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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로부터의 대탈출을 기념하는 유월절Passover은 유대인의 최고 명절입니다. 전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성내는 발 디딜 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습니다. 그날 새벽,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했던 제자의 밀고密告로 체포되셨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원수들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소식을 전해들은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용하지만 일사분란一絲不亂하게 움직였습니다. 순식간에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아무리 흉측한 죄인을 다루는 재판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아홉시 이후에 개정하기로 한다는 원칙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습니다. 마치 무엇인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최소한의 사람들만 모인 상태에서 곧바로 재판을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이번만큼은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재판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했습니다. 그들이 미리 준비해 두었던 거짓 증인들은 서로 다른 말을 했습니다. 그들의 말은 증거로 채택할 수 없었습니다. 판결 요건에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것 따위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변론할 기회를 거의 주지 않은 상태에서 사전 모의를 통해 이미 확정해 놓은 대로 사형을 선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심한 채찍질을 당하셨습니다. 당시 채찍에는 날카로운 뼛조각과 쇠구슬 등이 달려 있었습니다. 한 대라도 맞으면 뼈가 부서졌습니다. 몸 이곳저곳에서 살점이 뜯겨져나갔습니다. 선지 같은 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걸음도 제대로 옮기기 힘들 정도로 기진맥진해 지셨습니다. 그런 몸으로 십자가의 가로 기둥을 어깨에 짊어지고 협착한 고난의 길Via Dolorosa을 걸어가셨습니다.
겨우, 600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길이었지만 한 시간씩이나 걸려서 겨우 형 집행 장소인 골고다 언덕에 도착하셨습니다.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가장 무자비하며 또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치욕적인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고통스러운 비명과 신음만 난무하는 극형을 받으셨습니다.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혀를 끌끌 차며 혐오嫌惡하는 최악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전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여섯 시간 동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오후 세시에 운명하셨습니다.
“물이 잦아들듯 맥이 빠졌습니다. 뼈 마디마디는 어그러졌습니다. 가슴 속 염통은 촛농처럼 녹았습니다. 목은 깨진 옹기 조각처럼 타오릅니다. 혀는 입천장에 달라붙었습니다...손과 발은 마구 찔린 채 죽음의 먼지 속에 던져졌습니다. 몸의 뼈들은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로 다 드러났습니다.”(시22:14-17)라는 증거에 따르면, 피와 물이 조금도 남지 않고 완전히 다 쏟아졌습니다. 뼈들은 어그러졌습니다. 마음은 촛농처럼 녹아내렸습니다. 힘은 완전히 고갈되었습니다. 목은 마르다 못해 타는 것 같았습니다. 혀는 덕장의 생선들처럼 말라비틀어졌습니다.
입천장에 완전히 달라붙었습니다. 몸의 뼈들을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로 앙상하게 다 드러났습니다. 뼈마디들 가운데 성한 데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말 한마디 꺼내는 것조차 고통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 밑을 지나가고 있던 사람들은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고 장담하던 사람아! (남들은 고사하고) 자신이나 구해 보시지!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막15:29b-30)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비웃었습니다. 조롱했습니다. 멸시했습니다.
모욕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율법학자들과 함께 “저 사람이 다른 사람들은 구원하고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나.”(막15:31b)라고 수군거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라.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겠다.”(막15:32a)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했습니다. 백성들은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면서 서서 구경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이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했다. 만일 이 자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인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자신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눅23:35)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비웃었습니다.
군인들은 신포도주를 주면서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라면 네 자신부터 구원하라.”(눅23:37a)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희롱했습니다. 함께 못 박힌 강도들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눅23:39b)라고 말했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지은 자들이 죄라고는 그림자조차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욕했습니다. 거기다 십자가 밑에서는 군인들이 발가벗겨놓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옷을 서로 가지려고 제비뽑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어야 마땅한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취급했습니다.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사람들마다 나를 보고 비쭉거립니다. 머리를 흔들며 빈정거립니다.”(시22:6-7), “황소들이 떼를 지어 에워쌌습니다...들소들이 에워쌌습니다. 으르렁대며 찢어발기는 사자들처럼 입을 벌리고 달려듭니다.”(시22:12-13), “개들이 저를 에워쌌습니다. 악당의 무리가 저를 둘러싸 손발을 묶었습니다.”(시22:16)라는 절규가 저절로 쏟아질 정도였습니다. 저라면 도무지 참지 못하고 온갖 욕과 저주를 퍼부어버릴 것 같습니다. 가지고 있는 탁월한 능력을 십분 발휘하여 제압해 버릴 것 같습니다.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 곧 사형 집행자인 로마 군인들, 주범인 산헤드린Sanhedrin 공회원들, 음모에 가담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눅23:34a)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도, 경험하지도, 깨닫지도,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보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다스리고 있던 어둠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던 지식과 생각, 판단과 의식 등은 무용지물이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을 때, 저와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창세전 작정이었습니다. 한번은 반드시 되어야할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작정을 이루는 도구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악한 도구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악한 도구가 되도록 역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아니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 악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선택할 때 충분히 심사숙고하고, 충분히 기도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용서를 구하셨습니다. 그들을 용서의 자리로 초청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한편, 종은 왕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유대 역사가Josephus의 기록에 따르면, B. C 4세기 경 유대와 인근 지역에서는 대략 육백 달란트 정도의 세금이 걷혔습니다.