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정치 참여는 정당한가 2013.12.22>
요즈음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그렇죠?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이 상쾌하지가 않습니다.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전부 다 시국선언을 했고, 목사님들은 금식기도까지 하셨어요.
어떤 분들은 ‘종교가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더 잘하라고 박수를 치고 있고, 어떤 분들은 ‘너무 한 거 아니냐. 정치에 관여하지 말고 가서 기도나 하라’고 그럽니다. 이분들 말씀을 들어보면, ‘종교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
자, 그럼 제가 한번 여쭈어 볼께요.
‘종교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성경의 어느 구절에 나오는 말씀인가요? 신약 성경에 나오나요? 구약 성경에 나오나요?
제가 어제 밤 12시까지 찾아봤는데 못 찾았거든요? 혹시 찾으시면 말씀 좀 해 주세요.
그러면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면 안된다”는 말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어디에 나오나요?...
교리서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신자니까 교황님 말씀 따라야죠.
어느 교황님이 저렇게 말씀하셨나요?
어떤 교황님도 그렇게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자, 그렇다면, ‘종교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대체 누가 한 말일까요?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면 제일 좋아할 사람들이 누구죠?
정치인들이겠죠? 그래야 자기들 마음대로 정치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혹시 정치인들이 만든 말 아닐까요?
정확히 누가 처음 저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철학자 한 명과 정치인 한 명이 최근에 저 말을 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레닌입니다.
마르크스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라고 말을 했고, 레닌은 마르크스의 사상을 기초로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을 일으켜서 소련 즉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만들면서 ‘종교와 정치는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레닌의 이야기는 김인국 신부님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가톨릭 신자가, 하느님 말씀을 자기 신조로 삼지 않고 정치인들이 만든 말을 신조로 삼고 있는 것일까요?
‘종교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말은 하느님 말씀도 아니고 교황님 말씀도 아니고 정치인들이 주로 하는 말인데 말이지요.
*
전 세계 240 여개 국가 중에 종교가 정치에 절대로 개입할 수 없는 나라가 딱 한 군데 있습니다. 어디일 것 같으세요?
북한입니다.
북한에는 미미하게나마 종교가 있지만, 정치에 절대로 개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고모부도 하루아침에 숙청하는데, 종교인들 숙청하는 건 일도 아니겠죠.
그 외에 종교가 정치에 개입할 수 없는 나라들은 대개가 공산국가들입니다. 공산혁명 일으킨 사람들이 종교와 정치를 철저히 분리시켰으니까요.
요즘에 시국선언하면 ‘종북이다’, ‘빨갱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종교인들이 시국 선언을 할 수 없는 나라가 북한이고 빨갱이 나라입니다.
종교인들의 시국선언이 금지되면, 그게 뭐예요? 그게 종북입니다. 북한 따라가자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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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하느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내 보내 달라고 누구한테 얘기했나요? 왕한테 얘기했지요. 이집트 왕 파라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누구한테 따지고 있나요? 왕이죠. 이스라엘 왕 아하즈.
구약의 예언자들, 생각나는대로 말씀해 보세요. 엘리야 – 아합 왕이랑 붙었습니다.
나탄 예언자는 다윗 왕한테 가서 따졌죠. 왜 부자가 가난한 사람 양 한 마리 뺐듯이 남의 부인을 뺐느냐고.
세례자 요한도 헤로데 임금한테 가서 왜 율법을 어기냐고 말했다가 참수 당하잖아요.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에제키엘, 다니엘... 예언자란 예언자는 모두 왕과 정부, 때로는 민족 전체에게 정의 문제를 가지고 뭐라고 한 거예요. 왜 율법과 하느님 계명 어기느냐고.
하느님 계명이 뭐죠? 십계명이죠? 그중에 하느님 안 믿는 사람들한테도 지키라고 말할 수 있는 계명이 뭐예요?
“사람을 죽이지 마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아녜요? 그런데 요즘 국가 기관들이 계속해서 거짓 증언을 하니까, 구약의 예언자 중 한 명이라도 살아 계시다면 말씀하시겠죠? 거짓 증언 하지 마라고.
지금 교회가 그걸 하고 있는 거예요. 예언직을 수행하고 있는 거지요.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게 예언직인데, 세상이 복음의 가치를 크게 거스르는 일을 할 때, 하느님의 정의에 입각하여 볼 때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게 예언직입니다.
