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니발 전쟁의 서막
아직 로마가 북부 전선의 방어체제를 확립하지 못한 기원전 221년, 카르타고가 지배하고 있는 에스파냐에서는 총독 하스드루발이 살해되었다. 하인으로 부리고 있던 갈리아인이 하스드루발에게 모욕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주인을 죽였다고 하며 그 뒤를 이은 사위 스드루발은 한니발이 성장할 때까지의 공백 기간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한니발은 26세가 되던 해에 총독으로 취임한다. 전권을 장악한 한니발은 이지역 원주민들을 제압해 나가는 한편 에스파냐 동해안에 있는 항구도시인 사군토를 공략했다. 한니발의 공격을 받는 사군토 주민들은 급히 동맹국 로마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로마인은 동맹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민족이었지만 먼 에스파냐까지 원군을 파병할 여유가 없었다.
사군토 유적지
로마는 이 문제를 외교로 해결하기 위해 원로원 의원 두 명을 사군토에 사절로 보냈으나 28세가 된 젊은이는 애매한 소리만 할 뿐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로마 사절들이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살기등등한 병사들한테서 신변을 지켜줄 자신이 없다고 은근히 협박까지 하는 형편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로마 사절은 사군토를 떠나 카르타고 본국으로 갔다. 그런데 한니발의 편지가 그들을 앞질러 도착해 있었다. 카르타고 본국에서도 확답을 얻지 못한 두 사절은 로마도 돌아왔다. 원로원은 다시 다섯 명의 사절을 카르타고에 보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에스파냐 식민지 경영에 성공하여 유복해진 카르타고의 유력자들은 한니발에게 사군토 공격을 중지시키기는 커녕, 한니발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는 로마인들의 요청을 깨끗이 묵살해 버렸다. '국내파'의 리더인 한논만이 불길한 예감을 품고, 로마의 명예를 손상시킬 기회가 생겼다고 기뻐 날뛰는 동포들의 눈을 뜨게 하려고 애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니발 바르카스
'성품이 격렬한 그 젊은이가 바르카스 가문에 속해 있다는 것이 이중으로 위험하다. 로마의 동맹도시 사군토를 공격하는 것은 또다시 로마와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한니발에게 사군토에서 손을 떼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논의 말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카르타고 정부는 한니발이 사군토를 공격한 것은 사군토 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이라고 로마 사절단에게 말했다. 빤한 거짓말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로마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군토에서 병력을 철수하던가, 아니면 로마와 전쟁을 하던가, 양자택일을 하라고 카르타고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카르타고 정부의 회답은 '사군토에서 병력을 철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실 로마인뿐만이 아니라 카르타고인도 이런 작은 사건이 제2차 포에니 전쟁으로 이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사군토 공략전은 계속되고 있었고, 전쟁을 시작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로마의 민회가 결정해야 할 몫으로 남았다.
사절단이 귀국할 즈음, 사군토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다. 기원전 219년도 어느덧 가을로 접어들어 있었다. 사군토는 무려 8개월 동안 버틴 끝에 함락된 것이다. 살아남은 주민은 모두 노예가 되었고, 이들을 포함한 전리품을 팔아서 얻은 이익은 3등분되어, 일부는 병사들에게 분배되고 일부는 카르타고 본국에 보내지고 나머지 3분의 1은 한니발의 전쟁 경비로 남겨졌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 민회는 카르타고에 대한 선전포고를 가결했다.
사실 한니발이 원한 것은 로마가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고 협정 조항에 넣는 것을 잊어버렸을 만큼 작은 도시인 사군토가 아니라, 로마의 선전포고였으며 겨울을 나고 있는 한니발에게 기다리던 소식이 전해졌다. 로마가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로마인이 '한니발 전쟁'이라고 부르게 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이 전쟁의 목적과 전쟁터가 어디가 될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서른도 채 되지 않은 한 젊은이 뿐이었다.
2. 알프스를 넘어...
기원전 218년 5월, 29세의 한니발은 준비를 끝낸 군대를 이끌고 카르타헤나를 떠났다. 한니발과 그의 군대가 에브로 강을 건너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현재의 프랑스인 갈리아 땅에 들어가 론 강을 건너 프랑스를 횡단한 다음,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한 것이다. 한니발이 대군을 이끌고 코끼리 부대까지 데리고 알프스를 넘은 것이야말로 그후 2천 200년 동안 역사에 흥미가 없는 사람도 한번쯤은 들은 적이 있는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는 왜 이 험난한 길을 선택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니발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처들어 가자니 카르타고와 시칠리아 사이의 제해권은 로마 해군이 장악한 상태라 불가능하고...그렇다면 동쪽의 아드리아 해에서 쳐들어가는 것은 어떨까? 하지만 에스파냐에서 아드리아 해까지는 우선 거리가 너무 멀었다. 다행히 성공하여 아드리아 해에 침입한다고 쳐도, 로마 해군에게 저지당할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한니발로서도 이꼴은 당하고 싶지 않았던 게지...
만일 이탈리아 서쪽에서 진격한다 하더라도 로마의 속주인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거쳐야 하며 규모가 적긴 하더라도 로마 육군과 해군을 상대해야 했다. 수백 척에 달하는 대규모 수송선단이 로마의 방해를 받지 않고 무사히 군대를 실어나르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다. 즉 기원전 218년의 시점에서 로마의 방어선은 동쪽과 서쪽과 남쪽이 모두 철벽이었던 셈이다다. 남은 방법은 북쪽에서 쳐들어가는 것뿐이지만, 이 방면에도 넓은 프랑스를 횡단하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야 하는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그 일대의 원주민인 갈리아인은 로마인의 친구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카르타고인의 친구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 루트에는 이점도 있었다. 로마가 포 강까지 방어선을 확장했지만, 아직은 확고한 방어선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피아첸차와 크레모나에도 로마가 식민지를 건설했지만, 그 도시와 기존 방어선을 잇는 가도도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또한 그 일대에 살고 있는 갈리아인도 일단은 로마와 강화를 맺었지만, 전투에서 졌기 때문에 강화를 맺었을 뿐이었다.
