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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 24장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
톰 라이트의 주석-마태복음 24장:
마 24:1~14 해산의 진통이 시작됨
아이를 임신한 여인은 모든 일에 주의한다. 그러나 산달이 가까이 오면 더욱 그렇게 한다. 그리고 해산일이 임박하면 병원에 입원하는데, 병원에서는 혈압이 높은지, 아이를 낳을 때 어떤 위험이 있는지 미리 준비한다. 물론 임신한 여인은 주의를 기울이지만 동시에 인내할 필요가 있다. 조금 이상한 일이 있다고 해서 애를 낳을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미래에 대한 성경의 그림 중 하나는 아이를 낳는 것처럼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큰 소망과 새로운 가능성 그리고 또한 오늘날과 같은 의학의 진보가 있기 전에는 위험과 근심의 시간이었다. 의학 전문가들은 임신의 각 단계를 설명하고 연구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부부와 모든 산모들은 개인적으로 그것을 직면해야 하고 그 기대와 위험을 겪어야 한다. 그리고 얼마 동안은 극도의 공포와 고통 그리고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할 것이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이렇듯 잘 알려진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탄생하게 하시는 새로운 시대를 자유롭게 그린다. 이러한 성경 전체의 주제가 가장 잘 배어 있는 부분이 바로 마태복음 24장이다. 그리고 이는 마가복음 13장과 누가복음 21장에도 나와 있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해산의 시작일 뿐이다.
이런 그림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미래를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정확한 설명은 할 수 없으며 그렇게 했을 때 그 사태에 대해서 우리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림은 다음과 같다: 아이의 출생, 왕의 아들의 결혼식, 새 잎이 나오는 나무. 하나님의 미래는 이와 같은 것이며 물론 이와 같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만 국한하여 보면, 하나님의 미래는 두 가지의 그림으로 묘사된다. 한편으로는, 주님 자신의 부르심과 운명이다; 주님은 지난 장에서 충분히 자주 그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 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서 이스라엘을 회개하게 하시는 주님의 극적인 사명의 연속으로서 비방과 박해 그리고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 계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님의 죽음 이후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심으로써 보응하실 것을 주께서는 믿으셨다.
다른 한편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운명이 있었다. 공생애를 통하여 예수께서는 행동과 말씀으로 그것을 이미 암시하셨는데, 성전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치료와 회복의 실제적인 중심이라는 것이다. 이제 성전에서 예수께서 하신 행동과 말씀은 그곳에 통째로 심판 아래 있다는 것과 주께서 그런 심판을 선언할 권리를 갖고 계시다는 점이다. 그리고 제자들이 주님께 웅장한 성전 건물들을 보여드렸을 때(성전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 중의 하나였다), 주께서는 그들에게 분명하게 경고하셨다: 그것이 모두 무너져 내릴 것이다.
제자들은 두 가지를 모두 묶어서 질문을 한다. 성전의 멸망과 함께 예수께서 하신 행동과 말씀대로 모든 것을 보응하실 때에 대한 것이었다. 그 둘은 어떻게든 함께 일어날 것이었다. 만약 예수께서 모두 옳으시다면, 성전은 물러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언제 그렇게 될 것인가? 언제 세계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메시아였음을 알게 될 것인가?
만약 당신이 로마 시민이라면, 시저Caesar가 세계의 정당한 왕이라는 것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면 당신은 황제가 당신의 도시를 방문해 줄 날을 학수고대할 것이다. 그것을 당신만 볼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모든 이웃도 똑같이 보고 세계의 주인과 지배자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로마 제국의 많은 사람들은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헬라어로 그런 방문을 ‘나타남appearance’ 또는 ‘임재presence’ 이라는 의미로서 파루시아parousia라고 한다.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는 경우는 신들이 극적으로 나타날 때인데, 예를 들면, 기적적인 치료가 일어날 때와 같은 경우다. 그것은 신들의 권세와 임재가 나타남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단어 파루시아는 마 24:3에서 제자들이 사용한다. 그들이 예수께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물을 때 사용했다.