우리가 자꾸 성당 안에서 ‘정치’라는 말을 쓰면 싫어하는 것은 정치에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이걸 혼동하기 때문인데요, 국어사전 (daum) 에서 찾아보니까 ‘정치’라는 말의 첫 번째 뜻은,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일”입니다. 이건 좋은 거예요. “투표는 국민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할 때의 정치는 이 뜻입니다.
그런데 정치의 두 번째 뜻은 “개인이나 집단이 이익과 권력을 얻거나 늘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교섭하고 정략적으로 활동하는 일”이예요. “그 사람은 실력이 좋다기보다는 워낙 정치를 잘해서 그런 지위에 오른 것 같다.”할 때 이 뜻이지요. 나쁜 거예요.
‘아, 참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하는구나~’ 할 때는 좋은 의미이고 첫 번째 뜻이고,
‘저 사람은 참 정치적이야’ 할 때는 나쁜 의미이고 두 번째 뜻이지요.
그런데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 쓰니까 우리는 정치는 나쁘고 혼탁한 거다, 거기에 왜 교회가 나서서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말을 합니다.
교회는 두 번째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관여해서는 안되죠. 나쁜 거예요. 이권을 챙기려고 몰래 교섭 하는 거죠. 하지만 첫 번째 의미의 정치에는 참여해야 합니다. 교황님들께서 그렇게 말씀하고 계세요.
우리는 천주교 신자들이지요. 천주교는 성경과 교도권의 가르침을 믿을 교리로 삼는 종교입니다. 교황님 말씀 따라야지요.
전임 교황이셨던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말씀을 들어 보겠습니다. 2005년도에 교황님께서 발표하셨던 첫 번째 회식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28항의 말씀이에요.
“국가와 종교는 서로 구분되지만 언제나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 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이성적인 토론의 길로 그러한 투쟁에 들어서야 하며, 그 정신적인 힘을 다시 일깨워야 합니다. 그러한 힘이 없으면, 언제나 희생을 요구하는 정의는 구현될 수도 없고 진보할 수도 없습니다.”
(‘정의’ ‘구현’ ‘진보’ - 요즘 민감한 단어는 다 말씀하셨네요.)
지금 교황님은 누구시죠? 프란치스코 교황님이십니다. 정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친구가 되어주셔서 가톨릭에 대해 가장 도전적인 국가인 미국의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교황님을 선정했지요. (미국은 유일하게 천주교 신자였던 존 F. 케네디 대통령 빼고는 43명의 역대 대통령 모두가 개신교 신자인 나라죠.)
교황님께서 지난 11월 26일 첫 번째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을 반포하셨습니다. 아직 우리말로 번역도 안 되었는데 로마에 유학 중이신 우리 교구 신부님 한 분이 일부를 번역해 주셨네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복음의 기쁨’ 182-183항에서 사회 문제들에 대해 교회가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시며 마지막에 베네딕도 교황님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사목자들은 다양한 학문들의 도움을 받아들여, 사람들의 삶에 대한 모든 것에 의견들을 표현할 권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누구도 우리에게, 종교는 사회적 국가적 삶과의 어떠한 관계도 없이, 시민 사회의 기관들의 건전성에 대해서 걱정 없이, 또 국민들이 관심을 갖는 사건들에 대해 자기 의견을 표현함도 없이, 그저 사람들의 내적 영역에만 국한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사목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는 일에 매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만약 ‘사회와 국가의 정의로운 질서가 정치의 주요 과업’이라면, 교회는 ‘정의를 위한 싸움에 변두리에 있을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자, 교황님들께서 왜 이렇게 첫 번째 회칙과 권고에서 교회가 첫 번째 의미의 정치에 관여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주님의 기도 바칠 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한 다음에 뭐라고 기도하지요?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예.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다른 말로 하면 뭘까요? 아버지의 국가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국가, 즉 하느님 아버지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평생의 목표가 이것이었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는 일. 그리고 왔지요.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죠.
보이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 나라 안에 살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믿고 복음을 기준으로 살아갈 때에.
그런데 하느님 나라와 세상의 정치가 충돌할 때가 있어요. 그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순교자들은 어떠셨나요? 나라의 법이 천주교를 금하니까 배교하셨나요?