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한 달란트는 약 6,000 데나리온이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일반 노동자의 하루치 임금입니다. 한 달란트는 약 16.4년 치 임금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약 십육만 사천년 치 임금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시90:10a)이라는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인생은 고작 칠십에서 팔십년에 불과합니다. 아니 2024년도 대한민국의 남자의 평균 수명은 86.3년, 여자의 평균 수명은 90.7년에 불과합니다. 평생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서 번 돈을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다 모아도 절대로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종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치며 노력해도 갚을 수 없었습니다. 가진 모든 걸 다 팔아도 갚을 수 없었습니다. 참아 달라고, 다 갚겠다고 간절하게 애원할 수는 있어도 갚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습니다. 왕이 면제해주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처형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몸과 소유를 파는 것은 물론 아내와 자식들을 종으로 팔아서라도 갚으라는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당시 노예의 값은 많이 쳐줄 때 한 달란트정도였습니다. 대부분은 10분의 1달란트나 그 이하에 불과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갚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조금만 더 참아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갚겠다는 약속은 절대로 지킬 수 없었습니다. 빚의 수렁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절망이었습니다. 전적 무능이었습니다. 불가항력이었습니다. “사람의 생명 값은 너무도 비싸며, 아무리 많이 내어도 살 수 없습니다.”(시49:8)라는 시인의 고백대로,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은 절대로 자신이 저지른 죄의 값을 갚을 수 없습니다. 죽고 또 죽고 또 죽고 골백번 죽어도 갚을 수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몸은 물론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까지 다 팔아도 갚을 수 없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쉬지 않고 수고해도 갚을 수 없습니다. 마침내,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불과 유황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구덩이에 아무렇게나 던져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으로 회복될 가능성을 조금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파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왕은 빚을 탕감해줄 수 있는 여력餘力이 충분했습니다.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충분히 인식하고, 솔직하게 고백한 다음,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구하는 그를 “불쌍하게σπλαγχνισθείς” 여겼습니다. “측은하게” 여겼습니다. 그의 빚을 기꺼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막대한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값없이 베풀어주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해서 세상에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待臨節 절기 세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선지자는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는 절대로 갚을 수 없는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어두운 세상에 나타나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동행 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인류 구원을 위한 서막序幕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함께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왕이 값없이 베풀어준 은혜를 받고 돌아가던 종은 길에서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빚은 백 데나리온이었습니다. 노동자 백 일치 임금이었습니다.
자신이 왕에게 탕감 받은 빚의 60만분의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얼마든지 갚을 수 있는 빚이었습니다. 동료는 반드시 갚겠다며 말미를 조금만 더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는 완고頑固했습니다. 융통성이 전혀 없었습니다. 고집불통이었습니다. 동료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미뤄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관례대로 남은 가족들이 빚을 갚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자신이 왕에게 값없이 받아 누리게 된 은혜와는 정 반대로 행동했습니다. 사실 그는 왕이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았었다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은 가족들은 자신의 빚을 갚기 위해서 모두 노예로 팔려가는 비참한 신세를 면할 수 없었습니다. 당연히 감사와 감격과 감동이 넘쳐야 마땅했습니다. 왕이 자신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평생 잊지 말아야했습니다. 받은 은혜를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는,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동료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은혜를 베푸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야했습니다. 그것이 왕이 베푼 은혜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이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상황을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었던 동료들은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동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절망감이 밀려들었습니다. 소식은 곧 왕에게 알려졌습니다. 왕은 그를 당장 불러들였습니다. 자초지종을 따졌습니다. 악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마18:32-33)라고 호통 쳤습니다.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집어 넣어버렸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그가 진 빚은 평생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아니 영원히 갚을 수 없었습니다.
영원히 감옥에 버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마18:35)라는 증거에 따르면, 용서를 베푸는 삶은 값없이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진심으로 받았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삶에서는 반드시 찾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도 찾기를 바라시는 특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는 사명입니다. 그Charles Wesley는 “천사 찬송하기를”이라는 제목의 찬송가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오늘 나신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와
처녀 몸에 나셔서
사람 몸을 입었네
세상 모든 사람들
영원하신 주님께
영광 돌려보내며
높이 찬양하여라
영광 돌려보내며
높이 찬양하여라
자신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죄를 지었는지 온전히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런 저와 여러분에게 베풀어진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깨알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감사와 감격과 감동이 넘치는 복된 성탄 절기, 자신에게 빚진 자를 기꺼이 용서하기로 결단하는 복된 성탄 절기, 무엇보다 영원히 값을 수 없는 은혜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값없이 베풀어주기 위해 세상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리는 복된 성탄 절기를 보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