그들이 세 가지를 말했는데, 그 각각은 이 긴 장에서 중요하며 이제 주님의 대답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성전의 파괴, 예수님의 파루시아 즉, 왕으로서의 현현, 그리고 세상의 끝이 그것이다. 이 장 전체에서 우리는 이 질문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이 알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으며, 예수께서 그들에게 해 주신 대답은 어떤 의미였으며, 마태는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냉정한 머리와 세심한 마음을 필요로 한다.
일단 우리는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생각하셨는지를 대강 살펴 보자. 제자들이 보기 원했던 것은 언제 예수께서 왕으로서 통치를 하실 것인가 였으며,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성전의 파괴와 하나님의 새 시대의 도래였다. 이 세대는 종말을 고하고 새 세상이 태어날 것이다. 정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그런 일이 갑자기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해산의 고통이라는 새 시대의 도래가 시작될 것이고, 그 형태는 전쟁, 혁명, 기근과 지진이었다. 힘든 시기가 올 것이고,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험한 시험을 받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속으면 안 된다. 새로운 메시아들이 나타날 것이지만, 예수님의 보응은 즉, 주님의 왕으로서의 현현과 나타남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다른 사람들이 일어나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그들은 믿음을 굳게 붙들고 미혹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을 지켜야 한다. 현재의 순간과 모든 것이 나타날 시간 사이에 그리고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천국 복음이 이스라엘 주변뿐 아니라 널리 전파될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에게만 복음을 전했다. 그 중간 시기 동안에 그들에게 이런 임무가 주어졌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와 AD 70년에 이루어진 예루살렘의 멸망 사이에 있을 일들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다음 본문에서 그것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살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고 오는 그리스도인 제자들 모두에게도 메시지를 던질 것이다. 우리도 역시 충성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믿음을 굳게 지키고 깨어 있어야 한다. 우리도 역시 고난의 시대를 견디라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 우리도 역시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것들 의 파괴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다면 예수님께 끝까지 신실할 것이며 지속적으로 주님을 신뢰할 것이며 일 세기에 하나님에 의해서 옳은 분이라고 보응을 받으신 예수께서 온 세상 앞에 언젠가 옳은 분으로 드러나게 되실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의 새 시대가 태어나는 때를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주님이 정하신 때에 새로운 세상이 탄생할 것을 믿으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마 24:15~28 거룩한 곳이 황폐화됨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시기를, 사람들이 계속해서 메시아가 왔다고 말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들은 그럴싸해 보일 것이라고 하셨다. 그들은 이런 지도자들에게 유혹을 받을 것이고 어떤 지도자들은 사람들을 광야로 이끌어 갈 것이며 어떤 지도자들은 은밀한 아지트에서 모의를 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그런 모습으로 다시 오신 것이라고 믿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 바는,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라는 것이다. 진짜 메시아가 오실 때에는 물론 눈에 보이겠지만, 그 때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주님이 왕으로서 오시는 것은(27절에서 다신 한번 파루시아가 사용되었다),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누가 진짜인지 분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알게 될 것이다.
이 모든 배경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끌 사건들이다. 마태는 마가와 마찬가지로 이 시점에서, 그가 이것을 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경적인 이미지로 암호화할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에 가장 부합하는 자료는 다니엘서라는 것도 알았다.
다니엘은 1세기에 아주 인기 있는 책이었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자유롭게 인용하셨으며, 그것은 당시의 많은 주석가들과 일반이었다. 다니엘서가 묘사하는 것은, 이어지는 이야기들과 꿈들인데,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나라들을 어떻게 이길 것인가를 그려준다. 다니엘서 2장은 거대한 동상을 깨트린 돌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그것을 21장 33절~46절을 읽을 때 살펴본 바 있다. 다니엘 3장과 6장은 하나님께서 고난으로부터 그의 성도들을 어떻게 구하시는가 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7장은 다니엘서의 중심에 해당하는데, 인간과 전쟁하는 짐승에 대한 이야기로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자 같은 이를 보응해 주시는지를 다룬다. 그리고 그 짐승을 멸망시키시는지를 다룬다. 그것은 일세기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방 나라들을 이기도록 보응을 받게 될 이스라엘에 대한 암호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 더 있다. 12장에서 다니엘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의 최후의 부활을 예언한다. 그리고 9장은 신성모독적인 사나운 어떤 가증한 물건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성전에 놓여지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진실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일련의 사건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뒤를 이어 하나님께서는 진짜 메시아를 보내시며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바를 완성하실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많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지만, 마태는 여러분이 그것을 붙들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바와 씨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하라, 이 장을 주도하는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성전이 무너지는 때는 언제입니까? 언제 예수께서 메시아로 나타나게 되실까요? 언제 이 세상에 끝 날이 올까요?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다니엘서를 되돌아보라. 이런 일에 대하여 전부 이야기 하지 않느냐? 그리고 다가오는 환난의 때를 바라보라.
