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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향문학 11호 특집]
최기복 칼럼집
<빛은 꺾이지 않는다>
최기복 (崔基福)
충남 서천초, 중, 고 졸업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성산효대학원대학교 (효학 석, 박사)
해병 장교 전역
삼성그룹 공채
전 자유민주연합 부산 서구지구당 위원장
전 제20대 윤석열 대통령 선거 충청도 상생 연합 상임고문
전 제20대 윤석열 대통령 선거 충청도 상생분과 학술 부위원장
현 충남신문 칼럼니스트 회장
현 순수문예지 덕향문학 발행인 (덕향문학회)
현 새시대 노인회 충남총회장
현 충청 효교육원 원장
현 사단법인 충청창의인성교육원 원장
현 포럼 동심동행 상임부회장
현 충청의 소리(You Tube) 대표
2021년 자랑스러운 충남인상 수상
저서 : 『인성과 효』 외 다수
<머리말>
주관적 공분이 객관적 공감을 얻기를 기대하고 글을 쓴 것은 아니지만 저의 칼럼에 보내주신 독자층의 긍정적 반응은 10년을 넘게 이어져 왔다. 일간지와 주간지를 가리지 않고 써 오면서 대우다운 대우를 받아온 기억은 없다.
그러나 세상은 요동을 치고 삶은 각박해져 간다. 이웃은 너무 먼 거리가 되었고 친인척도 이용의 도구로 전락되어간다. 부모 자식 간의 소통도 칸막이를 쳐간다. 위선은 삶의 도구가 되었고 거짓말은 일상화가 되어 간다. 正. 反. 合의 논리조차도 자의적 해석을 통하여 착점을 잃어버린 현실에서 글을 쓴다는 일이 어리석은 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래도 하던 일을 멈출 수는 없다는 이유로 하여 글을 쓸 것이다. 자유의지에 의하여 쓰인 글이기에 이해집단과의 반목도 예상될 수 있고.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힘든 시간도 있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으며 입마저 닫아 버린다면 사람 사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논픽션의 기조하에 스스로의 감정에 취해 객관적 공감보다 주관적 감성의 노예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컴퓨터가 만든 문명의 이기 중 하나 카페지기가 스스로 만든 카페에 글을 탑재하고 선택한 언론사는 입맛에 맞는 글을 퍼 옮겨 탑재하도록 했다.
충청 효 교육원 원장으로서 ‘효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라고 주창했다. 사) 충청 창의인성교육원 이사장으로서 스승과 제자 간에 참교육이 고갈되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향하여 ‘인성이란 선 지향적 회귀 본성!’이라고 역설했다. 충청의 소리(You tube)를 통하여 목이 터지도록 영호남의 시녀 노릇에서 과감하게 돌아서고 핫바지의 오명을 벗어버리자고 외쳤다.
새시대노인회 충청총회장으로서 21세기 첨단 IT 시대의 MZ세대에게 북극성이 되는 좋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포럼 동심동행(同心同行)을 통하여 좌표를 잃고 흔들리는 시대를 향하여 탄탄한 길을 열어주고자 고군분투하였다.
덕향문학 순수 문예지 발행인으로서 인간사가 곧 문학사요 덕향 문학의 순수한 시심이 우후죽순 격으로 올라가는 고층건물들, 부실화로 사람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사실들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현실을 정화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세상과 사람을 향하여 구애의 손짓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칼럼집 <빛은 꺾이지 않는다!>는 필자가 걸어온 여정의 족적이라 할 수 있다. 언론사에 기고했던 흩어졌던 원고들을 모아 정성스럽게 엮어 소중한 역사를 만들어 준 아세아출판사 사장님께 감사를 드린다.
중구난방, 정제되지 않은 글들이 주제별이든 연보별이든 정리되어 기록되기를 염원하였다. 맞춤법, 띄어쓰기 등에 미흡하기도 하고 옮겨놓는 작업도 힘들어져 덕향문학 김인희 편집국장님에게 칼럼집 편제를 부탁드렸다.
늙은 스승을 향한 신의로 오롯이 편집을 감내하는 편집국장님!
머리를 들 수 없으리만치 감사가 넘친다. 빚진 자의 마음으로 열심히 글을 쓰겠다고 다짐한다. 멈출 수 없는 길이다. 내가 사는 이유이다.
싱그러운 오월, 눈이 부신 날
2022년 5월 우거에서 溥根 최기복
정치란 무엇인가?
“대한민국의 국체(國體)는 공화국이고,
정체(政體)는 민주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다.
모르는 사람 없을 것 같아도 모르는 사람 참 많다.
혹자는 말한다.
헌법 몰라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혹자는 말한다.
그런 것은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알면 되지
우리가 알면 무엇하냐고.”
1.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다. 모르는 사람 없을 것 같아도 모르는 사람 참 많다. 혹자는 말한다. 헌법 몰라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혹자는 말한다. 그런 것은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알면 되지 우리가 알면 무엇하냐고.
정치를 모르고 법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 어쩌면 행복하게 사는 사람 들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알려하지도 않고 배우려 하지도 않는다. 사람에게 성명이 있듯이 나라에도 이름이 있다. 우리나라의 이름은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정치체제(政體)는 민주이고 국가 체제(國體)는 공화국이다. 그리고 그냥 민주가 아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이며 시장 경제를 기틀로 한다.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체제가 전복되고 파탄이 나도 변해서도 안 되고 변할 수도 없는 것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반기를 들거나 변질된 이념으로 이를 바꾸려는 자나, 세력은 반역자이고 국가전복 세력이다. 지금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국가 목적 또한 헌법 제1조에 함축되어 있음을 국민 모두가 알아야 할 절대적인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기를 바라지만 문재인 정권의 실체는 종북 정권이거나 친북 정권으로 치부할 수밖에 없다. 친북이거나 종북 정권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념까지 완전히 물들어 있다는 것은 아닐 수 있다. 평화를 운운하고 통일을 지향한다는 등의 대외적 세리프를 이용하여 양두구육의 허허실실 전법으로 우리의 정체성 변질을 유도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다시 말하면 반역을 획책하는 문재인. 문재인을 추종하는 반역집단으로 변질되어간다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이북의 헌법도 조선 인민 민주를 표방한다. 그들은 조선인민 민주주의 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이라고 부른다. 헌법 제1조는 우리나라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다. 제2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다. 주권은 인민이 최고 주권기관인 최고 인민회의와 지방 주권기관인 인민위원회를 근거로 하여 행사한다.
우리의 국호는 대한민국이고 그들의 국호는 조선인 민민 주주의 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헌법 체계와 다른 것은 거의 없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저들의 헌법 제2조와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의 내용 중 차이는 국민과 인민이라는 단어다. 국민은 무엇이고 인민은 무엇인가. 우리가 추종하는 의회민주주의와 저들의 헌법상 지위와 권한을 인정하는 최고 인민 회의는 개념상 동일하다. 저들의 지방자치기구인 인민위원회와 대한민국의 지방의회의 개념 또한 동일하다. 저들에게도 선거가 있고 투표행위를 한다.
그럼에도 왜 저들은 3대에 걸친 세습 정권이어야 하고 세계 유일무이한 독재정권으로 악명을 날리고 인권유린국가로 낙인이 찍혀 있는 것인가. 그들의 헌법 전문에는 김일성은 시공을 초월한 유일 지존이고 그의 사상은 감히 손볼 수 없는 유일사상이다. 이에 기조한 체제는 초종교적이고 사회주의를 표방하여 만든 당헌 당규는 초헌법적이다.
일반적으로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해야 하고 누구든 평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다툼의 소를 제기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저들에게는 지존의 위력 앞에 법은 무력하고 절대권력의 비호를 받는 공산당원들은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당에 반대하면 숙청을 당하여 목숨을 저당 잡히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가야 하고 공산당 강령을 위반한 반동 행위자라고 낙인이 찍히면 이념의 불구자로 사회에서 낙오되어야 한다.
아버지를 반동이거나 반당 분자로 고발하는 아들에게는 영웅 칭호를 수여하여 천형의 생명윤리마저 저버리게 하는 모순의 극치가 저들의 국가 운영 체제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석기라는 용공 주의자를 용서하라고 소리를 지른다. 이북에서 남파된 간첩을 색출하기보다는 보호하려 드는 정권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절대 전력의 부족으로 기간산업이 위축될 우려가 팽배한 상황에서 멀쩡하게 돌아가는 원자력 발전소를 폐처리하고 대신 이북에 발전소를 건설해 주겠다는 이면 약속설이 나돈다. 원자력 발전소에서 나오는 핵연료를 대한민국에선 아예 생산을 못 하게 하겠다는 저의도 보인다. 이런 이야기를 지면을 통하여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저들에게는 없다.
저들에게는 선전선동은 당헌에 나와 있는 정치적 가치이고 문화적 유산이다. 선전 선동에는 공산당 특유의 전략과 전술이 내재되어 있다. 굶주리게 하여 전투역량을 제고시키는 반면에 이남의 경우는 군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전투역량의 배가 보다 저들의 눈치나 보는 수뇌부와 군의 장성들은 전쟁의 참혹한 양상을 확대 재생산시켜 군기문란을 조장한다. 군인의 사명과 본분을 망각하게 하고 감성주의를 조장하는 일련의 조치가 그렇다.
이남에서 미군을 철수하면 누가 제일 좋아할까? 지금의 군으로 제2의 6, 25를 획책 이북에서 남침해오면 이남의 정신전력으로 싸움에 나설 군인과 군인정신을 가진 자들이 얼마나 될까? 대한민국의 헌법 체계를 수호하고 주권재민 사상으로 중무장하여 다시는 이 땅에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는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주인은 아니다. 양아치 근성으로 먹고 튀고 파당의 이익을 위해 가치관까지 바꾸는 쓰레기들을 뽑아 놓고 그 책임을 회피하는 국민정신도 양아치 근성이고 식민지적 사고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이북도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진정한 주인은 국민이어야 하고 인민이어야 한다.
