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들려주는 성인이야기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이 친구의 이름은 김대건 안드레아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함께 신학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방 신부가 김대건을 소개했어요. “나는 최양업 토마스야. 반갑다.” “난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라고 해.”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세 소년을 보며 모방 신부는 마음이 든든했어요. “모두 같은 나이니까 친구처럼 지내며 서로 도와 열심히 공부하기 바랍니다.”
모방 신부는 장차 조선 천주교회를 이끌어갈 방인 사제 양성에 힘을 기울였어요. 모방 신부는 1836년 부활절을 전후하여 교우촌 순방차 은이 공소를 방문하게 되었어요. 그는 그곳에서 김대건을 만나 세례를 주었어요. 그리고 신앙심이 깊고 남달리 비범한 데가 있어 보이는 김대건을 눈여겨보고는 그를 제자로 삼기를 원했어요. 모방 신부의 뜻을 알고 김대건과 그의 부모는 기쁜 마음으로 이를 승낙했어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의 장남으로 태어났어요. 아명은 제복이고 족보명은 지식이며 관명이 대건이지요. 그의 집안은 몰락 양반의 가문으로, 천주교와 관계를 맺은 것은 그의 증조부인 김진후 때부터였어요.
1827년 정해박해 때 7살 난 김대건은 할아버지 택현과 아버지 제준을 따라 서울을 거쳐 경기도 용인 한덕골로 피신했어요. 그리고 유학을 가기 전 15세 때까지 이곳에서 할아버지에게 천주교리와 한학을 배우며 자랐어요. 1836년 7월, 김대건은 서울로 올라와 그보다 너댓 달 앞서 뽑힌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부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어요. 모방 신부는 박해 때문에 국내에서는 조선인 성직자 양성교육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신학생들을 파리외방선교회 동양대표부가 있는 마카오로 보내기로 했어요. 그는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시키기 전에 반 년 이상이나 라틴어와 해외 유학에 필요한 기본 지식을 직접 가르쳤는데, 세 소년 모두 훌륭하게 잘 익혀나갔어요.
새 신학생들은 신학 공부를 위해 1836년 12월 2일 서울을 떠나기 전, 앞으로 공부하게 될 신학교 교장에게 순명할 것과 교구 신부가 되어 열심히 봉사할 것을 서약했어요. 모방 신부는 이 소년들을 변문까지 안내하고 그곳에서 샤스탕 신부를 모셔올 진실한 교우로 정하상, 현석문, 조신철, 이광렬 이렇게 네 사람을 뽑았어요. 12월 28일 저녁 무렵에 일행은 무사히 변문에 도착했어요. 이곳에서부터는 샤스탕 신부를 안내한 중국인 안내원들이 세 신학생들을 안내했어요. 이들은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만주와 몽고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도착했어요. 출발할 당시에는 세 신학생들이 공부할 장소가 결정되지 않았어요. 파리외방선교회 신부들은 선교방침에 따라 이 조선 신학생들을 단시일 내에 공부를 마치도록 할 최선의 방도를 검토했어요. 그리하여 파리외방선교회 동양 대표부 안에 조선인 신학교를 세워서 이들을 교육하기로 했어요. 이곳에서 이들은 신학, 철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새로운 서양 학문과 프랑스어, 중국어, 라틴어를 배웠어요.
그러나 이들의 공부 과정은 그리 순탄치 않았어요.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인하여 1837년 8월과 1839년 4월,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해야만 했어요. 그때마다 신학생들은 그곳에서 몇 개월 동안 공부하다가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했는데, 이 과정에서 맏형격이었던 최방제가 열병에 걸려 결국 1838년 11월 27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김대건의 건강 역시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키는 컸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영양이 부족하여 어릴 때부터 가슴앓이와 위장병, 요통, 두통을 달고 살았지요. 그래서 얼굴은 황달에 걸린 사람처럼 늘 누렇게 떠있었고, 머리카락도 하얗게 탈색되었어요. 최방제를 잃게 되자 신부들은 김대건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더 커졌어요.