특별히, 이교도들의 침략이 오는 것을 보거든 그리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놓여지면 마지막이 다가온 줄 알라. 이것은 예수님 당시에 거의 10년 안에 일어났다. AD 40년, 로마의 황제 가이우스 칼리굴라는 성전에 자신의 거대한 상을 세워두려고 했다. 그는 일부러 이렇게 하여 유대인들을 건드려 분을 돋구려 했다. 결국 그는 그 일을 이루기 전에 암살당한다. 그러나 그가 일찍 죽었지만, 마태복음 24장에 설명된 모든 사건들은 일어난 셈이다. 사실, 그 이후로 30년이 지나 로마의 군단이 성전을 에워싸고 마침내 자신들의 가증한 군장을 거기에 세웠다. 그것은 참으로 예루살렘의 종말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었다. 즉, 세상 질서의 종말이었으며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그들의 조상들이 수 세대에 걸쳐 알고 있던 종말이었다.
이런 모든 일이 일어나면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은 달아나야 한다. 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들의 천성적인 기질은 신실한 유대인으로서는 당연히 달아나지 않고 싸울 것이며, 새로운 저항운동에 가담할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메시아를 위해 전투를 할 것이다. 그들은 결국 그 나라를 위한 전쟁 같은 것을 예견하면서 예수님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몇 장을 못 가서 우리는 그들 중의 하나가 어둠 가운데서 칼을 휘두르는 것을 보게 된다. 마침내 예수께서 그들로 하여금 칼을 들고 싸우기를 원하신다고 추측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께서 전혀 생각하지 않으신 일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식도 아니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진실한 예언자들과 메시아에 대하여 보응하시는 방법도 아니었다.
그들이 달아나야 하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었기 때문이며 이교도들의 상이 성전에 있어서 심판이 곧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의 단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신약성경에는 다른 차원의 ‘구원’이 있다. 그들은 반드시 매우 기본적이고 실제적이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그 성에 임박한 파괴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셨다. 그들이 그 징조를 볼 때 그들은 주저하거나 재산을 챙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그 성을 즉시 떠나야 한다. 그것은 매우 극심한 고통과 고난의 때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나면, 그 때는 어떤 의혹도 없을 것이다. 그 사건은 알아보기 어려운 것이 아닐 것이다. 여러분은 메시아가 보응 받으셨음을 알아보려고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는 사람의 모습으로 서 계시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있을 것이다. 그의 보응은 시대의 징조로서 알게 될 것이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인다: 고대 세계에서 콘도르vulture와 독수리eagle은 항상 구별되는 것은 아니며, 로마의 군장(軍裝)인 독수리가 예루살렘 주변에 모이면 사막에서 시체 위에 나는 먹이를 찾는 새들처럼 보일 것이다.
다시 한번, 1세기의 고통의 때는 세상의 고통의 때를 예고하며, 교회는 많은 고난의 때를 통과해야 한다. 내가 이를 쓰는 동안 나는 나의 형제 자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 때문에 오늘날 악한 정권으로부터 망명하는 것과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을 생각한다. 그들은 손쉬운 해결책을 제안하는 거짓 메시아들을 따르라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이 본문은 일차적으로 오늘의 우리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주요한 의미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대에 있으며, 세계는 그 거대한 종말을 통과했으며 하나님의 새로운 세상이 태어났다. 이런 사실에 따라 살고 오랜 기간 동안의 함축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그 이후 내내 그리스도인의 제자도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어 왔다.
