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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애지문학상 비평부문 후보작
송기호, 나무, 나무 그리고 나무
김명원, 디지털 문명 속 인간다움의 회복
- 어향숙 시인의 현대 사회 비판과 감각의 재발견
김태선, 망각이 이끄는 방향--장석원의 시세계
나무, 나무 그리고 나무
송기호
높은 곳에 이르기를 갈망하는 마음은 인간의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땅에 발이 묶여 사는 우리는 이곳의 삶이 비루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저 높은 곳에 있다고 믿으며 그곳에 이르기를 소망한다. 천국이 우리가 서 있는 곳보다 낮은 곳에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어느 문화권에서든 대개 천국은 우리 위 높은 곳에, 지옥과 악마는 우리서 서 있는 곳보다 낮은 곳에 있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높은 곳을 갈망하며, 지금 있는 곳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한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은 높은 곳과 낮은 곳이라는 두 공간의 높이 차이를 통해 표현된다. 단테는 『신곡』에서 우리가 소망하는 것과 높이의 상관성을 누구보다 더 선명하게 그려낸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천국으로 오르는데, 이 천국은 아홉 개의 하늘로 이루어져 있으며 높이 오를수록 신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또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를 받아 연옥과 지옥도 둘러보는데, 지옥 역시 아홉 단계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로 내려갈수록 더 큰 죄를 지은 자들이 더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는다. 단테는 인간이 죽어서도 얼마나 높은 곳에 가 닿기를 소망하며 또 지금 있는 곳보다 더 아래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는지 잘 그려낸다.
땅에 발이 묶여 사는 우리는 높을 곳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을 동경한다. 그리스 신화에 새의 깃털을 밀랍으로 이어 붙인 날개를 달고 공중을 날았던 이카루스의 이야기가 있다. 태양에 너무 가까이 간 탓에 태양의 열기에 밀랍이 녹아 바다로 추락한 그의 이야기는 우리 안에 숨겨진 높이에 대한 갈망을 잘 말해준다. 높은 곳을 갈망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나무를 닮았다. 나무는 지구에 사는 생명체 중 가장 키가 크다. 그래도 나무는 여전히 위를 향해 자란다. 우리는 머리 위 하늘 높은 곳으로 자라는 나무를 보면서, 높은 곳에 가 닿기를 바라는 우리 안의 열망을 의식하게 된다. 높은 곳에 대한 갈망이 우리 안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기에 우리는 나무에 특별한 매력을 느낀다.
언제나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고 위로 자라는 나무처럼, 인간도 애초에 아래가 아닌 위를 향해 고개를 들고 살도록 만들어진 존재이다. 로마 제정시대의 시인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인간의 그러한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동물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대지를 내려다보는데
신은 인간에게만은 위로 들린 얼굴을 주며 별들을 향하여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하늘을 보라고 명령했다.
방금 전만 해도 조야하고 형체가 없던 대지는 이제
여태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인간의 모습이라는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천병희 역. 11)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이 세상에 인간이 등장하면서 대지의 모습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지금까지 땅 위를 걷던 동물은 모두 아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위를 향해 고개를 드는 인간이 생겨난 것이다. 이제 인간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든 유일한 존재라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구별된다. 고개를 들게 되면서 인간은 하늘에서 찬란히 빛나는 별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별들을 운행하는 신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늘과 그곳에 사는 신을 바라보게 만들어진 존재이기에 높은 곳에 가 닿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존재이기에, 우리는 우리와 가장 닮은 생명체, 언제나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들고 위로 발돋움하는 나무와 친밀감을 느낀다.
그런데 나무는 언제부터 땅에 뿌리내리는 삶을 시작했을까. 이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바다에서 삶을 시작했다. 지구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지구의 대기 중에는 산소가 거의 없었던 탓에 강한 자외선을 막아 줄 오존(O3)층이 없었다. 모든 생물은 지표면에 직접 와 닿는 자외선을 견딜 수 없어, 초기의 생명체는 이 자외선을 막아주는 깊은 물 속에서만 살 수 있었다. 물속에서 조류가 생겨나서 활발하게 광합성 작용을 했고, 이 과정에서 산소가 대기 중에 방출되었다. 그 산소의 일부는 번개의 방전 등에 의해 오존이 되어 대기권에 오존층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오존층이 강한 자외선을 막으며 땅의 표면은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물속에서 살던 생명체들은 점차 땅 위에서 살 수 있게 진화했다.
지금 보이는 나무의 생물학적 특성과 형태는 진화의 과정에서 확정된 결과이다. 물을 벗어난 초기 식물인 물가에 사는 선태류나 땅 위에 사는 양치식물은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몸의 표면을 단단하게 하고 기공을 만들었다. 그리고 수관과 체관을 만들어 수분과 양분을 공급했다. 특히 체관은 식물 줄기를 단단하게 지지하는 역할을 했고, 이렇게 해서 나무는 몸을 곧추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무는 생존에 필수적인 요건인 광합성 작용에 유리하게 태양을 향해 잎을 위로 밀어 올릴 수 있었다. 하늘을 나는 조류를 제외하면, 나무는 물을 벗어나 뭍으로 올라온 생명체 중 태양과 하늘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존재이다. 물속에서 편안히 유영하거나 물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던 나무의 먼 조상들을 떠올려 본다. 무엇이 그들을 기를 쓰고 뭍에 오르게 했을까. 하늘로 오르려는 나무의 꿈은 그때 시작되었을지 모른다.
나무의 모든 것이 그저 신비하다. 몸통과 가지는 중력을 거슬러 위를 향하면서도, 뿌리는 중력에 몸을 맡기고 땅속 깊은 곳으로 향한다. 언제나 제자리에 발이 묶여 있으면서도 계절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제 몸을 바꾼다. 봄이면 바짝 여윈 나뭇가지마다 연한 싹을 살며시 내밀고, 여름에는 온통 초록빛으로 몸을 부풀리다가 가을이 오면 선명하고 강렬한 색의 옷을 입고 서 있다. 이렇듯 나무는 크나큰 신비를 품고 있어 그 존재의 근원에 결코 가 닿을 수 없을 것 같다. 심지어 나무는 겨울에 무성했던 여름 잎을 다 떨구고 바짝 여윈 모습으로 서 있을 때조차도 여전히 신비롭다.
잎 다 진 채
추위를 맞서며
헐벗고 외로운
가을 나무가
나긋한 가지 안에
시인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를 품고 있네.
(Nosheen Irfan, “A Tale for the Poet”)
여름의 무성했던 초록과 가을날의 불붙듯 강렬했던 색을 다 떨구고 헐벗은 모습으로, 찬 바람을 맞으며 몸을 떨고 있는 나무를 보면 삶의 모든 열정이 소진되어 사라진 것 같다. 몸속마저 비어버린 듯하여 나무라는 존재의 내면도 텅 비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나무도 여전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시인처럼 예민한 감성을 지닌 사람만이 읽어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누구보다 예민한 눈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그 의미에 대해 숙고하기에 다른 이보다 나무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마저도 나무가 지닌 신비로움은 다 풀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무처럼 사랑스러운 시를
볼 수 없으리라.
감미롭게 흐르는 대지의 젖가슴에
굶주린 입을 댄 나무.
온종일 신을 바라보고
기도하려고 잎 무성한 팔을 들어 올리는 나무.
여름에는 머리에
울새의 둥지를 이고 있을지도 모를 나무.
그 가슴에 눈이 내려앉고,
다정하게 비와 함께 산다.
시는 나 같은 바보들이 짓는 것이지만
오직 신만이 나무를 창조할 수 있다.
(Joyce Kilmer, “Trees”)
나무가 가장 사랑스러운 시가 될 수 있는 것은 여러 속성을 제 한 몸에 아우르기 때문이다. 나무는 대지의 여신의 젖가슴에 입술을 박고 감미로운 젖을 빤다. 언제나 대지의 젖에 굶주려 대지의 살 속으로 더 깊이 뿌리를 뻗는다. 동시에 나무는 온종일 고개를 들고 해를 바라보며, 그 해와 햇살을 보내준 신을 경배하며 잎이 무성한 팔을 들어 올리고 기도한다.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뭇잎은 온통 초록 물결을 팔랑인다. 또 잎이 무성하여 울새가 둥지를 트는 때도 있지만, 잎이 진 나무의 가슴에 차가운 눈과 비가 내리는 때도 있다. 그래도 나무는 그 모든 시간을 다정하게 품는다. 시인은 나무의 그러한 삶을 인간이, 자신과 같은 시인도 흉내 낼 수 없다고 말한다. 나무는 그렇게 시인도 다 밝힐 수 없는 신비를 지녔으니, 그 나무를 창조한 신만이 그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있다. 요즘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신이 만들었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 많지만, 한때는 누구나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세상 만물이 모두 신이 만든 것이라 해도 나무는 특별하다. 나무의 신비로움이 나무의 키 보다 크고 높아 보인다. 나무가 신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존재라는 말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중세 서양의 우주관은 우리가 올려다보는 하늘을 두 개의 서로 다른 공간, 혹은 세계로 설명했다. 그 두 세계가 만나는 곳에 달이 있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두 세계는 달이 지나며 그리는 궤적을 기준으로 경계가 나뉘어 달 위 세상과 달 아래 세상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 두 세상은 서로 조금도 닮지 않았다. 이 세상에 속하거나 연관된 것을 뜻하는 영어 단어 sublunar 혹은 sublunary와 같은 말은 ‘달 아래’라는 어원적 의미를 품고 있다. 달 아래 세상은 공기로 채워져 있고, 그곳에서는 시간이 끊임없이 흘러가며 모든 것이 변하고 달라진다. 낮과 밤이 바뀌고, 빛과 어둠이 교차한다. 사계절의 변화가 반복되며, 모든 좋은 것이 시들고 퇴색하며,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만물은 태어나고 죽는다. 인간도 달 아래 사는 존재이기에 생로병사의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신이 사는 달 위의 세상은 아래 세상과는 전혀 다르다. 그곳은 공기 대신에 에테르라는 정기로 채워져 있고, 온통 신에게서 나오는 빛으로 가득 찬 곳이기에 어둠이 없는 곳이다. 또 시간이 흐르지 않고 멈추어 있어, 죽음이 없고 삶이 영원히 계속되는 곳이다. 그렇게 서로 다른 두 세계를 가르며, 우리가 서 있는 이 세상의 지붕이자 우리가 꿈꾸는 천국의 마룻바닥인 그 길을 오늘도 달이 지나간다.