아니죠. 국법을 어기면서까지 하느님을 믿고 섬기셨죠. “지금 이러한 통치는 잘못되었다. 양반도 천민도 없다. 우리는 한 아버지 아래의 형제 자매다. 우리는 하느님을 참 임금으로 섬긴다.” 순교하시면서 고백하신 믿음이 그것이죠. 나라에서 하지 말라고 해서 그만두면, 그게 배교죠. ‘나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하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거죠.
어떤 분들은 천주교회가 너무 시끌시끌하니까 성당 안 다니겠다고 말씀하시는데, 그건 배교하시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성당에 나오고는 싶은데 사정상 못나오는 냉담하고는 다른 거예요. 남들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거죠.
200년 전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평화롭게 들어와서 열렬히 환영받았나요? 천주교 믿으면 때리고 고문하고 죽이고 그랬습니다. 목을 잘라서 성문 앞에 걸어 놓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하느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주위에서 ‘성당은 요즘 왜 그래? 자네도 성당 다녀? 자네도 그쪽이야?’ 이런 얘기 듣기 싫어서 성당 다닐까 말까 고민하신다면, 앞으로 순교자 찬가 부르지 말아야죠. ‘순교자 믿음~ 본받아~ 끝까지 충성하리라’ 이 성가 부르지 말아야죠. ‘배교자 믿음~ 본받아~ 여차하면 냉담하리라’ 이렇게 불러야죠.
교회를 상대로 협박하는 거 아닙니다. ‘앞으로 천주교회가 이렇게 나가면 나 성당 안다니겠다’고 협박하는 거 아닙니다. 그건 성령의 이끄심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입니다. 어떻게 해서는 나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 놓게 만드는 게 마귀의 목표입니다.
마태오 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러시면서 어떤 것들은 길에 떨어지고, 어떤 것들은 돌밭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에, 또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말씀을 직접 풀이해 주셔요.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우리 영혼이 이런 돌밭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 말씀이 우리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뿌리 박혀서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뿌리 박혀 있는 것이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만들어 낸 말이라면, 내 마음 밭은 돌밭인 겁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성 요셉은 의로운 분이셨습니다. 성모님께서 아이를 가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남몰래 파혼하려고 마음먹습니다. 그런데 꿈에 천사의 말을 듣고,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구나 하고 깨닫고 나시니까 자신의 결정을 바꿉니다. 하느님 말씀이 내 신념보다 우선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1독서 말씀을 보면 아하즈 임금은 그 반대입니다. 하느님의 표징을 청하라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에 대해 ‘청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하고 말합니다. 언뜻 들으면 겸손한 말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이 내 신념과 다른 것일까봐 거부하는 겁니다. 내 맘대로 살고 내 맘대로 내 나라 다스리게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개입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예언자는 엄청난 예언을 하지요. “네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시대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은 무엇일까요? 성 요셉처럼 내 신념을 꺾고 따라야 하는 하느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교황님을 통해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것을 믿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가톨릭 신자라고 할 수 없지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시기 직전에 추기경단 회의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에 의해, 교회를 위해 살아가는 세속적 교회 (la Iglesia mundana que vive en sí, de sí, para sí) 가 되지 말고, 자신으로부터 나와 세상을 향하는 복음적인 교회 (la Iglesia evangelizadora que sale de sí) 가 되어야 한다”고요.
이 추기경 회의 직후에 성령께서 추기경님들의 투표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하시는 성령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황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정말 잘 들어야 합니다. 내 신념과 다르면 내 신념을 깨고 그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요셉 성인처럼이요. 내 신념만 고집하고 정치인들 말만 믿으면 아하즈 임금이 되는 겁니다.
교황님께서는 올 6월 7일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치가 너무나 더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왜 정치가 더러울까? 왜 그리스도교인들이 복음의 영으로 정치에 참여하지 않을까? (la politica si è troppo sporcata; ma io mi domando: si è sporcata, perché? Perché i cristiani non si sono coinvolti in politica con lo spirito evangelico?)”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Coinvolgersi nella politica è un obbligo per un cristiano.)”
“우리는 정치에 참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치는 공동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가장 뛰어난 자선의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Dobbiamo coinvolgerci nella politica, perché la politica è una delle forme più alte della carità, perché cerca il bene comune.)”
