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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인 순간, 시간의 시학
임현준
신수형, 「하루」, 『문학동네』, 2024 가을.
김기택, 「수염으로 칼날 깎기」, 『애지』, 2024 가을.
안도현, 「3월에서 5월까지」, 『창비』, 2024 가을.
엄원태, 「균형 잡힌 식단」, 『애지』, 2024 가을.
정현종, 「하루의 크기는 히말라야만큼 거대합니다」, 『문학과사회』, 2024 가을.
문학에서의 시간은 ‘시(詩)적인 순간’을 의미한다. ‘시적인 순간’은 어느 구체적인 사건일 수 있고, 정서의 폭발을 일으키는 어떤 발화점일 수 있고, 섬세한 균열을 감지해 세계를 자각하게 하는 뜻 모를 이질감일 수도 있다. 불현듯 수염을 깎다가 면도날의 무뎌짐을 발견할 때나, 봄철 나물을 뜯다가 배고플 때나, 하루가 흘러가는 것이 어색해 뒤통수가 근질근질할 때 같은 ‘시적인 순간’들이 문학이라는 세계의 시간을 구성하게 된다.
이 문학의 시간성은 개인의 일상성, 사회의 보편성, 정치와 역사의 특수성, 철학의 관념성을 두루 포섭한다. 개개의 문학작품은 작가나 시인이 처한 생활 안에서 제각각 관조되는 것이면서 사회라는 약속 체계에 의해 구속받는다. 또한 역사적 맥락에 따른 그 시대의 정치적 특수한 현실 인식이 작품마다 스며들어 있고, 그 안에서 인류의 지성이 누대에 걸쳐 심어놓은 논리적 사유가 작동되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시를 쓰는 일은 일상성과 보편성과 특수성과 관념성이 ‘시적인 순간’에 갑자기 수렴될 때 첨단의 언어를 통해 폭발적으로 발산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이 총체적 수렴과 폭발적 발산 덕분에 시를 계시적이며 직관적인 것이라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일상과 사회와 정치와 역사와 사유는 오래 살고 많이 겪고 깊이 생각하고 홀로 고민할 때 비로소 꽃피게 되는 것임을 문학과 시는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다시 말하거니와, 시의 시적인 순간은 단 한 번도 이 세계와 유리되거나 단절된 적이 없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들다는 푸념이나, 오늘의 뉴스에 노출되는 시대적 폭력성과 정치적 천박함을 읽을 때 일갈하는 욕설이나,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편을 갈라 서로의 부조리함을 폭로하는 토로까지도 죄다 생활과 역사와 현실이라는 시공간 위에서 연기(緣起)되어 온 것이다. 그러니까 이유 없는 행위가 없고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는 말이다. 어쩌면 시는 푸념과 욕설과 토로라는 오래 묵은 시간을 삼키고 소화해서 ‘시적인 순간’을 정제된 언어로 도로 내뱉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시적인 순간’이 현실 세계와 단단히 결속되어 있다는 것은 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초가 된다. 시간에 대한 여러 가지 인식론적 방식이 시를 읽거나 쓰거나 하는 데 유용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간을 직선적으로 이해하거나, 순환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현상으로 보거나, 물리학적 논리와 증명으로 파악하는 방식은 시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계를 이해하는 관점이 될 수도 있다.
현대서정시는 주로 ‘오늘’, ‘하루’, ‘지금’이라는 시간대를 중심으로 ‘시적인 순간’을 형상해 온 것처럼 보인다. 문명의 이기가 논리와 합리 체계의 과학기술에 편승하면서, 또는 효율과 손익의 자본주의에 치우치면서 삶의 속도가 가파르게 빨라졌기 때문일까. ‘어제’를 이야기하기에는 ‘오늘’이 너무 분주하고, ‘어느 날’을 이야기하기에는 ‘하루’가 너무 살벌하고, ‘과거와 미래’를 이야기하기에는 ‘지금’이 더 절실한 시대이다. 그러나 시의 ‘시적인 순간’은 얄팍하지도 단절적이지도 않아서 그 이면에는 두꺼운 시간의 앞과 뒤가 덧대어져 있다. 모든 시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좋은 시가 포착하는 시간성은 깊고 웅숭하고 길어서 ‘순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오랜 여운을 선사해 준다.