달 위 신의 세상과 달 아래 인간의 세상은 나무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나무는 이 두 세계 사이에 걸쳐진 사다리이다. 인간이 신의 세상에 가려면 이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야 하고, 신이 달 아래 이 세상으로 내려올 때도 이 나무 사다리를 밟고 내려올 것이다. 바람 고요하고 달이 밝은 밤에 커다란 나무 아래서 우듬지에 걸린 달을 바라보면, 그 나무를 타고 오르기만 하면 달 위의 세상에 이를 것 같다. 제 팔로 달을 안고 있는 나무 아래 서면 달 아래 세상과 맞닿은 달 위 세상의 마룻바닥을 거니는 신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나무가 단순히 달 아래와 달 위의 세상을 연결하는 사다리, 혹은 두 세계 사이의 이동 수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무가 신 자신이라고도 믿는다.
만일 신이 이 세상으로
내려오려 한다면
신은
나무로 변할 것이다!
나무가 된 신은
인간을 바라보리라
열 개, 백 개, 천 개의
자애로운 눈으로.
초록빛 푸른 눈으로,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비둘기 같은 나뭇잎들로!
신선한 산소로
몸에 생명의 공기를 부드럽게 불어넣으며,
귀에 신비로운 메시지를
속삭이면서,
예쁜 빨강, 분홍, 노랑 꽃들로
세상에 소나기를 내리며,
그 풍성한 사랑의 온기로
달콤하고 즙이 흐르는 열매를 권하며,
수백만 개의 씨앗으로
그 날개를 멀리 넓게 펼치면서!
오 자애로운 신이여!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머니 대지를
달랠 길은 없겠지요!
감사해요, 감사해요!
오 장엄한 신(神) 나무여!
(Geeta Radhakrishna Menon, “The Magnificent God Tree”)
신은 이 세상을 동정하여 나무의 모습으로 인간에게 나타난다. 나무 자체가 신의 현신이라면, 나무의 다양한 모습은 신이 인간의 삶에 관여하는 다양한 방식이다.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음보살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이 세상을 두루 살피듯, 나무로 변한 신은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의 삶을 위로하고 보듬는다. 나무의 수많은 가지는 인간을 향해 뻗은 자애로운 신의 손이다. 가지에 난 잎은 인간의 삶을 구석구석 살피는 무수히 많은 신의 눈이다. 봄이 되어 겨우내 움츠렸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지면 그들을 보살피려는 신도 바빠진다. 신은 가지마다 연한 초록색 나뭇잎 눈을 내밀고 세상을 살핀다. 그래서 나뭇가지마다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비둘기를 닮은 수많은 신의 눈이 앉아 있다. 여름이 깊어갈수록 신의 사랑도 깊어져 생명 있는 것들을 살아있게 하는 산소를 잎에서 내뿜는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마음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꽃으로 표현된다. 가을이면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 달콤한 즙이 흐르는 과일로 익어 그 열매로 사람들의 배를 불린다.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마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씨앗이 되어 더 널리 퍼져간다. 그래서 어느 때든 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면 인간은 그 씨앗에서 인간을 향해 뻗은 수많은 나뭇가지 손과 인간의 고통을 살피는 수많은 나뭇잎 눈을 가진 나무가 새로이 자라게 할 수 있다. 나무가 이렇게 인간을 사랑하는 자애로운 신의 마음이 체화한 것이라면, 그 나무가 없는 세상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나무가 서 있는 자태가 아름답고, 나무가 모여 있는 숲이 싱그럽고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준다면, 거기에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가 신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라거나, 더 나아가 신의 현신이기도 하다는 생각은 동서양의 여러 문화권에서 두루 공유한 생각이었다. 기독교는 특히 여러 종류의 나무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핵심 내용을 설명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인 야훼는 모세를 시켜 이집트에서 그들을 구해낸 후 모세에게 떨기나무의 불꽃 모습으로 나타나 그와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신이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를 위해 만든 곳인 에덴동산에서의 일화는 나무가 어떻게 신의 뜻과 연관되어 있는지 잘 보여준다.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니라 ...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니라 ...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은지라 (창세기 2:8~3:6)
신은 인간을 위해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고, 그 동산의 한가운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 좋은 열매가 열리는 두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하나는 생명의 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는 이른바 지식의 나무이다. 그런데 이 지식의 나무는 인간이 신의 명령을 잘 따르는지 시험하는 나무이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그 나무의 열매를 먹었기에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낙원을 잃어버린 자로서 살아가게 된다. 나무에 담긴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고, 나무의 신비를 다 풀어내지 못하는 것이 애초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무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드러내는 상징이라는 것은 예수가 못 박혀 희생된 나무 십자가를 통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 중 하나는 신의 아들인 예수가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이야기에서도 나무는 핵심적 역할을 한다. 예수가 못 박혀 죽은 십자가가 나무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를 물푸레나무 혹은 노간주나무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어느 나무였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예수의 부활을 통해, 사람들도 죄를 회개하면 죄로 인한 죽음을 이기고 다시 구원과 생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되는 기적을 이룬 장소가 나무 위였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런 의미를 지닌 십자가 나무는 에덴동산에 심어진, 신의 명령을 따를지 시험하는 수단으로 등장하는 지식의 나무보다 더 중요하며, 기독교 신앙을 떠받치는 몸체가 된다. 그렇기에 중세시대 십자가는 영생의 나무와 동일시 되었으며, 그 나무의 열매는 예수였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흘린 피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부여한다.
기독교 신앙에서 나무가 품은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주는 시가 있다. 영국에 기독교가 막 전해지던 7세기경에 쓴 것으로 작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십자가의 꿈」(“The Dream of the Rood”)이 있다. 이 시에서는 꿈에 나무가 나타나 자기가 겪은 경험을 들려준다. 나무는 숲에서 자라고 있는데, 어느 날 원수들이 와서 그의 몸을 자른다. 그리고 그렇게 잘린 나무는 죄인을 몸에 지고 있어야 하는 십자가가 되어 세워진다. 어느 날 그 나무의 몸에 어떤 사람이 매달리게 되는데, 그가 바로 예수다. 나무는 자기 몸에 매달린 예수의 무게를 견디기 힘들어 몸을 숙이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잘 견뎌낸다. 나무가 몸을 숙이고 싶은 유혹에 굴복했다면, 예수를 통한 구원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무는 예수에게 쏟아지는 원수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그와 함께 견딘다. 그 후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갈 때, 예수는 그 나무의 공을 높이 여겨 함께 데리고 간다. 그리고 그 나무를 온갖 귀한 보석으로 아름답게 꾸며준다. 나무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든 이 세상에서 죄로 이끄는 유혹을 잘 견디어내면 그 보상으로 천국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를 들려준다. 그렇게 나무는 아직 신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친다. 이 이야기에서 나무는 인간을 구원하려는 신의 뜻이 실현되는 중요한 장소다.
십자가에서 고통 속에 죽어간 예수의 이야기는 본래의 종교적 맥락을 떠나 세속적 삶에서 고통의 상징으로도 변주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미국의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는 이런 시를 썼다.
남부의 남쪽 깊은 곳
(내 가슴이 무너진다)
그들이 내 젊은 흑인 연인을
십자로 길 나무에 매단다.
남부의 남쪽 깊은 곳
(멍든 몸 공중에 높이 걸리고)
내가 백인 예수에게 묻는다
기도가 무슨 소용이냐고.
남부의 남쪽 깊은 곳
(내 가슴이 무너진다)
사랑은 옹이 많고 헐벗은 나무 위에 걸린
벌거벗은 그림자
(“Song for a Dark Girl”)
남북전쟁 전 미국의 남부는 북부와 달리 백인 중심의 귀족 문화가 성했던 곳으로, 대농장을 경영하는 백인 지주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컸던 곳이다. 이 농장에서는 주로 담배와 면화 그리고 사탕수수를 재배했는데, 모두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다. 남부의 지주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을 사들여 이들의 노동력으로 농장을 경영했다. 이것이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미국에 정착하게 된 계기이다. 비록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하며 미국에서 노예가 공식적으로 해방되었지만, 흑인에 대한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 차별이 뿌리 깊게 더 오래 남아 있던 곳이 남부였다. 남부에서 흑인들은 오랫동안 법률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백인들이 사적으로 휘두르는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휴즈는 이 시에서 기독교를 믿고 예수의 사랑을 외치던 백인들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흑인에게도 실천하고 있는지 묻는다. 남부에서 흑인들의 삶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고통스러웠다.
불교도 나무와 인연이 깊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불교를 창시한 싯다르타는 탄생에서부터 깨달음을 얻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여러 번 나무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첫 인연은 그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에게서 시작된다. 마야 부인이 그를 임신한 뒤 출산을 앞두고 친정으로 가던 중에, 룸비니 동산에 이르러 산기를 느꼈다. 부인이 출산할 때 의지할 것을 찾던 중, 마침 곁에 있던 무우수(無憂樹)가 가지를 내려주었다. 마야 부인은 이 가지를 잡고 산통 없이 왕자인 싯다르타를 낳았으니 그의 탄생 자체가 나무와 큰 인연 속에서 이루어졌다. 싯다르타와 나무의 두 번째 인연은 그가 어렸을 때 생겨났다. 그가 왕국의 어린 왕자였을 때, 씨 뿌리는 파종축제를 보았다. 어린 그는 쟁기질하는 소와 소를 모는 농부가 힘겹게 밭을 가는 모습, 쟁기질에 뒤엎어진 흙에서 나온 벌레들이 발버둥 치는 모습, 그리고 그 벌레들을 먹이로 삼는 새들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한적한 숲으로 가서 잠부나무 아래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러자 잠부나무는 그의 명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던지, 기우는 햇살에도 그림자를 옮기지 않고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싯다르타와 나무와의 인연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이후에도 계속되어, 부처는 사라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생을 마쳤다. 이렇듯 싯다르타의 삶 전체가 나무와 인연을 맺었고, 나무는 그에게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을 함께 걷는 도반 같은 존재였다.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특정 종교와 연관 짓지 않더라도, 나무는 인간의 보편적 영성이나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나무는 오랫동안 인간에게 그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생명체 중 하나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을 성찰하도록 만드는 거울의 존재이다. 나무는 단순히 우리 눈에 땅의 표면에만 갇혀 있지 않다. 나무의 가지는 하늘에 닿고 뿌리는 땅속 깊은 곳에 닿아 있다. 나무의 이러한 속성은 땅에 발이 묶인 채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특별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동서양 어느 문화권에서나 사람들이 나무에 대해 오랫동안 가졌던 생각은 나무가 세 개의 세상, 삼계(三界)를 이어주거나 아니면 이 삼계를 묶어 제 몸에 품은 존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무의 가지와 잎은 하늘 혹은 천상의 세계를, 나무의 몸통은 이 지상 세계를, 그리고 뿌리는 지하세계를 상징하거나 혹은 각기 그 세계와 닿아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 나무의 몸통, 뿌리, 그리고 가지와 잎은 그저 나무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되기보다는 각기 독립된 세계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나무의 각 부분이 품고 있는 서로 다른 세계를 살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송기호,
송기호 한남대 영문과 교수. 저서, 『시간을 물고 달아난 도둑고양이』 등.