여기서 공동선이라는 말에 대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 74항은 “개인과 가정과 단체가 더 완전하게 더 쉽게 자기 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사회 생활의 모든 조건들의 총체를 내포한다.”라고 말합니다.
정치가 가장 뛰어난 자선이라고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왜일까요?
교회는 사회복지 사업에 앞장서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우리가 이 말씀을 듣도록 살아야지요.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국가의 사회복지 예산을 얼마나 줄지 누가 결정하나요? 정치가 결정합니다. 병들었을 때에 병원에 가야 하는데, 병원비는 누가 결정하나요? 의료보험제도이고, 이 보험제도는 정치가 결정합니다. 우리가 소득에서 얼마간 내는 사회복지 2차 헌금하고는 차원이 다른 액수예요. 그러니까 정치가 가장 뛰어난 자선이지요.
그런데 교황님들의 이런 말씀들이 우리에게 왜 생소하게 다가오는 것일까요? 그리스도교 영성의 역사에는 두 가지 커다란 흐름이 있는데, 종말적 영성과 육화적 영성입니다.
종말적 영성은 이 세상을 죄와 고통의 장소로 보고 구원과 거룩함을 천상적이고 종말론적인 면으로 이끌어갑니다. 한마디로, 세상은 멸망할 것이니 세상일에 관심 갖지 말고 기도와 개인구원에만 충실하자는 입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조하는 영성입니다.
이에 비해 육화적 영성은 하느님께서 인간으로 육화하여 세상에 태어나신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진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고 완성하려는 영성입니다. 십자가보다, 오히려 부활과 예수님 성탄을 더 강조하는 영성입니다.
초대 교회 때에는 종말적 영성이 강했습니다. 박해 중에 시도 때도 없이 끌려가 죽임을 당했으니까요.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고 1,2학년 때에 종말적인 영성만을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교에 왔기 때문에 어서 이 세상이 빨리 멸망해서 아버지께서 저에게 ‘유정아, 내가 잘못했다, 네 덕에 내가 구원을 받는구나’ 이렇게 말씀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정말 부끄러운 고백입니다만, 세상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신문도 안 읽었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멸망할 건데 뭐 하러 관심을 두나 하고 세상에 신경을 끄고 저 혼자 기도만 했습니다.
그런데 군대 제대하고 나서, 복학하기 전에 공사장에 가서 막노동도 해 보고 식당에서 알바도 해보고 공장도 다니면서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을 직접 마주하면서부터 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배는 안 만들어 봤어요) 또, 사고로 무릎을 다쳐서 병원에서 두 차례 수술을 받고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으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을 통해 세상 보는 눈이 달라진 것 같아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제가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너무나 사랑하신 세상을 나는 왜 미워해왔을까? 제가 한쪽으로 너무나 치우쳐 있었습니다.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우면서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세상’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하나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그래서 극진히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는 세상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세속이라는 의미의 세상입니다.
요한복음 1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여기에 나오는 세상은 단어는 같지만 그 뜻이 각각 다릅니다. 이것을 혼동했기에 세상은 나쁜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교만했기 때문에 하느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종말적 영성에만 치우쳐서도 안 되고 육화적 영성에만 치우쳐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도 안하시고, 당신을 죽이려하는 헤로데 왕을 향해 ‘그 여우한테 가서 전하여라’라고 소리치실만큼 세속에 대해 미련이 없이 사셨는가 하면,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그리고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실 만큼 사람과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종말적 영성과 육화적 영성은 사실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다른 분이 아니시듯, 십자가의 영성과 성탄, 부활의 영성은 다른 영성이 아니어야 합니다.
가장 종말적 영성을 살고 계신 봉쇄 수녀원의 수녀님들이 세상일에 대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계시고, 세상을 위해 매일 기도하고 계십니다. 가르멜 수녀원에 갔다가 깜짝 놀랐어요. 오늘 뉴스에 대해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신 거예요. 세상을 위해 기도해야 하니까,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셔야 하는 거죠.
진정한 종말적 영성과 진정한 육화적 영성은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잘못된 종말적 영성, 잘못된 육화적 영성이 문제입니다.
