 피타고라스에서 시작된 것이다. '코스모스'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이도 피타고라스였다. 그는 우주를 '아름다운 저화가 있는 천체'즉 코스모스를 봄으로써 우주를 인간의 이해 범주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오니아사람들 대부분은 우주의 조화에 인간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은 관측과 실험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의 접근 방식은 달랐다. 파토고라스학파 실험주의자가 아니라 순수한 사고를 통해서 자연의 법칙을 추론해낼 수 있다고 가르친 수학자였으며 철두철미한 신비주의자였다.
365쪽
피라고라스학파는 수학적 논증의 객관성 및 확실성에 매료돼 있었으며 수학적 논증이야말로 인간 지성이 도달 할 수 있는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는 최상의 인지 세계라고 받아들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학을 통해서 완벽한 현실, 즉 신의 영역을 들여다 볼 수 있다고 여겼고,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은 완벽한 세계의 단지 투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학파는 플라톤에게 그리고 나중에는 기독교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들은 상충하는 관점들의 자유로운 대결을 허락하지 않았다.
366쪽
이 점은 모든 정통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현실이다. 이와 같은 경직성 때문에 피타고라스학파는 자신들의 오류를 고쳐 나갈 수가 없었떤 것이다. 그들은 명이 정오각형으로 구성된 정십이면체에 관한 지식을 위험한 것으로 간주했다. 정십이면체를 코스모스의 신비와 연관시켜 일반인들이알면 안된다고 비밀로 간주했다.
367쪽
피타고라스 학파는 정수를 특별히 좋아했다. 정사각형의 한 변에 대한 대각선의 길이의 비를 나타내는 그의 제곱근이 무리수로 판명되었다.. √2 는 두정수의 비로서 정확하게 표시할 수 없는 숫자로 √2가 무리수라는 사실은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통해 밝혀졌다. 피타고라스학파는 무리수를 모종의 위협적인 요소로 받아들였는데 무리수가 그들 세계관의 불합리성과 오류를 암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늘날 "irrational'이라는 단어가 '불합리'라는 두번째 뜻을 갖게 된 연유이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이렇게 중요한 수학적 발견들을 외부로 공유하지 않았고 그의 제곱근과 정십이면체에 관한 사실의 공표로 거부했다.
368쪽
피타고라스학파는 구를 완벽한 존재로여겼다. 행성들도 원형의 궤도 위를 언제나 같은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고 주장했고, 행성이 궤도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속력을 바꾸며 움직이는 것은 이해할 수 엇는 일,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피타고라스학파는 완벽하고 신비한 세계의 존재를 확신했고, 기독교도들은 이러한 생각을 쉽게 받아들였다. 이러한 초기 신학교육을 받은 케플러는 파타고라스학파의 행성등속 원운동을 설명하려고 애를 썼지만 원 궤도 운동을 포기했고, 그의 연구는 그로 인해 10년 이상 지체됐다.
369쪽
실용적 가치를 얕잡아 보는 풍조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루타르코스, 코세노폰 등도 천하게 여겼다.
370쪽
기능인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통념과 천시 때문에 전도 유망하던 이오니아의 실험중심적인 방법론은 그후 2000년 동안이나 버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과학사를 연구한 벤저민 패링턴은 고대과학의 쇠퇴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오니아의 중상주의적 전통은 과학의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노예 경제의 발전도 동반했다. 아테네인들의 민주주의에 관한 온갖의 대범한 생각들은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해당됐지 구성원 전부를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노예의 정체성은 손을 사용하는 그들의 육체노동에 있었다. 육체노동은 바로 노예임을 뜻했다. 과학실험도 육체노동이었다. 과학을 할 만큼의 물질적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사람들은 일부 사회에서 체면치레로 'gentle`men'이라고 불러주던 노예주들뿐이었다.
371~372쪽
기원전 7세기부터 5세기까지의 이오니아 출신 과학자들과 그외 그리스 과학자들-탈레스, 아낙시만드로소, 피타고라스, 아낙사고라스, 엠페도클래스, 히포크라테스, 데모크리토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 아리스타로코스, 아르키데메스, 에라토스테네스, 히파르코스, 루크레티우스-이후 기원전 1세기부터 과학자들의 수가 급감, 그리스과학은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걷는데 기원전 600년경 이오니아의 위대한깨달음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중상주의의 전통은 200년 후에는 노예제도를 통하여 과학적 사고의 몰락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었다. 중국 고유의 천문학도 1280년경 절정에 이르렀지만 사대부 계급인 엘리트 계층의 경직성과 자식인들의 기술에 대한 반감으로 급속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374쪽
파타고라스와 플라톤은 코스모스가 설명될 수 있는 실체이고 자연에는 수학적인 근본 얼개가 있다고 가르쳤지만, 자신들의 입지를 불안하게 할 소지의 사실들이 유포되는 것을 억압하고 과학을 소수 엘리트만의 전유물로 제한하고 실험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주고 신비주의를 용인하고 노예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외면함으로 인간의 위대한 모험심에 큰 좌절을 안겨주어 과학의 발전에도 퇴보를 가져왔다. 과학탐구의 이오니아적 접근 방법은 일부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학자들을 통해 후대에 전해지면서 재발견되기도 했다.