디지털 문명 속 인간다움의 회복
- 어향숙 시인의 현대 사회 비판과 감각의 재발견
김명원
문학 작품은 시대의 사회상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는 역사보다 철학적이라고 설파한 이유는 문학 작품이 역사보다 현실의 본질을 잘 반영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시대의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한다는 것은 사회의 다양한 현실을 그려내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상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보편적 진실을 천착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은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와 진리에 대해 고민하고 올바른 방향을 모색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시대적 실상과 밀접한 영향 관계에 놓이게 됨을 암시하게 한다.
그러므로 문학과 사회상은 서로 조우한다. 문학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시대의 역사적 모순을 규명하거나 역사적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으로 사회 현실의 오류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전망을 획득함으로써 문학과 사회상은 상보적 구조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한 시대의 문학 정신을 논할 때, 총체성을 규명하는 작업은 정체된 고정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역동적인 실체적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문학의 기능과 사회의 변혁 사이에는 다원적이고 중층적으로 매개된 관계항들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공지능 기술의 급속한 진보는 더 이상 특정 산업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일상과 사회 전반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보의 축적과 연산 능력을 기반으로 한 혁신적 지능은 인간의 판단과 선택, 관계 맺기의 방식에까지 깊숙이 개입하며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연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편리함의 확장’이라는 긍정적 표상으로만 환원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이 오랜 시간 축적해 온 감각적 체험과 관계의 온기를 서서히 대체하며, 존재 방식 자체를 변형시키는 문제적 국면을 드러낸다.
전통과 관습 속에서 형성되어 온 인간의 삶은 단순한 정보의 교환이 아니라, 몸을 매개로 한 경험과 정서의 축적 과정이었다. 타인의 눈빛과 말투, 공동체적 시간 속에서 생성되는 섬세한 감정의 결들은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주요 요소였다. 그러나 오늘날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해 매개되는 세계는 이러한 체험의 층위를 점차 평준화하고, 정량화가 가능한 정보로 환원한다. 그 결과 인간은 더 이상 세계를 ‘살아내는’ 존재라기보다, 정보를 ‘처리하고 선택하는’ 기능적 주체로 재규정된다. 이때 상실되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 맺는 방식 자체인 것이다.
더욱이 인공지능 기반의 자동화 시스템이 확산되면서,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접촉은 점차 축소되고 있다. 무인 점포, 비대면 서비스, 알고리즘에 의한 의사결정 구조는 효율성과 정확성을 극대화하는 대신, 관계의 우발성과 불완전성을 제거한다. 그러나 우발성과 불완전성 속에서 인간성은 생성되어 왔다. 타자와의 마찰, 예측할 수 없는 감정의 교차, 설명되지 않는 공감의 순간은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삶의 핵심적 경험들이다. 우리는 점점 더 그러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조직하고 있으며, 그 결과 인간은 고립된 채 새로운 시스템 속에 편입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유사한 양상을 보인다. 무분별한 개발과 효율 중심의 생산 구조는 자연을 더 이상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관리와 소비의 대상으로 전환시켰다. 생존의 기반이 되는 환경은 점차 훼손되고, 그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편의와 안락함이다. 이와 같은 환경은 인간에게 물리적 안정성을 제공할 수는 있겠지만, 존재의 감각을 풍요롭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자연과의 단절은 인간의 감각을 단순화하고,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 자체를 빈곤하게 만든다.
한편, 영상 매체와 디지털 콘텐츠의 확산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자극과 속도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미지들은 감각을 즉각적으로 소비하게 만들며, 타인의 고통과 생명의 무게를 간접적이고 피상적인 것으로 전환시킨다. 특히 폭력의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환경 속에서, 생명에 대한 감각은 점차 무뎌지고, 감정이입의 동감 능력은 약화된다. 이러한 조건은 인간을 더욱 개별화하고, 경쟁과 효율 중심의 구조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처럼 기술, 환경, 매체의 변화가 중첩되는 오늘의 상황은 단순한 사회적 변화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 조건을 재구성하는 전환기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외부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선택이 기술과 결합하며 형성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용이함과 효율성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동시에 어떤 감각과 관계를 포기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기술 비판을 넘어, 인간 자신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게 한다.
이 지점에서 문학의 역할은 새롭게 요청된다. 문학은 정보의 정확성이나 실용성을 추구하는 담론이 아니라, 사라져가는 감각과 말해지지 않는 경험을 붙잡는 언어의 형식이다.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미묘한 감정, 표현하기 어려운 사랑과 추억의 온도,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불확정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고유한 기능이다. 따라서 오늘날 문학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술적 세계가 배제하거나 삭제한 인간 경험의 층위를 복원하는 비판적 실천으로 자리한다.
결국 디지털 사회, 인공지능 시대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문학이 담당해야 할 과제는 명확하다. 그것은 인간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이었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끝까지 질문하는 일이다. 감각이 축소되고 관계가 단절되는 시대에, 문학은 그 균열 속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의 온기를 증언하며, 존재 양식의 오류를 사유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언어로 존립할 것이다. 이는 문학이 다른 어떤 예술 형식보다 인간의 체험과 실제의 삶을 직접적인 질료로 창작한다는 점에서 가능한 일이며, 어향숙 시인은 이번 신작시들을 통해 이러한 성찰의 지점을 예리하게 직시하고 있다.
1. 픽셀 감옥에서 출구 찾기
아침부터 요란한 알람음이
손을 잡아끄는 핸드폰
매일 수백 번 넘게 쓸어올리는 화면 속 글자들이
들여다보는 눈빛을 오라지우는데
나도 점점 공범이 되어가는 기분
멀리 있는 사람과 다정해도
바로 곁에 있는 얼굴과 마주 앉아서는
각자의 감옥 안에서 면벽 중이다
길을 걸어도 주머니 속
교정校庭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수시로 액정에게 감찰 당하면서
발을 헛디디기도 한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스스로 가둔 것일지도
사방을 픽셀로 닫아걸었으니
출구 없이 살 수 없으니 만들어야만 했어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잠깐의 고요를 바라본다
문명의 소음을 접고
주변의 온기를 오감으로 하나씩 열어간다
볕뉘가 창문으로 들어와 앉고
얕은 그림자 자리 잡는다
안 보이던 길 하나 다가와 있다
그 오솔길이 화면 밖의 세계를
궁금하게 만든다
문자 없는 세계가 느린 보폭으로 다가온다
오래된 방식으로
정직한 빛의 밝기로
- 「출구는 없을까」 전문
어향숙의 시 「출구는 없을까」는 스마트폰이라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적 경험을 통해 인간 감각의 소외와 그로부터의 탈출 가능성을 점검하고 타진하는 작품이다. 스마트폰이라는 작금의 필수 기기를 중심으로 인간 관계와 감각 체계가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를 탐색하면서, 화면 안에 갇힌 삶과 화면 밖 세계 사이의 대조 되는 긴장을 서정적으로 간파해 간다. 픽셀로 상징되는 ‘과도한 빛’의 디지털 공간과 ‘정직한 빛’으로 표상되는, 복원하고자 하는 세계를 대비시키며, 디지털 문명 속에 자발적으로 유폐된 현대인의 초상을 가감 없이 그려내고 있다.
시의 도입부에서 시인은 현대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스마트폰의 존재를 “아침부터 요란한 알람음이/ 손을 잡아끄는 핸드폰”이라고 규정하여 스마트폰은 단순한 생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이끄는 능동적인 존재로 간파하고 있다. 인간이 기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계가 인간의 일상을 주도하고 있다는 역전된 관계를 강조하려는 연유이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매일 수백 번 넘게 쓸어올리는 화면 속 글자들”은 반복적이고 자동화된 행위를 환기하며, 이러한 습관이 이미 삶의 일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나도 점점 공범이 되어가는 기분”이라는 고백은 기술 환경에 대한 단순한 비판이 아니라 그 구조에 이미 귀속된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는 자기반성적 시선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이 시에서 두드러지는 핵심 시어는 ‘감옥’이다. 화자는 스마트폰 화면에 몰입한 현대인의 모습을 “멀리 있는 사람과 다정해도/ 바로 곁에 있는 얼굴과 마주 앉아서는/ 각자의 감옥 안에서 면벽 중”이라는 극도의 간극을 벌이는 거리감과 폐쇄적인 ‘감옥’ 이미지를 차용하여 소통 단절의 아이러니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디지털 네트워크는 물리적 거리를 넘어 수많은 사람들을 연결하지만, 동시에 바로 곁에 있는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각자 개인 공간 몰입으로 약화시키기도 한다. 더구나 ‘면벽’이라는 시어는 서로 마주하지 못하고 각자의 벽을 향해 앉아 있는 상태를 떠올리게 하여, 디지털 기기가 만들어낸 고립의 풍경을 적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고립의 이미지는 곧 감시의 구조와 연결된다. “수시로 액정에게 감찰 당하면서/ 발을 헛디디기도 한다”는 부분에서인데, 여기에서 ‘감찰’이라는 표현은 스마트폰 화면이 단순한 정보 매체가 아니라 사용자의 행동을 규율하는 장치로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인간이 화면을 바라보는 동시에 화면 역시 인간을 통제하는 시선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개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디지털 환경에 종속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인식 주체가 전도된 상황을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스스로 가둔 것일지도”라고 추측하면서, 스마트폰 의존성이 그 유익성에 길들여진 개인을 무력화하고, 결국 개인과 주종 관계를 이루는 거대한 사회적 구조임을 드러낸다.
