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광우 바이오그라피 47)
당시에 일어난 사건 중에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있다. 이 나라 최고재벌이었던 장충동 삼성그룹의 이병철회장이 사는 인근에 소문난 부자가 살았다. 그의 집에는 경비초소가 있었고, 집안에는 사설 경비원들에 의하여 24시간 경비가 이루어졌다. 부자는 그 당시 화폐로 약300억 원의 현찰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대학 입학금이 7만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자택에 침입한 강도에 의해서 피살되었다. 사람이 죽을 운명이다 보니 평소 그렇게 엄중한 자택 경비도 무용지물이었다. 그가 죽고 난 후에 그의 평소 생활에 대한 편린(片鱗)들이 언론에 의해 공개되었다. 그는 평소에 바깥에서 자장면을 사 먹을 정도로 돈을 아꼈다고 한다. 돈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극도로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주위사람들에게도 몹시 인색했던 것 같았다. 돈이 없어도 진짜 부자로 사는 사람이 있고, 돈이 많아도 진정 가난한 사람이 있다. 또한 쓰는 만큼만 부자라는 말이 있다. 장충동 부자는 바로 그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성경에도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보다 어렵다” 고 하였다. 그 사건은 당시 사회적으로 상당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에피소드114]
심신단련을 목적으로 가입한 태권부와 더불어 나는 교내 방송국에 기자로 잠시 활동했다. 기자 시험의 경쟁률이 10:1을 넘을 정도로 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수습기자시험 때 내가 쓴 논문 제목은 “쓰레기통에서도 민주주의는 피어난다.” 이었는데, 이 논문으로 나는 1위에 합격하였다. 이어 교내 방송국 신입국원 환영회에서 생맥주 파티가 열렸다. 나는 1000cc맥주잔을 처음 보았는데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혹시 먹고 기절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과연 내가 먹을 수 있을까 생각했지만 막상 먹고 보니 맛도 있고 부드러워서 연거푸 석 잔을 먹었다. 나는 이후 맥주에 맛을 들여서 맥주 마니아가 되었고 최고로 많이 먹었을 때는 학교 앞 맥주홀 알로하에서 1만cc까지 마셔 보았다. 나중에 직장 생활할 때(외환은행)도 맥주하면 내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소문이 났다. 그러나 학창시절에는 호주머니 사정으로 주로 막걸리나 소주를 먹었다.
방송국 기자생활은 사정이 생겨 덕수궁 고궁음악회를 개최한 가을까지만 다녔다. 교내에서 반정부 데모가 한창일 때 정규 음악방송을 내보내다가 방송중지를 요청한 흥분한 데모학생들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당시 같은 기자로, 친하게 지낸 정갑영군은 당시 교내방송국 아나운서이고 성격이 여성스러웠고 미모의 소유자였던 H양(가정대)과 학창시절 내내 교제해 마침내 결혼에 골인, 캠퍼스커플이 되었다. 정갑영은 경제과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잠시 다니다가 국비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했다. 펜실베니아 대학 경제학석사, 명문 코넬대학 경제학박사를 취득하고 모교 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교무처장, 미래캠퍼스 부총장을 거쳐 제 17대 연세대 총장에 취임했다. 그는 총장 재임 시 송도국제캠퍼스의 이전, 백양로 재창조 사업, 학생 기숙사 통합신축, 이, 공과대 증개축, 경영관 및 원주 의료원의 신, 증축 등 연세대의 대부분 숙원사업을 모두 완결시켰다.
특히 백양로 재창조 사업은 교내의 일부 학생들과 교수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그리고 공사가 완공된 후에는 캠퍼스의 모습이 세계적 수준으로 변모되어 높은 업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정 총장은 학교의 외형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많은 개혁적인 사업을 추진하여 영국의 세계대학 명성도 평가기관에서 역대 최초로 세계 80위권(사립학교 21위)에 모교를 진입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또한 그가 재임 중 청와대로부터 정부고위직(청와대 비서실장)에 일해 달라는 요청도 여러 차례 받았으나 사양했다고 한다. 정 총장은 소문에 의하면 전북 만경 평야의 대 지주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그 재력 때문에 연세대 다닐 때도 다른 시골출신들과는 달리 하숙을 하지 않고, 학교 근처 연희동에 있는, 부친이 사준 2층 양옥집에서 생활했는데, 나도 그 집에 몇 번 가서 잔적이 있었다.