375쪽
현대도 미신에서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지구가 하나의 행성이며 지구인은 우주시민이라는 생각은 피타고라스 이후 3세기가 지나 뒤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아리스타르코스에서 시작된다. 그는 태양이 행성계의 중심이고 모든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첫 번째 인물이다. 그는 월식 중에 달의 표면에 드리워지는 지구의 그림자를 보고 태양은 지구보다 훨씬 크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추론했다.
376쪽
그는 지구 궤도 중심에 태양을 놓았다. 그리고 지구가 하루에 한번씩 자전하는 동시에 태양을 1년에 한번씩 공전한다고 가정했다. 갈릴레오는 코페르니쿠스를 태양 중심 우주관을 복귀시킨 사람이며 입증시킨 사람이라고 기술했지 태양 중심 우주관의 창시자라고 하지 않았다. 아리스타르코스와 코페르니큐스 사이에 있었던 1,800년이라는 긴세월이 있었다.
378쪽
별들도 우리의 태양과 같은 존재일 것으로 생각한 사람은 아리스타르코스였다. 망원경이 발명되기 전에는 가까운 별의 시차 측정도 감지할 수 없었다. 19세기 들어와서야 비로소 별의 시차 측정이 이루어 졌다. 일단 별의 시차가 알려지면 그리스 인들이 발명한 기하학을 이용하여 누구나 그 별까지의 거리를 쉽게 계산해 낼 수 있다. 이렇게 측정한 거리가 가장 가까운 별이라고 해도 수 광년이나 된다.
380족
아리스타로코스가 우리에게 남겨준 남겨준 위대한 유산은 지구와 지구인을 올바르게 자리 매김한 것이다. 지구와 지구인이 자연에서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통찰은 위로는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보편성으로 확장됐고, 옆으로는 인종 차별의 철폐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통찰이 성공하기까지 인류의 역사는 반대쪽으로 흐르는 물결을 끊임없이 거슬러가며 저항해야 했다. 지구와 지구인을 우주에서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는 일이 천문학, 물리학, 생물학, 인류학, 경제학, 정치학의 발전에 원동력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에 대한 깊은 통찰의 결과가 완강한 사회적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러한 통찰이 천문학 이외에 분야에 초래하게 되는 사회적 영향의 심각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미주리주 출신 할로 섀플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구상성단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381쪽
구성상단에서 특정한 패턴으로 밝기가 변화하는 별을 찾아내고 그 변광주기에서 그 별의 원래 밝기를 추정한 다음 겉보기 밝기와 비교함으로써 거리르 계산해 내는 것으로 하위언스가 사용했던 거리 측정의 방법이기도 했다.
382쪽
1915년 섀플리는 "태양계는 은하의 중심이 아니라 은하의 외진 변방에 있다."라는 참으로 대담한 주장을 펼쳤다. 이제 우리는 태양계가 은하의 중심핵으로부터 약3만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다고 확실하게 알고 있다. 은하수 은하 내부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태양계의 현주소는 나선 팔의 가장자리이다. 별들의 밀도가 주위보다 좀 낮고 외치고 후미진 곳이다.
383쪽
에드윈 허블이 1924년 드디어 M31에서 변광성을 찾아냈다. 이러한 변광성들의 평균 겉보기 밝기와 원래 밝기를 비교하여 그는 M31이 어림잡아 200만 광년은 조금 넘는 매우 먼 거리에 있다고 규명했다. 안드로메다자리에 보이는 나선형 성운M31도 하나의 은하였다.
384쪽
하늘에는 훨씬 더 흐리게 보이는 성운들이 많이 널려있다. 더 흐리다는 것은 더 멀리 떨어져 있음을 뜻한다. 코스모스의 광막한 어둠속에는 1000억개가 넘는 엄청난 수의 은하들이 널리 흩어져 있는 것이다.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기 시작한 이래 인류는 코스모스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고저 노력해왔다. 인류라는 종의 유아기, 우리의 조상들, 고대 그리스로 와서 이오니아의 과학자들 시대, 현대에 와서도 우리는 '우주에서 우리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우리는 누구란 말인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고,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행성에 살고 있음에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태양이라는 이름의 그 별은 은하의 변방, 두 개의 나선 팔 사아에 잊혀진 듯이 버려져 있는 대단하지 않은 존재로 우주의 후미진 구석에서 겨우 십여개의 구성원을 거느린 작은 은하군의 그저그런 '식구'일 뿐이다.
그런데 우주에는 지구의 전체 인구보다 많은 수의 은하들이 널려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우주적 관점을 갖게 되기까지 우리는 하늘을 보고 머릿속에서 모형을 구축해 보고 그 모형에서 귀결되는 관측 현상을 예측하고 예측들을 하나하나 검증하고 예측이 실제와 맞지 않을 경우 그 모형을 과감히 버리면서 모형을 다듬어왔다. 생각해 보아. 태양은 벌겋게 달아오른 돌멩이였고, 별들은 천상의 불꽃이었으며 은하수는 밤하늘의 등뼈였다.
386족
이론적 모형을 이렇게 지속적으로 구축하고 또 파기하는 과정을 뒤돌아보면서 우리는 인류의 진정한 용기가 과연 어떠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여태껏 인류가 멋모르고 부렸던 우주에서의 특권의식에 먹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코스모스를 제대로 이해해야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