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도 교황권도 더욱 확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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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0년 7월 18일에 열린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제4차 공개회의 모습.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교의를 공포한 이 회의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실상 마지막이었다.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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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
개막과 진행 과정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예정대로 1869년 12월 8일 로마 바티칸 바실리카 곧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장엄하게 개회합니다.
공의회 참석
대상 교부 1050명 가운데 774명이 개회식에 참석했습니다. 이탈리아 주교가 200명이 넘은 것을 비롯해 유럽 주교들이 약 3분의 2를
차지했지만,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와 아프리카, 오세아니아에서도 주교들이 참석했습니다.
세계 각 대륙
주교들이 참석한 것은 공의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공의회가 예정된 날짜에 정확히 개회한 것도 이례적이었습니다. 교통 수단의 발달로
그만큼 이동이 쉬워진 것입니다.
◇회의 진행
규칙 : 개회식에 앞서 시스티나 경당에서 회의 진행 규정이 발표됐습니다. 교황을 대리해서 공의회를 진행할 의장대리로 추기경 5명이 임명됐습니다.
회의는 전체회의와 공개회의로 구분됐습니다.
준비위원회가
마련한 안을 주교들이 검토한 후 전체회의에서 찬성, 반대 혹은 조건부 찬성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수정이 필요할 때는 대리위원회를 통해 수정한 후
다시 전체회의에 회부한 후 마지막으로는 교황이 주재하는 공개회의에서 찬반 표결을 통해 확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수정을 담당할
대리위원회는 신앙, 규율, 수도회, 동방전례 등 4개 위원회로 이뤄졌습니다.
공의회에서
논의할 의제를 결정하는 권한은 교황에게만 있었지만 주교들이 제안을 받아들여 의제로 채택할지 여부를 결정하는 소청심사위원회를 별도로 두었습니다.
흥미로운 일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 결정 사항이 된 교황 무류성이 바로 이 소청심사위원회를 통해 의제로 채택됐다는 사실입니다.
◇공의회
진행 과정 : 추기경들로 이뤄진 공의회 중앙준비위원회는 사전 작업을 통해 모두 51가지 안건을 마련했는데 그 가운데 6가지 안건이 공의회에
제출됐습니다.
주교들,
공석인 주교좌, 성직자 생활과 규율, 보편교회에서 사용할 교리서 준비, 신앙과 이성, 교회에 관한 안건들이었습니다.
공의회
교부들은 첫 공개회의인 개회식 후 4개 대리위원회와 소청심사위원회 등 다섯개 위원회 위원을 선출하는 데 거의 한 달을 보냈습니다. 12월
28일에야 신앙과 이성에 관한 안건으로 신앙교리위원회가 마련한 가톨릭 신앙에 관한 헌장 초안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초안은
장황하고 군더더기가 많다는 지적에 따라 신앙 담당 대리위원회와 전체회의를 오가며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습니다. 제17차
전체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최종 수정안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 안은 세
번째 공개회의에서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 헌장으로 통과됐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제목의 헌장은 제1장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 제2장 계시, 제3장 신앙, 제4장 신앙과 이성과의 관계 등을 제시하면서 이 교리에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이들을 파문한다는 내용의 법규를 싣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시를 부인하면서 인간 자연 이성의 힘으로 하느님을 파악할 수 있다고 여기는 당시 자연주의, 이성주의를 단죄한 것입니다.
공의회에
제출된 다른 안건들과 관련해서는, 초안에는 없는 교황 무류성을 안건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주교들 사이에서는 적극 찬성,
소극적 지지, 반대 등으로 입장이 엇갈렸습니다.
하지만
무류성을 안건으로 바라는 주교들은 500명이 넘는 교부들의 요청 서명을 받아 교황에게 제출했고, 교황은 이를 소청심사위원회에 넘겼습니다.
소청심사위원회는
25대 1의 압도적 찬성으로 안건에 포함시키기로 했고, 교회에 관한 안건 초안에 무류성 부분을 추가했습니다.
공의회는
「하느님의 아들」을 통과시킨 다음에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을 규정한 교회에 관한 헌장 수정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합니다. 열띤 토론과 거듭된 수정
끝에 시험 투표에서 찬성 451명, 반대 88명, 조건부 찬성 62명으로 통과시킵니다.
이어 제4차
공개회의에서 교부들은 찬성 533 반대 2로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을 규정한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영원하신 목자」를 통과시킵니다. 반대표를
던진 주교 2명은 교황앞에서 "교황 성하, 이제 저는 믿습니다"하고 승복했습니다.
「영원하신
목자」는 수위권과 관련, '품급(주교, 신부, 부제)과 전례(각 지역의 고유한 전례)를 불문하고 모든 목자들과 신자들은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교황에게 예속돼 있고 순명할 의무가 있다'면서 이는 "신앙과 도덕에 관한 사항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세계 교회의 규율과 통치에 관한 사안에도
해당된다"고 밝혔습니다.
또 무류성
부분에서는 '로마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목자요 스승으로서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전 교회가 받아들여야 할 교리를 자신의 사도적 최고
권위를 가지고 사도좌에서 발언할 때 무류성을 지닌다'고 선언했습니다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교의가 발표된 다음날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로마를 보호하고 있던 프랑스 군이 철군하면서 로마가
위태로워졌습니다.
공의회는 9월
1일 교부 120명이 모여 제89차 전체회의를 열었지만 그것이 끝이었습니다. 일주일 후 이탈리아 군대가 교황령을 침공했고, 9월 20일 로마가
함락되고 교황령이 붕괴됐습니다. 교황은 공의회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공의회는 다시 열리지 못했습니다.
▨공의회
결과와 의의
교황
무류성에 반대의사를 표시했던 주교들은 자기 교구로 돌아가서 대부분이 공의회 결정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일부 지식인들이 반기를 들고
'구 가톨릭교회'를 세워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나갔습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정립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아들」을 통해 인간 이성만을 강조하여 계시의 하느님을 거부하는 이성주의적
이신론(理神論)과 반대로 신앙만을 내세우고 인간 이성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에 이를 수 없다는 신앙주의의 오류를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 교황
수위권과 무류성에 관한 교의 헌장 「영원한 목자」를 통해서는 공의회우위설에서 비롯하는 갈리아주의나 페브로니우스주의 같은 오류들을 제어하고 교황의
권위를 확고하게 다질 수 있었습니다.
이후
교황들은 세속적으로는 교황령까지 잃게 돼 통치 기반이 사라졌지만 영적으로는 더욱 확고하게 권위를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교황은 이제 세속 군주가
아니라 교회와 세계의 영적 정신적 지도자로서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게 됩니다.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는 제1차 바티칸 공의회로 제1부를 마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아 다음호부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집중
조명하는 제2부 '끝나지 않은 공의회 :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사는가?'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