이때 “사방을 픽셀로 닫아걸었으니”라는 표현은 이 시의 주요 이미지라 할 수 있다. ‘픽셀’은 디지털 화면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현실 세계가 아닌 가상 공간을 지칭한다. 화자는 이 픽셀을 닫힌 문으로 묘사함으로써 현대인이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디지털 이미지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갇혀 있음을 제시한다. 그러나 시 「출구는 없을까」는 극단적인 절망으로 치닫지 않는다. 작품의 전환점은 다음 장면에서 나타나는데,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잠깐의 고요를 바라본다”는 단순하지만 단호한 인식의 전환점을 담대하게 결정하는 행위가 바로 그것이다.
핸드폰을 뒤집는 순간, 화자의 시선은 디지털 공간에서 현실 세계로 이동한다. 이전까지 시를 지배하던 단어들이 ‘알람’, ‘화면’, ‘픽셀’ 같은 기계적인 어휘들이었다면, 시의 후반부에서는 ‘온기’, ‘볕뉘’, ‘그림자’와 같은 심상적인 시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볕뉘가 창문으로 들어와 앉고/ 얕은 그림자 자리 잡는다”에서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핸드폰을 뒤집어 놓는 결심만으로도 주변 세계가 감각적인 시어들로 새롭게 인지되는 순간들을 채집해 낸다.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현실 공간으로 이동하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소한 풍경들이 화자의 오감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곧 ‘길’이라는 연결 이미지로 이어진다.
“안 보이던 길 하나 다가와 있다”에서의 ‘길’은 공간적 통로라기보다 디지털 환경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타진하는 은유적 이미지로 읽힌다. 특히 ‘다가와 있다’는 확정적 표현은 길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음을 명시하여, 화면 밖 세계로 나아가는 출구는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인식 전환 속에서 성취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한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문자 없는 세계”, 즉 문명 이전의 느린 보폭으로 다가와 픽셀처럼 과장된 빛이 아닌, “오래된 방식으로/ 정직한 빛의 밝기”로 바라보게 하는 감각적인 세계가 그윽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문자’는 스마트폰 화면 속 정보와 메시지라면 ‘문자 없는 세계’는 언어와 정보 이전의 직접적인 경험을 의미하고 있다. ‘느린 보폭’ 역시 디지털 환경의 빠른 정보와 대비되는 시간 인식을 드러낸다. 디지털 문명이 만들어낸 속도와 자극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운 감각의 리듬으로 돌아가는 실천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의 제목인 “출구는 없을까”는 사실상 출구가 없을 수 있다는 절망이나 한탄이기도 하지만, 시에서는 출구라는 개연성을 기대하며 대안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다. 이 시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조건을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으로 과도한 비판이나 선언적 메시지로 귀착하지 않고, 일상 속에서 감각의 회복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스마트폰이라는 동시대적 사물을 통해 인간관계와 감각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화면 밖 세계로 향하는 실현성을 제시하는 이 시는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게 하는 의미 있는 시적 성취를 획득하고 있다.
2. 무인화 시대의 정서적 공백과 감시의 윤리
주인이 보이지 않는 가게들
골목에 즐비하다
커피 라면 옷 문구
70프로 할인 아이스크림도 판다
가게 앞 나무들도
벚꽃을 진열해 놓았다가 초록 잎들로
봄날의 수요를 맞추고 있다
라면 끓여 김치와 함께 내놓던 인심 좋은 아줌마도 없고
학용품 이것저것 꺼내주던 문구사 사장님도 안보이고
커피 배달하던 미니스커트도 어디론가 떠났지만
문을 밀고 들어서면 스피커에서 들리는
안녕하세요!
아줌마도 사장님도 아가씨도
한철 벚꽃으로 다녀간 듯싶어 문득, 망연해진다
물건을 골라 근처에 대충 놓아도
괜히 조심스러워져
고개 들어 CCTV를 보게 된다
거기 계신가요?
벚나무들이 나이테에서
몇 해 전 가게들의 안부를 헤아리는 것처럼
나도 검고 둥근 카메라에 대고 묻고 싶어진다
주인은 그대로 일지 몰라
봄날 벚꽃도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처럼
키오스크 앞에서 음성안내를
잘 따라가야 결제 완료에 다다를 수 있는데
기계치인 나는 허둥대기 일쑤다
양심이 주인인 이 가게,
CCTV가 그림자처럼 뒤따라 움직이며
배웅까지 해준다
- 「무인가게」 전문
「무인가게」는 최근 도시 공간에서 빠르게 확산하고 있는 무인 상점의 풍경을 통해, 현대 사회의 변화된 인간관계와 정서적 지형을 살피는 작품이다. 이 시는 기술적 효율성과 편리성을 기반으로 설치된 무인 시스템의 일상적 장면을 포착하면서, 그 이면에서 서서히 소멸해 가는 인간적 교류와 공동체적 정서를 섬세하게 추적해 낸다. 인간의 부재가 만들어내는 공백과 그 자리를 대신하는 감시 장치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현대 도시 문명의 새로운 윤리적 조건을 사유하게 한다.
주인이 보이지 않는 가게들이 골목에 즐비하다는 간결한 진술로 시작하는 이 시는 풍경 묘사에 그치지 않고, 오늘날 도시 일상에 깊숙이 침투한 무인화 현상을 명징하게 환기하고 있다. 이어지는 “커피 라면 옷 문구/ 70프로 할인 아이스크림도 판다”와 같은 나열적 서술은 무인가게가 이미 특정 업종에 국한된 예외적인 공간이 아니라 생활 전반으로 확산된 유통 방식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과장이나 수사적 장식을 최소화한 채 실제 경험의 장면들을 하나씩 배열하는 방식으로 현대 소비 공간의 변화를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도시적 풍경 속에 자연 이미지를 병치하는 방식이다. “가게 앞 나무들도/ 벚꽃을 진열해 놓았다가 초록 잎들로/ 봄날의 수요를 맞추고 있다”에서 ‘진열’과 ‘수요’라는 상업적 어휘들을 봄이라는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계절 변화를 표식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이는 인간 사회의 경제적 언어가 자연의 질서까지 포섭하는 현대적인 인식 구조를 드러내는 동시에, 자연의 순환을 일종의 상품 진열처럼 바라보게 하는 반어적인 정서를 보여준다. 이때 벚꽃과 초록 잎으로 이어지는 봄 풍광은 인간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달리 지속성과 반복성을 지닌 자연의 영속성을 일컬어서, 삭막하게 무인화된 도시 공간과 대비되는 순환적 생명력을 조성해 낸다.
시의 중반부에서 화자는 과거의 가게 풍경을 회상한다. “라면 끓여 김치와 함께 내놓던 인심 좋은 아줌마”, “학용품 이것저것 꺼내주던 문구사 사장님”과 같은 인물들은 단순히 회억의 대상이 아니라, 한때 동네 상점 주인들이 수행하던 공동체적 기능자를 지칭한다. 이들은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인 동시에 이웃과 관계를 맺는 사회적 주체였다. 하지만 무인가게에서는 이러한 상호 교류하는 연계적 장면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기계가 반복 재생하는 음성 안내로 대신한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은 환대의 언어이지만, 그 발화의 주체가 부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소통의 결핍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화자가 망연해진다고 말하는 정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공허감의 표출이다.
이는 곧 감시의 시선과 연결된다. “괜히 조심스러워져/ 고개 들어 CCTV를 보게 된다”에서 드러나듯, 무인가게의 질서는 인간의 신뢰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기술적 감시 장치에 의해 보완된다. 화자가 “괜히 조심스러워”지는 순간은 이러한 감시의 내면화가 작동하는 심경이라 할 수 있다. 이어 “거기 계신가요?”라고 묻고 싶어진다는 화자의 상상은 의미심장하다. 사라진 인간의 자리를 대신하여 기계에게 존재 여부를 묻는, 현대 사회에서 감시 장치가 수행하는 새로운 ‘주인’의 역할을 시사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이때 CCTV는 단순한 보안 장치를 넘어 인간의 시선을 대체하는 삼엄한 장치로 기능하는 연유이다.
키오스크의 등장 역시 이러한 기술 환경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음성안내를 잘 따라가야 결제 완료에 다다를 수 있는데”라는 진술은 편리함을 제공하는 기술이야말로 사용자의 능동적 적응을 요구하는 엄중한 체계임을 드러낸다. “기계치인 나는 허둥대기 일쑤다”라는 화자의 고백은 기술 환경 속에서 경험하는 개인의 미묘한 소외감을 드러내며, 무인 시스템이 모든 사용자에게 동일하게 친절하지 않은 디지털 격차(digital divide)의 문제를 야기한다. 기계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보았을 일상적 체험의 서술을 통해 기술 문명으로 겪는 정서의 균열을 자연스럽게 간파해 내고 있다.
“양심이 주인인 이 가게,/ CCTV가 그림자처럼 뒤따라 움직이며/ 배웅까지 해준다”는 시의 마지막 연은 작품이 전언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집약하고 있다. 여기서 ‘양심이 주인’이라는 표현은 무인가게 운영의 기본 원리를 설명하는 동시에, 사회적 신뢰에 대한 기대를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CCTV라는 감시 장치가 ‘그림자처럼’ 따라온다는 비유는 이러한 신뢰가 감시와 분리될 수 없음을 내시한다. 즉 이 공간은 인간의 양심과 기술적 감시가 함께 작동하는 이중의 아이러니한 윤리 구조 위에 아프게 놓여 있다.
「무인가게」는 무인화된 상업 공간을 통해 현대 도시 사회 속에서 적응하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과 속성을 고찰한 작품이다. 주인의 온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자동화된 음성과 감시 장치가 엄연하게 존재하며, 그 속에서 화자는 사라진 예전 인간관계의 훈훈했던 흔적을 더듬는다. 벚꽃과 같은 생동하는 자연 이미지조차 자본적 속성하에서 기술적 사물인 키오스크, CCTV 검고 둥근 배경 안에서 공존하는 장면은 오늘날 우리들이 견지해야 할 내성(內省)을 복합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자각을 일상의 동선 속에서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무인화 시대의 삶이 요구하는 새로운 관계 방식과 윤리적 조건을 고심하게 하는 작품으로 주목하게 된다.
3. 이질성의 공모, 공감의 연대 의식
현대 사회에서 감시는 점차 물리적 권력의 형태를 벗어나 일상적 공간 속에 내재 된 장치로 작동한다. 이러한 구조는 미셸 푸코가 논의한 판옵티콘적 감시 체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판옵티콘에서는 감시자의 실제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감시 가능성 자체가 개인의 행동을 규율한다. 기계에 의해 인간이 조정되는 차가운 시각에서 벗어나 인간다움의 회복과 정서의 치유를 위해 화자는 조용필 콘서트를 찾아간다. 그리고 다수의 팬들이 함께 열광하는 그 현장에서 시를 발견하게 된다.