2. 검수완박
저질스러운 자들의 저질스러운 입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필리버스터라는 국회법적 용어는 구사하는 언어의 합리적 타당성을 통하여 반대의 이유가 정당하다는 것을 강변하는 절차적 제도일 뿐이지 반대를 위한 반대의 방법으로 이용되고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하는 모습으로 파당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자들의 내로남불을 보면서 아직 시작도 않은 윤석열 정권의 미래가 암담해 보인다. 여당이 야당 되고 야당이 여당 되는 것은 어쩌면 정치의 당연한 로드맵이다. 그렇다손 억지가 억지를 낳는 정치권의 악습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정치인들의 바이블이거늘 어찌 똑같이 전철을 답습하며 변화를 수용하지 않으려 하는지? 기가 막힌다. 검 수완 박이라는 사전에도 없는 사자성어는 어쩌면 우리말 사전에 등재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거대 양당의 기싸움 이거나 이념적 스펙트럼을 통한 정당의 정책 싸움이라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저들의 싸움은 국민적 입장에서 보면 범죄 집단의 자기 보호를 위한 입법이요, 반대자의 입장에서 보면 권력의 칼자루를 쥐고 조자룡이 헌 칼 휘두르듯 흔들어 댐으로 당한 보복을 되값아 주겠다는 의도가 눈에 보인다.
검찰은 검사가 근무하는 집단 관리소에 불과하고 검사는 국가 기관이다. 국가 기관은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고 공권력의 남용에 희생의 제물로 전락됨을 막아 보호받아야 할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한다. 권력의 시녀로 전락되어 본연의 임무보다 정권의 앞잡이로 존재해온 것에 필자는 동의한다.
홍준표 의원의 말처럼 검찰의 자업자득이지만 지금 전 검사가 사표 소동을 치르며 야당의 검 수완 박에 저항하는 모습은 과거를 반성의 기재위에서 이루어져야 하건대 반성은 없고 자신들의 권한 사수만을 위하여 투쟁하는 모습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반성은 없고 승냥이 떼처럼 자신의 먹잇감만을 지키고 빼앗기 위하여 으르렁거린다. 유리하면 정의고 불리하면 불의라고 치부한다. 그 철면피한 모습들에 아연할 뿐이다. 악법도 법이라고 스스로 독배를 마시기 위하여 형장으로 들어가는 소크라테스가 생각난다. 국민 세금으로 호의호식하며 날밤 새워 싸우는 것이 고작 자신들의 이해에 관한 것들이다.
창을 든 앞잡이들을 사주하여 내 죄는 감추고 네 죄는 침소봉대하여 반신불수 만들었으니 이제는 받은 대로 돌려줘야 하지 않겠느냐? 비록 0.73% 지만 우리는 승자독식의 전통을 고수하겠다는 여당의 야당 때 모습을 떠올려 본다. 반대로 기고만장하여 적폐 청산이라는 미명으로 더 큰 적폐의 성을 쌓아 올린 야당의 여당 때 모습도 떠올려 본다.
검수완박은 범죄 집단 간에 주고받는 편 갈이 세력의 법제화를 위한 정치권의 저질 싸움이다, 붕괴된 멘탈의 복구를 위하여 현재의 제도를 보완하고 철저한 교육을 통하여 가치관을 확보시킨 후 정치권에 몸담아 있는 당신들부터 철저한 자성의 자세로 국민 앞에 과거를 사죄하라. 법은 없어서도 안 되지만 운용하는 자의 자의적 판단도 중요하다. 이들을 정당에서 공천을 미끼로 활용하듯 자리와 승진을 미끼로 활용하지 마라. 검사는 국민의 소유고 도구지 정치권의 도구나 하녀는 더 더구나 아니다.
5년 후에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을 명심하라. 0.73%의 승리 24만 7천여 표로 정권을 잡은 여당은 국민 앞에 겸허해야 한다. 국민의 표심은 수시로 변한다. 막강한 조직과 여당 프레임으로도 패배할 수밖에 없었든 현재의 야당 사람들 해서는 안 될 일들,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 일들, 뼈 아픈 반성으로 새롭게 시작하라. 하여 여겸야성(與謙野省) 하라. 국민적 시각으로 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이다.
* 與謙野省 : 여당은 겸손하고 야당은 반성하라
3. 대한민국의 법과 원칙
법과 원칙?
정치인들의 입에 달고 사는 말 아니겠나? 우리말 속담에 제 마누라 서방질하는 것 동네 사람 다 아는데 저만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치인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 중에 아주 흔한 말처럼 국민은 다 알고 이미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꿰뚫고 있는데도 달린 입이라고 짓씹고 곱씹고 하면서 우쭐댄다. 어쩌면 그것이 정치고 정치적 수사라는 어이없는 자조도 팽배해 있다.
0.73%라는 사상 초유의 근소한 표 차로 정권이 바뀌고 이 시간부터 승자와 패자의 엇갈린 희비는 다음 대통령 선거까지 계속될 것이다.
빼앗긴 자의 두려움은 정권을 쥐고 있을 때의 독식을 위한 횡포와 엉터리 눈만 뜨면 주창하던 법과 원칙이 얼마나 허구였는지 스스로 알고 있기에 그 두려움이 극에 달할 것이리라. 우리가 지니고 사는 양심이란 인간이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보루지만 양심은 독식과 거짓. 속 다르고 겉 다른 사람들이 가장 접하기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기에 이들에겐 양심은 없고 세 치 혀끝만 있다고 필자는 주창한다.
지금 신. 구 대통령의 샅 바 싸움이 시작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마지막 줄다리기 싸움이다. 양쪽에 매달려 있는 정권의 하수인들이 상대방 전력을 흩트리기 위하여 마지막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서 새삼 저들의 민낯이 읽힌다. 저들의 꿈은 무엇인가? 스스로 만들어서 서로가 나누어 먹는 정부의 요직을 빼앗는 일과 권력 유지에 걸림돌 제거가 급선무다.
입으로 외치는 법과 원칙은 국민 대다수의 신뢰 위에 공정과 상식이 되기를 기다리는 염원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싶다. 코로나-19 감염자가 국민의 1/4을 넘어간다. 국민 부채가 세계 3위 수준에 이르렀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인구절벽의 벼랑에 서서 나라가 문을 닫아도 아이는 낳지 않겠다는 부부들의 야합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나마 무역 대국이 되고 밥 굶지 않고 사는 것이 정치하는 사람들의 덕인가? 곳간은 비워놓고 포퓰리즘의 선봉에 서서 퍼주기에 급급하다.
망한 나라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싶지 않다. 공약이랍시고 여기 가서는 이 말 저기 가서는 저 말 하고 다니다가 한 사람은 낙선하고 한 사람은 당선했다. 허리띠 조여 매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곳간이 비워져 가족 전체가 기아와 굶주림 속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 것이 유비무환이다.
독약인 줄 모르고 받아먹다 그것이 독약인 줄 알게 될 즈음 이미 끝장이다. 대장동 사건만 해도 니밀락 내밀락 하면서 유야무야 하게 끝내려는 정치권의 수작들이 보인다. 돈은 없어졌는데 먹은 자는 없다. 그 돈이 공중에서 분해되어 태평양 바닷속에 잠적했나?
이게 나라냐 이것이 법과 원칙이냐. 대통령 한 사람들은 30년 형을 받아도 몇 년 살면 사면이라는 법 때문에 출소하고 굶주리다 못해 빵 한쪽 훔쳐먹다 들킨 사람은 형기를 다 채워야 하는 것이 법과 원칙인지 묻고 싶다. 이렇게 무너져 내린 법과 원칙 때문에 이를 부추기는 언론들의 무너진 원칙 때문에 국민정신은 골병이 들어간다.
강자를 위한 법. 가진 자를 위한 원칙보다 상식이 우선 하고 공정이 우선하고 사회정의의 실현이 우선 하였으면 좋겠다.
4. 위기를 부채질하는 대통령 후보들
장수를 이야기할 때 용장(勇將), 지장(智將), 덕장(德將)이 등장한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 관우, 장비를 일컬어 유비는 덕장, 관우는 지장, 장비를 용장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앞으로 20여 일 남은 대통령 후보들의 두 번째 토론회를 시청하면서 이를 주관한 언론사들이나 출연한 대통령 후보들의 모습에서 필자는 무엇인지 불덩이처럼 가슴에서 치밀어 오는 분노와 함께 천인단애(千仞斷崖)의 절망감에 휩싸였다.
대통령이 도덕군자일 수만은 없다. 그러나 지도자 반열에 설 수 있는 사람이 타락의 대명사 가 되어서는 안 된다.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라가는 스캔들의 진위여부를 떠나 서로가 서로를 손가락질하면서 당신이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는 무엇으로 망하든 폭망 할 것이라는 겁박이다. 서로가 서로를 곁눈질하면서 말꼬리 잡고 늘어지고 시청자나 국민이 평가해야 할 사안에 대하여 막말을 해대는 모습들을 보면서 저들이 저럴진대 일반 서민대중들의 이해관계를 통한 갈등과 반목은 그 해답을 제시할 수 있을까 너무 두렵다.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그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좌충우돌 소란스러워야 할 선거 후가 두렵다.
전제적인 국가 안위나 국민 행복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부분 공약 지엽적인 이해관계인의 표심을 자극하기 위하여 저들은 천문학적인 재원 마련에 대하여는 어물어물 피해 넘어간다. 공기라는 언론사들 또한 구체적 적시를 통하여 빌 공(空) 자 공약의 허구를 지적하기보다 이해의 종속 집단으로 시청률 올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공약을 남발하는 후보는 도둑놈이거나 사기꾼에 해당된다. 도둑질하거나 훔친 돈이라도 있어야 입으로 말한 약속을 지킬 수 있다. 단 한 후보도 국민 부채 1000조의 시대에 재정 건전성이거나 비어 있는 국고 곳간의 텅 빈 모습에 대하여는 이야기하기를 기피한다. 장밋빛 공약의 허구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재정건전성을 회복하여 세계를 휘어잡는 건전 재정의 상징 국가를 꿈꾸게 하는 후보는 보이지 않는다. 필자가 이들을 사기꾼 집단이거나 도둑놈 집단으로 몰아 부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주머니가 텅 빈 사람이 무엇인가를 해 주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들이 오버랩된다.