여기 인류가 쌓아온 지혜로서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통해 노래한 시편들이 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직선적 이해로 지은 시가 있고, 계절의 순환 같은 이치로서 춘하추동 물레 돌리는 시가 있고, 숙명이라는 업보의 순환을 관조하는 의지로 빚은 시가 있고, 과학적 인식론으로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현상의 시가 있다.
직선적 표상으로서의 시간, ‘하루’에게 진심인 것에 대해
하루는 하루의 뒤에 서본다
하루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
하루에게 하루는 진심이었고
하루에겐 오직 하루밖에 없었다
그러니 하루는 하루에게 모든 걸 바칠 수밖에
하루가 오는 것을
하루가 떠나가는 것을
기꺼이 지켜보았다
하루는 하루를 바라보다
하루의 뺨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루의 주변을 맴돌면서
하루를 곁눈질한다
하루에게 가까이 다가가
눈 코 잎을 들여다본다면
하루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런데 하루의 얼굴을 만질 수가 있나
하루는 아름답고
하루는 슬퍼 보이고
하루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른다
하루는 하루의 곁에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무언가를 먹고 잠에 빠져들지만
하루가 하루에게 말을 건 적은 없다
다른 곳으로 가보자거나
들어보지 못한 신기한 일을 말해준다거나
하루의 눈을 들여다보며 하루의 뺨을
가만히 만져보고 싶어
이렇게 뒷모습뿐이지만
하루는 잠에 빠져들고
어둠 속에서
눈을 뜬다
하루는 갔구나 이 방엔 아무도 없구나
가버린 하루를 생각하며 하루는
하루를 보낸 것이라고 해야 할지
하루가 가서 아쉽다고 해야 할지
골똘해진다
―신수형, 「하루」, 『문학동네』, 2024 가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시간을 인식해 왔다. 과거가 있고 현재가 따라와서 미래가 이어진다는 감각은 시간을 직선적 표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토대가 됐다. 그러므로 시간이라는 관념은 지극히 인간 중심의 인공물일지도 모른다. 이해하기 쉽게, 또 활용하기 간편하게 만들어진 직선적 표상으로서의 시간을 오로지 정방향의 흐름으로만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 일회적 직선의 시간성은 다시는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치를 자연스러운 합리로 받아들이게 한다. 나아가 의지와 선택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은 인간 능력 밖의 일로 미뤄놓는다. 이해할 수 없거나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사유하고 추구해야 한다는 서구 철학의 변증론적 근간이 직선적 시간성을 더욱 강화시켜 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창안한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는 우주가 운동하게 된 시원의 첫 운동자를 말한다. 동자는 시간적 선후관계를 설정하고 정립한다. 이로써 각각의 사물에 이데아가 서릴 수 있게 되는데, 각각의 이데아는 근원으로서의 이데아를 지향하고 가닿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직선적 논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직선적 표상으로서의 시간성을 칸트는 선험적인 것이라 단언한다. 경험 이전에 있었으며 인간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객관적 틀 같은 것으로 시간의 특질을 이해한 것이다.