멜론밭에 하몽이 한 줄로 늘어선 걸 본 적 없지만
콘서트장에서 각기 다른
덩굴성 삶과 세월에 숙성된 사람들이
열광하여 벌떡 일어서는 장면은 있다
어울리지 않는 그들이어도 조용필이라는 상징에서는 모두 한패다 그가 어렵게 구한 티켓으로 함께 간 콘서트, ‘창 안의 늑대’와 ‘못 찾겠다 여우’처럼 나란히 앉아 각자 좋아하는 노래 고래고래 따라 부르면서 어깨를 들썩였다 그렇게 청중에게 청춘이 왔다
앙코르도 무대 뒤편으로 빠져나갈 무렵
그래도 뒤풀이는 해야지
맥줏집에 들어가 생맥주 안주로 시킨 메뉴
멜론과 하몽이 접시에 담겨 나온다
비릿한 하몽을 멜론이 상큼하게 감추고
오래도록 입안에 머물게 한다
낯설지만 낯익은
신선하면서도 쿰쿰 콤콤한
퐁피두 센터와 루브르 박물관 같은
멜론과 하몽은
둘이서 새로운 맛이 되고
용필씨 용필아
옛일을 꺾어 부르듯
마음을 밀고 당기며
그는 단발머리
나는 창밖의 여자가 되었다
- 「멜론 하몽」 전문
「멜론 하몽」은 ‘멜론’과 ‘하몽’이라는 낯선 식품들의 결합을 통해 감각과 기억, 그리고 대중문화적 체험이 어떻게 개인의 내면에서 따듯하게 재구성되는지를 면밀하게 간파한 시이다. ‘조용필’은 보편적인 가수를 넘어, 1970년대 후반 이후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를 견인한 대표적 아이콘이자 ‘가왕’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트로트, 록, 발라드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음악적 경계를 확장하였고, 군사정권 시기에도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바탕으로 사회 전반에 위로와 활력을 제공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압도적인 인기와 영향력을 통해 한국 대중문화의 흐름을 표상하는 존재로 위치한다.
조용필이라는 한국 대중문화의 상징적 존재를 매개로 하여, 시간과 세대를 가로지르는 정서적인 연대 의식을 형성하고, 그 이후의 여운을 ‘맛’이라는 감각으로 치환하는 전략이 매혹적인 시의 첫 연은 “멜론밭에 하몽이 한 줄로 늘어선 걸 본 적 없지만”이다. 이러한 진술은 애초부터 ‘부조화’를 전제하고 있다. ‘멜론밭’과 ‘하몽’이라는 이질적인 결합은 현실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면이지만, 화자는 곧바로 콘서트장의 경험으로 전환한다. 서로 다른 세월로부터 모여 한 공간에서 관객들이 열광하는 장면은, 멜론밭과 하몽의 비현실적 병치에 대응되어 목도된 현장의 등가물이다. 이때 “덩굴성 삶”과 “숙성”은 각각 어우러지는 생장 방식과 세월의 축적을 암시하며, 개인의 삶이 서로 다르면서도 공통의 층위로 묶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두 번째 연에서 ‘창 안의 늑대’와 ‘못 찾겠다 여우’가 호출되는 대목은 시에서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는 단순히 곡명인 ‘창밖의 여자‘와 ’못 찾겠다 꾀꼬리’에서 변주된 나열이 아니라, 각기 다른 취향과 기억을 가진 개인들 – 늑대와 여우들 - 이 공연장 안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동일한 시간을 경험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각자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어깨를 들썩”이는 장면은 집단적 연대의 형식을 발휘한다. 경계를 허무는 행동으로서 동질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청중에게 청춘이 왔다”는 싱그러운 문장은 청춘이 생물학적 연령이 아니라 정서적 환기라는 시간의 재현을 통해 도래함을 내포하고 있다.
시선은 공연이 끝난 뒤의 일상 공간으로 이동한다. 맥줏집에서 등장하는 멜론과 하몽은 앞서 제시된 비현실적 조합이 현실 속의 음식으로 구현된 순간이다. 비릿한 하몽을 멜론이 상큼하게 덧입혀 오래도록 입안에 머물게 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성질의 음식이 충돌하여 오히려 감각을 증폭시키는 역설을 보여준다. 이는 곧 콘서트 경험의 여운, 낯설지만 익숙해지고,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일체화된 청중들의 뜨거운 감흥에서 비롯한 연결 감정과 정확히 겹쳐진다.
“퐁피두 센터와 루브르 박물관 같은”이라는 비유 또한 이질성과 공존성의 미학을 강화한다. 퐁피두 센터와 루브르 박물관은 각각 현대미와 전통미를 대표하는 건물들로, 이 둘의 병치는 멜론과 하몽, 그리고 대중문화의 황금기를 경험하며 아날로그 감수성을 지닌 세대(Pre-digital generation)와 디지털 네이티브( Digital native)세대 간 등, 서로 다른 것들과 상응한다. 시는 이렇게 공간, 음식, 음악 향유 세대 등을 입체적으로 교차시키며 ‘이질적 요소들의 조화’라는 중심 주제를 다층적으로 확산해 간다.
마지막 연에서 “용필씨 용필아”라는 호명은 심적 거리의 변화로 공적 존재에서 사적인 영역인 친구를 부르듯 친밀감으로의 전이를 보여준다. 이어서 “그는 단발머리/ 나는 창밖의 여자가 되었다”는 진술은, 화자가 단순한 관객을 넘어 노래 속 인물로 ‘변환’되는 순간을 감지해 낸다. 이는 대중음악이 개인의 정체성과 기억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대한 일체성이라는 결과에 이르게 한다. 더욱이 단발머리와 창밖 여자의 조응은, 화자가 노래를 듣는 것을 넘어서 그 서사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담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시가 일반적인 정서를 넘어서 독자가 체험하였을 개인적이고 특별한 정서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시는 멜론밭과 하몽이라는 시각적이고 미각적인 이미지에서 출발하여, 조용필 콘서트라는 청각적인 집단 체험, 그리고 가요를 통한 추억 소환, 그리고 정서의 일체화라는 입체적인 재구성으로 뻗어 나아간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물들이 만나 신박한 의미와 감각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이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기계화된 도시 문명에 저항하는 통찰의 방식이다. 여기서 통찰은 고요한 자기반성이 아니라, 타자들 - 가수와 관객, 여러 세대간의 중층 관객들, 시인과 독자 - 와의 공감, 다각적인 감각의 혼합, 그리고 회억(回憶)의 재연 속에서 발생하는 역동적인 행위로 제시되고 있다. 뜨겁고, 두텁고, 감미로운 시이다.
4. 몸속에 남아 있는 원형의 시간 : 자연에서 신체로, 모성으로, 역사로
뭉친 산세山勢가 풀어지는 계곡으로
시원한 물줄기가 내려오고 있다
퀄퀄거리는 물살 한가운데
둥그렇게 휘감겨 있는 큰 바위
첨벙첨벙 다가가 올라 보니
볕에 달궈져 후끈한 불가마 같다
엉덩이를 디밀고 앉아 하늘 향해 눕는다
주위 기슭의 그늘은 진흙 아궁이만 같고
굴뚝 같은 소나무 위로 구름이
솔솔 피어올라 있다
너럭의 가마칸이라니
어느새 구들장 되어 절절 끓는 열기가
내 안을 훗훗이 데워놓는다
골반 안쪽까지 깊숙이
점심나절 생각도 기억을 담그고 놀고
눈길에 닿는 개여뀌와 달개비꽃도
도란도란 물소리에 성겨져 있다
직박구리 날아간 자귀나무에서
간간이 바람 불어올 무렵
코끝에 시큼하고 비릿한 결이 와 닿는다
아, 젊은 날의 엄마 냄새다
서늘한 어둠이 뜨거워져 응어리가 풀리면
헐거워진 두렁뼈가 조여진다
참싸리꽃 얼룩이 뚝뚝 떨어져 나간다
나는 아랫목에서 젖은 그늘을 말리던
엄마의 달거리를 건너고 있다
냉한 통증이 지나가고 몸은 거뿐해져 간다
바위는 여름내 흡수해 두었던 정기精氣를
서서히 내게 돌려주고 있다
찌뿌듯한 한낮이 온돌처럼 지져져 간다
- 「너럭 가마」 전문
「너럭 가마」는 자연 풍광의 공감각적 체험에서 출발하여, 신체 내부의 기억과 여성적 생의 리듬, 더 나아가 모성과 존재의 기원으로까지 확대되는 체감적 서사의 구조를 지닌다. ‘가마’와 ‘온돌’이라는 한국적인 열(熱) 이미지 체계를 중심으로, 자연 – 몸 – 기억 - 모성이 상호 침투하는 독특한 시적 공간을 구축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시의 전반부는 계곡에 대한 지형 묘사로 시작된다. “뭉친 산세가 풀어지는 계곡”은 경직된 것이 이완되는 유연한 운동성을 내시한다. 이어지는 “둥그렇게 휘감겨 있는 큰 바위”, “퀄퀄거리는 물살” 등의 시각과 청각 이미지들은 고정성과 유동성의 대비를 이루며, 화자가 진입할 시적 공간을 다각적으로 마련하고 있다.
여기에서 바위는 자연물이 아니라 이후 토속적인 ‘가마칸’과 ‘구들장’으로 변모하는 변환 기제로 기능한다. 화자가 바위 위에 올라 엉덩이를 디밀고 앉아 하늘을 향해 눕는 순간, 자연과 신체는 서로 스며든다. 바위는 볕에 달궈져 후끈한 불가마로 인식되며, 전통적 난방 구조인 온돌로 전화되는 까닭이다. “주위 기슭의 그늘은 진흙 아궁이”, “소나무 위로 구름이/ 솔솔 피어올라 있다”는 묘사는 자연을 하나의 거대한 가마 구조로 재구성하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는 자연을 바라보고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라, 화자의 몸으로 들어가 체험되는 ‘내적 공간’으로 변환시키는 시적 전략이다.