두 신학생은 1841년 11월 철학 과정을 마치고 신학 과정에 들어갔다. 1842년 아편 전쟁이 끝날 무렵, 프랑스 함대의 함장 세실이 마카오 대표부를 방문했어요. 그는 조선 원정 계획을 알리면서 조선인 신학생 한 명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요청했지요. 두 신학생은 아직 수학 중이었지만, 몇 년째 조선 교회로부터 소식이 끊겨 있었던 터라 대표부 신부들은 이번 일을 하느님이 주신 기회로 여겼어요. 김대건은 조선 포교를 지망한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2월 15일 에리곤호를 타고 마카오를 출발했어요.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1842년 8월 29일 중국이 영국과 남경조약을 체결하자 조선 출동을 중단하고 마닐라로 돌아왔어요. 그래서 김대건은 강남 교구장 주교의 도움을 받아 중국 배를 타고 귀국 길에 오르게 되었어요.
10월 2일 상해를 떠난 그는 10월 23일 요동 땅에 도착하여 백가점에 머물면서 세 차례에 걸쳐 의주 변문을 통한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어요. 그리하여 1843년 4월부터 거처를 소팔가자로 옮겨 최양업과 같이 신학 공부를 계속했어요. 이곳에는 1841년부터 페레올 신부가 머물고 있었어요. 김대건은 1843년 12월 양관에서 있은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에 참석한 후 주교의 지시를 받고 1884년 2월 두만강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했었지만 실패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그해 12월 최양업과 같이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부터 부제품까지 받았어요. 그들은 사제품의 법정 연령인 만 24세 미만이었으므로 사제품을 받지는 못했어요.
김대건은 1845년 1월 1일 변문을 무사히 통과하여 1월 15일 드디어 서울에 도착했어요. 김대건은 본인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교우들에게 부탁했어요. 임시 귀국이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데다가 중병까지 앓으면서 어머니를 만나면 마음이 약해질까봐서였지요. 귀국 후 3개월 동안 그는 먼저 선교사들이 거처할 집을 석정동에 마련했어요. 페레올 주교를 모시러 가시 위해 배 두 척도 구입했고요. 또 14세 된 두 명의 예비신학생을 선발하여 가르쳤고, 조선전도를 작성하여 마카오로 보냈어요. 그리고 현석문 등이 수집해 온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도 작성했어요. 수개월에 걸쳐 오직 주교와 외국인 선교사들을 입국시키기 위한 만반 준비를 갖추는 데 전력했어요. 그는 드디어 주교를 모셔오기 위해 10여 명의 사공을 거느리고 해로를 통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중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했어요.
1845년 8월 17일, 상해 연안에 있는 금가항에서 김대건 부제는 조국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페레올 주교님의 집전하에 사제 서품을 받았어요.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사제가 탄생한 것이지요. 서품식을 마치자 신자들과 서양 선교사들이 그를 둘러싸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강강수월래를 했어요. 서품식을 마치고 서둘러 8월 30일에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상해를 출발하여 다시 뱃길로 귀국을 시도했어요. 이때도 폭풍을 만나 제주도 가까이까지 표류했다가 40여일 만인 1845년 10월 12일 가까스로 강경 황산포 나바위에 상륙할 수가 있었고, 드디어 서울로 잠입하는 데 성공했어요.
고국에 돌아온 김대건은 두 달 동안 경기도 용인의 은이 공소에서 어머니와 함께 은신하고 있으면서 밤을 이용하여 교우촌을 찾아다니면서 전교에 열중했어요. 그러나 곧 페레올 주교의 부름을 받아 서울로 올라와 사목 활동을 하게 되었어요. 한 자리에 모인 세 분의 성직자들은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 토마스 부제를 데려오기 위해서 여러 경로를 궁리했어요. 나라의 쇄국정책으로 인하여 경비가 삼엄하여 육로를 통한 선교사들의 입국이 불가능해지자,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에게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내렸어요. 주교의 명을 받은 그는 1846년 5월 14일 황해도지방으로 떠났어요.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토마의 입국을 위해서 주교의 편지와 입국할 때 사용할 해상지도를 가지고 백령도의 순위도로 갔지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어요. 그러나 그가 이 사명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려 할 즈음에 예기치 않은 사건이 생기고 말았어요. 때마침 그곳 관에서는 중국 배들을 쫓으려고 조선 배를 징발 중이었는데, 그들이 김대건의 배를 요구했던 거예요. 김대건은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거세게 항의했어요.