신형수의 「하루」는 “하루가 오는 것을/ 하루가 떠나는 것을/ 기꺼이 지켜보”는 직선적 시간의 ‘시적인 순간’을 노래한 시이다. 직선적 시간의 세계에서 “하루는 하루의 뒤에 서” 있을 수 있다. 이 독특한 활유는 “하루의 뒷모습을 본 적이 있던가”와 같은 신선한 의인화로 상상력을 확장시킨다. “하루”가 인간적인 면모의 성질을 띠면서 “하루의 뺨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도, “하루의 주변을 맴돌면서/ 하루를 곁눈질”하는 것도 시인의 상상력 때문에 가능해진다. 그러면서도 “하루의 얼굴을 만질 수” 없어서 “하루가 하루에게 말을 건 적”이 없는 까닭은 “하루”의 시간성이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적 표상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임을 시인은 직시하고 있다. 직선의 시간 안에서 “하루”는 되돌아갈 수도, 돌이켜질 수도 없는 일회적 사건일 뿐이다. 이 일회적 시간의 생성과 소멸은 인문학적 특유의 인식론, 즉 시간이나 색과 같이 분절되지 않은 개념을 쉽게 인식하기 위해 시도하는 개념의 분절화일 뿐 “하루가 하루에게” “다른 곳으로 가보자거나/ 들어보지 못한 신기한 일을 말해준다거나/ 하루의 눈을 들여다보며 하루의 뺨을/ 가만히 만져”보게 허락하지 않는다. 어제는 오늘과 말을 섞을 수 없고, 오늘은 내일과 포옹할 수 없는 것이 직선적 시간의 불문율이다. 그러므로 이 선험적이고 객관적인 틀인 시간의 불문율 앞에 우리는 만져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고 마음 졸이면서도 가닿지 못하고 “뒷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만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하루”여서 우리는 “하루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존재인 채로 “가버린 하루를 생각하며” “골똘해진다”. 그리하여 직선적 시간의 불가항력 앞에서 입을 다물어야 하지만서도 변증법적 희망에 투신하는 쪽으로 시는 나아간다. “하루에게 하루는 진심이었고/ 하루에겐 오직 하루밖에 없”어서 “하루는 하루에게 모든 걸 바칠 수밖에” 방법이 없어도 말이다.
순환적 표상으로서의 시간, ‘무량겁’이라는 숙명적 시간에 대해
흰 머리 흰 수염 흰 눈썹
언제 나에게 와서
얼굴이 되었니
나도 모르게
나였던 것들도 모르게
깎아도 깎아도 매일 얼굴이 되고 있었니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수만 년 수백만 년 되풀이하고 있었니
수억 년 전의 것과 같은 허공을 되풀이하고 있었니
풀에서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어둠에서도
그 짓을 되풀이하고 있었니
지금도 쉬지 않고 어딘가로 가서
또 누군가의 얼굴이 되고 있니
검은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는 줄도 모르는 되풀이
시야에 가득한 햇빛처럼 쏟아지고 있는 되풀이
바람처럼 불고 있는 되풀이
죽는 줄도 모르는 죽음
태어나는 줄도 모르는 얼굴
무한인 줄도 모르는 무한
거울 볼 때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서
흰지 검은지 모르는
흰 머리 흰 수염 흰 눈썹
번쩍 한 얼굴
슬쩍 한 슬픔
그토록 무량겁 무량겁 투명했으면서도
투명인지 모르는 투명
―김기택, 「수염으로 칼날 깎기」, 『애지』, 2024 가을.
직선적 표상으로서의 시간이 직관적 인식이었다면, 순환적 표상으로서의 시간은 경험과 관찰에 의해 형성된 인식이다. 비근한 예로 봄·여름·가을·겨울 같은 계절의 반복이 주기에 맞춰 되돌아오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을 상정할 수 있게 된다. 사계의 생동하는 변화를 관찰하다 보면 『천자문』에서 언급하는 ‘한래서왕(寒來暑往)’, ‘추수동장(秋收冬藏)’ 4언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추위가 오면 더위가 가니, 가을에는 추수하고 겨울에는 저장한다’는 경험과 관찰은 반복적으로 순환하는 시간성을 자연의 섭리로 인식하게 만든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순환하는 시간은 세상을 변화시킨다. 봄은 겨울을 녹여 싹을 틔우고, 여름은 봄을 키워 녹음을 이루고, 가을은 여름의 열기를 갈무리해 울긋불긋 열매를 맺고, 겨울은 가을을 땅속에 재우기 위해 눈을 덮는다. 결국 시간은 세상의 모든 변화를 이어주는 틀이 된다.
