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 선생님 댁에 다녀와서
김미지
방학이라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갔다. 반복되는 하루를 보내다 점심 약속이 잡혔다. 모처럼 만에 문인협회 회원들과 이문열 선생님 댁에 방문하는 일이었다.
하루 전부터 혼자 마음이 분주했다. 세차를 하고 반찬거리가 뭐가 있나 냉장고를 열었다. 지난 겨울에 담근 김치를 가져갈까 하다가 너무 익었다 싶었다. 마트에서 김치와 장아찌도 조금 샀다. 식구가 많다 보니 손이 커 반찬을 하면 오래 두고 먹을 양이 됐다. 냉장고에 쟁여져 있던 도라지무침, 파김치를 반찬통에 옮겨 담고 작년 가을에 담근 오미자청을 조금 챙겼다. 함께 먹고 마실 생각을 하니 혼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이 따가운 한여름 날이었다. 이승주 선생님, 김연화 선생님과 함께 차를 타고 부악문원으로 갔다. 조정호 선생님과 조성희 선생님이 야채와 고기, 김치, 복숭아를 준비해오셨다. 먼저 와 계신 김신영 선생님은 흑보리밥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런 자리를 여러 번 함께 해 본 것도 아닌데 금새 점심상이 차려졌다. 조정호 선생님과 김대희 선생님이 고기를 굽고 다른 선생님들은 식기들과 야채 손질을 하며 함께 준비한 식사라 그런지 마음이 한결 편안한 자리가 된 것 같았다. 이문열 선생님과 사모님 그리고 문인협회 회원 선생님들과 문학수업을 함께 듣는 이승주 선생님 모두 한 자리에 둘러앉아 점심식사를 했다. 창 밖으로는 푸른 잎사귀들이 살랑거리고 어느 틈으로 풀냄새 고인 바람이 식탁 위로 날아들었다. 조용한 목소리로 나누는 담소는 악기 소리처럼 잔잔하게 흘렀다. 이 자리 이 시간에 만난 인연들이 특별해지는 순간이었다.
자리를 이동해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로 갔다. 사무장님과 사모님이 준비해주신 차와 과일을 먹으며 오랜 시간 이문열 선생님의 손길이 닿았을 공간에 대해 생각했다. 낡은 고서와 역사책들이 숨죽이고 말을 걸어오는 듯도 했다. 커다란 통창으로는 마당이 한 눈에 들어왔다. 짙고 푸른 나무와 여리고 연한 새순이 함께 얽혀 있는 마당이었다. 자그마한 모과가 올망졸망 영글고 이름 모를 들풀과 정원수들이 가꿔낸 작은 숲 같았다.
부악문원은 많은 문인들이 거쳐간 곳이다. 스스로 발을 묶고 생각을 정리했을 것이다. 여러 개의 방을 지나쳐 갈 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이 곳에서 자라났을까 생각했다. 그 이야기들이 남긴 자취로 뭉근한 향기를 간직한 부악문원이었다.
괜찮은 기다림으로 만나자
김미지
꾸덕함을 닮은 하루는
깊은 퇴적층의 단면이다
바람이 가져다 놓은대로 쌓인
한 번 나였던 적 없는데
그대로 나인 것처럼
울지 않겠다고 꾹 참던 날은
누구에게든 들키고 싶은 슬픔
눈물은
흔한 기대와 욕심을 지운다
쏟아지는 빗줄기 세공에도
절벽은 주장이 있어 반듯하지는 못한 것이다
침울함으로 빚는 낭떠러지
깎아내고 부순 하루가 적립되는 곳에서
결국엔
괜찮은 기다림으로 만나자
후회의 색채는 무색이다
김미지
기나긴 침묵 끝에
밖으로 꺼내기까지
발끝부터 통증이었을 것이다
하늘길을 건너고 바다를 건너
이렇듯 먼 곳에라야 풀어 놓을 수 있는
짐보따리 같은 걸
결국엔 내가 꿰어야 한다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다
너의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탄식 역시
도리없이 엮어야만 했다
계절의 나이테가 색을 잃고 촘촘해질수록
썩어 양분 되었기를 믿고 있었다
먼 곳에서 들리는 폭죽 같은 후회
나는 잊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발 붙이지 못하고 떠돌았던 그 시절은
극성맞은 파도처럼 사정없이 엎어졌다가 사라졌다
생각에도 구분 지을 수 있다면 발끝부터 색이 바랬다
너는 통증의 시절을 거꾸로 견뎠다면
오래 곱씹어도 후회의 색채는 무색이다
알부카 스파릴리스
김미지
조용한 밤, 유영하듯
너는 푸른 촉수를 뻗는다
나아가다 멈추고 나아가다 멈춘 자리
진물이 흐르고
옹이가 진다
코 끝에 번지는 미끈한 풀내음
적막한 하늘에 빗금을 긋고
생각은 또아리를 튼다
쓰다 지우고 쓰다 지운 자리
물 때 같은 너울이 진다
구부렁한 문자
파릇한 입새처럼 돋아나다가
까무룩 눕는 밤
비밀스럽게 뜨거웠다가 재로 남은 문장 위로
횟대처럼 솟은 줄기 끝에
무심한 박하향이 터진다
알부카 스파릴리스 ㅡ 스프링 골풀, 동그랗게 끝을 말며 자라는 식물. 꽃은 박하향이 난다.
나의 궤적은
김미지
잘못 찍은 발자국들로 그리는 나의 궤적은
마흔 해 동안 부지런을 떨었더니 꽤나 길이 들었다
거품 빠지고 수분 적당마른 나는 조형하기 좋은 재료
빗살무늬, 파초무늬 각을 뜨고 응달에 말린 한참 뒤
언제 생겼는지 모를 반점 하나 발견했다
예측 불가능은 생의 기억
공든 탑은 뒷통수를 맞고 무너지기 마련
반점은 나를 통하는 들숨과 날숨
숭숭 뚫린 구멍으로 불어넣은 지난꿈들은
윤기 반지르한 유약을 덮어 전시되는 것으로 뭉뚱그려진다
다음이 궁금해서 버틴 뒷장에는 실금 하나가 자라났다
완성 뒤엔 내일이 없다지 그래서 나는
오늘의 미완성에 발자국 하나를 더 보탤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