한니발은 이 이탈리아 북부에서 로마의 방어선을 돌파할 가능성을 발견했다. 한니발의 '알프스 넘기'는 결국 냉철한 계산을 토대로 하여 실행한 모험이었다. 한니발이 카르타헤나를 떠날 때 이끌고 있던 병력은 보병 9만 명에 기병 1만 2천명, 그리고 코끼리 37마리였다. 그밖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본국을 수비하기 위해 2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에스파냐를 수비하기 위해 보병 1만 2천 명과, 기병 3천 명, 코끼리 21마리를 남겨놓았다. 그에게는 카르타고 본국보다 오히려 에스파냐가 모국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에스파냐의 방위는 동생인 하스드루발에게 맡기는 한편, 막내동생 마고네는 큰형 한니발이 이끄는 원정대와 동행했다. 한니발은 행군하는 것을 보고 정예 병사를 선발했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쪽으로 들어갔을때, 그의 병력은 보병 5만 명에 기병 9천 명, 그리고 코끼리 37마리가 되어 있었다.
기원전 200년경에 제작된 '죽어가는 갈리아인' 대리석상
한니발군은 프랑스에 들어간 뒤에도 어떤 부족은 돈으로 회유하고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힘으로 억누르면서, 수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있는 갈리아 지방을 돌파했다. 한니발은 그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로마가 군대를 보내오리라는 것도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군과 마주치지 않고, 마르세유와 그 부근의 그리슨 한테도 눈치채이지 않고 론 강을 건널 수 있는 지점을 찾았다. 회유한 갈리아인한테서 얻은 정보와 여느 때처럼 파상적으로 내보낸 척후병이 가져오는 정보를 토대로 도강지점이 결정되었다. 강 속에 산재하는 모래톱 덕분에 물의 흐름이 완만해져 코끼리까지 포함된 대군이 건너기에 좋은 지점이었는데 오늘날의 발랑스 근처로 여겨진다. 이곳은 마르세이유에서 론 강 상류로 150킬로미터나 거슬러 올라간 지점이기 때문에 로마군과 마주칠 위험도 거의 없었다. 하지만 5만 명의 대군이 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수십 차례로 나누어 건너야만 했다. 문제는 병력의 일부만 강을 건넌 시점에서 론 강 동족 연안에 있는 갈리아인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뗏목을 만들기 위해 나무 베는 작업을 시작하자마자 이를 알아차린 갈리아인들이 맞은편 연안에 나타나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이는 일까지 일어났다.
한니발은 부하 한 명에게 기병대를 주어 40킬로미터 상류로 보냈다. 기병뿐이라면 강을 건너기도 쉽다. 기병대는 40킬로미터 상류에서 론 강을 건넌 다음, 그 일대의 갈리아인 마을을 모두 습격하여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동안 나머지 병력은 모두 뗏목 만들기에 전념했다. 모래톱이 산재하는 강 맞은편에서 불길과 연기가 치솟은 것은 이 양동작전이 끝났다는 신호였다. 이미 맞은편에서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던 갈리아인들도 썰물처럼 모습을 감췄다. 마을이 불타오르자 강 맞은편에서 카르타고군을 향해 칼이나 휘두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코끼리 도강 작전
5만 명의 병력과 밀, 짐수레와 코끼리떼의 '론 강' 도강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모래톱에만 의존하지 않고 도강지점의 상류와 하류에는 물의 흐름을 완만하게 하기 위한 울타리도 세웠다. 밧줄도 몇 가닥이나 강을 가로질러 강 양쪽의 나무에 고정시켰다. 그래도 공포에 질린 병사와 코끼리는 발을 헛디디거나 뗏목을 잘못 조종하여, 울타리를 부수고 하류로 사라지기도 했다. 갈리아인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도강을 끝낼 수는 있었지만, 론 강을 건넌 뒤 한니발에게 남은 병력은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4만 6천 명이었다고 한다. 피레네 산맥을 넘었을 때의 병력이 5만 9천 명이니까, 갈리아에 들어온 뒤부터 론 강을 건널 때까지 1만 3천 명을 잃은 셈이다. 하지만 이 손실도 한니발의 계산에 다 들어 있었다.
29세의 젊은이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하는 론 강 도강을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끝내기 위해, 후위 기병대를 론 강 하류로 파견하여 순찰을 돌게 했다. 그 500기의 기병대가 한니발을 추적하고 있던 집정관 코르넬리우스 소속의 로마 기병대와 마주쳤다. 기병대끼리 전투가 벌어졌다. 마르세이유 지역에서 펼쳐진 한니발과 로마군의 첫 번째 전투였다. 그 결과 로마는 300기 가운데 140기를 잃었고, 카르타고는 200기를 잃었다. 이것으로 로마군은 비로소 한니발의 행방을 포착할 수 있었다.