순환적 시간에 대한 일련의 관찰은 인간세계의 생로병사를 이해하게 만들고, 죽음 이후에 또 다른 생명의 부활을 상상케 한다. 순환적 시간성에 믿음과 기복의 신앙이 서리게 되는 것도, 윤회이라는 틀 안에서 업보라는 원인이 작용하여 그 결과인 ‘지금’의 ‘나’가 존재하게 된 것도 이러한 경험에 의해서이다. 이는 숙명으로서의 윤회이고, 이러한 숙명의 윤회는 고대 인도의 브라만교에서 발전하여 불교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김기택의 「수염으로 칼날 깎기」는 “수만 년 수백만 년 되풀이하고” 있는 순환적 표상으로서의 시간을 수준 높게 형상화한 시이다. 칼날에 의해 수염이 깎이는 일회적 사건에서 보면 시간은 단선적인 현상이지만, 수염을 생성과 소멸하는 순환의 연속에서 보면 칼날은 수염에 의해 서서히 무뎌지는 억겁 시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순환하는 시간에서의 억겁은 “무한인 줄도 모르는 무한”일 따름이다. “풀에서도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어둠에서도/ 그 짓을 되풀이”하는 순환하는 시간은 “검은 머릿속”같이 인식될 수 없는 아득한 것이다. 그러나 “죽는 줄도 모르는 죽음/ 태어나는 줄도 모르는 얼굴/ 무한인 줄도 모르는 무한”의 숙명을 윤회하다가 불현듯 “번쩍한 얼굴”과 “슬쩍한 슬픔”을 깨닫게 되기도 한다. 이는 종교적으로는 깨달음이라고 하겠지만, 시에서는 “거울 볼 때만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시적인 순간’이다. 시인은 이 ‘시적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영겁과 같이 “되풀이되는 줄도 모르는 되풀이” 속에서 “흰 머리 흰 수염 흰 눈썹/ 언제 나에게 와서/ 얼굴이 되었니” 하고 자문하게 되는 이 ‘시적인 순간’에 “깎아도 깎아도 매일 얼굴이 되고 있었”다는 숙명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시적 화자는 “또 누군가의 얼굴이 되”는 업보를 가늠할 수 있게 된다. 깎인 수염이 다시 자라나는 속도만큼, 몸의 검은 털이 하얗게 변화하는 속도만큼 미세하게 생동하는 시간의 변화 속에서 ‘나’라는 숙명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존재할 것이라는 경험적 예감을 정당화하기까지 한다.
덧붙여 「수염으로 칼날 깎기」는 종교적 색채가 다분하면서도 시인 특유의 섬세한 관찰과 반복적인 묘사 덕분에 믿음과 기복이라는 신앙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은 좋은 시이다.
현상으로서의 시간, 하루하루 먹고사는 변화에 대해
3월 17일 논둑으로 냉이를 캐러 갔다 땅에 발을 묻고 있던 눈발들이 가까스로 발목을 꺼냈다
3월 26일 달래 뿌리가 엄지발가락만큼 실했다 아내가 달래간장을 만들었고 나는 흰밥에 비볐다
3월 28일 고깔을 쓰고 나온 광대나물을 데쳐 무쳐 먹었다 다 뜯지는 않고 한고랑은 꽃 보려고 남겨두었다
4월 1일 고들빼기와 흰민들레를 한바구니 캤다 김치를 담글 요량으로 다듬었다
4월 6일 진달래 꽃잎을 따 입에 물어보았다 화전이 눈에 삼삼했으나 찹쌀가루가 없다 했다
4월 7일 화살나무 새순 손바닥 펼치기 전에 한움큼, 돌나물도 한움큼 주머니에 넣었다
4월 8일 비 온 뒤 논둑에 벼룩나물 지천이다 마당에 벼룩이 튈까봐 보기만 했다
4월 9일 오전에 원추리 새순 자르고 오후에 망초와 꽃다지 새순을 따 데쳤다 처음 해본 일인데 맛이 좋았다
4월 10일 아버지 산소 둘러보고 가는데 두릅 순이 돋았다 나도 두리번거렸다
4월 17일 소망실 사는 정문수가 엄나무 순을 따서 한봉다리 갖다주었다
4월 20일 뽕나무 새순 반뼘쯤 올라왔다 왼손으로 가지 끝을 잡고 오른손으로 톡톡 딸 때 나는 소리 지상으로 빗방울 뛰어내리는 소리
4월 26일 흰민들레 씨앗이 맺히는 대로 받았다 내년 봄에는 민들레밭을 일굴 것이다
5월 20일 참비름과 명아주 연한 잎을 한소쿠리 땄다 조선간장과 참기름으로 무쳐 고추장에 비벼 먹었다 끝내준다
5월 24일 왕고들빼기 잎사귀 몇장 쌈 싸서 먹었다 봄이 다 가겠다
―안도현, 「3월에서 5월까지」, 『창비』, 2024 가을.