삼국지에서 유비보다 나이가 많은 관우는 덕장으로 덕치를 주장하는 유비를 형으로 모셨다. 용감한 용장(勇將)은 지혜로운 지장을 못 이기고 지혜로운 지장(智將)은 덕 있는 덕장(德將)을 이기지 못한다는 고사가 자꾸 생각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용감하게 죽을 수 있는 용장도 안 보이고 지혜로운 처사로 만사를 지혜롭게 해결할 지장도 보이지 않는다. 1차, 2차 토론회에서 봐온 후보들 중 덕장은 더 더구나 없다. 대한민국의 슬픈 자화상으로 통탄만 해야 할까? 위기는 기회라는 슬로건으로 서로를 손가락질하면서 당신이 되면 대한민국이 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는 저들이 곧 위기의 본산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정말 싫은 후보가 당선될까 봐 마음에 있는 후보를 찍을 수 없는 현실도 슬프다. 그러나 당신들의 헛소리처럼 대한민국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순간의 실수도 그 폐해는 국민 몫으로 돌아온다. 허지만 위대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선택과 집중은 저들이 부르짖는 위기가 아니라 호기가 될 것임을 믿는다.
당신들 중에는 용장도 지장도 덕장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소수민족으로 전락시켜 한국인의 자존심에 피멍을 들게 한 개막행사 한복 등장 사건이나 심판들의 준동에 대해서도 지도자는 국민의 분노조차 삭여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국제 사회의 미아가 되어서는 안 된다. 투표일까지 남은 시간 반성하고 회개하며 당신들에게 실망한 국민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 활짝 웃게 해 주기를 바란다.
5. 이런 대통령 후보 어디 없나?
2020년 대한민국 출산율은 0.84%다. 2021년 통계수치는 아마 그보다 더 하락 추세일 것으로 예상된다.
한때 한 가정에서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슬로건으로 반 출산 장려 정책을 전개하여 예비군 훈련장에서 정관수술을 마치면 훈련을 면제해 주던 시절이 있었다. 한 치 앞을 못 내다보는 어리석은 정책이었음을 이제 와서 인정하고 후회해본들 무슨 소용이랴. 더구나 지구촌은 코로나-19 팬더믹으로 많은 인구가 감소 추세에 있다.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지구에 인류가 존재할 수는 없다. 시선을 국내 역사로 돌려 보자. 일제의 탄압으로부터 벗어나 겨우 미 군정 하에서 태어난 남한의 이승만 정부와 소련의 스탈린 휘하에서 집권한 북한의 김일성이 집권한 후 세계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 6. 25를 치렀다.
소실된 재산과 인명은 우리의 역사를 뒷걸음질 치게 하였다. 그 후유증은 작금에도 대립과 갈등, 반목과 시기로 남북한의 장벽은 허물어질 것처럼 보이다가 더 공고하게 쌓이고 있고 남 북의 수뇌부는 이를 자기들 정권의 이용 도구로 적의 활용하고 있다. 인권은 없고 정권만 있는 이북. 인권을 빙자하여 가짜 뉴스의 천국이 되어 가고 있는 남한. 3대의 세습 정권 속에 공포 일변도의 정치로 일관하고 있는 이북. 상대의 약점을 물고 늘어져 반사이득으로 존재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기생충 집단의 남한.
만만한 것이 홍어 X라고 했나. 남북한의 국민들은 이들 정치집단의 흡혈에 숙주가 되어 노예 집단으로 길들여지는 것 아닌가.
양 집단의 지도자나 그 추종세력들은 재산 불리기. 자파 집단의 이해기관, 내로남불의 상징화로 국민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함에도 이들은 양극화를 부추긴다. 기가 막히게 지능적 술수로 국민을 호도한다. 양의 탈을 쓰고 벌어진 입으로는 호박씨를 깐다. 이를 알아차린 일부 국민들은 못 알아차린 더 많은 국민들을 무시하고 좌절한다. 적당히 포기하다 자신에게 유리한 집단으로 몸을 위탁하고 주구가 된다. 숙청은 이북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남한에도 입바른 소리 하고 자파 이익에 반하는 객관적 바른 소리 하다 쫓겨나 정치생명이 절단 난 사람들이 있다.
이데올르기란 상호 보완을 통하여 그 시너지 효과가 상호 소통을 통하여 이해의 폭을 넓히며 역지사지를 몸으로 익혀 냄으로 나와 다른 의견을 수용하게 하는 것이다. 상대를 적으로 돌리고 복종을 강요하며 살육을 일삼았던 역사의 끝자락에서 아직도 우리는 그 잔재의 여진에 휘말려 있다. 나는 우파 너는 좌파. 우파가 싹쓸이되면 좌파 속에 우파가 싹터서 언젠가는 좌파를 싹쓸이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임에도 우리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2022년 3월 9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공약도 없고 철학도 보이지 않는다. 여론조사 수치에 혈안이 되어 상대방 약점과 비리 들추어내어 나보다 더 나쁜 놈 만드는 일이 저들의 본업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구절벽의 상황에서 인구 제로의 나라로 문을 닫아야 할 미래. 내로남불로 인성이 마비되고 수치를 모르는 수성(獸性)만 남아있는 자화상, 나라 곳간은 비워놓고 가렴주구로 선거용 선심만 베풀며 생색을 낸다. 국민은 무엇을 보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실언을 거듭하며 자파의 집토끼도 못 지키는 무능한 대통령 후보, 표만 된다고 생각되면 아침에 한 말 저녁에 바꾸는 거짓말의 달인, 이런 후보 말고 일관된 철학으로 국민에게 꿈을 심어 주는 대통령, 겸손한 모습으로 국민과 애환을 같이 하는 대통령. 바른 역사관을 갖고 공의를 바로 실천하는 대통령. 국민의 자존심을 지켜 주는 대통령. 이 나라를 반석 위에 세워 애 많이 낳고 오래오래 대를 이어 지켜가며 행복을 구가하게 하는 대통령.
이런 대통령 후보 어디 없나?
6. 기생충 집단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대한민국의 영화 수준을 세계 무대에서 돋보이게 했고 세계 영화 팬들을 열광하게 하였다. 내용인즉 기생충 가족이 또 하나의 기생충 가족을 파멸로 이끌고 빌붙어 흡혈하는 주인 가족까지 함께 공멸로 이끈다는 스토리의 전개다.
기생충이 알을 낳아 번식을 꾀하듯 아들 기생충은 여동생을 기생충으로 여동생은 그녀의 아버지를 기생충으로 아버지 기생충은 그녀의 아내를 끌어들여 부유한 4인 가족의 4인 기생충이 되어 한 가정을 파멸로 이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인생이 화려한 변신을 기한다든가 삶의 쾌적을 바꾼다든가 기대를 갖게 하기보다 함께 공멸로 가는 길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대통령 선거를 목전에 두고 파당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인들은 대한민국 역사의 기생충 노릇에 환장한 존재들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필자만의 생각이기를 빌지만 죽기 살기로 권력 쟁취만이 목적이 되어 그 진흙탕 싸움에 휘말려 양극화의 정점에서 서로를 적으로 치부하고 입에 게거품을 물게 하는 국민 편 가르기에 대하여 당신들은 어떤 대안을 갖고 있는가?
남북이 대치되고 동서가 양분되고 이념이 분산되어 종국에는 기생충 집단으로 하여금 한가정이 파멸로 가듯 이 나라가 파경으로 가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역사가 증명해준다. 망국의 요인에는 기생충과 기생충 집단의 준동이 요인이었음을...
오늘의 정치 책임 집단은 여당이다. 이들은 도덕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국민들의 신임을 저버린 채 자신들과 소속 집단만을 위하는 현행범 집단이다. 내 눈의 대들보는 보지 않거나 일부러 피하면서 상대 눈의 티끌만을 침소봉대하며 어용 언론과 집단 이기주의 화신들을 총동원하여 나팔을 분다.
모두가 국민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세금이거나 부채로 이 짓을 계속하고 있고 멈출 날은 기대난이다. 이들이 바로 국민의 피를 흡혈하는 기생충 집단이라는 것이다. 여당의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의 야당이 하고 있는 짓들은 자신들이 여당을 하면서 해온 짓들을 작금의 여당이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일말의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하면서 과거 여당을 지내며 누렸던 권력의 단맛을 다시 찾으려고 몸부림친다.
그들이 해온 짓들을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부끄럽다. 국민을 위한다는 입 치례 거짓말로 보수를 빙자하여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 들고 대드는 집단 아니었나? 오늘의 현행범 집단의 태동 요인을 제공한 전과자 집단이라고 표현해야 적절할 것 같다. 하여 오늘의 정치집단은 모두 국민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 집단임을 적시해야 하지 않겠나.
영화에서 본 것처럼 기생충은 결국 피, 아를 모두 공멸하게 한다. 잠시의 꿀맛에 취해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면서 자신만이 옳고 상대는 모두 그르다는 내로남불 시대를 만든 장본인들이다. 이들 전과자 집단과 현행범 집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세력도 눈에 보이질 않는다. 그렇다고 장탄식으로 포기할 수는 없다.
선거가 구충제가 되어야 한다. 양대 집단이 기생충 집단으로 머물게 할 수는 없다. 대권을 가져가는 세력에게는 대권을 주고 빼앗긴 세력에게는 견제의 능력을 주는 지혜가 구충제일 수도 있음을 제언한다.
7. 대통령이 뭐길래!! -후보 때는 머슴이고 당선되면 제왕-
인간의 역사는 만남과 이별의 윤회다. 우리는 어느 부모에게 태어나느냐가 남은 삶을 영위해 감에 있어서 결정적인 관건이 된다.
산다는 일은 먹고 자고 일하면서 누가 되든 롤모델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때로 누구처럼 타락한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 혐오의 대상을 멀리하는 것을 삶의 방편으로 삼기도 한다. 하여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야 하고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계속된다. 결국, 죽음은 모든 것과의 결별이 된다. 생(生)과 存(존)은 부모와의 만남으로 시작되고 결별(訣別)은 그 모든 것과의 끝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를 향하여 질주하지만, 그 목적과 결과가 아무리 소중해도 과정이 잘못되었으면 소중한 결과나 이루어진 목적에 대하여 회의적일 수밖에 없다. 과정을 중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청사에 남길 업적을 쌓았다손 부정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면 이는 당연히 제책 사유를 갖게 되고 탄핵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필자는 대한민국 헌정사에 나타난 대통령 중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 그에게는 결정적인 과오가 있다. 일본 군관학교 시절 조센징 사냥에 결기를 보였다는 것과 정권 연장을 위하여 유신이라는 망령을 덧씌웠다가 부하의 흉탄에 세상과의 결별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든 비운이다.
