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ay back home -
06.08
에귀 디 미디(Aiguille du Midi / 3,842m) 남서릉
코스믹 릿지(Arête des Cosmiques / 350m Ⅱ AD 3)
오랜만에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목욕재계하고 다 같이 산행을 나선다. 셀보즈로 다녀온 나들이만 빼면, 전원이 등반에 나선 것은 일주일도 더 된 일이다.
사실 며칠 전만 해도 8일, 9일은 이틀 내리 날씨가 좋다는 예보가 있어 우리는 한 번 더 프렌도 스퍼를 시도하자며 칼을 가는 중이었다. 지난 실패 후 끈질긴 추적 끝에 문제의 침니 구간도 찾아냈고, 장비도 컴팩트하게 조정한데다 프랑스 감기 항체까지 완벽하게 준비해 두었으니, 사실상 갈 수만 있다면 성공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호석이형 말마따나 ‘알프스 산신령’은 우리를 받아줄 마음이 없는지 고사이 또 예보가 악화되었고, 결국 마무리 등반지는 코스믹 릿지로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전날 밤에 예약을 해둔 덕분에 오늘은 정말로 첫차를 타고 아침 일찍 일정을 시작한다. 케이블카를 갈아타기 위해 쁠랑에 잠시 서 있는 동안 에귀 디 미디를 바라보니, 겨우 일주일 새 벽 상의 눈이 멀리서도 보일 만큼이나 줄었다.
햐.. 이젠 벽 등반도 저번보다 훨씬 수월할텐데.. 날씨가 야속할 따름이다.
지난번처럼 장비를 차고 동굴 문을 나선다. 국내에서부터 느껴온 것이지만, 현직 등산학교 강사로 일하고 있는 두 큰형은 각종 시스템이나 새로운 기술에 해박하다. 형들이 오니 안자일렌 묶는 방법부터가 다르다. 지금껏 ‘익숙한 게 최고’라는 마인드로 살아왔는데, 더 다양하고 큰 등반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시스템들을 배워갈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설원으로 내려가는 길, 한 번 와본 덕분인지 이제는 스노우 릿지가 그다지 불안하지 않다. 지난번엔 추락이 걱정돼서 잔소리를 했다면, 이번에는 앞에 가는 호석이형의 엉거주춤한 자세를 놀린다. 가끔 보면, 여섯 살이나 차이나는 동생이 맨날 놀려대는데 화 한 번 내지 않는 호석이형이 참 대단하다 싶다. 아 이 형 참 좋은데, 누가 안 데려가나.
집에 돌아갈 때가 되니 이제야 알프스에 완전한 적응이 됐는지, 오랜만에 산에 오른 형들을 멋지게 찍어주려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는데도 몸이 아주 가볍다.
“하... 어차피 시험장 못 갈 줄 알았으면 원정이나 좀 길게 올 걸...”
얼마 전 1년에 한 번뿐인 생활체육지도자 필기시험에 늦잠을 자느라 못 간 나였다.
코스믹 릿지의 시작점인 아브리시몽 비박 헛(Abri-Simond Bivouac Hut)을 지나 점점 가팔라지는 바위 능선을 따라 오른다. 시간은 열 시 반.
“아니, 이거 대체 어디까지 가서 로프를 쓰는거지?”
“이러다 끝까지 가겠는데.”
이 일대에 올라오는 산꾼들의 상당수가 케이블카 역 복귀에 선택하는, 소위 ‘귀갓길’인 곳이라 그러한지 오히려 생각보다도 쉽다. 첫 하강 지점이 나오기 전까지 30분이 넘도록 로프 없이 전진한다.
만일 아무런 고생도 않고 편안히만 지내다 코스믹에 붙었다면, 코스가 생각보다 너무 쉬워서 싱겁다는 평을 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고생은 이미 신물이 나도록 했으니, 더 이상 등반에 전투적으로 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형용할 수 없는 감사함을 느낀다.
원래 힘들고 거친 여정에서 무사히 돌아오고 나면, 일상적인 작은 일에도 하나하나 감사하는 마음이 샘솟는 법이다.
하강점에서 떨어트린 장비를 회수하다 뒤처진 나는 뒤로 빠지고, 큰형들을 선두로 하여 쭉쭉 정상까지 밀고 나간다. 나름의 크럭스인 믹스 구간을 통과한 후, 릿지의 남측면에서 북측면으로 넘어서니 제법 가까운 곳에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시간은 한 시. 주변의 모든 것들은 짙은 가스에 잠기고, 어느새인가부터 가늘가늘한 눈발이 조용히 내리고 있다. 평소라면 우리를 조급하게 만들었을 눈발마저, 오늘만큼은 우리의 무사 생환을 축하하는 포근한 눈으로만 느껴진다.
아름다운 산, 아름다운 날이다.
첫댓글 등반기 잘 감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선배님, 참으로 고맙고 멋진 분이구나!^^
ㅎㅎ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