마태복음 24:29~35 인자의 오심
성경에서 그리는 종말의 묘사는 마치 오케스트라와 같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각 악기가 동시에 소리를 내면서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종말에 일어날 현상들도 순차적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그 각각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따로 떼어 내서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 본문이 주로 연주하는 음악의 주제는 ‘인자의 오심’이다. 오늘날 교회의 어떤 지역에서는 오직 하나의 주제만을 노래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우려할만하다. 오케스트라는 풍부하고 깊은 음악이다. 그것은 조금씩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온 구절을 보자. ‘해가 빛을 잃고 달이 어두워지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다. 그리고 하늘의 권능이 흔들릴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이사야서에게 있어서, 그리고 일 세기 독자들이 그의 예언서를 읽을 때, 이 의미를 하늘에 있는 실제 해와 달과 별을 가리킨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이 언어는 잘 알려진 것으로서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변혁을 일컫는 말로 흔히 사용되었다. 우리가 말할 때, 제국이 ‘무너진다(또는 기운다)’거나 나라가 ‘솟아오른다(또는 뜬다)’고 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위 아래로 움직이는 물리적인 움직임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태가 우리에게 의도하는 바는 인자가 오는 때에는 전 세계가 혼돈에 빠질 것이라는 점을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심’이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것일까? 왕으로서 예수께서 오심은 어떤 것들로 이루어져 있을까? 마태는 우리를 다시 과거로 인도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구절들을 보면 다니엘서를 다시 한번 인용하는데, 7장 13절이다(우리의 본문은 30절이다). 그들은 볼 것이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부터 오는 것을. 이제 다니엘서에서 이것은 확실히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이상한 인간 모양을 한 이가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인자의 오심은 하늘의 관점에서 볼 때 오심인데, 그것은 땅에서 하늘로의 오심을 말한다. 그의 오심은 이런 의미로 보면 하늘에 머물러 계시다가 땅으로 귀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승천을 가리킨다. 그의 보응을 가리키며, 그의 고난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께서 옳으셨음을 하나님께서 보응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킬까?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우선, 주님의 부활과 승천이다. 이것은 가장 위대하고 극적이며 땅을 흔드는 사건들로서 유대인들의 법정의 판결과 이교도들의 시행을 뒤집는 것이다. 이것들이 보여주는 바는, 예수께서 참으로 인자로서 짐승이나 괴물의 손에 고난을 받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짐승들은 지금 성전과 그것을 운영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이로써 주께서 참으로 하나님의 진정한 대변인이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둘째로, 성전의 파괴다. 예수께서는 예언자의 말처럼,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예언자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성전이 당시의 이스라엘과 더불어 행한 악행 때문이었다. 그리고 주께서는 그 앞서서 극심한 환란을 겪을 것을 예언하셨다. 그런 까닭에 25절에서 주께서는 미리 말씀하신다고 강조하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진정한 예언자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들은 미혹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상한 일들에 속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성전이 마침내 무너질 때, 그것은 주님께서 진리를 말씀하셨음을 입증하는 표시가 될 것이다. 그것이 주님의 진정한 보응이 될 것이다. 주님께서 온 세상에 높임을 받으시는 것과 성전보다 뛰어남은 역사의 페이지마다 크게 기록될 것이다. 또는 그들이 보여주는 대로, ‘그들은 하늘에서 인자의 표적을 보리라(30절).’
셋째로, 주님의 승리에 대한 소식은 신속하게 세계에 알려질 것이다.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은 낯선 전령들일 것인데, 한 사람이거나 여러 명일 것이다. 그들은 나라와 나라를 순회하면서 사람들에게 최근에 죽임 당하신 유대인 선지자가 하나님에 의해서 옳다고 보응을 받았음을 전할 것이다. 즉, 그 분은 메시아이시며 온 세상의 주님이시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 사건일 뿐이다. 이런 사건의 더 깊은 차원은 한 분이신 진정한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에게 예수께서 온 피조세계의 주님으로 임명하셨다는 사실이다. 혹은, 그들이 말하듯이, ‘그가 사자들을 보낼 것이다’, 또는 ‘사방에서 하늘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택하신 자들을 모으실 것이다.’ 우리가 성경 기록자를 이해하고자 하면, 우리는 다시 한번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쓴 그들의 언어를 읽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해졌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 그런 대 사건이 일어날 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나무의 잎들을 살펴보라, 그러면 너희는 여름이 가까이 온 줄을 알 것이다. 이런 사건들을 살펴보라, 그러면 너희는 대 사건 곧 성전의 멸망과 예수님의 완전한 보응이 임박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시 말씀하시기를, 이에 관하여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이 세대 안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마태는 특별히 이것을 강조한다).