나중에 3학년이 되어 방송국장을 한 서영일(행정학과)군은 미국으로 가서 신학대학을 졸업 목회자가 되었고, 작가활동도 한동안 했는데, 불행히도 이른 나이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학창시절에도 감성적인 시를 쓰는 등 감수성이 너무 풍부한 친구였다. 경기여고를 나오고 의생활과를 다닌 미모의 오영제 아나운서는 졸업 후 MBC에 들어가서 당시 인기프로의 진행자가 되었다. 그런데 인기가 올라갈 즈음, 퇴사한 그녀는 미국에 유학 미국 모 대학 교수가 되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아직도 독신이라고 한다. 같은 기자였던 구본상은 내가 외환은행 가기 전에 잠시 근무했던 금성계전에서 만났다. 그는 총무부서에서 근무했고, 나는 심사부에서 일했다. 그가 일한 총무부에는 나중에 명 야구 해설가로 이름을 날린 허구연씨도 고참사원으로 같이 일하고 있었다. 국문과의 홍성철은 구본상, 나와 함께 이대 앞 지하 막걸리집에서 자주 술잔을 기울였다. 그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무슨 기막힌 사연이 있었는지 군대 단기하사로 가서 장기하사관 복무를 신청했다고 한다. 그 후에 전혀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는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가기에는 심성이 너무 곱고 여린 편이었는데, 술에 취하면 자주 세상을 비관했던 기억이 난다. 프로듀스였던 간호학과의 임묘옥은 간호학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서강대학교 독문과에 다시 시험을 쳐서 1학년에 입학했다. 임묘옥이 서강대 다닐 때 나는 서강대 도서관에서 그녀를 두세 번 만나 대화를 나눈 적 있었다. 그 때 그녀는 표정이 어두웠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 당시 임은 한남동에서 홀어머니와 같이 살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운 듯 했다. 임은 그 후 소식을 들으니 모 외국 항공사 국제선 스튜어디스로 취업했다고 했다. 지금 그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기자 1년 선배인 방윤현형은 졸업 후 KBS 기자가 되었고, 후일 KBS 부산방송총국 사장이 되었다고 했다. 김경웅형은 대한항공에 입사했다.
우리 집은 이 무렵 그동안 살았던 이대 서문 옆 골목 집에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사 갈 집 후보 두 곳을 두고 고민을 했다. 한 곳은 이대 후문 길 건너편 도로와 붙은 집인 이형근 육군대장 자택이었고, 또 한 곳은 그 당시 와우 아파트가 붕괴되고 난 뒤 박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맨션아파트인 여의도 시범아파트였다. 제 9대 육참 총장을 지낸 이형근 대장 집은 정원과 건물이 제법 넓은 2층 양옥집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 집을 사자고 졸라 댔지만,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는 그 당시 생소한 아파트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 결국 여의도 시범아파트 48평으로 분양신청을 했고, 71년 초에 이사를 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금융기관 임원을 했기 때문에 급여가 많았고, 어머니가 이 돈을 수년간 착실히 모은 덕분으로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형근 대장 집을 구입했다면, 지금 쯤 그 집을 허물고 제법 큰 빌딩을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곳은 이대 후문 도로 변을 낀 상업적으로 상당히 좋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집에 재물 복은 주시지는 않았고, 그냥 평범하고 겸손하게 살게 하신 것 같다.
우리가 새로 살게 된 여의도 시범 아파트 입주민 중에는 사회 명사와 연예인들이 많이 있었다. 군 장성, 사회 원로 구상 선생, 서울대 유달영선생, 연세대 김명회 교수 등을 비롯한 저명한 학자, 허주 김윤환, 김형욱 회고록을 쓴 김경재씨 같은 정치인, 황해, 김동원씨 같은 원로 배우, 꽃반지 끼고를 부른 가수 은희씨를 시범 아파트 상가 지하 칵테일 바에서 가끔 볼 수 있었다.
내가 98년에 은행을 퇴직하고 난 후에는 종교철학의 대가이고 박정희 대통령, 천재화가 이중섭, 김수환 추기경과도 절친 으로 지냈던, 원로시인 구상 선생과는 운이 좋게도 그 분의 자택에도 들리는 등 많은 교류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이 구상 선생의 방대한 독서량이었다. 구상 선생은 여의도 시범아파트의 자택을 제외하고 같은 단지 내에 서재만 별도로 가지고 있었다. 그 서재에는 일본서적을 비롯해 약 4만여 권의 장서가 빼곡하게 집적되어 있었다. 나는 어느 날 선생에게 그 많은 장서를 한권도 빠짐없이 다 읽어 보셨습니까? 하고 질문했었다. 구상 선생은 서슴지 않고 다 읽어 보았다고 하셨다. 나는 그 이후 구상 선생보다 독서를 더 많이 한 분은 국내에서 한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구상 선생 사후 그 서적들은 경북 왜관에 있는 구상 선생 기념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강광우 자서전 내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