한니발의 원정군은 로마군의 집요한 추적을 따돌리고 갈리아인들과는 때로는 싸움을, 때로는 회유를 거듭하며 전진을 계속했다. 그런데 산 속에서는 첫눈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갈리아인들은 처음 보는 코끼리 때문에 겁을 먹었는지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오는 일은 없었지만, 남국 태생인 코끼리에게도 알프스 매서운 날씨는 기분좋을리가 없었다. 코끼리들은 걸핏하면 난폭해졌고, 코끼리를 다루는 이들도 눈발이 흩날리는 좁은 계속을 통과하기는 처음이었다. 길은 낭떠러지를 따라 구불구불 나 있는 좁은 길밖에 없었다. 여기서 한 발짝만 헛디디면 골짜기 바닥으로 떨어진다.
한니발의 알프스 원정
코끼리들은 동물의 직감으로 위험한 장소에 오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보병들까지 동원해서 뒤에서 떠밀어 억지로 행군을 계속했지만 추락의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발을 헛디딘 코끼리나 짐수레가 사람을 길동무로 삼아 골짜기 바닥으로 사라져갔다. 단말마의 비명이 구름낀 하늘을 뚫고 들려올 때마다 저 뒤에서 따라오는 기병들의 마음까지 우울해졌다.
모든 병사들이 편히 쉴 수 있는 숙영지 건설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산악 민족이 사용하는 피난처나 요새를 만나면, 신들의 은총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천막을 칠 곳조차 찾지 못해서 천막을 몸에 둘둘 감고 바람과 추위를 견디는 밤이 허다했다. 모닥불을 피워도 추위는 막을 수 없었다. 총사령관 한니발도 일개 용병과 마찬가지로 꽁꽁 얼어붙은 식사를 목구멍에 밀어넣고, 일개 용병과 마찬가지로 낭떠러지아래서 선잠을 잤다. 하지만 그는 일개 병졸이라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여러가지 일을 생각하고, 상황에 따른 판단을 즉석에서 내릴 필요가 있었다.
산을 오르기 시작한 지 아흐레째에 고갯마루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사람도 말도 코끼리도 모두 기진맥진해 있었다. 고갯마루 근처에 군대 전체가 쉴 만한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29세의 총사령관은 병사들을 전부 집합시키고, 동쪽 방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쪽으로는 저 멀리 이탈리아가 푸른 하늘 밑에 희미하게 보였다.
'저곳이 이탈리아다. 이탈리아에 들어가기만 하면, 로마 성문 앞에 선 거나 마찬가지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내리막길뿐이다. 알프스를 다 넘은 뒤에 한두 번만 전투를 치르면, 우리는 이탈리아 전체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병사들의 표정에서는 극도로 쌓인 피로와 불만이 사라져가는 것 같았다. 이 역사적 사실을 공부했는지, 그보다 2천 년 뒤에 이탈리아로 쳐들어간 나폴레옹은 알프스 고개 위에서 병사들에게 이와 똑같은 취지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산을 내려가는 것은 올라가기보다 더 어려웠다. 갈리아인은 한니발이 알프스를 통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더 이상 그들을 공격하지 않았지만, 알프스 산 속의 계절은 이제 완전히 겨울로 접어들었다. 추위는 날이 갈수록 혹독해지고, 살을 찌르는 바람의 고통은 화살에 맞은 고통과 맞먹을 정도였다. 온종일 내린 눈은 날이 밝고 보면 밤새 얼음으로 변해 있다. 얼어붙은 산길은 코끼리뿐만 아니라 병사들에게도 지옥과 같았다. 앞서가는 병사들이 지표면의 얼음을 떼어낼 때까지 부대 전체가 멈춰서서 기다려야 할 때도 많았다. 얼어붙은 눈 위에 다시 눈이 쌓인 곳은 특히 위험했다. 별 생각없이 발을 내디디면, 그대로 미끄러져 버렸다.
폭풍속의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 군대 / 터너, 1812년작
눈사태를 만날 위험도 많았다. 한번은 눈사태로 길이 완전히 파묻혀, 그 길을 뚫느라 온종일 발이 묶인 적도 있었다. 사람이나 말이라면 지나갈 수 있지만 짐수레나 코끼리가 통과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낭떠러지의 바위까지 깎아 길을 넓히기도 했다. 산에 올라갈 때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추위와 피로를 견디지 못해 산속에서 얼어죽거나 발을 헛디뎌 골짜기 아래로 사라졌다. 코끼리 여러 마리도 병사들과 같은 운명을 밟았다.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데 걸린 시간은 보름이었다고 한다. 뒷날 한니발 자신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땅에 내려선 시점에서 그의 병력은 보병 2만 명과 기병 6천 명, 합계 2만 6천 명이었다. 론 강을 건넌 시점에서는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4만 6천 명이었으니까, 알프스를 넘으면서 치른 희생이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무려 2만 명이나 된 셈이다. 피레네 산맥을 넘은 시점과 비교하면, 뒤에 남기고 온 시체는 3만 3천명에 이른다. 일찍이 아무도 이룩하지 못한 위업이긴 했지만, 치른 희생도 엄청난 규모였다.
하지만 29세의 젊은이는 그것까지도 다 계산에 넣고 있었던 게 아닐까. 로마인의 본거지인 이탈리아를 전쟁터로 하려면, 아무리 희생이 크더라도 알프스를 넘어 북쪽에서 쳐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한니발의 군대가 카르타헤나를 떠난 뒤 이탈리아 땅에 들어갈때까지 총 넉 달이 걸렸다. 알프스를 내려온 곳에 펼쳐져 있는 골짜기에서 한니발은 군대 전체에게 보름 동안의 휴식을 주었다.
