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인간학이다. 미래를 예시하기 위해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 이며 좋은 수필의 요건이다.
수필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듬는 글이다.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사회 속에 속한 사회인으로써, 시대의 허리를 받치는 중추로, 작가적 소명감이 있어야 한다. 분명한 철학 - 글에 일관성 있게 흐르는 주제의식이 담겨 있어야 한다. 주제의식은 논설이나 훈계조의 직설화법이 아니라, 정서가 흥건하게 배어 있는 음유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작가는 항상 시대를 꿰뚫는 혜안과 통찰력이 필요하다.
시대를 외면한 글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작가는 항상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열어 놓는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예전에는 옳다고 생각한 가치가 더 이상 진실이 되지 못하고, 그 반대일 수 있는 것이 시대의 흐름이다. 그 흐름을 간파하며 독창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나만의 신선한 것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을 읽는 눈은 열린 사고에서 나온다. 표현상 시(詩)의 적절한 함축미를 취택해야 한다. 시대감각을 무시한 채 단순한 과거회상이나 '나'의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그 글은 객관성을 잃게 된다.
수필은 '나'를 통한 '우리'의 고찰이고, 과거를 비추는 미래의 통로이다. 한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컵에 물이 반쯤 담겨 있을 때, 반 밖에 남지 않았다고 조급해 하는 것과, 아직 반이나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사회를 어둡게 하는 소식보다 숨겨진 미담이 많다는 것을 수용 할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평소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지식축적과 소양을 기르는 데 힘써야 한다. 로 이루어져 있다. 자칫 잣대를 잘못 대어 위에서 내려다보는 글이 되면 자기과시로 흐르게 되고, 지나치게 겸손하면 자기비하로 여겨진다. 작가와 독자가 어깨를 맞대고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흥겨운 춤사위처럼, 수필은 같은 눈높이에서 내다보는 또 다른 세상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조금 거칠더라도 분명하게 자기 색깔을 나타낼 수 있는 글이 환영 받는다. 식상하기 쉽다. 누구나 경험하는 일들이지만 나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읽어내고, 그 흐름을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다양한 경험과 창의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
문학은 상상력의 폭만큼 감동이 증폭된다. 행복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수필은 개인이 겪은 사실의 가감 없는 전달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생산되는 창의적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수필은 단락의 문학이다. 해야 한다. 월드컵대회 때 히딩크가 선수들을 조련하는 방법을 배우자고 했고, WBC 배 야구시합 때 김인식 감독의 믿음의 관리학 을 본받자고 했다. 대중과 독자 속으로 파고들어 두 발을 담글 수 있어야 한다. 자기중심의 가치관을 뿌리 삼아 가지를 사방으로 뻗치고 서 있는 나무처럼, 세상 온갖 것을 빨아들여 수용하고 그것을 푸른빛으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미문은 진실을 호도할 위험을 내포한다. 왠지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여운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비빕밥에 마지막 넣는 한 방울의 참기름처럼,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맛을 내기 위해서는 각고의 훈련을 거쳐야 한다. 건드리면서 냉철한 이론의 합일을 이룬다 해도 진실하지 않으면 감동을 주지 못한다. 진실이 담겨 있지 않은 글은 번쩍거리지만, 가치 없는 이미테이션과 다르지 않다. 당장은 화려함에 눈길을 받게 되지만, 곧이어 외면당하게 된다.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진실'이라는 보석이다. 각고의 세월을 거쳐야 비로소 도달 할 수 있는 경지라고 한다. 한평생을 바쳐야 이룰 수 있는 경지이기에 범인(凡人)은 감히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삼전지묘(三傳至妙)'의 기법이다. 점이다. 아무리 기교가 뛰어난다고 해도 '삼전지묘'가 되지 않으면, 난 잎이 아니라 풀잎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다.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고심해서 쓴 글은 독자에게 쉽게 읽혀지고, 쉽게 쓰여진 글은 뜻도 애매해 어려운 글이 되어버리는 이치 라고 할 수 있다.