순환적 표상의 시간에서는 과거의 업이 현재의 결과가 되고, 현재라는 원인이 미래의 결과가 된다. 이러한 숙명적인 순환의 과정에서 업을 상속받아 시간을 윤회하는 실체적인 자아가 필요하다. 그런데 붓다는 ‘나’가 임시적으로 구성된 존재이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적 자아를 부정하는 ‘무아(無我)’를 지향했다. 이를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는 개념으로 이해한다. 연기란, 모든 현상이 생기 소멸하는 법칙이다. 현상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서로 관계해서 성립하는 것으로 인연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것이다. 즉, 연(緣)은 조건이고 기(起)는 현상인데, 업은 조건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므로 그 조건이 해체되면 그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도 없어진다는 의미이다. 연기의 원리를 알게 되면 얼마든지 ‘나’라는 숙명을 ‘나의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된다. 무아(無我), ‘나’라는 실체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면 ‘시간’이라는 실체도 없는 것이 된다.
우리가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계절의 변화나 밤낮의 변화 같은 현상에 의해서이다. 봄이 영원히 지속되면 우리는 사계절이라는 시간을 포착할 수 없다. 시간이란 변화가 발생하는 현상에 의지하여 있는 것이지 독립적 실체처럼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시간을 현상으로서의 변화로 인식한다. 즉,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펴서[변화] 봄[시간]이 오는 것이고, ‘나’가 늙어서[변화] 세월이 흘러간[시간] 것이 된다. 이제 변화하는 현상으로서의 시간에서 과거는 지나갈 뿐인 것이고, 현재는 살아가는 것일 뿐이고, 미래는 다가오는 것일 뿐이다.
안도현의 「3월에서 5월까지」는 변화하는 현상으로서의 시간을 단편적인 일기 형식으로 엮은 시이다. 백석 시의 세례자임을 자처하는 시인답게 음식에 대한 열망이 담담하고 고즈넉하게, 그러면서도 생동감 넘치게 그려져 있다. “냉이, 달래 뿌리, 광대나물, 고들빼기, 흰민들레, 진달래 꽃잎, 화살나무 새순, 돌나물, 벼룩나물, 원추리 새순, 망초와 꽃다지 새순, 두릅 순, 엄나무 순, 뽕나무 새순, 민들레 씨앗, 참비름, 명아주 연한 잎, 왕고들빼기” 같은 풀과 순들은 봄이라는 시간성을 가능하게 하는 현상들이다. 시에서 봄이라는 시간은 숫자로 표기되어 날짜로 드러날 뿐, 봄의 생명력과 활력은 죄다 “눈발들이 가까스로 발목을 꺼”낸 “땅”의 현상을 통해 인식된다. 나아가 변화하는 식물의 싹과 들풀의 어린잎들은 “조선간장과 참기름에 무쳐 고주창에 비벼 먹”게 하는 식욕을 현상으로서 불러일으킨다. 더불어 “논둑에 벼룩나물 지천”이어서 “벼룩이 튈까봐 보기만” 하거나 “두릅 순이 돋”아 “나도 두리번거”리는 것은 현상을 적극적으로 관조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드러낸다. 이러한 현상들의 연속이 아이러니하게도 건조하고 간결한 시 형식에 힘입어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의 생동감을 극대화시킨다. “3월에서 5월까지”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 자체가 봄이라는 시간의 현상이자 삶이라는 현상이 되는 것이다.
