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에서 가장 깊은 산골...도천골 이야기 거제도에는 대금산을 따라 네 개의 골짜기가 있다. 1) 연초면 명동리 도천골과 대금산 동네 2) 장목면 외포리의 정골( 점골 동네) 3) 장목면 시방리의 절골 동네 4) 장목면 시방리의 봇골 동네가 있다. 오늘은 거제도에서 가장 골이 깊은 명동 도천골(홈골)을 찾아가 보자 ( 5km 도보 30분)
대금산 가는 길은 외포 상포마을 그리고 율천고개와 도천골 입구의 세 군데가 있다. 그리고 이 길 이외에 정골, 절골, 봇골의 지름길이 있으나 일반인은 잘 가지 않는 곳이다. 명동리 명상마을의 원래 이름은 홈골이다. 이 마을은 본 마을과 안골, 도천골, 버든, 대금산 아랫마을, 대금산 윗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옛날 農者 天下之大本이라 하여 농사가 모든 것을 좌우했다. 도천 골 물과 대금산 약수가 만나는 곳이 버든(柳村이다. 이 곳이 네 갈래 길인데 아랫길은 명상 본 마을이고, 직진하면 율천 고개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대금산마을이며, 왼쪽으로 가면 거제도에서 가장 깊은 골에 자리 잡은 도천골이며 좀 더 들어가면 안골이라는 동네가 나온다. 이곳이 거제도에서 가장 깊은 골이다. 이곳이 도천골이다. 도천골(都泉)이란 물의 근원이란 뜻이다. 이 고을에 인물이 많이 났는데 조선 중기에는 청송도호부사(정삼품) 지낸 사람이 살았으며 거제 한학자 김계윤(명계 유고, 1875~1951) 항일운동가 윤택근(1872년생, 윤일 7살 때 아주동 이사), 윤병철( 하나은행장), 윤춘근(1962년 소장 예편), 윤병각(1954년생, 변호사)), 김순부(1967년생, 변호사), 정태구 (1941년생 축협 조합장) 등 수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옛날에는 산골에 사는 사람이 출세했으나 지금은 강남에 있는 사람이 출세한다. 옛날에는 열심히 노력해서 명예를 얻었으나 지금은 돈으로 사람을 만든다.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맞아 들어가는 시대인가? 도천골 목장이야기 ( 증언 정태규) 정태규 씨는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으나 뜻한 바 있어 고향을 개발해 보려고 작심하고 홈골로 내려왔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축산을 장려해야 한다는 의지 때문에 전국에 목장 건설 붐이 일었다. 정태규 씨도 목장을 하려고 했으나 자금력이나 행정력이 딸려 김종찬 도의원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그런데 農 자도 모르는 김종찬 씨는 김 서무과장을 시켜 정태규 씨를 찾아와 농장을 개설해 달라고 몇 번이나 왔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트랙터가 갈 수 없는 길이 없어 트랙터를 분해해서 인부 5명이 끌고 갔다고 한다. 한 달 동안에 산비탈을 목초지로 만드는 데 최선을 다해 2만 평이나 되는 목장을 완공했다고 한다. 그 뒤 목장을 경영했으나 실패하고 몇 사람을 거쳐 지금은 하청 윤병훈 소유라고 한다. 현재는 소는 없고 염소 몇 마리만 외로이 목장을 지키고 있다.
도천골의 역사 (증언 정태규) 아주 오랜 옛날 약 1870년경 정성덕이라는 사람이 도끼 한 자루 들고 어머니와 함께 홈골에 들어와서 지천으로 깔린 나무로 장작을 해서 팔아 생활하다 보니 한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0년대만 해도 도천골에 30여 가구가 있었으며 대금산 아래, 윗마을에 15가구가 있어 상당히 큰 규모였다고 한다. 옛날에는 물 좋고 나무만 좋으면 명당 마을이었다. 그래서 연초, 이목 하청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심지어 산청 가덕 사람들도 모여 살았다고 한다. 윤병삼 씨, 정찬주 씨, 박강하 씨, 이찬호 씨, 김기수 씨, 서00 씨, 공개로, 김구식 등이 살고 있었으며 길흉사가 있으면 며칠간 서로 어울려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떠나는 적막강산이다. 도천골마을 지나다 우연히 들른 곳이 94살 된 정복수(공계오)댁이었다. 첫마디가 혹시 이곳에 천곡에서 시집온 옥석순 씨를 아시나요? 알고 말고 우리 뒷집인걸. 나중에 확인한 거지만 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었는데 우체통에는 옥석순이란 편지가 있지 않은가? 이 집을 비운 지가 10년도 넘겠구먼. 사라져 가는 농촌 현실을 보면서 아련한 추억이 생각나면서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최갑석 씨의 노래 ” 고향에 찾아와도 그리운 고향은 아니지만, 두견화(진달래) 피는 언덕에 누워 풀피리~~~. 할머니는 사람이 그리워서 손을 잡는 바람에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노래도 한 곡 뽑았다. ♪♪ 어머니 손을 놓고 돌아설 때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할머니도 화답하여 ♪노새 노새 젊어서 놀아 늙고 병들면 못노라니~~~♪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심심산골로 들어간다. 거제도에 산골이 있지만 이렇게 좁고 긴 산골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한참 올라가니 목장이 보인다. 30여 년 전 학생을 데리고 소풍해 온 기억이 살아난다. 멀리서 쳐다보니 소는 보이질 않고 염소 소리만 들린다. 외부인 출입 금지라 하여 발길을 돌린다. 앞산 뒷산 일부는 깎아 버리고 인공조림 준비를 한다. 인공조림하여 목재를 생산해도 쓸모가 없으니 왜 하는지 모르겠다. 한 바퀴 돌려고 하다 너무 먼 것 같아 중도에서 돌아왔다. 다시 집이 한 채 보이고 웬 할머니가 다리를 질질 끌고 한탄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아이고 아이고, 뭐 달라고 이곳에 왔는가. 이웃도 없고 남편도 없으니 살아서 무엇할꼬? 듣고 있자 하니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질 않는다. 나도 저런 나이가 때면 이런 골이 되려나??? 가만히 보니 장목에 있는 윤 씨 아저씨 부인 생각이 난다. 할머니, 혹시 장목에 사셨나요? 그래 내가 장목에 살았다. 내 동생은 모골배 집에 시집가서 잘사는데 나는 이 험한 골짜기에 시집와서 이렇게 눈물만 흘리고 있다오.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노래도 불러줄 분위기도 아니고, 위로의 말씀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밥은 어떻게 하나요?