좋은 글은 평이하게 읽히는 글이다. 흐르게 된다. 수필은 객관적인 입증을 거쳐 명확함으로 고증되어야 하고, 뜻이 애매하지 않아야 되며, 일관된 주장으로 촌철살인의 명쾌함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 같은 일련의 과정은 끊임없는 훈련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형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글은 자신의 생각을 담아내 남과 공유하는 것이므로, 혼자만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집에서 벗어날 수 없다. 폭넓은 사유와 멈추지 않는 자기성찰이 있을 때, 좋은 글은 저절로 다가오게 된다.
한 편의 수필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작가적인 창의력이 필수요건이다. 통해 잠자고 있는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그 감흥이 배가되어야 창조의 에너지가 나온다.
세태에 따라 모든 것은 변한다. 되고, 어제의 사고가 오늘을 이끌어갈 수 없듯, 변화하는 세상에 혼자 고답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으면 도태될 수 밖에 없다. 대중가수인 나훈아나 조용필이 나이가 들어도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그들이 끊임없는 자기계발을 통해 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장씩이라도 글을 쓰며 자신을 연마하지 않으면 좋은 글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창작의 기쁨으로 승화되지 않는다.
수필은 비유와 유추의 문학이다. 국물을 우려내듯, 함축은 자르기가 아니라 전체를 졸여내는 과정이다. 원용한다. 형용사와 부사가 넘치는 글은 자칫하면, 집은 없는데 방만 오밀조밀 꾸미고 있는 것처럼 허세로 보일 수 있다. 줄여낼 수 있다. 한 문단으로 설명할 것도 간접묘사를 통해 한 문장으로 줄이고, 한 문장은 적확한 은유 하나로도 감동과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은유의 범위를 확대하면 문장이 깔끔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시적문장으로서의 힘을 지니게 된다.
수필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유행한다고 해서 갖고 있는 긴치마의 길이를 싹둑 잘라 입고 나갈 수는 없듯, 짧은 글 안에는 더 많은 은유와 상징을 통한 - 진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 말들을 나열하게 되면 짧은 수필의 창작의도에서 벗어난다. 글을 쓰다보면 자신에게 맞는 길이가 어느 정도인가, 감을 느끼게 된다. 인지는 각자 개성의 문제다. 때로는 짧은 글로 생각을 담뿍 담아낼 수도 있고, 몇 십 장 되는 장편으로 소회를 풀어내야 할 때도 있다. 수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너비가 관건이 된다. 내가 입는 긴 치마가 부끄럽지 않고, 남이 걸친 짧은 치마도 멋스럽게 봐줄 수 있는 운용의 묘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글을 읽어야 한다. 고전을 통해 숨은 힘을 기르고 신간에서 새로운 힌트를 얻어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인용이나 도용이 아닌, 육화 되고 체화 된 다양한 지식과 지혜는 작가의 심성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 두루 섭렵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격조 높은 글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격조 높은 글을 많이 읽고 나면 저속한 글이 구별된다. 나에게 맞는 글, 내게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글, 책을 덮고도 한참을 머릿 속에서 경구(警句)가 떠나지 않는 글이 내게 맞는 좋은 글이 된다.
양서는 권장 받는 것이 아니다. 아니라, 모두에게 좋아도 내게 맞지 않으면 그것은 좋은 것이 될 수 없다. 콩나물처럼, 내 안의 정화장치를 통해 스스로를 지켜갈 때 다양한 독서는 자양분이 된다. 이란 어떤 것이라고 수없이 정의되어 왔다. 하지만 자신만의 수필론(隨筆論)이 확립되고 다른 사람의 이론도 존중할 안목이 키워질 때까지 끊임없이 논의되고 수정되어야 한다.
수필의 얼굴은 다양다기하다. 통용되는 마스터키 같은 글의 왕도는 없다. 세상을 받아들이려고 하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내게로 온다. 담을 허물면 내 울안을 침범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담 바깥까지 내 마당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남의 주장을 인정할 줄 안다. 그것이 그 사람의 교양이고 인격이다.
변화하는 것은 발전이다. 변화의 모색은 수필가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아포리즘이다. 좋은 수필에 관한 한 완성은 없다. 완성을 향해 가는 노정(路程)이 있을 뿐이다.
출처: e-수필 |
출처: 꿈꾸는 정원에서 원문보기 글쓴이: 희라
첫댓글 함축은 '자르기'가 아니라 '졸여내는' 과정이다.
'나'를 통한 '우리'의 고찰--- 좋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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