제가 한 가지만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주일 미사 중에 보편지향기도를 바치는데, 기도만 하면 그걸로 끝인가요? 아니면 기도 내용을 실천해야 하나요?
가령 오늘 매일미사에 나오는 세 번째 보편지향기도가 “노숙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인데, 하느님께 노숙자들을 잘 돌보아 달라고 기도만 하면 될까요? 아니면 노숙자들에게 우리가 관심을 갖고 다가가야 할까요?
“본당 단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하고 기도하고 나서, ‘하느님께서 본당 단체 알아서 잘 하시겠지’ 하고 말아야 할까요? 아니면 내가 소속한 본당 단체 안에서 나도 최선을 다해 봉사해야 할까요? 당연히 나의 실천이 뒤따라야지요.
그렇다면, 보편지향 기도 때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합시다.”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이건 어떻게 해요? 기도하고 말아야 해요? 아니면 무언가 해야 해요?
무엇인가 해야죠. 나랏일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잘하는 정치인들은 격려해 주고, 잘못하는 정치인들은 나무라야죠. 그런 거 안 하려면 기도도 하지 말아야죠.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실행하시니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사람을 통해서 실행하실 때가 많지요. 오죽하면 당신 아드님까지 사람이 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시잖아요. 그렇다면 우리도 당연히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을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시도록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드려야죠.
지금 천주교회는 전국 열다섯 개 교구가 정의평화위원회 주관으로 시국선언을 다 했습니다. 이제 교구별로 시국미사도 이어질 거예요. 끝난 게 아니에요. 이제 시작입니다.
어떤 분들은 화나실 거예요. 아니,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인데, 왜 이래라 저래라 해? 그런데 정말 공정하고 투명한 상태에서 우리 손으로 뽑은 건지 확인 좀 하자는 거지요. 의혹을 제대로 조사 좀 하라는 거죠. 아직도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이 인터넷 댓글 수 십 개가 전부인 걸로 알고 계신 분들도 계신데, 검찰이 발표한 것만 2천 2백만 개예요.
제 아버지가 저한테 물어 보시더라구요. “거 정말로 국정원 댓글이 선거에 영향을 주었나?” 그래서 제가 대답했지요. “선거에 영향 안 주려면 국정원이 왜 했겠어요? 정보와 심리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요?” 그랬더니 ‘하긴 그렇군...’ 그러시더라구요.
저희 아버지는 작년에 선거 전날 저한테 전화하셨어요. 1번 찍으라고. 그런데 누가 되었든 간에, 설령 다른 후보가 당선 되었다 하더라도 선거 과정에서 공정성과 투명성이 훼손되었다면, 그것을 정확하게 밝히고 조사하라는 게 종교계 시국선언의 내용인 거죠.
그런데 자꾸 천주교가 이런 거에 개입하면 신자수가 줄어들지 않을까하고 걱정하시는 분들도 계셔요. 이런 걱정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걱정이지만, 그런 걱정도 안하셔도 되요.
지난 2005년도에 통계청이 인구 총조사를 했는데, 종교계가 깜짝 놀란 통계가 있었습니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10년간 불교 신자가 3.9% 늘어났고, 가톨릭 신자가 74.4% 늘어났는데, 개신교는 1.6% 감소했거든요. 대형교회가 늘어나서 개신교가 성장한 것처럼 보였지만, 개척교회에 계신 젊은 목사님들은 신도수가 줄어 교회 문을 닫기도 하고 정말 힘들어 하셨거든요.
개신교 교단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가톨릭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선교를 해 왔는데, 왜 개신교 신자는 줄고 가톨릭은 저렇게나 많이 늘었을까? 그래서 개신교 목회사회학연구소란 기관에서 세미나를 하고, 인천교구 총대리이셨던 오경환 신부님을 초청해서 강연도 듣고, 그 내용을 책으로 펴냈습니다.
제목이 “그들은 왜 가톨릭 교회로 갔을까?” 부제목은 ‘현대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가톨릭’, ‘경이적인 가톨릭 교회 성장과 개신교 성장 정체에 대한 목회사회학적 분석’입니다.
이 책에 보면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김종서 교수님이 ‘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증가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다섯 가지 이유를 들었습니다.