한니발 흉상
병사들이 피로를 씻고 있는 동안 한니발이 한 일은 사실 이 일대의 갈리아인을 회유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회유는 그의 병력이 무사히 통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니발 군대에 가담하여 로마와 싸울 용병을 모으기 위해서였다. 국방에 용병을 쓰는 것이 전통인 카르타고에는 전부터 갈리아인 용병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알프스 이남에 사는 갈리아인이 모두 한니발에게 기울어진 것은 아니었다. 갈리아 민족을 가까이에서 관찰한 한니발은 그들을 휘하로 끌어들이려면 로마군과 싸워서 이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갈리아인은 많은 부족으로 갈라져 부족들 사이에서도 싸우는 일이 많았고, 전쟁터에서도 폭발력은 있지만 지구력이 떨어지는 것이 특징이 있었다. 이런 빈약한 조직력은 그들의 사회 구성에도 나타났고, 그때문에 야만족이나 비문명인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한니발도 갈리아 민족의 이런 특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인을 동맹자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동맹은 맺었지만, 실제로는 용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즉 로마인이 동맹국을 의지하고 있었던 것처럼 갈리아인에게 의지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비주력 부대도 반드시 필요했다.
폭발력은 있지만 지구력이 떨어지는 갈리아인의 전형을 보여주는 K-1 파이터 제롬.
갈리아인은 한니발의 속셈은 정확히 몰랐지만 로마인을 증오했기 때문에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한니발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알프스를 넘는 데 성공한 지 한 달도 지나기 전에, 한니발 밑에 모여든 갈리아인 병력은 1만 명을 넘어섰다. 2만 6천이 3만 6천으로 늘어난 셈이다. 게다가 당시의 갈리아는 아프리카의 누미디아와 더불어 기병의 산지이기도 했다.
그동안 로마 쪽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에서 쳐들어온 적을 맞아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코르넬리우스는 자기 군대만 가지고 한니발과 싸움을 시작할 마음은 없었다. 론 강을 건너는 방식으로 보나,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것과는 달리 알프스를 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나, 이 모든 일을 예상 밖으로 짧은 기간에 해치워버린 수완으로 보아도, 코르넬리우스는 이제 더 이상 한니발을 단순한 애숭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한니발 군대는 갈리아인 병력까지 추가하여 계속 증강되고 있다고 했다. 2개 군단으로는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동료 집정관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2개 군단이 당초에 파견되었던 시칠리아를 지나 북상하고 있었다. 코르넬리우스는 아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계절도 11월에 들어서 있었다. 여느 때라면 겨울철의 자연 휴전기였겠지만 상대는 결코 정상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3. 타치노 - 제1회전
지금까지 로마인이 만난 적들은 겨울이 되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휴전했기 때문에, 로마군은 소수의 수비대만 남기고, 로마 시민병들은 로마로 돌아가 민회에 참석하고, 동맹국에서 온 병사들도 각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의 적은 코끼리까지 데리고 알프스를 넘는 등 비상식적인 일을 해치운 한니발 일당이었다. 절대 상식이 통할 위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로마의 2개 군단은 최전선 기지가 된 피아첸차에 그대로 묶이게 되었다. 게다가 피아첸차는 아직 충분히 요새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겨울을 나야 했다.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여주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병사들을 집합시켜놓고, 그 앞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전사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마르세유까지 나와 함께 갔던 병사들이라면, 나는 아무것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라면 로마군과 카르타고군의 첫 대결이 로마 쪽의 대승으로 끝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마르세이유에서 벌어진 한니발군과의 첫 번째 전투는 기병끼리의 작은 충돌에 불과했고, 아군 전사자는 140기인데 적의 손실은 200기니까 대승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전과였지만, 코르넬리우스의 목적은 한니발과 처음 대면하는 부하들을 고무하기 위해 뻥을 살짝 튀겨야만 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때의 눈부신 전과를 직접 보지 못했다. 그래서 한마디 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여러분을 집합시켰다. 여러분은 새로운 적과 싸운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우리가 23년 전에 무찌른 패배자의 잔당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이겨서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얻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대등한 전사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승자와 패자가 다시 맞붙는 싸움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게다가 그들은 알프스를 넘어오느라 이미 전력의 3분의 2를 잃어버렸다. 그뿐 아니라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몸은 온통 오물투성이가 되고, 암석에 다친 병사들이다. 손발은 꽁꽁 얼고, 근육도 경직되고, 모든 병사와 말이 인간이나 말이라기보다는 의지도 없이 떠도는 유령에 더 가깝다. 23년 사이에 카르타고인이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 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우리가 에가디 해전에서 무찌르고 시칠리아에서 쫓아낸 바로 그 카르타고 인이다. 그들이 이번에는 우리 땅에 침입했다. 따라서 이번 전쟁은 시칠리아의 패권을 둘러싼 싸움이 아니다. 우리의 국토 이탈리아와 우리 각자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싸우느냐가 우리 국토와 우리 가족의 운명을 결정한다. 신들이 우리 모두를 보호해 주시기를!"
카르타고군의 숙영지에서도 한니발이 병사를 모아놓고 사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이 젊은이는 로마의 명문중에서도 명문인 코르넬리우스와는 다른 방식을 취했다. 한니발은 마치 구경거리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모인 병사들을 둥글게 둘러서게 했다. 그리고는 알프스를 넘으면서 포로로 잡은 갈리아인들을 그 한가운데로 끌어냈다. 갈리아인들은 무거운 사슬로 굴비 두름처럼 묶여 있고, 붙잡힌 뒤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비쩍 마르고, 거의 벌거벗은 꼴로 혹한의 산 속을 끌려왔기 때문에 동상에 걸려서 서있기조차 어려운 상태였다. 한니발은 부하에게 명령하여 그들의 사슬을 풀어주고, 통역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하는 자에게는 결투를 허락하겠다. 이긴 자에게는 무기와 말을 주고 자유롭게 풀어주겠다.'