“어찌 양반의 배를 징발하겠다는 말이오!” 관헌들은 이 말에 발끈 화가 나서 오히려 김대건 일행을 체포해버렸어요. 그리고 그의 짐을 수색했는데 예수성심상과 성모자상, 언문으로 된 기도서가 나오자 곧장 이들을 해주 감영으로 압송했어요. 김대건은 체포된 이후 교우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중국인이라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러나 곧바로 그가 중국인 선원들에게 전달했던 해도와 편지가 발각되어 정체가 탄로나고 말았지요. 6월 5일에 체포된 김대건은 해주감영을 거쳐 6월 21일에 다시 서울로 압송되었고, 3개월 동안 40여 차례의 문초를 받았어요.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어요. 6년간의 마카오 유학과 4년간의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수학과 활동으로 김대건은 학식이 깊고 신학문에 대한 조예가 풍부할 뿐만 아니라, 라틴어와 불어는 물론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사실 김대건은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양 학문을 정식으로 공부하였고 여러 나라의 언어를 구사했던 거예요. 대관들은 그를 죽이기에는 국가적으로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어요. 김대건은 몇몇 대신들의 부탁으로 옥중에서 세계 지리에 관한 책을 만들었어요. 또 영국에서 만든 세계 지도를 번역하기도 했고요.
김대건 신부는 옥중에서 마카오에 있는 장상 신부들에게 조선교회의 장래를 부탁하는 편지를 썼어요. 또 페레올 주교에게 조선교회의 모든 일을 당부 드렸으며, 어머니를 보살펴 줄 것을 부탁했어요. 그리고 조선 교우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회유문을 남겼어요. 그런데 이즈음 공교롭게도 세실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가 외연도에 나타났어요. 그들은 기해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 성직자 세 분을 살해한 책임을 묻는 편지를 조선정부에 전달하고는 회답을 받으러 다시 오마 하고 돌아가버렸어요. 이 사건은 김대건의 죽음을 재촉하는 촉진제가 되고 말았어요.
“영의정 권돈인이 아뢰옵니다. 프랑스와 내통하고 있는 이런 자를 살려둔다면 장차 나라에 어떠한 위험이 발생할지 모르므로 그를 속히 처형해야만 합니다.” 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어전회의에서 김대건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형의 집행이 다음날 바로 이루어졌어요.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의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김대건은 몰려든 많은 사람들을 향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어요. “나의 마지막 시간이 다다랐으니 나의 말을 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외국인과 교제한 것은 다만 나의 종교를 위해서이고 나의 천주를 위해서입니다. 이제 내가 죽는 것은 그분을 위해서 입니다.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바야흐로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하려면 천주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알아 공경하지 않는 자를 영원한 불로 벌하십니다.”
김대건이 이 말을 마치자 형리들이 옷을 조금 벗기고, 관습을 따라 두 귀에 화살을 꿰뚫어 꽂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회칠을 한 다음 겨드랑이에 긴 막대를 꿰어서 어깨에 메고 병정들이 결진한 가운데서 세 바퀴 돌고 내려놓았어요. 그리고는 무릎을 꿇려 놓고 머리카락을 줄로 잡아매어 그 줄을 왼쪽 깃대 구멍에 꿰어 잡아당기니 머리가 번쩍 쳐들렸어요. 그래도 김대건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어요.
“너희들도 천주교인이 되어 내가 있을 곳에 오도록 하여라.” 김대건은 회자수들에게 이렇게 말하고는 목을 쭈욱 뻗으며 물었어요. “이렇게 하고 있으면 칼로 치기가 쉽겠느냐?” 그는 담담히 죽음의 순간을 기다렸어요. 12명의 회자수가 그를 에워싸고는 빙빙 돌며 춤을 추었어요. 그리고 차례로 칼을 내리치기 시작했어요. 8번째에 가서야 김대건의 목이 땅에 떨어졌어요. 병정 하나가 김대건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대장에게 보였어요. 이 때 그의 나이 26세, 그의 목이 떨어지자 형장에는 큰 뇌성과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고 해요.
[월간 빛, 2009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