이 본문에서 말한 모든 것 중에서 그것이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것을 둘러싼 사건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가 이해할 때에야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들에 대해서 주님이 어떤 의미로 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음악의 작곡자를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긴 안목에서의 목적에 있어서, 이 본문을 읽고 있는 우리는 후대에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각각의 사건들을 별도로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일로 따로 이해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일단 그 근본적인 의미를 잘 이해하게 되면 다른 일에 대해서도 이 본문이 무언가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곧 하나님이 일세기에 완성하실 것이라고 하시던 것을 기다릴 수 있고, 모든 창조의 질서가,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영광에 자유에 이르기를 고대한다. 일세기를 우리가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모든 시대와 역사의 주님으로 이미 등극하셨음에 대해 주님께 감사 드려야 한다.
마태복음 24:36~44 뜻하지 않게 오심
이 본문에 대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경고로 받아들인다. 이런 해석을 하는 이유는 앞부분에 나오는 인자의 오심을 주님의 보응 곧 하늘로 높여지심으로 해석하지 않고 주님의 땅으로의 귀환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1장과 데살로니가 전서 4장 등에서 약속을 받은 대로 어느 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실 때, 예수께서는 그 중심에 서실 것을 알고 있다. 주님께서는 다시 나타나실 것이다. 이는 바울과 요한이 말한 바와 같다(골 3:4, 요일 3:2). 아무도 그 날이 언제 일지 알지 못하기에, 항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준비되어야 함이 중요하다.
다른 한 편으로, 많은 다른 독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대비하라는 이야기로 이 본문을 읽는다.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든지 간에, 죽음 이후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고, 그것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우리가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알지 못하는 그 단계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것은 확실히 중요하다. 그런 이유로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예배, 기도를 드리거나 또는 자기를 돌아보는 일에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해 좀더 깨어 있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여러분은 이 본문을 위의 둘 중 하나나 또는 둘 다의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종종 하나님의 목소리는 성경의 원 저자가 의도하지 않은 방식으로 들려질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을 자제해야 하기는 하지만, 잘 다루어야 할 점은 그 본문이 진정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특히 성경이 분명히 밝히지 않는 것을 입증하려고 할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 본문을 마태의 첫 번째 독자들이 이해한 방식으로 읽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돌아가 예루살렘과 그 주변 지역에 밀어닥칠 심각한 위기를 알게 된다. 그 날은 그들에게는 알지 못하는 미래이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AD 70년인 것을 안다. 그 때는 로마와 유대 사이의 전쟁이 절정에 도달한 때다. 모든 사람과 가족 그리고 전 공동체를 멸망하게 할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었다. 그것은 무시무시하고 겁나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인자의 오심이나 파루시아 즉 예수께서 왕의 나타나심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전체 본문은 이것이 어떤 것인지를 가리킨다. 그것은 급하고 순식간에 일어나는 사건들로서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로 끝이 날 것이다.
이 본문의 요점은 다음의 3단계다:
1단계, 아무도 정확한 그 날을 모른다. 다만 그것은 한 세대 안에 있을 것이다(34절).
2단계,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평범하게 진행될 것이다. 그것은 노아의 때와 같을 것이다. 홍수가 몰아치기까지(마태의 글 7:26~27을 보라) 평범한 일상은 특이한 동향 없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3단계, 그것은 가족과 동료를 가를 것이다.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둘 것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의해 어떤 사람은 초자연적인 구원을 받을 것이고 다른 사람은 파멸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다: 군대가 쳐들어와 마을을 휩쓸고 가면 그들은 어떤 이들은 죽음으로 끌려 가고 어떤 사람들은 건들지 않고 남겨둘 것이다.
결과-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장 염려하신 대목인데, 그들은 이 지점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당황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 즉, 밤중에 갑작스레 찾아올 손님이 언제 올 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 본문에서 밝혀준다.