쿠데타를 불러오게 된 동기는 개인적인 이해로 정당을 사당화하고 국가라는 공동체를 운영 함에 있어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정치판의 쓰레기들이 3.15 부정선거로 4.19 학생 의거를 불러일으켰고 청년 학생들의 핏값보다 권력의 사슬로 상대를 묶어 반신불수를 만들려는 여당. 야당 간의 권력 다툼에 멍들어 가는 조국에 대하여 이를 볼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어 칼을 빼 들을 수밖에 없는 당위 즉 합당한 구실과 명분을 자아내게 했던 점을 수긍할 수밖에 없다. 당시 한국은 민주주의를 운위할 자격이 없다는 국제적 중론도 한몫했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구하는 것은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를 구하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내년 3월 9일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다. 어찌 그리도 역사 속의 당쟁 사화를 일으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선동과 허언으로 민심을 이완시키고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힐 선수 양산과 입들을 총동원. 없어도 그만인 언론들에게 자갈을 물리는지 아연실색할 일이다.
후보들 또한 그 나물에 그 밥이다. 책임에는 법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이 있다. 우리 사회를 살면서 오래된 자동차 흠집 안 생길 수 없듯이 실수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다. 국민들은 살기에 바쁘다는 이유로, 손해 보고 살지 않으려는 이유로, 내로남불이 되어 가고 있지만, 마음속으로 나는 그래도 내가 뽑을 대통령은 완전무결한 인격과 탁월한 지도력과 애국심으로 뭉쳐진 인재이기를 바란다.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로망이다. 실수를 인정하고 대국민 사과를 할 수 있는 대통령, 솔직한 사과를 통하여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대통령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제가 혹시 바지를 한 번 더 내릴까요? 질문자는 여당 내 같은 후보군이고 이에 응수한 유능한 후보의 꼴불견 토론에 박수를 치는 네 편과 내 편의 호응자들, 쓰레기통에는 버려진 장미 외에는 찾을 것도 찾아볼 것도 없다는 웅변이다.
대통령은 국민의 충직한 심부름꾼이다. 정직하게 일 잘하는 머슴을 두고 그를 잘 부릴 줄 아는 국민이 일등국민이다. 개발도상국에서 32번째 선진국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법이 있으면 무엇 하나 무시하고 피해 가고 마음에 안 들면 고쳐서 더 못쓰게 만들어 남루한 걸레를 만들려는 위정자들을 먼저 정리해야 한다. 현행 제왕적 대통령제를 고치려 하는 척하면서도 과감하게 손을 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혹여 잡으면 한몫 잡고 튀려는 심보 아니겠나.
대통령이 뭐길래? 후보 때는 머슴이고 당선되면 제왕인지...
충효의 고장, 충청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역사는 말한다.
충청도는 한반도의 중심을 꽉 붙잡고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다.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뜨거운 애국의 불길로 타올랐던
충신열사들의 희생이 바람 앞에 놓인 국가를 지탱해 왔다.
그 선조들의 뜨거운 피가 오늘 우리들의 혈맥을 타고 흐르고 있다!
충청도 사람들을 핫바지라 한다.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입 다물고 있는 사람들,
이런 뜻으로 충청인을 모욕하고 있다.
선조들의 역사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다.
후예들에게 치욕스러운 이름을 물려줄 수 없다.
1. 누가 충청도를 이렇게 만들었나?
4월의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원성 천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벚꽃들이 지기 시작하고 태조산 자락에 초록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가장 잔인한 달이 가고는 있지만 어쩌면 춘삼월 호시절이 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굴곡 속에 달라지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 선거에서 영남의 민심과 호남의 민심이 극렬하게 갈라져도 아랑곳하지 않는 충청의 민심에 대하여 충청인의 한 사람으로 자괴감에 빠지곤 한다. 정말 충청도는 안 되는 지역인가? 충청도에는 충청의 정치세력화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입으로 부르짖고 있는 충신열사의 정신과 선비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산화할 각오로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들 사람이 없는가?
누가 충청도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거대 양당의 그늘에서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전국에서 으뜸인데 기실 제3당의 후보가 되어 충청인의 명예를 선양하고 전라당과 경상당에 대적할 만한 인물이 되겠다든가, 캐스팅 보트 세력이 되어 자라나는 2세들에게 정치지도자의 길을 열어 주려는 자는 없는가?
아직은 눈을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천안을 중심으로 충청 정치세력의 싹을 틔우려 안간힘을 쓰는 인사에게 왜 손해 볼 짓을 하려 하느냐? 하고 만류하고 비웃음의 화살을 날린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본다. 내심 자기희생은 별도로 하고 남이 차려놓은 밥상에 수저 들고 덤비는 가당찮은 이기 지심이 온몸에 DNA로 자리 잡은 자칭 정치지도자들이다
정당조직을 등에 업고 작당하여 상대 정당을 적으로 몰면서 내심으로 주고받는 독식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충청의 미래를 우리는 이들에 맡기고 "충청도는 안 돼유"만 연발하는 자포자기의 늪에서 소탐대실( 小貪大失)의 노예 상태로 살고 있다.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충청의 목소리조차 밖으로 내뱉을 수 없도록 거대 양당의 주구들은 치밀하게 전략을 짜고 자파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 있다.
충청의 아들을 자임한 대통령 당선자의 각료 인사에서 충청도가 얼마나 무시당하고 있는지 느낌조차 없다는 말인가? 충청도의 소외는 어제오늘이 아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충청도의 복소리는 조심스럽게 자제된다.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공천권자의 눈에 벗어나 그나마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자리가 위태해지기 때문 아니겠나? 충청인들의 입에 회자되고 있는 역사적인 인물들, 충신열사의 혼이 비웃고 있어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눈앞의 먹거리 외에는 보이지도 않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 충청의 민심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6월 1일은 지방선거다. 과거 무엇을 했다는 스펙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그들의 재직 중에 충청을 위하여 충청인을 위하여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이룩한 업적이 있는가? 충청인을 볼모로 무엇인가 자신의 입지 선양과 충직한 정파의 이익을 지키는 주구가 아니었나?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사람들,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빤빤하기 이를 데 없는 거대 양당의 이전투구. 누가 이를 징치하고 옳고 그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것인가? 기울어진 운동장의 추가 더 흔들리고 있다. 충청도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
2. 충청은 안중에 없는 대통령 후보
필자는 해병대 장교 출신이다. 복무는 진해와 포항에서 했다. 어렵다고 정평이 난 훈련 과정을 이겨내며 국가관이 정립되었고 애국혼이 몸의 DNA가 되었다. 임관식에 온 아버지는 소위 견장을 꼽아 주시며 멋지구나, 훌륭한 군인이 되라는 격려를 주었고 의무복무를 마친 예비역이지만 해병대 출신인 것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충남에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유는 충신열사의 고장이요 애국선열들의 역사가 숨 쉬고 있다는 이유였다.
하나 필자를 광분하게 하는 기사가 떴다. 육군사관학교를 경북 안동으로 옮기겠다는 모 대통령 후보의 공약이었다.
반도 대한민국의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를 통칭 우리는 국군이라고 부른다. 사관학교라면 국제신사라는 장교 교육의 터전이다. 특히 육군사관학교는 헌정사에 있어서 국방의 간성을 양성하는 기관이요 대한민국 군의 역사이기도 하다. 현재 서울 근교의 태릉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안동에 옮기겠다는 공약을 공약이라고 선전 포고처럼 외쳤다. 앵무새처럼 언론은 이를 지면과 TV 모니터에 공개했다.
이전의 이유인즉 안동은 충신열사의 고장이라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 후보가 부산에 가면 부산으로, 광주에 가면 광주로 옮기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오차범위 안에서 지지율 % 1. 2위를 다투는 여당 후보다. 정작 안동시민들에게는 고무적인 공약일 수 있겠으나. 지금까지 공들여 왔던 충남 그중에서도 육군 훈련소가 있고 인근에 계룡대가 있는 논산시민에게는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면, 그는 충청인들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지역감정 조장의 달인이다.
안동은 양반문화의 고장일 뿐 상대적으로 충신열사의 고장은 충남이라는 사실도 잘 모르는 것 같다. 논산은 황산벌 싸움에서 나당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5천 명의 군사로 10배가 넘는 5만 군사와의 전투에서 몰사당한 계백 장군의 혼령이 숨 쉬는 곳이요. 충남은 충무공 이순신, 김시민,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만주 벌판에서 독립운동을 지휘했던 김좌진 장군, 이범석 장군, 조병옥 박사, 이동녕 선생 등 우리 역사의 중추적 애국 열사들의 혼이 숨 쉬는 곳임에도 이를 폄훼하고 엉뚱하게 양반문화의 고장을 충신열사의 고장으로 둔갑시키려 하고 있다.
더하여 선거 정국이라는 이유로 이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여야를 막론 한 충청권 출신의 정치인들이거나 현역 단체장들의 침묵이다. 이들의 가면을 벗기면 이들의 민낯이 드러날 것이다. 입에 붙은 지역 사랑, 입만 열면 헌신 봉사한다는 자화자찬, 때만 되면 동네 고샅 고샅에 내거는 현수막이 가관이다. 그들의 몸속에 충신열사의 기백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다면 기자회견이라도 한번 열어서 호도된 사실을 충청도민에게 알리고 상대적 피해에 허덕이는 충청인의 상실감 박탈감 해소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내내 자기 자신의 선거운동에 몰입하다가 대통령 후보만 나타나면 얼굴 팔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설치던 그 기백은 다 어디 갔는가? 눈치코치 봐가며 줄 서기나 계보 찾기 등에 혈안이 되어 후보 눈에 벗어나지 않으려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군. 의원이면 어떻고 시의원이면 어떻랴. 충청도에서 태어났던, 충청도로 와서 일가를 이루고 함께 살던 충청인이 되었으면 충청 사랑 충청 정신을 몸에 담아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는 핫바지 대우를 벗어나자. 육군사관학교는 논산으로 이전하여 국토의 중심부가 되어 있는 충남이 육군 장교 육성의 터전이 되어야 한다.