가련한 갈리아 포로들 모두가 결투를 희망했다. 그들 사이에 애처로운 결투가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진행될수록 결투하는 갈리아인과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 병사들은 똑같은 감정을 품게 되었다. 이긴 자에게도 박수를 보냈지만, 죽음을 맞이해서 가혹한 삶을 끝낸 이에게는 승자보다 더 많은 박수를 보냈던 것이다. 이 결투가 끝났을때, 29세의 장군은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방금 본 갈리아인과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싸운다면,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방금 본 것은 구경거리가 아니다. 너희들의 현재 실정을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의 좌우는 두 개의 바다로 막혀 있다. 여기서 도망치려 해도 배가 없다. 눈앞에 있는 것은 포 강이다. 론 강보다 크고 물살이 세다. 등 뒤에는 알프스가 우뚝 솟아 있다. 엄청난 고생 끝에 겨우 넘어온 산맥에 다시 도전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너희에게는 로마군과의 첫 전투에서 이기느냐, 아니면 패하여 죽느냐 하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다. 너희가 승자가 되면, 불사신조차도 바랄 수 없는 보수를 손에 넣게 될 것이다. 로마군에게 이기기만 하면,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는 물론이고 로마인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너희 것이 된다. 로마인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땅의 지배자는 너희가 된다. 휴식은 충분히 취했을 것이다. 앞으로의 고생은 에스파냐를 떠난 뒤 알프스를 넘을 때까지의 고생과는 다르다. 똑같은 고생이라도 보수가 기다리는 고생이 될 것이다. 적장이 누군지는 나도 모른다. 적장이 누구든, 전쟁터에서 태어나 숙영지에서 자라고 용장 하밀카르를 아버지로 둔 나와는 비교할 수 없다. 대군을 이끌고 에스파냐에서 이탈리아까지 먼 길을 온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장군은 로마에 아무도 없다. 이 전쟁은 반드시 이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너희들에게는 카르타고든 에스파냐든 원하는 나라의 땅을 주겠다. 조세는 자식대까지 면제다. 땅보다 금화를 원하는 자에게는 응분의 금화를 주겠다. 카르타고 시민권을 원하는 자에게는 그것도 주겠다.'
한니발은 노예들에게도 약속했다. 싸움에 참가하면 자유민으로 만들어주겠노라고. 그들은 병사로 참전한 상전들을 따라 이곳까지 온 처지였다. 하인 노릇을 하던 노예가 자유민이 되어도 불편하지 않도록, 병사들에게는 한 사람당 두 명의 로마인을 노예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총사령관의 강력한 자신감은 병사들에게도 전해져, 그들은 한니발의 연설을 우렁찬 함성으로 매듭지었다. 겨울철인데도 전투를 강행할 속셈이었던 한니발은 로마의 2개 군단이 피아첸차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군대 전체를 이끌고 숙영지를 떠났다. 행군 방향은 물론 피아첸차가 있는 동쪽이었다. 피아첸차에 있는 집정관 코르넬리우스는 이 시기에 전쟁을 시작할 마음은 없었지만, 아군이 도착할 때까지 적정 시찰 정도는 끝내두고 싶었다. 그는 기병 전원과 소수의 경무장 보병만 거느리고 피아첸차를 떠나 서쪽으로 전진을 계속해서 한니발의 군대와 마주치게 된다.
티치노 전투
한니발은 접근하면서 진형을 정비했다. 기병으로는 가장 우수한 누미디아 출신 기병을 배치하고, 자신이 몸소 지휘를 맡았다. 반대로 로마 쪽에서는 신뢰할 수 있는 로마와 동맹국 기병이 본대를 구성하고, 그 전위에 로마와 강화를 맺은 부족 가운데서 참전한 갈리아인 기병을 배치했다. 전황은 처음 얼마 동안은 호각지세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카르타고군의 양쪽 날개를 맡은 누미디아 기병의 전투력은 대단해서, 그들과 처음 격돌한 갈리아 기병이 순식간에 희생의 제물로 바쳐졌다. 로마군의 전위를 격파한 누미디아 기병은 선전하고 있는 로마 본대까지 육박했다. 로마 기병은 적에게 포위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도망치다가 집정관 주위까지 허술해졌다. 상처를 입고 적병에게 포위된 집정관을 구해낸 것은 그날 처음 출전한 젊은이었다.
로마 기병은 중상을 입은 집정관을 보호하면서 한 무더기가 되어 패주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전쟁터에 남아 있다가는 수적으로나 전투력으로도 우세한 카르타고군에게 전멸당할 게 뻔했다. 경무장 보병을 걱정할 여유는 없었다. 보병들 가운데 일부는 풀숲으로 달아났지만, 갓 만든 다리를 파괴하는 임무를 맡은 병사들은 다리를 건넌 기병이 동쪽으로 도망친 뒤에 파괴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6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들은 한니발에게 귀중한 정보원이 되었다. 한니발은 다 잡은 로마 집정관을 아슬아슬하게 놓쳐버린 것이 아쉬웠겠지만 그보다는 집정관을 구해낸 젊은 기사를 놓친 것을 더 애석하게 여겨야 했다. 집정관의 아들인 그 병사는 그해 나이 17세. 아버지와 같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앞으로 16년 뒤에는 로마군을 이끌고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과 대결하게 된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피아첸차까지 도망쳐 돌아온 코르넬리우스는 중상으로 괴로워하면서도, 적의 전력은 정확히 관찰하고 있었다. 카르타고 기병의 전력이 월등히 우세한 것으로 판명된 이상, 평원에서 숙영하는 것은 절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갓 건설한 피아첸차의 방비는 아직 허술해서, 휘하의 2개 군단과 시칠리아에서 도착할 2개 군단을 합한 4개 군단의 숙영지로는 안전하지도 않고 너무 좁았다.
