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2007년 1월 해병대 1사단. 필자가 자대배치 후 처음으로 받았던 교육은, 당장 모든 선임들의 기수와 이름을 외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기수열외’였다. 많은 사람들이 지난 2011년 해병대 김상병 총기사건 당시 생소했던 이 단어를 입에 오르내렸다. 마치 근래 ‘임병장 사건’에서 ‘왕따’가 오르내렸듯이.
‘기수열외’는 신병에게 바로 세뇌교육을 가동해야 할 만큼 체계의 핵심개념이었는데, 일종의 ‘추방’이자, 가장 강력한 ‘경고’였다. 한 기수 차이가 하늘 땅 사이라는 위계사회 속에서 ‘기수열외자’들은 그야말로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죽었다고 봐도 다름없었다.
일말의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극한의 위계가 없으면 누가 전쟁터로 뛰어들 것이며, 그러라고 있는(줄 알았던) 해병대를 자원입대 했는데 당연했다. 당연했기에 견뎠다. 뭐 판단의 자유도 없었지만.
그런데, 차츰 맞는 횟수와 때리는 횟수가 비슷해질 즈음에, 이 체계가 온전히 당연하진 않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전쟁 없음’에서 비롯됐다. 병이던 부사관이던 장교던, 그 누구에게도 ‘전역’만이 있었지, ‘전쟁’은 없었다.
적이 오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 전쟁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 ‘위계질서’가 각자의 일을 하등 계급에게 떠넘기는데 이용됐다. 심지어 기본적인 ‘군인정신’까지도. (필자가 근무했던 곳은 방공포대. 얼추 90%의 초소근무 상황에서, 하급 근무자가 전방이 아닌 군기 순찰을 경계했다. 상급 근무자가 자빠져 자야 했기 때문에)
부대 내 모든 일의 총량은 이병(=아메바), 일병(신) 들에게 80% 부여됐고, 상병 15%, 병장 5%정도의 비율이 유지됐다. 모든 규칙과 규율과 위계, 구타 및 가혹행위는 전쟁이 아니라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했다.
“지옥 같은 일/이병”에서 “왕족 같은 상/병장”으로 나아가는 이 군생활 프로세스는, 아이러니하게도 군생활의 유일한 활력이자 희망이었다. 전쟁과 전투가 없는 휴전군대에서 유일한 성취는 '적의 목'이 아니라 '짬밥'과 그 대가로 얻은 ‘착취’와 ‘안락’이었다.
정리하자면 군대는 ‘전시를 가정하는 위계’, 이와 결탁된 ‘짬밥 절대가치주의’ 그리고 이 모두의 강력한 뒷배경인 ‘전쟁 없음’이 ‘삼위일체’되어 체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사이 사이에 ‘구타’, ‘가혹행위’, ‘기수열외’, ‘비윤리’, ‘군인정신 상실’ 등이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7년이 지나 2014년 6월. 군생활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임병장 총기사건이 사회에 던진 화두는 또 다시 ‘기수열외’. ‘관심병사’와 ‘왕따’였다. 수 많은 사람들이 ‘임병장’이 당한 부조리를 자신의 아픈 경험에 빗대며, 살해된 병사들의 순직처리 정당성에까지 의문을 제기했다. 물론, 사회에서 겪은 경험에 의한 공감대가 괴롭고 아플 순 있겠으나, 군대 내 왕따는 사회 내 왕따와 엄연히 다르게 보아야 한다.
미성숙으로 인한 '치기'나 '시기', 이유 없는 '악의'가 절대적인 이유가 아니라, 강력히 뿌리 박힌 체계 유지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힘든 거 다 알면서도 모두가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는 군생활, 피하려는 자가 묵인된다면 체계는 흔들린다. 누구 하나 하고 싶어서 하는 자가 없다. ‘왕따’ 없이는 학교가 안 돌아간다고 보면 된다.
아마 본보기를 삼고자 했을 것이다. “저런 취급 당하지 않게 참아내야 해.” 이걸 일이병들에게 심어줘야 군대가 돌아간다는 거 간부들도 다 안다. 간부들이 무지해서, 어려서, 싸이코라서 그런 게 아니다. 임병장도 알고 있었을 거다. 자기가 왜 왕따가 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안타깝다. 누군가를 죽일 만큼의 분노와, 그 분노를 생산할 수 밖에 없던 시스템, 그리고 5명의 어이없는 죽음. 어느 한 쪽으로 원인과 책임을 묻기가 주저스럽고 그저 안타까운 이유는, 이 비극이 ‘정신적 살인’, ‘육체적 살인’ 이전에 ‘시스템적 살인’인 걸 직접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방부가 직접 나선 ‘게임 탓’, ‘왕따 탓’, 죽인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폭탄 돌리기’는 분명 치졸했다. 게임 못하게 휴가군인 피시방 금지령도 내릴 것인가? 군대 내 왕따 없앤다고 GOP도 동기끼리 근무세우고, 이병들 열외시킬 것인가?
사건 이후 27일, 22사단에서는 또 한명의 관심병사가 자살을 선택했고, 바로 어제 31일에는 지난 4월 부대원들의 집단 가혹행위로 사망한 윤일병 사건 내역이 공개됐다. 임병장 사건과 달리 희생자가 ‘왕따 가해자’에서 ‘왕따 피해자’로 바뀌었고, 살인에 이른 가혹행위 증거들이 참혹하고 충격적이기에 보다 명쾌한 판단과 처벌이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수 많은 예비군들이 이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질까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유는,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 책임 지고 옷을 벗는다 해서 ‘휴전 중 징집제도’ 국가의 장병들이, 국방의 의무와 책임과 긍지를 불태울 수 없게 하는 문제의 핵심 본질들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수도 없이 반복되어왔다.
국방부 스스로 인정하고 개혁해야만 한다. 엄연한 국제 깡패 주적국을 둔 국방부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은, ‘왕따’당한 관심병사의 ‘인권’이기 이전에, ‘악마’가 되어버린 장병들의 ‘처벌’이기 이전에, ‘문책’당할 책임소재 ‘밥그릇’이기 이전에, 지금 이순간에도 ‘있던 애국심’과 ‘자긍심’마저 소멸하게 만드는 ‘분노 유발 시스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