3. 지역주의 논란 - 호남은 발끈, 충청은 멍청 -
지난 7월 2일 충남 천안시청 봉서홀에서 주최하였던 포럼 동심 동행(同心同行)의 행사는 그 주재가 충청권 대망론이었다. 남북이 갈라져 있고 남한은 영남세력과 호남세력으로 동서가 서로를 경원시하는 정치세력으로 갈라치고 있다.
그 틈바구니 속에 신음하고 있는 충청도민을 향한 여과되지 않은 폄훼의 발언으로 충청도를 우롱하고 도민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는 여권의 이재명 도지사의 네거티브 설전에 통곡한다. 권력욕에 불타 백제 역사를 세 치 혀끝으로 난도질한 사실에 경악한다. "한반도 5,000년 역사에 백제 이쪽(이남)이 주체가 되어 한반도 전체를 통합한 때가 한 번도 없었다" 이재명은 이낙연을 향하여 어차피 독자적 호남세력으로는 대권과는 거리가 멀다는 요지이며 이를 받아 갈라친 이낙연과 더불어 정세균 후보는 발끈한다. 선거는 다수가 소수를 이기는 제로썸 게임이다. 과거 김대중 정권의 DJ.P 연합을 통해 창출한 호남 정권의 한계나 노무현을 도운 충청권의 은혜를 무시하는 듯한 표현으로 충청도는 이용의 도구 외에 존재의 정체를 아예 깡그리 무시한다.
충청권이 정치적으로 미래를 무시당하는 것으로 끝이 나지 않는 상황임을 누누이 설명해 왔다. 정부 예산의 최하위 배정, 인구 대비 국회의원 정수 4명 부족, 정부 인사 기용의 배제, 대청 호수의 용수공급 관계, 당진 300만 평을 경기도에 강탈당한 사건, 관광특구 지정 자금의 제외지역으로 홀대받고, 심지어 동서관통철도 부설 문제까지 강 건너 불구경으로 넘어간 처참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별로인 대통령병 환자에게 이토록 푸대접을 받아야 하나?
호남은 발끈하고 충청은 멍청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지역주의는 망국의 한계임을 역설한다. 입으로는 역설하지만 이를 이용하고 득실을 계산하는 저들을 이번에 싹쓸이해야 한다. 지금의 여론조사는 간 보기이며 맛보기이다. 여당의 후보들에 대한 지지도는 등락이 예상되지만, 후보가 결정되면 호남세력은 분명히 85% 이상 여당 후보를 지지할 것이 불을 보듯이 훤하다. 영남세력은 야당 후보에게 65%를 지지할 것으로 예상한다. 충청권의 경우 충청권 독자 후보가 출마하게 되어도 45% 지지 열도에서 멈출 것이다. 지역주의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예상 수치이다. 이번만은 예외가 되어야 한다.
이제는 충청도의 시대를 열어 가야 할 명분을 저들이 주었다.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관망하며 자해 수준의 인내를 재현하고 있는 것은 차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 아니다. 도민들과 정치권이 이를 성토하고 충청인의 각성을 촉구해야 한다. 논평조차도 못 내고 속으로 삭이는 것이 미덕이 아니다.
충청인이여 궐기하자!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4. 충청의 시대를 열자!
충청도에서 충청도 출신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는 꿈은 영원히 무망한 것인가?
필자의 군대 동기가 한 사람 있었다, 그와는 장교후보생 시절 절친이었고 당시 필자가 본 그 친구는 도덕 교육이 필요 없는 친구였다. 법도와 예도뿐만 아니라 봉사와 희생정신도 투철했다. 그는 고향이 전라남도 순천이었고 순천에서 지금도 1급 자동차공업사를 경영하고 있다. 필자는 그가 순천역 부근 음식점에서 접대받은 주꾸미 짚불구이 요리, 그 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때때로 그 맛을 잊지 못하여 그를 찾고 싶었지만 꾹 욱 눌러 참았다. 뿐만 아니라 부산 - 순천 간의 도로는 당시 비포장 도로가 포장도로보다 많았다. 그해 틈을 내어 그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포니라고 부르는 내 승용차에 연료를 채우고 길을 나서며 마음이 들떴다. 부산을 떠나 하동쯤에서 내 차가 덜컥거리기 시작했다. 불안하지만 부산으로 되돌아가기보다는 순천으로 가는 거리가 짧다. 나는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고 예정시간보다 거이 한 시간 정도 늦게 그의 공장에 도착하였다.
기다리고 있던 친구를 만나 인사를 나누고 나서 평소 안면이 있던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분위기가 평소의 그것이 아니었다. 공장 분위기가 초상집을 방불하게 했다. 친구 녀석 또한 평소에 비해서 반가움보다 비통함이 커 보였다
“너, 왜 그래?”
“응, 아무것도 아니야.”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나 도로 간다.”
그때서야 그는 직원을 시켜서 고장 난 내 차를 점검시켰다. 나는 침울한 공장 분위기를 물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낙선했다는 것이다. 내 이성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선거의 당락이 공장 전체를 초상집을 방불하게 할 수야 없지 않은가. 얼핏 부산에서 들은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그때 내 자동차 번호에는 부산이라고 지역 이름이 표기되어 있었다. 사실은 아니었겠지만, 호남 지역에 부산 차가 연료 주입을 위하여 주유소에 가면 김대중 선생 만세를 세 번 불러야 연료를 주입시켰다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호남에서는 인구 배가 운동을 통하여 유권자를 양산해야 영남 인구를 능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출산을 장려한다는 등 낭설들이 유언비어처럼 회자되든 시절이었다, 점심을 같이하면서 차가 수리되는 동안 그 친구와 상당 시간을 함께하였다. 평소 말을 아끼던 그가 말문을 열었다. 호남에 대한 영남의 푸대접과 한처럼 여겨온 호남 출신 대통령을 만들어 내려하던 호남인의 꿈이 무너지는 순간 저들은 패닉 상태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상당한 수리비가 들었음을 짐작해도 한사코 수리비를 거절하는 그를 뒤로하고 필자는 부산으로 되돌아왔다.
그다음 대통령 선거 시까지 정치 은퇴를 선언하고 한국을 잠시 떠났던 김대중 총재는 다음 선거에서 JP와 연합하여 유일한 전라도 출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호남인들은 한을 풀었다. 그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노벨 평화상을 받은 호남 출신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광주의 김대중 컨벤션센터에 가보면 그 호화로움이 놀랍기도 하다, 이젠 가셨지만, 그 위력이란 무시 못할 것이란 생각에 잠겨 보곤 한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영, 호남이라 하여 남한에는 영남의 정치세력과 호남의 정치세력 외에는 없었다. 인구가 영남에 비하여 현저하게 적은 호남은 찬밥신세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호남은 대세요, 영남은 빼앗겼다는 상실감에 젖어 권토중래를 노린다. 노무현 대통령도 충청인이 호남의 정치세력에 힘을 합쳐 주지 않았다면 당선은 불가했음을 기억한다. 시간은 흘러 내년 2022년 3월에는 이 나라의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
이제 충청도는 인구도 땅덩어리도 호남보다 넓다. 백제라는 이름으로 도읍이 된 역사이래 임금이든 군왕이든 대통령이든 충청도 출신은 하나도 없다. 필자가 순천에서 보고 겪었든 호남인들의 집단 패닉 상태가 차기 대통령을 만들어 내듯이 이제 충청도민이 하나가 되어 충청도 대통령을 만들어 내야 할 절체절명의 시간이 도래한 것 아닌가 생각된다.
단순하게 접근하자!
영남 출신과 호남 지향적 대통령들이 번갈아 가며 당선되었다. 이제 충청 출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보자. 김대중 대통령 김종필 총재가 도왔지 않은가? 노무현 대통령 세종시에 와서 수도 이전 공약으로 수혜를 받아 당선되지 않았나? 이제 호남에서 충청을 도와줬으면 한다. 영남에게 묻는다. 호남 출신 대통령보다 충청 출신 대통령이 되는 것이 국토의 균형. 인재의 고른 등용이라는 차원에서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 아닌가?
충청이 핫바지 취급해도 침묵하고 홀대해도 먼 산 보고 핍박받아도 눈을 감는다고 속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영남 충청 호남으로 3분 된 정치판을 만들어 영. 호남의 갈등을 조정하고 분열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충청인이여! 산자수명한 충신열사의 고장 충청의 시대를 열자.
5. 충청권의 희망
JP 김종필 전 총리는 박정희 대통령의 궁정동 피격 사망 후 3김의 봄이라고 했던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의 정치적 각축 현장에서 흔히들 차려놓은 밥상을 물리고 전두환 일당에게 기회를 헌납했다고들 한다.
그리고 대권 가도에서 충청권 시대를 오픈하지 못했고 그사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까지 전직 대통령 반열에 올랐다. 작금 문재인 정권 휘하에 이르는 동안 세분 3김께서는 세상을 하직했다. JP께서는 평생 이인자로서 정권 창출에 공헌도 했고 캐스팅 보트 세력으로 충청권의 위상도 한껏 올려놓았으나 마지막으로 전국구 비례대표로서도 당선되지 못한 채 추락의 역사 속에 정치를 마감하였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세분 3김 중에서 정치철학도 지식수준도 언어능력도 심지어 예술적 기량 쪽에서도 탁월했다. 대통령으로서 역할이 주어졌다손 김영삼, 김대중보다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정치판에 도사리고 있는 가짜 뉴스나 지역감정의 도발이거나 학연. 혈연을 감안해서도 그렇다. JP 이후에 포스트 JP를 자처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재를 키울 줄 몰랐던 자신의 책임도 있겠으나 충청 민심의 리렉스한 기질이거나 응집성의 결여가 종합적인 이유라고도 봐지지만 충청 출신 지도자들의 뚝심과 배짱의 결여가 더 큰 이유라고 여겨진다.
