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53. 키르기스스탄으로
구도승 답사길…만나는 사람도 ‘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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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산산맥 속의 평원> |
사진설명: 키르기스스탄에서 중국으로 갈 때 넘어야 하는 산맥이 천산산맥이다. 오쉬에서 출발해 중국으로 가던 중 만난 평원. 저 멀리 눈덮힌 천산산맥의 멋진 연봉을 배경으로 소와 말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2002년 9월8일)와 부하라(2002년 9월9일)를 둘러본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지난해 9월10일 역경승 안세고스님의 고향 부하라에서 다시 타쉬켄트로 돌아갔다. 타쉬켄트에서 출발해 페르가나를 거쳐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다음날(2002년 9월11일)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타쉬켄트를 떠나 페르가나에 도착했다. 페르가나 하면 떠오르는, 바위에 그려진 한혈마(汗血馬) 그림도 보지 못한 채, 서둘러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 국경으로 갔다. 준비해간 음식으로 차 안에서 간단히 점심을 떼우며, 주변 풍광을 감상했다. 드넓은 평야와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 그 사이로 우즈베키스탄에 강제로 이주당한 교포들(고려인)들이 떠올랐다.
타쉬켄트 일대엔 현재 약 25만 명의 교포들이 살고 있다.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에 살고 있던 교포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것. ‘일본과의 내통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강변했지만, 참으로 강압적인 결정이었다. 강제 이주 중 10만 명이 죽을 만큼 야만족인 조치이기도 했다. 조정래씨의 소설〈아리랑〉에 나오는 것처럼, 교포들이 도착한 우즈베키스탄 땅은 전부 소금 땅이고, 갈대만 있는 완전 황무지였다. 농기구조차 없었다. 그런 그 곳에서 교포들은 끝내 논을 일구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당시 200가구를 중심으로 집단농장을 만들었는데, 중앙아시아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농장은 다 망해버렸다. 반면 교포들로 구성된 콜호즈(집단농장)는 전부 흑자를 냈다. 때문에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았을 때, 농업 관계 자문을 교포들에게 맡길 정도였다.
타쉬켄트에 교포 25만명 거주
타고난 근면성과 뛰어난 교육열 덕분에 교포들은 소련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독립한 지금, 대개 중산층 이상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안내인(교포3세 김이고르씨)이 설명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중산층으로 자리 잡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을까. 차창(車窓) 밖으로 보이는 들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새삼 교포들의 고난사가 떠올랐다. 교포들을 생각하고 있는 그 때 김이고르씨가 “티무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무심결에 “우즈베키스탄의 영웅 아니냐”고 답했더니, “영웅은 영웅이지만 사람을 너무 많이 죽여 자기는 싫어한다”고 말했다.
안내인의 지적에 다시 우즈베키스탄 과거사로 생각머리를 돌렸다. 일세의 영웅 티무르(1336~1405). 징기스칸의 둘째 아들 후손들이 다스리던 차카타이 한국이 쇠퇴하자, 1369년 발흐(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는 도시)에서 독립, 1370년 사마르칸트에 도읍을 정하고 왕조를 창건한 인물. 몽골제국 부흥을 역설한 그는 차카타이, 일, 킵차크 등 몽골계 여러 칸국을 통합했으며, 나아가 인도와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 중아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문예와 공예 등 예술뿐 아니라 법학·수학·의학 등 이슬람 학문을 일으킨 군주이기도 했다. 그가 영도한 티무르 왕조의 문화적 유산은 페르시아의 사파위 왕조, 바부르(1483~1530. 카불에 무덤이 있음)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인도에 걸쳐 세운 무굴제국(1526~1857) 등에 계승됐다.
티무르와 관련해 알아들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1941년 6월, 소련의 고고학자가 사마르칸트의 ‘구르 에 아미르’(티무르 무덤)에 잠들어 있던 티무르의 관을 열고 그의 유체를 조사했다. 조사결과 티무르는 구전돼 내려오는 바와 같이 오른쪽 다리만이 아니라, 오른손도 왼손 보다 상당히 작았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티무르를 비꼬아 ‘테멀레인’(Tamerlane)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페르시아어 ‘티무르 렝크’에서 나온 말로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 오른쪽 다리가 짧았고, 오른손마저 작았다는 것이 무덤 조사결과 확인된 것은 1941년 6월이었다.
민족의 영웅 티무르 관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사마르칸트 사람들의 심경은 복잡했을 것이다. 사마르칸트 주민들은 “티무르의 관을 열다니, 그 관을 열면 큰 변고가 생길텐데”라며 걱정마저 했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관을 연 그 다음날, 나치 독일이 돌연 소련을 침공했다. 지금도 사마르칸트 사람들 중에는, 2000만을 넘는 희생자를 낸 큰 전쟁이 일어난 것은, 티무르의 관을 열었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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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키르기스스탄에서 중국으로 갈 때 넘어야 하는 천산산맥 탈틱 고개에서 바라본 굽이치는 길. |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차는 어느 새 국경 검문소에 도착한 것 같았다. 우리를 안내한 교포 김 이고르(Igor)씨가 “국경 검문소에 다 왔다”며 깨웠다. 차에서 내려 우즈베키스탄 세관으로 갔다. 절차를 밟은 뒤 국경선을 넘어 키르기스스탄으로 갔다. 국경을 넘기 전,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 김이고르씨와 악수했다. 국경을 넘어 키르기스스탄 세관에 들어갔다. 여권과 비자를 보여주고, 입국서류를 작성 한 뒤, 세관 밖에 나오니 러시아 출신 안내인인 라다(Lada)씨가 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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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키르기스스탄 제2의 도시 오쉬의 시장. |
우즈베키스탄 쪽으로 보니 김이고르씨가 아직도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라 그런지, 유달리 흔드는 손에 정이 갔다. 다시 손을 크게 흔들어 주고, 준비된 차를 타고 우리는 키르기스스탄 제2의 도시이자, 실크로드 상에 위치한 오쉬(Osh)로 출발했다. 시간을 보니 오후 3시(2002년 9월11일)였다.