1. 교황청과 각 교구의 지휘를 받는 일사불란한 천주교회의 조직력과 결속력
2. 청렴성
3. 과거 군사 정권 시기에 인권 문제 등에 대하여 천주교회가 조직적으로 저항해 정의 종교로 비친 것이 위상을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4. 장례를 조직적으로 돕는 등 관혼상제 의례와 관련하여 유연하고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은 유교 문화에 대한 유연한 입장
5. 다른 종교에 대해서 열린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젊은 층으로부터 호감을 샀다. (이건 한마디로 배타적인 방식으로 선교를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상 다섯 가지입니다.
이중 세 번째 항목에 대해 오경환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주교회의 정의 활동이 외부 인사들에게는 일사불란한 것으로 보였던 것 같지만 내부적으로 갈등도 있었고 일부의 반대가 없던 것은 아니다. 반대론자들은 정의 활동이 선교에 해롭고 입교자를 감소시킨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았다. 정의 활동에 참여한 이들은 입교자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고 그것을 예상하지도 않았다. 현시점에서 볼 때 입교자의 증가는 정의 활동의 사회학에서 말하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이다.”
그러시면서 통계 자료를 분석해 볼 때, 신자 증가율이 3.9%였다가, 사회 정의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 시기에 9.6% 까지 올라가는 등 천주교의 사회 정의 참여가 선교에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왔다고 보셨습니다.
지금도 냉담 중이었던 많은 젊은이들이 이번 일을 계기로 성당에 돌아오기도 하고, 또 종교가 없었지만 천주교회에 다니겠다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직접 들은 분들도 꽤 많아요.
그래서 우리가 신자 수 늘리려고 사회 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수적으로 신자 수가 증가한다는 것은 통계에 바탕을 둔 사실입니다. 신자 수가 늘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만큼 정의에 참여하는 것을 많은 국민들은 종교 본연의 임무로 알고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고, 교회가 믿지 않는 이들에게도 복음을 선포했다는 것이지요. 예언직을 올바로 수행했다는 것이지요.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종교가 없으신데, 지금 왜 모든 종교들이 시국선언을 하고 있는지, 무신론자들도 알아듣게 설명해 달래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민주주의는 삼권 분립이 원칙이죠.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이 세 부서가 고유하게 독립성을 갖고 활동해야 민주국가죠. 입법부는 법 만드는 곳 국회고, 사법부는 법 집행하는 곳, 법원과 검찰이죠, 행정부는 그 법의 토대 위에서 국민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일해야 하는 정부구요.
이 세 기관은 서로 독립성을 유지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건강한 견제를 해야 하지요. 그런데 입법부 즉 국회의 다수당과 행정부를 관장하는 당이 같아요. 그러면 ‘국민들이 그렇게 뽑았으니까 그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물으시겠죠.
좋습니다. 그러면 사법부는 어떤가요? 지난번에 국가 기관의 선거 개입 사건을 검찰총장이 제대로 조사하려고 했더니 아주 커다란 신문사에서 저 사람이 혼외 자식이 있다며 확인 되지도 않은 의혹을 제기했고, 결국 검찰총장이 옷을 벗었어요. 그런데 이 정보를 신문사에 제공한 사람이 청와대 소속이었다는 거죠. 이번에는 팀장이 제대로 수사하려 했는데 정직 처분을 받았어요. 사법부가 독립적으로 일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삼권 분립이 잘 안된 거죠.
그러면 제4의 권력이라는 언론이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대형 신문사와 방송국은 정부 편에서 보도를 해요. 뿐만 아니라 그 언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민 여론이 불법댓글들로 말미암아 조작되었다는 거죠.
사법부와 언론이 그렇게 되어 있으면, 이제 우리나라에 남은 기관이 뭐가 있어요? 종교와 시민단체들 뿐이지요. 그런데 요즘 처음 듣는 이름의 시민단체들이 마구 생겨나면서, 어떤 단체가 정말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행정부를 감시하는 단체인지 혼란스러워지고 있어요.
그러면 남은 건 뭐죠? 종교 밖에 없지요. 종교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잘잘못을 가리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인 거죠. 종교마저 정부 편을 들거나, 아무 얘기 안하고 있으면 우리나라에는 정부가 하는 일을 제대로 견제할 기관이 하나도 없는 겁니다. 많은 국민들이 종교계에 그걸 바라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교황님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예언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종교의 임무를 수행하고자 사회 문제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