이미 흘러간 물로 치부되어야 하겠지만 심대평 충남지사, 이완구 충남지사, 이인제 의원, 최근의 이해찬 민주당 대표, 이제 국회의장이 된 박병석 의원이나 법무부 장관 반열에 오른 박범계 의원 등이 호남이거나 영남 출신이었다면 대권 물망에서 각축의 대상이 되고도 남을 법하기도 하고, 전, 현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오를 만도 한데 그렇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2022년 디가 올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도 아니고 야당도 아닌 임명직 공직자인 윤석열 검찰 총장의 경우 대권 후보자의 지지 선호도에서 우열이 각축되면서 지역별 여론조사에서 충청권이 눈에 보일 정도의 높은 지지율이 예상되었으나 이 또한 평균 수준을 밑돈다. 우리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반짝 인기를 기억한다. 여야를 막론한 호감도가 수위를 넘는다는 분위기가 감지되자 정치권의 무차별 공격에 속수무책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때도 이를 지켜주고 책임질 충청권 사람들의 애매모호한 태도와 반기문 총장의 태도나 자세가 그 요인이었다.
지금 정치권은 보수와 진보의 싸움이냐, 영남과 호남의 대립이냐로 분석을 요한다면 필자의 경우는 영남과 호남의 싸움이라고 규정짓고 싶다. 양 세력의 균형과 조화의 기틀을 마련할 캐스팅 보트 세력으로 충청권의 대통령 후보가 만들어져야 할 역사의 기로가 현재 아닌가?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귀속된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낙후된 충청권의 균형발전과 지역인재의 발굴과 채용도 충청인에게 초미의 관심사이다.
추미애 장관이 윤석열 총장 몰아내기에 급급하여 악수에 악수를 거듭 두는 반사이득으로 이루어진 절호의 찬스를 잡은 정치권 외의 인사 윤석열 총장은 살아있는 권력에 메스를 가할 수 있는 유일한 보배다. 보배가 보배로 지켜질 수 있는 것은 이를 지켜낼 힘이 있어야 하고 이 힘은 국민의 여론이며 이 여론을 주도해야 할 사명은 충청인에게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적폐라는 이름으로 전 정권의 비리 수사에서 윤석열 총장에게 보냈든 현정권의 박수가 이제 저주가 되어 가는 상황이다. 이를 지켜내야 할 국민적 성원이 꼭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내로남불의 시대, 위선과 위증과 위계로 목적을 향하여 몸부림치는 정치권에게도 윤석열은 반면교사.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교훈으로 남을 것을 믿고 바란다.
충신열사와 선비정신이 궐기해야 할 시기가 지금이다!
6. 계백, 백제와 함께 산화(散花)한 이름!
계백장군, 그는 누구인가?
그는 백제의 멸망 위기에서 오천 결사대를 진두지휘(陣頭指揮)하여 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과 싸웠던 장수요, 전쟁터로 가기 전에 처자들을 패전 뒤 적국의 노비가 되어 치욕을 당하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고 하여 자기의 손으로 죽인 가장이었다.
계백장군은 역사 속에서 멸망한 나라 백제와 비극의 운명을 같이한 인물이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협공으로 백제는 폭풍 앞에 놓인 촛불이 되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탄현과 백강에서 패배하고 국가의 운명이 경각에 이르렀을 때, 의자왕은 결사대 5천 명을 뽑아 계백 장군에게 붙이고 백제를 구할 것을 명한다.
계백장군은 5천 결사대와 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 5만과 맞서 싸우면서 병사들에게 외쳤다. “옛날에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5천 명의 군사로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70만 대군을 무찔렀다. 오늘 각자 분전하여 승리를 거두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그리고 제군들이여, 부디 살아서 부모와 처자에게 돌아가라.” 계백은 불꽃같이 엄중한 장군이었고 부모와 처자를 사랑한 뜨거운 효장(孝將)이었다.
계백장군이 지휘한 5천 결사대는 나당연합군 5만 군사와 4차례나 싸워 이겼다. 신라의 화랑 관창(官昌)이 백제군 진영에 왔을 때 계백장군은 투구를 벗기고 어린 관창을 살려서 돌려보냈다. 관창이 재차 백제군 진영에 왔을 때 그의 목을 베어 돌려보냈다. 나이 어린 화랑 반굴(盤屈)과 관창(官昌)의 전사로 사기에 오른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패배당하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적의 화살이 계백의 심장을 뚫고 적장의 칼이 목을 베는 순간까지 백제국을 향하여 피어난 붉은 꽃의 거룩한 산화(散花)여, 계백이여!
삼국시대의 역사서의 대명사라 일컫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계백장군에 대한 기록은 황산벌 전투에 대한 기록으로 국한되어 있다. 심히 안타까운 것은 백제본기와 계백 열전에 쓰여있는 내용보다 신라의 기록에서 관창 열전 등에서 오히려 계백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계백에 대한 기록은 철저히 전쟁의 승자였던 신라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인들 역시 계백의 적대국인 백제국의 장수였지만 계백의 인품을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겠다.
계백의 행동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분분하다. <동국사략>을 저술한 고려말 조선초 유학자 권근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가족을 순으로 죽인 그를 인륜을 배반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조선 후기 <동사강목>을 저술한 안정복은 죽지 않는 것이 몸을 보전함이 되는 줄만 알고, 죽는데 마땅함을 얻는 것이 몸을 보전함이 되는 줄은 모르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계백은 결코 후대에게 자신의 이름을 묻지 않을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역사의 한가운데서 그의 선택은 죽음뿐이었다. 그때 그의 죽음만이 최선의 윤리였고 최후의 애국이었으리라.
천사백 년 동안 우리의 핏줄을 타고 면면히 흐르고 있는 그의 뜨거운 DNA가 지금도 대한민국을 지탱하고 있지 않을까!
효와 인성에 대하여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입으로 말하는
위정자들 자신이 타락의 온상이고 퇴폐의 온실이다.
10억을 손에 쥐어 주면 시키는 범죄행위를
거절하지 않겠다는 중학생 숫자가 86% 된다는
조사자료는 왜 한국이 연 13년간 자살의 왕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이혼의 왕국, 저출산의 나라,
불명예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 효 교육이다.
1. 설 명절 차례상 앞에서
양대 명절 때가 되면 실향민들이거나 이북에 부모가 계신 5도민 들은 망배단에 가서 차례를 드린다, 보통 드리는 차례의 의미는 죽은 자에게 드리는 것이 지만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에서도 제를 올린다. 죽은 자의 영혼이 제사상 위에 오셔서 운감 하고 흠향하리라는 생각보다 산자의 그리움이거나 도리라는 생각이지만 이를 나무라기보다는 장려해야 할 거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제사는 왜 지내야 하는가?
첫째는 부모거나 선영의 유훈을 기리기 위함이다. 보통 가정마다 가풍이거나 가훈이 있다 정직 성실 화목 등 의미가 아름답고 본받을 만한 기치들이다. 보통은 부모님 대에서 면면히 전해 내려온 것들이어서 소중하게 여기고 가정의 바이블처럼 되뇌곤 한다. 제주는 이 유훈을 제사의 의미로 손아래 식구들에게 전 하곤 한다.
둘째는 천륜의 확인이다. 우리는 생판 모르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일가를 이루고 태어난 자식들로 하여금 다음 대를 이어 간다. 대를 이어 기는 행위를 두고 천륜을 이어간다고 말한다. 부모형제란 생태적 한계를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식구라는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서 한솥밥을 먹으며 일정기간 단위 공동체로서의 삶을 영위하였고 이에 대한 기본적 의무와 책임이 그리움 혹은 은혜 갚음이라는 차원에서 꼭 만나 뵈어야 하는 의례다.
더하여 가족 간의 화해와 이해의 장이 마련되고 부모님 생전의 공유했던 음식의 공유와 삶의 정서를 확인하는 장이 마련된다. 사회나 국가라는 공동체의 기본이 되는 행위의 연습이거나 배움의 기초적인 장의 마련이다. 하여 차례를 거르거나 이를 회피하는 가정이라고 하여 가풍도 없고 가통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 윗대로부터 물려받지 못한 경우와 경제적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하기로 서니 아침식사 전 차례 상 준비하여 절을 하거나 찬송가를 부르거나 묵도로 예를 갖추는 종래의 유교 방식이 아니더라도 행사를 경건하게 치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겠나?
필자가 겪은 이야기 하나를 전해드리고 싶다. 모처에서 특강이 끝나고 나서 강사 면담을 요청하는 부인 이야기다. 부인은 남편과 사별을 하고 자식 두 명을 키우고 있었다. 남편 살아생전 남편은 부인을 하녀 취급 이거나 속된 표현으로 막가는 몸종 수준으로 하대 받았다고 한다. 자식 때문에 뛰쳐나오지도 못하고 산다는 것이 생지옥 같았다. 남편은 급사했다. 남편이 급사하므로 환경의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는데 웬걸 자식 둘이서 남편 살아생전 보다 남편보다 더 그악한 패륜 행위를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아니라 막가는 식모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하는 데 이를 어쩌면 좋으냐는 질문이 강사를 만나자는 요지였다.
필자는 남편 제사를 지내느냐고 물었다. 지낼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의 훈수는 제사음식을 마련함에 있어 자식들을 대동하고 최고 제수를 장만하라. 최상의 제수품을 선택하고 정성을 다해라. 제사를 왜 지내려고 하느냐고 묻거든 생전에 나의 속죄를 위함이라고 대답해라. 불참하려 하거든 아들 녀석들에게 애원하고 사정해라. 함께 의식을 치르기를 거부하거든 지켜만 봐달라고 해라, 제상 앞에서 밤을 새워 남편의 잘못을 용서하고 그 잘못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사죄하라고 훈수를 했다.
그 후 필자에게 연락이 왔다. 자식들이 고쳐졌다는 것이다. 제사상 앞에서 오랫동안 흐느껴 우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형제가 엄마 그만 울어라, 우리가 잘못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많이 잘못했다. 우리도 너무 잘못했다. 울면서 어머니를 일으켜 세웠다고 한다.
제사가 계기가 되어 모자지간의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훈수의 대가로 식사를 모시겠다는 전갈이 와서 이 사실을 공개한다.
명절에 휴양지를 찾아가서 콘도나 펜션에서 제사음식 세트를 주문 배달받아 제사를 지내는 일부 기족들에게 전하고 싶다. 멘탈이 붕괴된 조상 숭배 사상은 꼭 자식들에게 전수된다. 필자 자신에게 전하는 말이기도 하다.
註. 운감(殞感) 제사상에 차려놓은 음식을 귀신이 와서 맛봄.
흠향(歆饗) 천지의 신령들이 제상에 진설한 음식을 받음.