4. 트레비아 - 제2회전
피아첸차 근처에서 포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 가운데 트레비아 강이 있다. 알프스에서 발원하는 티치노 강은 북쪽에서 포 강으로 흘러들지만,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하는 트레비아 강은 같은 지류라도 남쪽에서 포 강으로 흘러든다. 트레비아 강이 흐르는 일대는 아펜니노 산맥에 더 가까이 있기 때문에, 기병 활동에 불리한 울퉁불퉁한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코르넬리우스는 이 일대에서도 가장 높고 넓은 언덕 위에 견고한 요새를 세웠다. 4개 군단을 위한 요새니까, 성채라고 하는 편이 어울리는 숙영지다. 그는 여기서 겨울을 날 생각이었다.
한편 한니발은 이대로 겨울을 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포로를 심문하여 얻은 정보로, 가까운 카스테조 마을이 단순한 촌락이 아니라 로마군의 군량 저장소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보병과 코끼리 부대에게 동쪽으로 진군하라고 명령한 다음, 기병만 이끌고 이 마을을 습격했다. 결국 로마군의 군량저장소는 카르타고군의 군량 저장소로 바뀌었다. 주변의 갈리아인 마을을 약탈하여 식량을 확보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한니발이 갈리아인 회유작전을 펴기가 더 쉬워졌다. 또한 티치노에서 기병전을 벌인 결과도 갈리아인에게 영향을 주어, 갈리아인의 참전 신청은 계속 늘어났다. 그래도 이탈리아 북부 전역에 사는 갈리아인의 절반 정도만이 카르타고 쪽에 붙었을 뿐이었다. 많은 갈리아인은 아직도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한니발은 해가 바뀌기 전에 다시 한 번 싸움을 벌여, 갈리아인의 동향을 결정적으로 카르타고 쪽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그는 충분한 군량을 휴대한 카르타고군에게 다시 동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한편 셈프로니우스가 이끄는 2개 군단이 이탈리아를 남쪽에서 북쪽까지 행군하여, 드디어 코르넬리우스가 기다리는 숙영지에 도착했다. 그들은 시칠리아와 그 주변 해역을 방위하기 위해 모든 군선을 남겨놓고 왔기 때문에 해로를 따라 북상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두 다리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트레비아 강
병사들이 피아첸차에서 남쪽으로 20킬로미터 떨어진 숙영지에서 피로를 풀고 있는 동안에도 두 집정관은 토의를 거듭했다. 코르넬리우스의 생각은 이대로 겨울을 나자는 것이었다. 숙영지는 적도 쉽사리 쳐들어올 수 없는 요충지에 세워져 있다. 군량 저장소인 카스테조가 적의 수중에 들어간 것은 뼈아픈 손실이었지만, 피아첸차 동쪽의 갈리아인은 아직 로마의 동맹자였다. '로마 연합'의 동맹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해도, 리미니에서 피아첸차까지는 줄곧 평야가 이어져 있으니까 보급도 용이했다. 게다가 계절도 한겨울이었다. 이지방의 12월은 알프스에서 불어오는 바람 때문에 추위가 혹심했지만 하다. 물살이 너무 빨라서 강이 얼어붙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집정관 셈프로니우스의 생각은 달랐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는 평민 출신이었다. 이 시대의 평민 출신 집정관 중에는 강경한 사람이 많았다. 개인적인 명예심이나 출세욕에 사로잡혀 그러는 건 아니었다. 호민관이 평민의 대표였던 시대보다, 평민 출신이 귀족을 포함한 로마 시민 전체의 대표인 집정관에 선출된 시대에는 자기가 평민계급의 대표자라는 것을 더 강렬하게 의식한다. 자기 출신 계급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기 뒤를 이을 평민계급 출신 집정관을 위해서라도 분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필요 이상으로 오버하는 경우도 많았다. 정보 수집에 열심인 한니발은 셈프로니우스의 심리까지 파악했던 모양이다. 셈프로니우스라면 도발에 응할 거라고 생각했다. 코르넬리우스가 중상을 입은 것도 한니발은 알고 있었다. 집정관 두 사람이 로마군을 이끌고 있는 경우에는 두 사람이 하루씩 교대로 지휘를 맡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한 사람이 중상을 입으면 나머지 한 사람이 계속 지휘를 맡는다.
한니발은 적장으로 생각해야 할 상대는 셈프로니우스 뿐이라고 판단했다. 29세의 젊은이는 대낮에 당당히 트레비아 강둑 언저리까지 군대를 전진시켰다. 그는 거기에 진영을 설치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있긴 하지만, 로마군 진영에서 7.5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다. 게다가 군량을 조달할 필요도 없었지만 자주 소대를 내보내 부근을 약탈하며 돌아다녔다. 로마군 진영 안에서는 날이 갈수록 셈프로니우스의 발언권이 강해지고, 코르넬리우스의 설득은 힘을 잃어갔다.
기원전 218년 12월 말, 1년중에서도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동짓날 전날, 한니발은 막내동생 마고네를 데리고 주변 지형을 조사하러 나갔다. 트레비아 강 서안을 특히 꼼꼼하게 조사한 뒤, 관목숲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동생에게 말했다.