이 시는 ‘들풀·순-관조-식욕’의 현상과 현상의 연속을 통해 시간을 포착한다. 그 시간은 독립적 실체가 있는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주관적이고 관찰적이고 경험적인 시간이다. 순환적 표상으로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현상으로서의 시간에서도 경험과 관찰은 중요한 토대를 이룬다. 그러면서도 “광대나물”을 “다 뜯지는 않고 한고랑은 꽃 보려고 남겨두었다”는 것과, “벼룩나물”을 보고 와서 “마당에 벼룩이 튈까봐 보기만” 한 것과, “흰민들레 씨앗”을 받아 “내년 봄에는 민들레밭을 일굴 것”이라는 ‘시적인 순간’은 화자의 의지가 발현되는 중요한 사건으로서 순환적 표상과 대별되는 지점으로 작용한다. 시적 화자인 ‘나’의 의지에 의해 변화될 현상들로부터 새로이 파생시키는 또 다른 봄의 시간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봄철 풀과 식욕과 관조를 통해 변화하는 세계를 노래하는 시인의 감수성은 “왕고들빼기 잎사귀 몇장 쌈 싸서 먹었다 봄이 다 가겠다”와 같은 생생불식으로 숙명이나 업보 같은 관념을 유쾌하게 “끝내준다”. 시간이라는 순환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시적 방법론이 이 시를 통해 가능해진 것이다.
물리학으로서의 시간, 엔트로피에 대해
왼손은 지팡이를 짚고
오른손은 아내의 손을 잡아야
내 산책은 시작된다
백 미터를 넘기기 힘들다
벤치가 없다면,
아무 데라도 걸터앉아야 한다
그렇다고 오른손과 왼손의 역할을
바꿔볼 수도 없다
오른발과 왼발을 바꿔 달아볼 수 없듯이
나아감과 물러섬을 단숨에 결정할 수 없듯이
균형이란 단순하면서도 이처럼 간단하지 않다
너무 많은 식사와 허기의
오래고 무의미한 되풀이를 지나오면서
기우뚱함과 갸웃거림을 거듭 반복해오면서,
균형이라는 낡은 전설을 무턱대고 믿어온 게 아니었던가
한 방향으로만 기울어 온 것이 아니었던가, 해찰한다
기름진 육식을 피하고 소박한 채식을 권하는
자연 식이요법 전문가의 권유는
저 도시의 수많은 외식 식당가를 돌고 돌아
오늘날
거울 앞에 선
내 앞에 도착했다
내 앞의 당신에게도 그것은 도착했다
균형이란,
얼마나 단순하고도 간단하지 않은 것인가
―엄원태, 「균형 잡힌 식단」, 『애지』, 2024 가을.
직선적 시간이든, 순환적 시간이든, 현상으로서 시간이든 결국 시간은 흐른다. 시간의 인과관계가 일방적일 수도 있고, 관계와 영향을 맺으며 상호적일 수도 있다. 의지에 따라 시간을 해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태까지 전통적 방식의 시간 인식과 종교적인 시간 이해는 현대물리학에 와서 어리둥절해진다. 아인슈타인 이후 현대물리학은 우리가 시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모든 직감이 틀렸다고 말한다. 시간은 ‘내가 어디에 있는가’와 ‘얼마나 멀리 있는가’와 ‘어떤 상황에 있는가’에 따라 다르게 흐른다는 것이다.
질량이 큰 물체에 가까이 갈수록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은 질량이 클수록 강한 중력장을 만들어 시공간을 휘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시공간을 상상하면 좋을 것 같다. 가령 높은 산에 있을수록 평지에 비해 중력의 영향을 덜 받으므로 더 많은 시간이 흐르게 되어 그만큼 더 빨리 늙게 된다. 마찬가지로 가만히 있는 물체보다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른다고 한다. 가만히 있는 사람이 더 빨리 늙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주는 무한대로 넓기 때문에 지구의 ‘지금’과 우주 반대편의 ‘지금’은 같은 ‘지금’이 될 수 없다고 한다. 빛은 우주에서 가장 빠른 것이어서 여기의 ‘지금’이 거기의 ‘지금’에 빛보다 빨리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할 때만 성립된다고나 할까. 그러니 물리학에서 바라보는 우주는 ‘하나의 시간’ 순으로 정립할 수 없는 복잡한 것이 된다.