2. 물 건너 간 대한민국의 인성교육
인터넷 기사를 살펴보다 다음과 같은 기사를 발견했다. “22일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는 의정부경전철과 지하철 등에서 중학생들이 노인을 폭행하거나 노약자석에서 시비가 붙은 장면이 촬영된 영상이 돌고 있다고 한다. 해당 영상을 보면 중학생으로 추정되는 남학생이 여성 노인의 목을 조르고 바닥으로 넘어뜨리는 등의 모습이 담겨있다. 두 사람은 서로 심한 욕설을 주고받기도 했다. 또 다른 영상 속에서는 지하철 노약자석에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앉아 있다가 남성 노인과 시비가 붙어 욕설을 하다가 되레 훈계를 듣는 장면 등이 찍혔다. 한편, 이 영상은 영상 속 학생들이 직접 촬영해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필자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대구에서의 사건은 수업시간 잠자는 학생을 깨우자 화가 난 학생이 복도에 나가며 욕지기를 하였다 이를 달래려고 학생 뒤를 쫓든 교사가 학생의 폭력으로 코뼈가 부러졌다는 기사를 접했고 몇 달 후 대전에서는 수업시간에 임시직 여교사의 머리채를 잡아 휘두른 중학생의 기사를 읽었다. 더 아연할 기사는 10억을 주면 당장 범죄행위에 가담하고 감옥으로 가겠다는 중학생이 86%였다는 기사였다.
신문의 사회면에서 잠시 회자되다가 사라져 갈 일회성 청소년 문제겠거니 하거나 혹은 이들이 몇이나 되겠냐는 편안한 대처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골병들게 하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하지만 더 아연할 일은 예방 교육이거나 장기적 대안 마련에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인성교육의 획기적 변화를 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 얼마나 시급한 것인가에 대하여 둔감하다는 것이다.
중학생의 나이는 13세 전후다. 이스라엘에서는 성인식을 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감수성이 예민하기도 하고 보통 사춘기라고도 일컫는다. 일련의 사태에 대한 책임은 1차 적으로 부모에게 있고 2차 적으로는 교사에게 있고. 사회에게 있고 특히 볼썽사나운 정치권의 언행에 있다.
교사의 교권은 무너지고 학생 인권이라는 미명 하에 회초리가 복원되지 않는 한 악순환의 골은 깊어지고 사회는 약육강식의 짐승사회보다 더 간특해지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이 도처에서 발생하게 될 것이다. 경찰관이 강도가 되어 금은방을 털고 법무부 장관이 아침저녁으로 거짓을 말하고 유전 무죄 무전유죄가 거의 모든 죄수들의 억울한 변론 사유가 되어 있는 대한민국이 이나마 굴러가는 이유는 아직은 선량한 국민이 사악한 무리들보다 훨씬 많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되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잘못된 시대정신을 바로 세울 수 있는 대안은 없을까? 초강대국이라고 하는 미국 국민은 확률적으로 불이 꺼지면 강도로 돌변할 확률이 많고 한국은 등불을 밝혀 길을 안내한다고 한다. 모든 것을 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나라는 없다지만 법이 없어도 약자에 대한 측은지심과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양심은 인간에게 부끄러움(羞惡之心)을 알게 하는 인간만의 전유물을 안겨 주었다. 이는 태교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인간의 기본 소양이며 이를 제대로 교육하지 않으면 사람의 탈을 쓴 악마나 악귀로 변한다.
입으로는 교육 제일주의를 부르짖는 전교조 교사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패륜 행위들을 보면서 왜 침묵하고 있는지도 자못 궁금하다.
3. 孝行 문화의 새로운 발견 - 삼대가 효의 필요성과 효과 -
길을 잃고 헤매는 윤리기준의 실종은 4차 산업 혁명 시대라는 변환과정과 만나서 재기불능의 사태에 처해 있다.
컴퓨터문화가 신의 영역에 도전장을 내고 AI의 기능이 사람을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더하여 대가족 제도의 붕괴가 몰고 온 가족 해체는 그 정도가 형언할 수 없이 심각하다.
중학교 교실에 들어가 학생들에게 묻는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사는 학생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이다. 1/2 수준이다. 산업사회의 도래와 함께 무너진 대가족 제도에 이어 우리는 핵가족 시대를 맞이하였고, 뒤이어 핵가족제도도 붕괴를 거듭하여 한 지붕 아래 살면서 하루 세끼 중 한 끼의 식사도 가족이 함께 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일터나 학교로 가는 나노 가족 현상이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이어서 출퇴근이나 등하교에 보내는 시간이 아깝다는 이유로 독거 가족 시대가 찾아왔고 반려동물과 함께 기거하는 혼밥족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간다. 애완견이나 고양이와 보내는 시간보다 컴퓨터 게임이거나 인터넷의 세계를 유영하는 혼밥족은 이제 개와 고양이와도 결별하고 모니터 앞에서 듣고 보고 줄기면서 생활의 행태를 바꾸어 간다. 이름하여 사물인터넷 가족 시대다. 진일보하여 찾아온 4차 산업 혁명 시대는 로봇과 스위치를 통하여 행동영역과 사고 영역의 대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줄기세포를 통하여 치료용 인간을 복제하여 만들고 필요한 만큼 사용 후 용도 폐기하여 소각장에 버리는 시대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이 경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실로 아연하다, 가족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정립하여야 할까?
가족윤리와 가치 질서를 어떻게 지켜 내야 할까? 설마 어떻게 되겠지 하는 기대 속에 패륜 범죄와 패역 범죄는 날로 기승을 부리고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일상 속에 인성은 동물의 그것만도 못하게 퇴락되어 간다.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입으로 말하는 위정자들 자신이 타락의 온상이고 퇴폐의 온실이다. 10억을 손에 쥐어 주면 시키는 범죄행위를 거절하지 않겠다는 중학생 숫자가 86% 된다는 조사자료는 왜 한국이 연 13년간 자살의 왕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다. 이혼의 왕국, 저출산의 나라, 불명예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효교육이다.
차제에 대전의 한국 효문화진흥원에서 행하고 있는 3대가(三代家) 효 캠페인이야 말로 발상도 탁월하고 효과도 만점이다. 조부모 세대와 부모세대와 함께 삼대가 어울려 가족애를 새기며 은혜와 감사를 공유하는 캠페인이기에 꼭 장려해야 할 사업이다. 이스라엘에 효교육이 필요 없는 것은 3대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첨언한다. 가족의 소중함을 통하여 내 이웃과 사회의 관계 또한 나눔과 소통의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4. 인성교육의 현주소
2018년 인성교육진흥법이 국회입법으로 통과 제정되었다. 자식이 부모를 극살 하는 패륜 범죄와 세상을 하직하려는 자살자의 속출, 내로남불의 팽배한 개인주의 사조는 시정되어야 할 국가의 덕목이면서 정치의 화두가 아니었던가?
모법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각 시. 도에서 조례로 제정이 되었어도 달라진 것이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어쩌면 정도가 더 심해지고 있는 듯하다. 시. 도 조례가 제정이 되었어도 첫해는 미동도 하지 않던 지자체에서 표현상 어쩔 도리가 없었던지 정말 쥐꼬리만 한 예산을 세워 공시를 통해 공모라는 이름으로 인성교육사업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 나라의 미래는 교육으로 밖에 승부를 낼 수 없다고 주창해온 터라 필자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만나 뵙는 것처럼 반가웠다. 그러나 이를 집행하는 시. 군. 구의 교육담당 주무관과 주무부서의 공무원들의 무성의와 무지는 가히 필설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은 하나같이 교육의 필요성은 공감했지만 인성의 정의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인성이 맹자의 성선설에 근거하여 착하기만 한(善) 것이라면 왜 교육이 필요하며 세상이 인면수심(人面獸心)으로 변해 갈 것인가? 에 대한 회의나 고민은 별개로 하고 책정된 예산을 교육 효과적 측면보다 선심예산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형식상 심의라는 통과의례를 거치지만 주무부서의 인맥을 찾아 심사위원이라는 직책을 부여하고 전문성보다 일반론적 관점에서 시행기관을 결정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문화라는 것은 살아 숨 쉬는 자연과 더불어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여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문화 사업은 가치 추구 사업이다. 함에도 충청남도나 천안시나 위탁업무를 지정받은 문화재단의 담당 주무들의 머릿속에는 대중문화만이 문화로 착각하고 있는 듯하였다.
효 문화는 세계 유네스코에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는 한국 최고의 문화유산임에도 이의 취급을 꺼려하고 있고 자신들의 업무와는 무관한 듯 이맛살을 찌푸린다. 인성과 효의 관계는 주지하는 것처럼 선행(善行)을 모토로 하고 있다. 효는 부모를 비롯하여 세상을 살면서 자신에게 혜택을 준 모든 이들에게 은혜를 갚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품격이 골격을 갖추어야 한다. 인간의 품격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이 나라에 미래가 있을까를 우려하는 사람들과 이를 지켜 내려는 가없는 노력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이를 위해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마땅하다. 때문에 모든 공직자 자신이 인성교육의 피 교육자이면서 교육자가 되어야 하고 솔선수범해야 한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국민을 호도하는 정치꾼들의 범람, 많이 배우고 누리는 몇몇 위정자들의 위선과 가증스러운 작태 속에 배울 것이 무엇이며 인성교육은 해서 무엇 하느냐는 자조가 팽배해지면 팽배해질수록 멸망은 가속도가 붙는다.
날만 새면 세치 혀끝으로 양산해내는 거짓말과 근거 없는 가짜 뉴스로 민심을 호도하는 세력이 진짜 적폐 세력이며 적폐를 청산한다고 적폐의 탑을 더 높이 쌓아 올리는 세력이 “나라 팔아먹는다.”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닫는 순간 보트 피플로 목숨을 저당 잡혀야 하는 현실 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인성교육은 목민심서조차 읽어보지 않은 모리배 같은 정치권 인사들과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철밥통 공직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교육이다. 인성교육장에 들어와 교육은 받지 않고 표구걸 하고는 교육 분위기 깨고 나가는 선출직 의원나리들에게는 더할 나위가 없다.