그야 도우미 오지. 우리나라도 많이 발전한 것 같다. 내가 아는 이웃 마을 x, y, z 할머니들도 모두 도우미의 도움을 받고 있다. 어떤 이는 목욕까지 시켜주니 우리나라도 선진국에 접근하는 모양이다. 아쉬워하는 할머니를 뒤로한 채 발길을 옮긴다. 처음 출발한 곳이 버튼이라는 곳이다. 이곳에는 5~6집 살았으며 똑똑한 인재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대금산 약수터와 탕근쟁이 집 다시 대금산 마을 올라갔으나 사람이 잇는 집이 거의 없어 대담을 나누지 못했다. 몇 년 전 연초 면지에서 마을 골골이 사연을 조사했으나 깊이 있는 조사가 없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이 명상마을에는 저 대금산 정상까지를 말함인데 옛날에 대금산 아래 약수터 밑에 탕근쟁이 영감이 살았다고 한다. 정태규 씨의 왕고모가 살았는데 남편이 가덕도 사람인데 이곳에서 탕근을 만들어 팔았다고 한다. 왕고모는 이곳에 땅이 좋아 인삼, 당귀 등을 심어 솔솔한 재미를 보았다고 한다. 대금산 주변의 땅을 보면 검은색으로 화산재가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정상 부근에는 발을 구르면 퉁퉁 소리가 지금도 나고 있다. 아마 동굴이 있을지도 모른다.
대금산 약수터에는 옛날 내가 어릴 적 한두 번 갔는데 꽃피고 새우는 삼월이 되면( 삼월삼짇날) 주변에 있는 동네(명동, 율천, 대금, 이목, 천곡, 덕포, 옥포, 외포) 사람들이 모여들어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며 야유회를 즐기고 저녁 무렵에는 동네끼리 싸움이 붙어 그걸 구경하러 가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십여 년 전 이곳에 정신병자 수용소가 있었는데 그 책임자가 을옻( 피부병)이 있었는데 몇 개월 이 물로 목욕하니 없어졌다는 얘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1980년대 미국에 살다가 고향에 들러 대금산 약수를 측정하였는데 진짜 좋은 물이라는 판명이 났다고 한다. 왜 그런고 생각해보니 약수터 위에는 물오리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그 나무의 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데 4~5년 전 진달래 심는다고 모두 베어버렸다. 진달래 평원도 좋지만 그러한 행위를 할 때는 세심한 조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물이 적게 나와 먹을 수 없어 아예 덮어버렸다.
마무리하며... 옛날 학교 다니면서 나도 천곡 촌놈이면서 명동 사람들을 홈 골 촌놈, 도천골 촌놈이라 놀려댄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至愚責人明’ )는 속담이 생각난다. 물 좋고 산 좋고 공기 좋아 농사가 천하지대본인 시절에는 살기 좋은 곳이었으나 교통이 불편하고 현대문명이 뒤떨어진 곳이기에 1990년대부터 마을이 기울기 시작하여 지금은 고향을 지키기 위한 몇몇 분과 텃밭을 가꾸기 위해 살아가는 몇몇이 있을 뿐이다. 옛 시골의 향취를 맛보며 도천골 임도 길을 둘러보며 대금산 마을 둘러 산행을 해보는 것도 또 다른 힐링이 되지 않을까요???
거제의 명산...대금산 이게 뭐냐구요? 조입니다. 옛날에는 주식으로 사용하는 다섯가지 곡식을 오곡이라하는데 쌀, 보리, 조, 콩, 기장입니다. 밥에다 조를 석은 것을 조밥이라하는데 너무 먹고 싶습니다.
대금산에서 바라 본 거가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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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도천골이 너무 삭막한 곳으로 느껴져서 댓글 올립니다.
현재 안골이라 불리는 곳에는 8가구 주민이 살고 있고 10개의 농막에 거제도에 주소를 둔 분들이 오가며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여다 보면 어느곳보다 평화롭고 한적한 마을과 사람들이 보일거예요.
할머니는 주말마다 자제분들이 찾아오셔서 우리 마을에서 가장 북적북적한 잔치집이 됩니다.
현재의 모습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됩니다.
저희들은 자유롭고 평안하게 잘 지냅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