'저곳이 네가 있을 곳이다. 보병 1천과 기병 1천을 선발하여 내일 동이 트기 전에 숙영지를 떠나라. 그리고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 저 숲속에 숨어 있거라.'
숙영지로 돌아온 한니발은 모든 병사에게 충분한 식사를 주도록 명령하고, 이튿날 아침에는 동이 트기 전에 아침식사를 끝내고 모닥불로 따뜻해진 몸에 기름을 발라두라고 명령했다. 양력으로 12월 22일이 되는 그날 아침은 여느 때보다 더한층 추위가 혹독하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처럼 잔뜩 찌푸린 날씨였다. 로마 병사들은 아직 동이 트기도 전에 진영 밖에서 들리는 때아닌 소음에 놀라 일어났다. 적군 기병이 습격해온 것이다. 집정관 셈프로니우스는 쳐들어온 적군이 기병뿐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당장 휘하 기병 전원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다. 기병들은 밥 먹을 시간도 없이 군장을 갖추자마자 곧바로 출격했다. 보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방한용 털옷을 짐꾸러미에서 꺼낼 겨를도 없이, 짧은 옷 위에 황급히 갑옷을 걸치고, 칼과 방패만 움켜쥔 채 진영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보병들이 목격한 것은 아군 기병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는 적이었다. 티치노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셈프로니우스와 중무장 보병들은 카르타고 기병의 주력인 누미디아 기병과 대결하는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얼핏 듣기론 누미디아 기병이 로마 기병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가졌다고 들었는데, 누미디아 기병이 로마 기병에게 밀려 퇴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적을 섬멸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은 셈프로니우스만이 아니었다. 중무장 보병들도 분발했고 기병들도 티치노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하려는 마음으로 불타올랐다. 이들은 사령관의 추격 명령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기병을 선두로 해서 퇴각하는 적을 쫓아 눈사태처럼 우르르 강을 건넜다. 하지만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진형을 갖춘 카르타고군의 전체 병력이었다.
골짜기를 흐르는 시내라고는 하지만, 비가 내려 물이 불어난 트레비아 강을 건너온 로마 병사들은 가슴까지 흠뻑 젖은 상태였다. 게다가 뱃속은 텅 비어 있었다. 반대로 한니발의 병사들은 이미 배를 충분히 채운데다, 모닥불로 덮인 몸에는 기름까지 발라서 추위와 비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갖추었다. 그러나 집정관 셈프로니우스에게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총사령관 곁에서 황급히 흩어진 장교들이 로마군의 진형을 갖추었다.
하지만 이 진형은 티치노에서의 쓰라린 경험을 전혀 살리지 않은 것이었다. 로마군의 병력은 로마와 동맹도시에서 온 병사를 합하여 4만명, 그가운데 기병은 4천도 채 안되었다. 한편, 한니발 군대는 에스파냐에서 데려온 2만 6천에 갈리아 병력을 합하여 3만 8천이다. 그 가운데 기병은 갈리아 기병의 참전으로 1만에 달한다. 보병 전력은 막상막하라고 할 수 있지만, 기병의 전력 차이는 숫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차원이 달랐다.
로마군은 여전히 주력인 중무장 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그 돌파력으로 적의 중앙을 돌파하려는 진형을 짰다. 한니발은 반대로 중앙에 갈리아 보병대를 배치하고, 양쪽 날개로 갈수록 전투력이 강해지도록 진형을 짰다. 포진을 얼핏 보기만 해도 한니발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다. 29세의 젊은이는 포위전을 노렸던 것이다. 포위전법은 적의 주력 부대를 무력화시키는 데 의미가 있다. 그것은 전술의 기본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니발을 배신한 것은 기껏 고생해서 데려온 코끼리들이었다. 남국 태생인 거대한 '전차'는 알프스는 간신히 넘었지만, 이탈리아 북부의 겨울에는 이기지 못했다. 로마의 경무장 보병이 쏜 화살을 맞고 화가 난 코끼리들은 적진을 교란시키기는커녕, 코끼리를 부리는 사람까지 떨어뜨리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하지만 나머지는 모두 한니발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꺄오오오오...
물에 흠뻑 젖은데다 공복과 추위라는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이 자랑하는 중무장 보병은 놀라운 돌파력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내리기 시작한 진눈깨비를 뚫고 적의 중앙을 향해 쇄도했다. 카르타고군의 중앙은 당장 격파되었다. 중무장 보병의 양옆에 있던 동맹국 보병들도 에스파냐나 리비아 보병을 상대로 용감히 싸웠다. 보병전만 보면 전황은 로마군의 우세 속에서 전개되거 있었다. 하지만 양군의 기병끼리 격돌한 구역에서는 전황이 거꾸로 전개되고 있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용감히 싸우던 로마군 보병들에게도 공복과 추위와 물에 젖은 몸이라는 악조건이 무겁게 덮쳐오기 시작했다. 기병이 격퇴당하여 무방비 상태가 된 로마군 양쪽 날개에 한니발의 보병이 들쑤시고 들어왔다. 이어서 로마 기병을 쫓아버린 기병까지 로마군의 배후로 다가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숲속에 숨어 있던 마고네의 2천 병력이 로마군의 배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니발의 군대의 중앙에 배치되어 있던 갈리아 보병이 로마의 중무장 보병을 당해낼수 없었기 때문에, 완벽한 포위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4만의 로마군은 포위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포위망은 조금씩 좁혀졌다. 로마 병사들은 칼을 휘두를 기력조차 없었다. 결국 바깥쪽에 배치된 병사부터 제물로 바쳐지기 시작했다. 전멸을 피할 수 있는 길은 가장 약한 정의 중앙을 돌파하여 도망치는 방법뿐이다. 로마군 중앙에 있던 집정관 셈프로니우스의 호령에 따라 로마군은 전력을 다해 전면 돌파에 나섰다. 불리해지면 더 이상 싸우지 않고 도망치는 갈리아 병사를 무너뜨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카르타고군 기병이 둘러싸고 있는 배후는 철벽에 가까웠다.