뉴턴의 법칙, 맥스웰의 방정식,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 온 그 어떤 물리 방정식도 시간이 흘러야 한다고 규정하지 않지만, 물리학에서는 과거와 미래를 구분하는 중요한 법칙을 가지고 있다. ‘열은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이동할 수 없다’는 ‘열역학 제2 법칙’이 그것이다. 열이란 분자들이 일으키는 미세한 동요인데, 뜨거운 물체와 차가운 물체가 만나면 뜨거운 물체의 분자들이 차가운 물체의 분자들과 충돌하고 요동치면서 더 많은 분자들을 움직이게 만든다. 이런 방식으로 열이 전달되는데, 분자들이 뒤섞이면 무질서의 정도가 올라간다. 이를 ‘엔트로피가 높아진다’고 말한다. 즉, 세상은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 물리학에서의 시간이다. 정리된 것은 흩어지고, 유리잔은 깨지고, 빌딩은 무너진다. 과거와 미래를 구분 짓는 것은 ‘엔트로피’, 무질서의 정도이다. 여기까지가 현대 과학계가 밝혀내고 증명한 사실이다.
엄원태의 「균형 잡힌 식단」은 물리학적 시간의 ‘엔트로피’를 적용한 시로 볼 여지가 있는 작품이다. “단순하면서도 간단하지 않은” “균형”이야말로 물리학적 시간의 복잡성을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외식 식당가를 돌고 돌아/ 오늘날”의 시간이 “내 앞에 도착했”을 때, ‘나’의 현재는 “왼손은 지팡이를 짚고/ 오른손은 아내의 손을 잡아야” 하는 모습이다. “너무 많은 식사와 허기의/ 오래고 무의미한 되풀이를 지나오면서// 기우뚱함과 갸웃거림을 거듭 반복해오면서” “균형”을 유지했던 방향과 속도는 한낱 “낡은 전설”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백 미터를 넘기기 힘”든 “산책”에서 “아무 데라도 걸터앉아야” 하는 삶의 무게는 시적 화자를 무너뜨리는 중력장이 된다. ‘어디에 있는가’, ‘얼마나 멀리 왔나’,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기름진 육식을 피하고 소박한 채식을 권하는/ 자연 식이요법 전문가의 권유”는 “한 방향으로만 기울어 온” 삶의 속도를 붙잡거나 주저앉혀 건강한 타인들과는 다른 시간의 속도를 “해찰”하게 만든다.
“균형 잡힌 식단”은 정방향으로 살아왔다고 믿었던 삶의 시간이 허물어지는 ‘시적인 순간’의 결과값이다. 그뿐이다. 물리학에서의 시간은 현상으로서의 시간처럼 변화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 건강이 쇠약해지고 정신이 노쇠해지고 삶이 비루해져 가는 방향으로 엔트로피가 증가하듯이 ‘열은 뜨거운 물체에서 차가운 물체로만 이동한다’는 ‘열역학 제2 법칙’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간단하지 않은” 물리학적 절대 법칙은 일말의 “균형”을 소망하는 우리의 바람을 허용치 않는다. 물리학에서의 시간은 “오른발과 왼발을 바꿔 달아볼 수 없듯이/ 나아감과 물러섬을 단숨에 결정할 수 없듯이” 야멸찰 정도로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물리학으로서의 시간은 무질서도가 높아진 ‘나’라는 결과값을 통해 “내 앞의 당신에게도 그것은 도착했”다고 적용해 보는 ‘시적인 순간’이 전부다.
덧붙여, 재미있는 부분은 “거울 앞에 선/ 내 앞”이라는 표현은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연상시킨다는 데 있다. “머언 먼 젊의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과 “저 도시의 수많은 외식 식당가를 돌고 돌아/ 오늘날// 거울 앞에 선/ 내 앞”을 놓고 비교해 보면, “누님”과 “내”의 ‘시적인 순간’의 중력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시마다 일상과 사회와 정치와 역사가 다른 속도로, 다른 무게로, 다른 질감으로 느껴지는 것은 “얼마나 단순하고도 간단하지 않은 것인가”.