중반부에서 이러한 공간은 더욱 내면화된다. “어느새 구들장 되어 절절 끓는 열기”가 “내 안을 훗훗이 데워놓는다/ 골반 안 쪽까지 깊숙이” 배어들게 하여 외부의 열이 신체 내부로 침투하는 과정이 점층적으로 다져진다. 이때 ‘골반’이라는 구체적 신체 부위의 명시는 이 체험이 단일한 온열감이 아니라, 생식성과 깊이 관련된 여성적 신체 감각임을 시사한다. 이 지점에서 시인은 자연 체험을 생물학적이고 존재론적인 차원으로 암유하고 있다. 이후 시적 흐름은 후각을 매개로 급격한 전환을 맞는다. “코끝에 시큼하고 비릿한 결”은 곧바로 “아, 젊은 날의 엄마 냄새다”라는 인식이다. 여기에서 냄새는 기억을 호출하는 가장 원초적인 감각으로 작용하며, ‘시큼하고 비릿한’이라고 진솔한 생물학적 체취를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모성을 이상화하기보다 생명성의 근원으로 환기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시의 후반부는 이 기억이 신체적 변화와 치유의 과정으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여준다. “서늘한 어둠이 뜨거워져 응어리가 풀리면/ 헐거워진 두렁뼈가 조여진다”는 일종의 정화 혹은 재생의 과정을 암시하며, 이어지는 “나는 아랫목에서 젖은 그늘을 말리던/ 엄마의 달거리를 건너고 있다”는 진술은 이 시의 핵심적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달거리’는 여성의 생리 현상을 지칭하고, 화자는 이를 ‘건너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모성의 시간, 여성의 생애 주기를 통과하는 존재로서 엄마와 자신을 한 몸으로 일치시킨다.
결국 바위는 “여름내 흡수해 두었던 정기”를 “서서히 내게 돌려주”는 존재로 형상화되어 자연은 엄마와 나와 동일한 생명공급자 내지 생체공유자로 겹쳐진다. 이는 자연 – 신체 - 모성이 생명이라는 순환 구조 속에서 연결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마지막 구절 “찌뿌듯한 한낮이 온돌처럼 지져져 간다”는 일상적 시간마저 열이 내뿜는 활력 에너지로 굳건한 생명순환성 속에 편입시켜서, 시 전체를 관통하는 ‘가마/ 온돌’과 ‘엄마’의 이미지를 다시 한번 ‘나의 몸’과 중첩시켜 생명의 시원(始原)으로 환기해 낸다.
이 시의 미학적 성취는 감각의 긴밀한 밀도로 생명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화하는 데 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이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열’과 ‘냄새’를 통해 몸을 지닌 존재의 심층을 탐색하는 중심 통로로 작동한다. 또한 자연 풍경에서 출발해 여성의 신체, 모성, 생명으로 나아가는 구조는 개인적 체험을 보편적 생명성의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견실한 힘을 지닌다. 그렇기에 「너럭 가마」는 자연 속 체험을 통해 몸의 기억을 호출하고, 그것을 다시 모성과 생명의 근원으로 연결시키는 수작이다.
독립운동가 김원봉이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워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했던 근거지 난징에서 발화된 어향숙의 또 다른 시「천녕사」는 버려진 공간(절터)을 배경으로,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의 삶과 기억을 복원하려는 애도가 애절하다. 동시에 잊혀진 과거의 인물들을 소환하여 역사 부재 혹은 역사의식이 부채화 된 현시대에 도의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이 시 역시 자연 이미지와 역사적 기억이 교차하며, ‘주변부’의 시선에서 중심 서사를 추출해내고 있다.
“기둥이 사라진 자리”와 “에도는 바람”은 풍경 묘사를 넘어, 허무한 공백의 정서를 상기시킨다. 이 절터는 물리적으로는 폐허이나 의도적으로는 비워진 역사 인식을 일깨우고, 바람은 그 허공을 순환하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매만지고 더듬는 기제로 기능한다. 이어지는 “비밀 결사가 된 청년들”의 등장은 이 공간에 역사적 층위를 두텁게 부여한다. 이들은 조국을 위해 떠났지만 “돌아가지 못한” 존재들로, 개인적 삶과 꿈이 중단된 채 집단적 사적(史蹟) 속에 흡수된 인물들이다. 그렇기에 “꿈들이 벽면의 이끼로 퍼렇게 살아나는지”로 지난 과거 사라진 꿈들만 무상을 증거하듯 살아남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빛바랜 기와”와 “서리”, 그리고 “속삭임” 등은 세월의 단층들을 시각과 청각 등 공감각적으로 환기하게 하여, “암울한 밤을 딛어낸 내일”이라는 선언으로 치닫게 한다.
이후 등장하는 “강아지풀”은 이 시의 중심 상징이다. 강아지풀은 흔하고 하찮은 풀로 여겨지지만, 여기서는 “쓰러진 담장 곁”에서 살아남아 “겨울을 견디는” 강인한 존재로 그려진다. 동시에 “아버지의 고무신”과 “어머니의 빨래 냄새”를 떠올리게 하여 고향의 질박한 정서를 불러온다. 즉, 이 강아지풀은 역사 속 익명의 청년들과 남겨진 가족들, 그리고 고향을 이어주는 중요한 존재이다. 마지막 연에서 강아지풀이 “사열하듯” 기울어서 “받들어총 자세”를 취한다는 이미지는, 보잘것없는 풀들이 군인처럼 변모하는 순간을 강렬하게 포착해낸다. 이는 죽은 이들을 기리는 엄중한 의식이자, 여전히 역사에서 기억하고 시에서 기록해야 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주목할 부분은 이 시가 “중심이 아닌 곳”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는 점이다. “신문의 가장자리”, “보고서의 각주”라는 표현은 공식 역사에서 배제된 이들의 위치를 정확히 짚어낸다. 이들은 역사를 ‘만든’ 인물들이지만, 동시에 기록에서는 ‘숨겨진’ 인물들이다. 이 대목에서 시는 단순한 회상이나 애상이 아니라 역사 서술 방식 자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낸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는 화해 불가능성 혹은 단절의 감각을 제시하여 “나라를 부르던 목소리”와 “신을 부르던 입술”이 “서로 알아보지 못할지”라고, 민족적 서사와 종교적 공간이 더 이상 하나로 통합되지 않는 작금의 상황을 고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람은 기억하리라”는 문장은 인간의 망각과 대비되는 자연의 섭리를 제시하여, 시 전체를 관통하는 위대한 위로이자 증언의 장치로 작동하게 한다.
“무엇이 이토록 고향을 향하게 했는지”라는 질문은 독자에게 남겨지며, 이들의 선택과 희생을 단순히 미화하지 않고 다시금 사유하게 만든다. 폐허 – 자연 - 고향 - 기억이라는 다층 구조를 통해 ‘이름 없는 존재들의 역사’를 정성스럽게 복원하는 데 시인은 성공하고 있다. 강아지풀이라는 미시적 식물 이미지와 불변성의 바람이라는 자연 이미지로 희생의 주체와 거대한 역사의식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며 추모하여 바치는, 시인의 절절한 헌시인 것이다.
이처럼 어향숙 시인은 이번 신작시들을 통해 현대 사회 속에서 약화되어 가는 인간적 감각과 관계를 회복하려는 시적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각각의 시는 서로 다른 소재 ― 디지털 기기, 무인 시스템, 대중문화, 자연, 역사 ― 를 다루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공통적으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출구는 없을까」는 기술 문명 속에서 변화된 일상을 비판적으로 포착, 스마트폰을 ‘감옥’의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스스로를 구속하는 현대인의 자발적 예속 상태를 고지한다. 사방을 픽셀로 닫아걸었다는 표현으로 디지털 문화가 생활 환경을 넘어 세계 인식의 틀 자체를 제한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지만 절망에 머무르지 않고,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감각을 회복하려는 미세한 실천을 통해 탈출 가능성을 희망으로 귀결하고 있다.
한편 「무인가게」는 비대면 사회의 정서를 보다 서정적이고 구체적인 장면으로 풀어낸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에는 ‘CCTV’와 ‘음성 안내’만이 남아있으며, 화자는 그 기계적 시선 앞에서 오히려 더 강한 타자 의식을 느낀다. 과거의 인간적 교류를 환기하는 회상과 현재의 무인 시스템이 대비되면서, 이 시는 편리성 속에서 핍진성이 교차하는 허무감을 효과적으로 제시한다. 의도적인 공허한 질문 “거기 계신가요?”는 사라진 인간관계를 향한 존재론적 질문인 것이다.
앞선 두 시와 달리 밝은 정조를 띠고 있는 「멜론 하몽」은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을 통해 참신한 감각과 진중한 의미를 이중 구조로 생성해낸다. ‘멜론’과 ‘하몽’이라는 조합은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지닌 사람들이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해 하나로 어우러지는 장면과 대응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완전한 동일성이 아니라, 이질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공감과 합일이다. 이는 기술이 제거해 버린 우발성과 다양성이 오히려 인간적 경험의 주요 정서임을 모순적인 상황으로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대지의 자궁인 「너럭 가마」에 이르면 시선은 신체의 감각으로 깊이 이동한다. 계곡의 바위는 “구들장”과 “가마”로 전환되어, 화자의 몸과 정서를 발열시키는 기제가 된다. “엄마 냄새”와 “달거리”는 개인적 기억과 여성 신체 체험을 결합시켜서, 자연 속에서의 경험이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생생해 내는 과정임을 드러낸다. 이 시는 감각의 회복이 곧 정체성의 회복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앞선 시들의 문제의식에 대한 대안이자 대응 양식으로 읽힌다. 현대 도시 문명이 상실해 버린 대지의 생명력과 모성적 온기를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의 완벽한 조화를 통해 복원해 낸 수작이다.
마지막으로 「천녕사」는 시적 관심을 역사적 차원으로 전개한다. 폐허가 된 절터와 그 주변의 사물들은 과거의 희생을 환기하며, 기록되지 못한 존재들의 흔적을 소환해낸다. “신문의 가장자리”와 “보고서의 각주”는 역사 서술에서 배제된 이들의 위치를 상징하며, 주류 역사 바깥의 기억을 복권하려는 시인의 윤리적 태도를 견지한다. 자연물인 강아지풀이 “받들어총 자세”를 취하는 장면은, 역사라는 담론 하에 서로를 기억해야 하는 존중 방식에 대한 인상적인 은유이다.