오쉬에 도착한 즉시 박물관으로 갔다. 중앙아시아 일대 초원을 돌아다녔던 유목민들이 사용했을 물건들이 박물관에 가득했다. 불교 관련 유적이나 유물(키르기스스탄 북부 지역에 산재)은 없었지만, ‘꼼꼼한 전시’와 ‘상세한 설명’이 돋보였다. 박물관을 나와 오쉬의 진산(鎭山) 격인 바라크흐 산에 올라갔다. 산에서 내려단 본 오쉬는 멋진 도시였다. 도시 중심부와 주변으로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좀 전에 지나온 우즈베키스탄과 국경도 저 멀리 보였다. 그 옛날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무역에 나섰던 대상들도 한번쯤은 오쉬에서 휴식을 취했으리라.
천산산맥 넘어 중국국경으로 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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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말을 탄 채 천산산맥 속 평원을 가고 있는 키르기스스탄인들. |
일몰을 뒤로 한 채 시내로 내려와 편안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저녁을 먹었다. 부하라·사마르칸트·타쉬켄트 등에서는 사실 일정에 쫓겨 편안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들어간 음식점은 키르기스스탄 전통 식당인데, 사람들로 붐볐다. 충분한 음식을 먹은 뒤 호텔로 돌아와 쉬웠다. 오늘(2002년 9월11일) 하루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되돌아보았다. 타쉬켄트를 떠나 페르가나에 도착, 페르가나에서 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 국경 안착, 국경을 넘어 오쉬에 다다른 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다음날인 9월12일 새벽 5시. 어두컴컴한 오쉬(Osh) 시내를 가로질러 키르기스스탄·중국 국경검문소가 있는 이얼카스탐으로 출발했다. 하루 만에 천산산맥을 넘어 중국 카쉬가르까지 가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굽이도는 천산산맥을 넘었다. 곳곳에 만년설이 녹아 생긴 강이 있고, 강 옆에는 대개 마을이 있었다. 양치는 사람들, 학교 갔다 오는 아이들,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 모두들 순박한 인상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과 얼굴이 비슷한 사람들도 상당히 있었다. 차창으로 손을 흔드니 그들도 답례했다.
산을 넘고 강을 가로지르길 몇 시간. 중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되는 해발 3600m 탈틱고개 정상에 도착하니 오전 10시10분이었다. 해발 3000m 이상에서 대개 나타나는, ‘머리가 아프고 토한다’는 고산병 증세는 느껴지지 않았다. 탈틱고개를 넘어 달리자 넓은 평원이 나타났다. 들판 가득히 양들이 풀을 뜯고, 그 사이로 양치는 사람이 왔다 갔다 했다. 11시경이 되자 중국 땅이 보이기 시작했다. 11시30분 마침내 국경에 도착했다. 오쉬에서 달리기 6시간, 거리로는 272km. 드디어 국경에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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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키르기스스탄과 중국 국경지대에 있는 중국측 세관 이얼카스탐 전경. |
국경에서 안내인들과 헤어졌다. 1박2일간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아쉬움이 서로들 가슴에 가득한 듯 헤어지기 쉽지 않았다. 어제 우즈베키스탄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갈 때 느꼈던 이별의 아픔(?)을 다시 한번 더 겪고, 키르기스스탄 세관으로 갔다. 손을 흔들며 세관에 들어가 수속을 밟고 중국 측으로 넘어갔다. 그 때 시간이 오후 12시30분. 키르기스스탄 세관에서 4km 떨어진 중국 세관까지 어떻게 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만마이마이티이밍(32)이라는 중국 트럭운전수가 자신의 트럭에 우리를 태워주었다.
중국 세관(이얼카스탐)에 도착하니 오후 1시. 2시가 넘어야 세관 직원들이 업무를 시작한다고 해, 기다렸다. 2시 이후 세관에 도착해 입국 절차를 밟았다. 중국 세관직원이 우리를 여러 번 살폈다. “이 길을 통해 중국에 들어간 한국인이 처음이라 그런다”고 안내인이 설명하자, 이해가 됐다. 세관을 나와 차를 타고 카슈가르로 내쳐 달렸다. 카슈가르까지는 250km. 지나온 길이 272km+4km, 여기서 또 더 가야만 된다고 생각하니 앞길이 아득했다. 그러나 “실크로드를 완주하고, 구도자들이 다녔던 길을 직접 답사한다”고 생각하자 몸의 피로는 절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키르기스스탄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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