경고는 기본적으로 일 세기에 다가올 위급한 상황을 가리킨다. 그 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그리고 성전에 대한 말씀이 이루어지기 전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그 이후로 오는 세기 내내 경종이 되어 우리 시대까지 이르렀다. 우리도 역시 혼란과 위기의 때를 살고 있다. 다음 주, 다음 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는가? 다음의 질문에 대답할 것은 각 교회와 각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에게 달려 있다: 당신은 준비되었는가? 당신은 깨어 있는가?
마태복음 24:45~51 지혜롭고 악한 종들
충성되지 못한 직원이 해서는 안될 일을 하고 있을 때 사장이 나타난다면 그는 즉시 해고될 것이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다 그 밑바닥에 흐르는 이야기는 동일하다. 다른 이야기로 말하면 집안의 모든 일을 맡겨놓고 먼 길을 떠난 주인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명을 맡은 종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다시 오셔서 그 한 일에 대한 보응을 하실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와 동시에 여기에는 구성을 약간 뒤틀었다. 감람산에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주께서는 이제 그들에게 할 일을 남겨두고 떠나신다. 그것은 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는 것이다(24:14). 그들 중의 어떤 이들은 젊은 사람들 가운데 책임감을 느끼고 기독교 공동체와 씨름을 한다. 어떻게 그들은 그 임무를 벗을까?
여기에 제시된 선택은 극명하다. 집을 맡은 종들은 의무를 가진 자들로서 그들을 그런 일들을 해야 한다. 만약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인이 오랜 후에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따라 산다면 유흥을 즐기고 동료 종들을 괴롭힌다면, 그는 큰 곤경에 빠질 것이다. 그는 배우요 위선자다. 그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하고 무시무시한 반복구절이 나온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8:12, 13:42, 50, 22:13, 25:30).
두 종류의 노예들 사이의 차이점 즉, 하나는 깨어 있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있고 다른 종들은 할 일을 잊어버리고 반대가 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차이점은 선함과 악함의 차이가 아니라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다. 그것은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다. 이 양자택일의 이야기는 다음의 이야기에서도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살펴보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고대의 유대 전통 깊은 곳에서 우리는 잠언을 발견한다. 거기에 나오는 말들은 대부분 짧지만 어떤 것은 좀 더 확장된 그림도 있다.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 사이에 대조를 이루는 재산에 대한 세부적인 것을 발견한다. 물론, 궁극적으로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회하고 존경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와 어리석은 일은 일상 생활이나 사업, 가정이나 마을 또는 미래를 대비하는 일이나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근면과 게으름, 또는 부도덕으로 빠지게 하는 유혹에 대한 인식과 피함 등에서 수천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이런 모든 지혜문학의 전통을 상기시키신다. 그 지혜문학은 구약성서 이후의 유대교에서 더욱 발전시켰으며 초기 기독교의 책들(야고보서 같은)에서도 발견된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마태복음에서도 발견하는데, 매우 중요한 순간들이다: 지혜로운 건축가는 반석 위에 집을 짓고 어리석은 건축가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다(7:24~27).
그러나 이제 ‘지혜’와 ‘어리석음’의 요점은 하나님께서 어떤 상황이나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할 수 있음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만약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느 때고 문을 두드리신다면, 지혜는 어느 때든지 준비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께서 일단 오시면,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가져오실 것이고 그 때 지혜롭다는 것이나 어리석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시간표에서 그 때가 어느 때인지를 아는 것이거나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지혜는 최소한 지금 세계가 예수님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아는 것이요 우리가 항상 우리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 보고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이런 경고는 복음의 더 큰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으로서 모든 사람과 종족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다. 물론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일하는 동안에 깨어 있지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추종자 중에 일부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항상 옳은 일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베드로처럼 우리도 잘못 가고 있을 때 즉시 깨닫고서 걸음을 바로 잡는다.
그러나 죄인을 환영하시는 예수님의 선언을 따라, 그리고 우리가 실패할 때마다 언제고 제공되는 용서가 있지만 그 이후에 따라오는 우리의 감정은, 경성함과 충성됨을 요구하는 엄격하고 수준 높은 부르심도 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게으름의 구실로 사용할 수 없다(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실 거야. 그것이 그분의 일이잖아). 우리가 깨어 있다고 생각을 못할 때에라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많이 받은 자는 많이 요구할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