이 다섯편의 시들은 기술 · 자본 · 속도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시대 속에서 사라져가는 감각, 관계, 윤리들을 다양한 층위에서 복원하려는 시도로 드러난다. 시인은 디지털 기기의 차가운 표면에서 출발해 인간 관계의 온기, 음악이라는 공감과 연대감, 에코페미니즘(자연과 여성의 합일), 역사적 기억에 이르기까지 시적 외연을 확장하면서, 인간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탐색하고 있다.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이미 사라졌거나 불완전하고 느리며, 때로는 비효율적인 것들에 대한 긍정이다. 이는 곧 기계화로 만연한 인공지능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대한 차분하지만 분명한 저항이라 할 수 있다. 어향숙 시인은 이번 신작시들로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더 편리해진 대신, 무엇을 잃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다시금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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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원 시인. 대전대 교수
1. 약력 : 이화여대 약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 문학박사. 1996년 《詩文學》으로 등단.
시집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 『달빛 손가락』, 『사랑을 견디다』, 『오르골 정원』,
공저 『한국 소설 읽기의 열두가지 시각』, 시인 대담집 『시인을 훔치다』 등 출간.
노천명문학상, 성균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한국시인정신작가상, 대전시인상, 호서문학상 등 수상
망각이 이끄는 방향
장석원의 시세계
김태선
출발에서 시작하자. 장석원의 시집 『우리가 소실되는 풍경』(문학동네, 2026) 1부 ‘배타원리’에는 「플랑크 타임」 한 편이 자리해 있다. 플랑크 타임(또는 플랑크 시간)이란 광자가 빛의 속도로 플랑크 길이를 지나간 시간 만큼을 가리키며, 모두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막스 플랑크가 제시한 물리적으로 의미 있는 측정 가능한 최소 단위이다. 플랑크 길이 역시 물리적으로 의미 있는 최소 측정 단위로, 이보다 짧은 거리에선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과 시공간 개념이 붕괴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플랑크 시간과 플랑크 길이 모두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측정 단위인 셈이다.
그런데 측정 단위라는 것은 언제나 그보다 작은 지점의 존재를 생각케 한다. 나아가 시간과 공간은 연속이기에 양자화된 것만을 측정할 수 있는 단위를 (그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시간은 생성과 소멸이 동시적인 동시에 서로 다른 시간 가운데 존재하고, 여기와 너머가 함께 있는 동시에 최극단에 있기도 할 것이다. 1부의 이름이기도 한 ‘배타원리’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배척하는 것을 이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밀어내는 다른 하나의 존재를 통해서만 하나가 존재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존재의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이중 운동은 이와 같은 조건 가운데 이루어진다. 장석원의 시 역시 이러한 여건에서 소실되는 가운데 생성하는 것으로서 흐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플랑크 타임」의 도입부에 쓰인 “어느 날 그곳에서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나는 그곳에서 사라졌다”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이율배반적으로 보이는 움직임들이 함께 있는 사태를 가리키는 말로도 다가온다.
모든 탄생은 앞선 존재의 지워짐을 전제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 자신의 사라짐과 함께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분히 관념적인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을 이러한 존재의 이중적인 운동을, 장석원의 시는 ‘오마공원’, ‘도화공원’, ‘변전소 삼거리’, ‘경의선 숲길’, ‘일산역’ 등 구체적인 장소의 이름과 함께 펼쳐 보임으로써, 우리의 현실과 분리되지 않은 것으로서 드러낸다. 가령 ‘변전소 삼거리’를 무대로 이루어지는 노래에선 “동해운수 차고지, 누워 있는 직육면체들/ 이곳은 상호적이어서 절대적인 좌표가 없다/ 이곳은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나타난다/ 출발하는 자와 도착하는 자 동시에 증발한다”고 하며 버스가 오가는 삼거리와 차고지라는 풍경에서 있음과 없음,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운동을 추상해 낸다. 추상이라 하였지만 이는 감각적 실질을 제거하고 남게 된 관념이 아니라, 운동과 변화의 양상들을 모두 담아내기 위한 노력의 한 모습이라 하겠다. 이처럼 존재의 모든 운동을 한 지점에 응축시킨 지극한 중첩의 한 형태를 장석원의 시는 ‘●’로 표현한다.
이곳은 연속적이고 연쇄적이다 ●●●●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 그곳에 네가 있다는 것, 얽힘
이곳과 그곳, 영원히 반복되는 1초 전과 후는
인접할 뿐, 너에게 건넸던 발화(發話)처럼
― 「플랑크 타임」 부분
인간의 일반적인 언어는 분절된 것이기에 연속적이고 연쇄적인 것을 불연속적인 단위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의 언어는 단절의 감각을 예각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제 자신의 한계에 틈을 낸다. “이곳에 내가 있다는 것, 그곳에 네가 있다는 것”이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나’와 ‘너’가 분리된 개체로서 각각의 장소에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그려낸다. 그런데 이러한 단절을 ‘,’라는 문장부호를 통해 단속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기이하게도 서로 닿을 수 없던 존재들을 얽어내는 독특한 움직임이 이루어진다. 그 때문에 앞 행에 쓰인 “이곳은 연속적이고 연쇄적이다”라는 표현은 그 자체로 실상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가 단속적이고 양자화된 형태로 이해되더라도 실상은 그러한 분절을 넘어서는 이어짐과 동시성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예감케 한다. 이를 장석원의 시는 “●●●●”로 다시 표현한다.
‘●’는 그 자체로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하나이자 존재의 모든 운동들이 응집된 모습을 가리키는 지극한 형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나드(monade, 單子)’라 읽을 수도 있겠으나, 장석원의 시는 이를 또한 “●●●●”라는 모습으로 표현하며 관계를 이루는 것들로 그려내고 있기도 하다. 즉 ‘●’가 오롯이 ‘창문 없는 단자’로서 독립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서로 교통하는 존재이기도 함을 밝히는 것이다. ‘●’를 제목으로 삼은 시 「●」에서도 그와 같은 모습들을 살필 수 있다.
우리는 경험하는 자. 우리가 그러안고 있는 돌, 같은, 몸. 환희에 젖어 응집한다. 풀이 바람 속으로 신음을 분사한다. 지배하던 것이 돌아오고, 나는 부복한다. 너의 박동이 말단에서 첨단으로 이동한다. 파르르 떠는 저곳의 불빛.
우리는 출렁이겠지
광장의 굉음에 절삭되며 신음하는 몸들. 검은 돛배처럼 눈을 감는다. 우리의 신체는 사라지는 것. 세계의 전부를 소실(燒失)한 후 슬픈 정물화 같은 다른 몸으로 건너간다. 내 몸은 비어 있던 적이 없다. 네가 돌아온다.
― 「●」 전문
경험한다는 건 어떤 일을 겪음으로써 변화되어 가는 움직임을 이른다. 즉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는 수동적 종합이자 관계를 맺으며 다른 무언가가 되어가는 생성의 움직임이기도 하다. 이처럼 시의 문을 여는 “우리는 경험하는 자”라는 언설은 ‘우리’라는 심급을 타자로 열리고 노출된 것이자 그와 교통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에서 노래하는 목소리는 그러한 ‘우리’에서 시선의 초점을 “우리가 그러안고 있는 돌, 같은, 몸”으로 잠시 옮긴다. ‘몸’이 “돌, 같은” 까닭은 “환희에 젖어 응집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경험하는 자’로서의 우리가 그러안고 있는 ‘몸’이란 겪어온 동시에 겪어갈 것들이 응축된 심급인 이유도 있겠다. 그러안은 것이기에 그것은 우리가 살아오면서 겪은, 또는 살아가면서 겪게 될 사태와 그에 따른 정서를 함축하기도 한다.
모임은 언제나 흩어짐을 예비한다. 마찬가지로, 겪어온 것들을 그러안은 것이 “돌, 같은, 몸”이라면 그 존재는 품었던 것들을 또한 펼치는 운동에 이를 수밖에 없을 터이다. 이와 같이 모이고 흩어지는 일, 그러안은 뒤에 다시 펼쳐내는 움직임은 “너의 박동이 말단에서 첨단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존재가 흘러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파르르 떠는 저곳의 불빛”처럼, “우리는 출렁이겠지”라 노래하는 이의 목소리는 이처럼 응집에서 확산을 함께 읽어내며 나타남에서 스스로를 지워가는 움직임을 동시에 본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들을 시인이 노래하게 되는 까닭은, 바로 그와 같은 존재의 운동이 흘러가는 움직임 즉 리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흐름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까닭도 있겠다.
“우리의 신체는 사라지는 것”이기에, 이를 그려내기 위해선 그 표현 또한 사라져가는 움직임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내야 할 터이다. 노래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지워감으로써 나타나는 존재이자,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건너감으로써 이루어지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러한 움직임을 표현하는 가장 탁월한 방식이라 하겠다. “세계의 전부를 소실(燒失)한 후 슬픈 정물화 같은 다른 몸으로 건너”가는 일은 한 존재가 그 삶을 다한 끝에 다른 몸으로 넘어가는 일생의 주기를 표현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 음(音)이 제 세계를 전부 사라짐에 이르게 하면서 다른 음으로 이어짐으로써 음악이 이루어지는 모습을 그린다. 이와 같은 일은 한 개체의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와 다른 하나가, 이를테면 ‘나’와 ‘너’가 만남으로써 이루어지는 교통과 변화로 나타난다. 그런데 모든 만남은 필연적으로 헤어짐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별과 상실은 존재의 역량이 감소하는 사태이기도 하기에 슬픔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기도 하다. 슬픔을 동반하는 일이기에 “너는 나를 떠났는데 헤어진 몸, 사출한 그 몸 소각하고 손바닥에 징 박는”(「회회(蛔蛔)」) 것처럼 고통스러운 몸짓이기도 하다.