결국 적의 중앙을 돌파해서 트레비아 강을 건너 피아첸차까지 도망칠 수 있었던 로마군은 1만에 불과했다. 2만 명의 병사들은 여전히 포위망에 갖힌 상태였다. 이때부터는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살육이 전개됐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도망친 병사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 대부분 진영으로 도망치려고 트레비아 강 속으로 뛰어들었다가 쫓아온 적의 기병에게 살해되어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티치노에서 당한 패배는 기병전이라는 이유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던 로마도 보병과 기병을 모두 투입한 본격적인 트레비아 회전에서의 패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트레비아 전투의 결과는 병사들 개개인의 전투력이 아니라 전술의 승리였다. 패배한 로마 쪽의 전사자는 2만 명. 집정관 셈프로니우스를 비롯하여 1만 명이 중앙 돌파에 성공하여 피아첸차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 병사나 진영을 수비하기 위해 남겨진 병사까지 포함하여 로마 쪽의 생존자 수는 1만 5천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나머지는 포로가 되었다.
반대로, 승리한 한니발 군대의 전사자는 대부분 갈리아인이었고, 한니발이 에스파냐에서 데려온 병력 가운데서 전사자는 헤아릴 가치도 없을 만큼 적었다. 다만 코끼리는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거나 도망쳐 버렸다. 진눈깨비 속에서 벌어진 장시간의 전투는 승리한 쪽 병사들에게도 가혹한 것이었다. 한니발도 패주하는 적의 추격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부상으로 진영에 남아 있었던 코르넬리우스는 몇몇 병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피아첸차까지 도망칠 수 있었다. 한니발은 집정관의 17세 된 아들을 또다시 놓쳐버린 셈이었다.
피아첸차에서 재회한 두 집정관은 피아첸차에 남아 계속 버틸 수는 없다는 점에 의견이 일치했다. 트레비아 전투의 결과는 순식간에 포 강 주변의 갈리아인들에게 알려져, 그때까지 로마에 붙어 있던 부족도, 어느 쪽에 붙을까 망설이고 있던 부족도 일제히 승리자 곁으로 달려갔다. 한니발 군대는 당장 5만 명으로 늘어났다. 두 집정관은 패잔병을 모아서 리미니로 떠났다. 로마는 몇 달 전에 제패를 끝낸 이탈리아 북부를 완전히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이듬해부터는 전쟁터가 남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운명에 맡겨진 피아첸차와 크레모나는 갈리아인들 틈에 남겨졌는데도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날 때까지 16년 동안 거의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것은 좋은 기회를 살릴 줄 모르는 갈리아인의 성향 덕분이기도 했다.
원정 첫해를 눈부신 전적으로 장식한 한니발이었지만, 이 29세의 젊은이는 승리에 탐닉하는 법이 없었다. 차례로 찾아와 고분고분 명령에 따르겠다는 뜻을 표하는 갈리아 족장들을 응대하면서도, 그의 눈빛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병력이 두 배로 늘어났다고 해도 결코 기뻐 날뛰지 않았다. 갈리아인이 아무리 많이 가세해도, 로마를 무너트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니발은 포로한테서 정보를 알아낸 뒤에는 포로 전원을 로마 시민과 동맹국 시민으로 양분하여 완전한 차별대우를 했다. 로마 시민병에게는 식사조차 충분히 주지 않고, 가혹한 사역을 시키면서 괴롭혔다. 반대로 동맹국 병사들한테는 충분한 음식을 주고, 손발을 묶지도 않고, 모닥불 곁에서 몸을 녹이는 것까지 허락했다. 그러다가 로마 포로들만 죽이고 동맹국 병사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로마 연합 전체를 적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내 적은 로마 뿐이다. 너희들에게는 지금 당장 자유를 주겠다. 몸값도 요구하지 않겠다.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여기서 일어난 일과 내가 말한 것을 동포들에게 전해라. 로마를 떠나 한니발한테 붙으면, 한니발은 그런 나라들을 적으로 삼지 않고 내 편으로 인정하여 자유와 독립과 안전을 보장할 것이 분명하다고 전해라.'
이 서른도 안된 젊은이는 동원 가능 병력이 75만 명이나 되는 이탈리아에 달랑 2만 6천의 병력만 이끌고 무작정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패배한 최대 요인인 '로마 연합'의 굳은 결속을 무너뜨릴 작정이었다. '로마 연합'을 무너뜨리는 데에만 성공하면, 더 이상 75만 대 2만 6천이 아니었다. 알프스를 넘으면서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전쟁터로 만드는 데 집착한 것은 동맹국의 로마 이반을 유발하기 위해서였다.
1차, 2차 전투지역
한니발은 갈리아인에게 성공한 전략이 '로마 연합' 가맹국에 대해서도 성공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로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석방하는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갈리아인의 경우에도 그랬듯이, 로마군과의 전투에 이김으로써 로마 동맹국에 그의 힘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다음 전쟁터, 즉 한니발이 자신의 재능을 멋지게 과시할 수 있는 무대는 반드시 '로마 연합'의 영역인 루비콘 강 이남이어야 했다...
첫댓글 요즘 글이 많이 올라오는 군요 감사~
진짜 학교 다닐 적에 세계사 공부 열심히 할 것을 하는 후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