희망으로서의 시간, 하루의 크기에 대해
여보세요.
태어난 날-생일은 중요하지 않아요.
정작 중요한 건
태어난 뒤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그게 그렇다면
나는 한없이 부끄럽지요.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산 듯하니 말씀이에요.)
하루가 아니라 5분 10분 동안에도
인생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는데
하루 속에는 5분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습니까.
하루의 크기는 히말라야만큼 거대합니다.
그 속에는 온갖 운명이 들어 있고
우리의 뜻과 정신에 따라,
손놀림, 발놀림에 따라
무슨 보석을 캐낼 수도 있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새로 태어납니다.
늦은 때란 없지요.
―정현종, 「하루의 크기는 히말라야만큼 거대합니다」, 『문학과사회』, 2024 가을.
앞서 다룬 네 편의 시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인식했거나, 경험했거나, 관조했거나,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방식으로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답한 작품들이다. 거기에는 ‘오늘’, ‘하루’, ‘지금’과 같은 ‘시적인 순간’이 소환되어 있는데, 제가끔 심오한 방식으로 아름다운 시 세계를 잘 축조해 냈다고 할 수 있다. 분주한 ‘오늘’과 살벌한 ‘하루’와 절실한 ‘지금’에서 파생되고 비롯되는 개인적 면모가 보편적 모습으로 잘 빚어졌기 때문이다. 더불어 물질적 풍요를 갈망하다 나자빠진 현대인의 시간성을 여러 면모로 풍성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시적인 순간’들이 완성하고 지향하는 어떤 한 대목을 상상케 한다.
만약 ‘시간의 시학’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시간에 대한 모든 인식이 ‘시적인 순간’으로 자연스럽게 발현된 시가 있다면, 우리는 시 안에서 오랜 시간 머무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래 머물 수 없으면 자주 드나들면서 위로를 받고 위안을 삼을 것이다. 결국에는 또 하나의 고향으로서 ‘시적인 순간’으로 귀의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삶의 시간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희망의 언어가 사철 풍성하게 열려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현종의 「하루의 크기는 히말라야만큼 거대합니다」는 시적 해석이나 분석이 불필요한 만큼 간명한 시이다. 시간에 대한 시적 태도랄 것도 없고, 자못 심오한 발견도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 시는 읽을수록 위로와 위안을 받게 된다. 응원과 격려를 느끼게 된다. 종내에는 희망하게 된다. “하루의 크기는 히말라야만큼 거대”하다는 시인의 언사는 “우리는 하루하루 새로 태어”난다는 위로를 담고 있다. “우리의 뜻과 정신에 따라,/ 손놀림, 발놀림에 따라/ 무슨 보석을 캘 수도 있”다는 응원은 단도직입적이지만 명쾌해서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자명한 그 무엇을 다짐케 한다. 그것은 “정작 중요한 건/ 태어난 뒤 하루하루를/ 어떻게 사느냐”를 통해 하루하루 ‘시적인 순간’을 살아가고자 하는 다짐이기도 하고, “5분 10분 동안에도/ 인생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는데/ 하루 속에는 5분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습니까”를 통해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서 ‘시적인 순간’을 재차 깨달으며 살아갈 것임을 생각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좋은 시란 ‘시적 순간’의 ‘순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오랜 여운을 선사해 준다. “히말라야만큼 거대”한 희망으로서의 시간에는 일방적인 방향성도, 순환하는 숙명의 업보도, 관조하는 의지도, 논리와 증명으로서의 합리적인 시간도 모두 만년설로 쌓여 있다. 만년설은 만년 동안이나 ‘시적인 순간’이다. 그러니 “하루의 크기는 히말라야만큼 거대합니다”라는 문장 앞에 세상의 모든 시간성이 “한없이 부끄”러워질 일이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게 산 듯하니 말씀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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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준
약력
2018년 애지 등단. 애지 편집위원.
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출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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