그러나 헤어짐을, 사라져가는 운동을 주목하는 시인의 눈은 ‘우리가 소실되는 풍경’으로부터 존재하던 것들이 허무(虛無)에 이르는 것과는 또 다른 무언가를 읽어낸다. 물론 「나를 불태워줘」에서 “네가 떠나고 나는 이끼처럼 흐느끼겠지 산창(酸愴)은 물컵 안에서 열렬하게 식어가겠지”라고 노래한 것과 같이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유한한 존재에게는 필연적으로 슬픔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나려는” 상황에서 “나는 부스러지겠지 누차 누차”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도 할 터이다. 그런데 이렇게 ‘너’라는 존재의 상실에서 ‘나’의 존재 역량이 낮아짐을 밝히는 태도는, 「회회(蛔蛔)」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기생했구나”라 말한 것과 같이, ‘너’라는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기 존재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또 긍정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장석원 시에서 노래하는 이는 기꺼이 떠나가는, 잃어버린 ‘너’의 존재를 향해 ‘나’를 열고 또 내던지는 것일 테다. 이는 과거의 모습으로 관계를 되돌리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라져감을 긍정하는 움직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별, 나를 짓찢는다, 몸 나간, 마음과 마음, 쫓아낸 몸”(「회회(蛔蛔)」)이라는 표현은 ‘너’와의 별리(別離)에 따른 고통의 경험을 전하는 의미로만 읽히지 않게 된다. ‘나’를 찟는 이 경험은 또한 ‘나’로 하여금 자기 안에만 갇혀 있지 않게 한다. 장석원 시의 ‘나’는 헤어진, 사라져간 ‘너’에게 자신을 던짐으로써 ‘우리가 소실되는 풍경’을 펼친다. 스스로 망각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이미 기억이 되어버린 ‘너’를 다시 돌아보는 것이다. “내가 나타나면 네가 사라지고/ 네가 다가오면 내가 멀어진다”고 하는 ‘배타원리’를 수행하는 것이다. 이처럼 기억한다는 건 사라져간 것들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간직하는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회상하는 일, 즉 지나간 것들을 이 자리로 다시 불러오는 이 움직임은 사라져간 것들을 원래의 모습으로 재현하는 것과 다르다.
기억과 회상은 모두 망각을 전제로 한다. 망각이란 잊는 일이자 잃어버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을 벗어나 스스로와 다르게 되어가는 움직임을 이른다. ‘몸’이라는 자기에게 익숙한 그릇을 벗어던지고 기꺼이 다른 무언가로 되어가려 하는 용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망각은 죽음에 이르는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계속해서 기억을 떠올리고 글을 쓴다는 건 끊임없이 죽음을 반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움직임은 한 삶을 끝을 향해 달려 나가 그곳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끝에서부터 시작하는 일이다. 과거를 되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더 잘 사라짐에 참여하기 위해 이별 이후의 삶을 모색하는 일이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스피노자가 『에티카』 3부에서 정리한 것과 같이 유한한 실재는 할 수 있는 한 자기 존재 안에 존속하고자 노력하는데, 이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오르페우스가 에우리디케를 향해 법을 위반하고 율(律)을 거스르면서까지 산 채로 죽음의 세계로 건너갔던 것처럼, 유한한 존재인 우리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하는 경향을 본능처럼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가짐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도록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너를 잃고 나의 물빛
엷어지고 묽어지고 빗방울
까치발로 달아나고
물빛 물빛으로 빚은 얼굴
눈썹을 적시는 비
널 부르고 불러 세운다
너는 돌아본다 얇게 퍼진다
― 「수색역에서, 1988」 부분
시집 첫 자리에 놓인 「플랑크 타임」에 등장했던 여러 장소의 이름은 현실에 실재하는 것들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이제는 기억이 되어버린 지나간 시간의 다른 이름들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수색역에서, 1988」의 무대가 되는 ‘수색역’ 역시 실존하는 지역의 이름이지만 동시에 이제는 가닿을 수 없는 흘러간 시간의 이름을 가리킨다. 그러한 이름들을 다시 지금 이 자리로 불러오려는 노력은 오르페우스의 위반과 (뒤돌아봄으로써 떠나간 이를 되돌리지 못한) 실수를 반복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되찾을 수 없을 것들을 이곳으로 불러오려는 열망은 예술의 독특한 힘을 빚어내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흐름에서 볼 때, 「수색역에서, 1988」에서의 ‘너’는 사라진 존재이자 잃어버린 대상이라는 점에서 에우리디케와 같고, “혼자에게/ 나는 돌아오고”라는 구절처럼 ‘나’ 역시 오르페우스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자리로 읽을 수 있겠다. 그러나 장석원 시에서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는 일은 과거의 한 때를 존재했던 원래 모습으로 되살리고자 하는 것과는 다른 길로 나아간다.
장석원의 시는 대상과의 단절을, 사라져가는 움직임 그 자체를 반복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재현의 방식과는 다른 움직임을 펼친다. 이는 시의 무대가 되는 수색역이 자리한 지역의 이름이 만들어지게 된 연원과도 일정한 연관이 있기도 하다. 한강 하류에 자리한 수색동은 장마철만 되면 물이 넘쳐 동네가 물천지, 또는 물빛이 된다 하여 수색(水色)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은 씻어내고, 용해하며, 흘러가고, 또 증발하며, 흩어지기도 한다. 일정한 형태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에 이르도록 한다. 때문에 물이 닿는 자리에 있던 것들은 다른 모습으로 바뀌거나 어디론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수색역에서, 1988」에서의 ‘나’ 역시 “너는 사라지고” “흐트러지는 물방울” “엷어지고 묽어지고 빗방울/ 까치발로 달아나고” 등과 같은 표현으로 사라지고 흩어지며 희미해지는 존재의 움직임을 그린다. 이렇듯 장석원 시의 ‘나’는 ‘너’를 부름으로써, 지나간 시간을 되살리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흐름에, 즉 망각의 움직임에 자신을 맡긴다. ‘너’가 떠나간 것처럼 “나의 물빛” 역시 “엷어지고 묽어지”는 일을 그림으로써 그와 같은 움직임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장석원 시에서 희미해져 가는 일, 사라져가는 움직임을 그리는 일은 허무를 향한 것과는 다른 길로 우리를 인도한다. 장석원의 시에서 지나간 시간을 반추하는 일, 떠나간 이를 향해 노래하는 일은, 그 흩어진 시간에 가닿음으로써 「힘 힘 너머로」에서의 표현처럼 “네 옆에 살아남아서 창궐”하는 일이 된다. 이는 함께 시간을 지나오며 ‘나’를 이루어온 “이웃하는 몸들/ 우글거리는 것들”을 “눈을 감고 더듬”으며 만나는 일이다. “다른 몸으로 이접”되어가는 움직임에 참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의 삶 역시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건너가는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스스로를 지워감으로써 사라지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이러한 움직임을 무의미로 향하는 것이라 할 수는 없을 테다. 사라짐에 이른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와 다른 하나가 맺는 관계 가운데 이루어지며, 차이와 차이가 만나는 일은 의미를 만들어낸다.
∞:∞. 폭우가 쏟아진다. 바위가 굳는다. 빗물 혓바닥 땅을 핥는다. 새로운 X가 태어난다. 방혈하면 나는 깨끗해질까. 나와 공동(空洞) 사이에, 나와 너 사이에, 비가 있다. 비가 나를 다스린다. 나는 녹는다, 흘러간다. 용암. 종말. 사랑은 망각 후에 발굴될 것이다.
― 「폼페이, (그)라(디)바」 부분
「폼페이, (그)라(디)바」에서 펼쳐지는 ‘망각과 회억’의 운동은 떠나간 것들을 다시 불러오고자 하는 무모한 시도를 이행하면서 동시에 부정하는 역설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진다. 시에서 노래하는 목소리는 “X의 귀환을 믿어, X가 살아/ 있다는 말을 해줘”라고 말하면서도 “부활, 그것을 죄라고 선언”함으로써 “명백한 후회”를 수행함과 동시에 그것이 “진실의/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살아/ 있다는 말을 해줘”라든가 “진실의/ 이미지에 불과하다”라는 표현은,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해 말하는 일이 단절 가운데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또한 일러주기도 한다. 아울러 “이곳에/ 내가 없다 내가 X일까”라는 모습과 같이 ‘이곳에’와 ‘내가 없다’를 단절된 모습으로 전하는 일은, 이들이 “언어의 조합”이자 “이미지에 불과”함을 표현함으로써 실재라는 여겼던 것들이 실상은 가상에 불과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데 시간의 흐름 가운데 있는 것들은 과정으로서 존재하기에 모두 이미지적인 것이기도 하다. 앙리 베르그손이 『물질과 기억』에서 사유한 바와 같이 현재란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는 미래를 잠식하는 과거의 포착할 수 없는 전진”이다. 빌헬름 옌젠의 소설 『그라디바』에 등장하는, 앞으로 걸어가는 (그 의미에서 ‘Gradiva’라는 이름이 붙은) 여인의 부조(浮彫)처럼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있는 것’이라 생각지만, 실상은 앞으로 나아가면서 ‘생성되는 것’으로서의 존재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움직임은 ‘나’에게 “나는/ 먹(히)고 있어요”라고 표현하게 되는 사태로 다가온다.
산다는 건 먹으면서 또한 먹히는 관계 가운데에서 몸에서 몸으로 건너가는 일이다. 끊임없이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되어가는 일이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에서 우리가 만난 것들, 본 것들은 모두 기억이 된다. 기억이 된다는 건 또한 망각에 이르는 움직임에 참여함을 이른다. 이처럼 시간의 걷잡을 수 없는 흐름은 용암(라바; lava)이 우리를 뒤덮는 것처럼 다가온다. 폼페이처럼 우리는 그에 삼켜져 소실되기에 이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단순히 시간에 잡아먹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너’ 사이에서 관계를 이루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와 공동(空洞) 사이에, 나와 너 사이에, 비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모든 것을 씻겨 내리도록 하기만 하지 않고 또한 “나를 다스”리는 것으로서 무언가를 생성케 한다. “나는 녹는다, 흘러간다. 용암. 종말.” 이러한 단절들 가운데에서도, 이들은 또한 이어짐의 관계를 이룬다. 대화라는 것은 실상 서로가 분리된 가운데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폼페이에 살았던 이들이 용암에 파묻힌 가운데에서도 제 삶을 구멍으로 남김으로써 발굴되었던 것처럼, 삶은 단순히 시간에 먹힘으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공동(空洞)을 만듦으로써 흔적을 남긴다. 사이에 사이가 있다. 이는 ‘나’와 ‘너’가 서로를 가르는 단절의 심연을 건너 교통한, 우리라는 이름의 공동(共同)을 이루어 서로의 있음을 나누며 나아간 증거이기도 하다. 존재한다는 건 지나가는 일이면서 동시에 나누는 일이다. 모두 망각의 물결에 휩쓸리겠지만, 그것은 또한 언제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발굴되는 일을 예비하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이렇듯, “사랑은 망각된 후에 발굴될 것이다”. 이렇게 장석원 시에서 노래하는 ‘나’와 ‘너’는 함께 망각이 이끄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기꺼이 스스로를 지워감으로써 나타나는 음악이 되어간다. 물러나는 가운데 제 모습을 드러내는, 끊이는 듯하면서도 이어지는 무한의, 그렇게 헤어지며 만나는, 사라져가는 가운데에서도 살아지는, 이러한 흐름이 우리 삶의 리듬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