최근 인성교육 예산 받아다 강좌 팔이 하는 비인성교육자도 나타나고 하는 것을 보니 이 나라에 인성 교육은 없는 것 같다. 돈만 준다면 살인이라도 하고 감옥에 가겠다는 중학생이 86% 인데도 이 나라 이대로 가야 할 것인가? 내로남불만이 살아가는 방법이라면 본능만 존재하는 미물 세계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다.
5. 인재(人才)가 인재(人災)인 세상
말세가 가까워지면 인심도 말세가 되고 인성은 처참하게 일그러진다.
11월 4일 천안 소재 모 중학교에 학생들의 꿈과 끼를 소재로 하는 강의에 들어갔다. 예산 관계로 인하여 필자는 무료 서비스 강의를 했고 다른 강사들에게는 소정의 강사료를 지급했지만 자라나는 꿈나무들과 만남이어서 필자는 설레기까지 했다. 강사의 첫 질문은 여러분은 왜 학교에 나옵니까? 였다.
앞줄에서부터 나온 대답 갈 데 없으니까, 엄마가 가라고 하니까, 점심 얻어먹으려고, 놀 데가 없어서. 배우려고 순이다. 기가 질린 탓으로 말문을 막으려 하자 뒷줄에서 한 학생이 소리를 지른다, 선생님! 행복하려고요.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자 입을 닫는다.
학교라는 자전(字典)적 의미, 학생이라는 자전적 의미를 바꾸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시대에 인재(人才)가 길러질 수 있을까? 인재 양성소가 학교일까? 가정에는 부모가 있고 학교에는 교사가 있는 것인가? 학부모의 자식에 대한 열망은 사람답게 성장하는 것을 원하는 것인가. 돈 버는 기계를 만들거나 사회적 위치를 선점하여 군림하고 호령하는 자를 만드는 것을 원하는 것인가?
학교 입구에 "학생 중심 학교"라는 현수막이 슬로건으로 걸려 있다. 학생이 갈 데 없어서 오는 학교, 놀 데 없어서 오는 학교, 점심 먹으러 오는 학교, 보낼 데 없어서 보내는 학교가 학생 중심 학교라는 말인가? 2025년에는 전국의 특목고 국제고 등을 일반 고등학교로 전환시키겠다는 정부 당국의 발표가 잇 다른다. 가정에 부권(父權)이 사라지고 학교에 교권(敎權)이 사라진 지 오래다. 학생 인권을 주창하는 전교조 교사들에게 묻고 싶다. 학생 인권을 침해하거나 찬탈하는 비인권 세력이 누구냐고? 지킬 것 없는 허허벌판에 선 문지기가 필요한 것인가를...
말로 말 만들어 교묘하게 언어의 사슬로 사람을 혼동하게 만들어 숨어 있는 불순 의도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저의를 가진 자들의 천국이 되어 가고 있는 학교 당국을 보면서 기가 질린다. 여기에서 배출된 학생들이 인재(人才)가 될까? 인재(人災)가 될까?
수업 자세 또한 불량하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옛말이기는 하지만 그 뜻은 교권의 위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의미 일진대 교권은 없어지고 학생 인권만 존재한다면 이제부터는 스승이 학생의 그림자를 밟으면 안 된다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는 말인가.
눈앞의 편익에 취해 지구가 멸망의 궤도에 진입해 있는 것처럼 바보의 평준화를 통하여 인재(人災)의 수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대한민국은 정치인들의 놀이터나 밥줄이 아니다.
6. 창의(創意)는 어디서 오는가?
창의(創意)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라면 새로운 의견이나 생각이다. 그 반대말은 사전에 없다. 사전적 의미로 말을 만들어 낸다면 기존의 생각이나 남과 공유하고 있는 의견쯤으로 봐야 될 것 같다. 관습의 틀, 모방의 틀을 깨고 부정되거나 고개를 갸우뚱해야 하는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낸다면 이것을 우리는 창의라 불러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현재가 최고라는 자만을 가진 사람이거나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로 세상을 새롭게 바꾸어 나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우리는 작금 시대를 융, 복합 시대라고 부른다. 기존의 사고가 틀을 벗어나기 위하여 새로운 것과 접목되어야 한다. 새로운 것은 있을 수도 있고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찾아내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 노력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를 얻어 낼 수 없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다. 현재는 과거 위에 서 있다. 과거 없는 현재란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좌표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어제와 오늘이 있어야 내일을 예측할 수 있고 그 예측을 벗어나게 하거나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창의다.
어제와 오늘을 토대로 하여 내일을 보다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복합이요 융합이라고 보면 된다. 인류 역사는 끊임없이 인간의 두뇌 속에 살아 숨 쉬는 융, 복합 의지로 인하여 새롭게 발전되어 왔다. 정신사적 의미로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고 있지만, 물질의 역사는 상상을 초월한다. 세계를 품에 안고 있는 빅 데이터의 위력, 제4차 혁명 시대를 예고하고 있는 AI 로봇이 그 예다.
인간이 로봇의 두뇌 속에 인간의 간특함이나 사악함을 심어 인류를 농락한다면 지구는 순식간 멸망의 궤도에 진입하게 될 것이다.
선(善)의지를 심어 인류 파괴를 금기의 선언적 명제로 선택하게 한다면 이야말로 금상첨화가 아니겠나.
하여 창의란 현재를 전제로 하여 얻어질 미래의 가치이어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얻어질 보편적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 가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모방에서 온다. 경청에서 온다. 이해와 포용에서 온다. 유연한 사고와 역지사지를 통해서 얻어진다. 독선과 오만, 자만과 오기는 창의와는 차단될 수밖에 없는 장벽이다.
적폐라는 이름으로 형성되고 있는 역사 왜곡이나 역사 부정은 어제의 잣대로 재단된 어제를 부정하는 행위이고 새로운 내일을 향한 융, 복합식 창의를 막는 행위일 수도 있다. 공무원의 권위를 지키기 위하여 이중, 삼중으로 요구하는 행정 요식 서류, 선명하지 못한 이기적인 작태의 여지를 묵과하는 이현령 비현령식 원칙 없는 행정 등 지금까지 국민 불편을 야기하고 있는 제반 사안들이 적폐다. 불(火)이 없어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드는 원시인들을 방화 위험군으로 분류. 현재의 법으로 소급 적용하여 처벌하려 한다면 소도 웃을 일이다. 창의란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희생하고 봉사하려 는 착한 의지에서 얻어지는 결실이다.
인정하라! 용서하라! 사랑하라! 그러나 잊지 마라!
7. 유대인의 회초리 교육
유대인 랍비를 초청하여 회초리 문제를 두고 그들의 견해를 들어 본 일이 있다. 대한민국은 여하한 경우에도 회초리를 들어서는 안 된다. 아동 학대나 부모 폭력은 법률로 금지되어 있다. 그 목적이 교육적이라 하더라도 회초리를 맞는 자식이거나 이웃이 고발하면 회초리를 든 부모나 교사는 형사 처벌을 받게 되어 있다.
과거 서당이거나 학당에서는 으레 회초리는 훈장으로 불리는 선생님의 교육용 체벌 도구이다. 필자가 해병대 장교 교육 시절 훈련 도중에 "밧다"라는 야구방망이로 엉덩이를 얻어맞으며 그 고통을 참아 내었든 시절에는 기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교관이거나 선배 장교의 매였다. 드물게는 구타사고로 인하여 불구가 되기도 했고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기도 했지만, 군인으로서의 강인한 정신력의 모태가 되었다.
회초리나 매를 예찬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기능과 순기능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유대인은 만 13세까지 회초리를 든다. 학교나 사회 교육의 과정에서가 아니라 오직 부모의 교육용 사랑의 매라도 그들은 말한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때리기를 원하겠는가. 만 13세가 되고 성인식 시험에 응하여 합격하는 순간에 회초리는 제 기능을 다 한 것으로 간주되고 벽장 속의 유물이 된다. 유대인 랍비에게 물었다. 한국에서의 회초리 사용은 금지된 지 오래다.
회초리의 사용은 부모 폭력, 아동 학대죄에 해당된다. 여하한 이유로든 사용되지 못한다. 너의 민족은 왜 회초리를 사랑의 도구라는 미명으로 가정교육의 필수 도구로 사용하는가? 랍비의 대답은 명료했다. "못쓰게 자란 나무는 밑동째 잘라내야 한다."
구태여 설명을 요할 필요가 없다,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패륜 범죄와 패악은 그 발상지가 가정이고 학교다, 이에 맞서는 사회 또한 범죄를 부추기는 범죄의 대상이거나 목적물이 되어 있다. 범죄 예방에 들어가는 천문학적 예산의 구성비는 연간 예산의 1/4이다. 범죄자가 양산되면 이를 통하여 먹고사는 집단이 경찰, 검찰, 법원이다. 우리는 회초리를 통하여 이스라엘 역사를 가르치고 사람으로서의 품성을 지니게 한다, 회초리 맞고 입원한 환자도 없고 병신 된 어린이 없다. 예방 교육은 사후 양방 문에 비하여 1/10의 비용으로 효과는 증대되고 불신 풍조는 1/100로 준다.
나는 나 스스로의 성장 과정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현실도 되돌아보았다.
국민들의 국가관. 정치하는 사람들의 변절과 이기심, 돈 앞에서 양심을 파는 기업인들, 사교 집단을 능가하는 비윤리적 종교집단들, 사도(師道)를 저버린 교사들, 특히 학교 교육을 어떻게 하였으면 중학생의 경우 할아버지 이름 석 자 쓸 수 있는 학생이 가뭄에 콩 나듯 희귀하고 고등학생의 경우 10억을 지금 준다면 시키는 범죄 행위를 저지르고 감옥으로 가겠다는 학생이 44%에 해당하는 나라가 되어 있을까이다. 더 무서운 현실은 이를 방기하며, 어떻게 되겠지 하는 안일한 국민의식이다. 어린 자식을 내던져서 죽게 하고 굶주려서 죽게 하고 유기하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하등동물만도 못한 짓을 하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성장에 1차 적인 책임은 모두 부모다.
유대인들은 그들 민족이 430년간 이집트의 종노릇으로 인간 이하의 푸대접을 받았고 거쳐 없는 방랑 생활 40년을 살았고, 독일 정교도들에게 600만 명이 학살되었든 역사를 회초리를 통해서 각인시키고 있다. 동족상잔의 참혹한 6.25와 일제 36년의 치욕의 역사를 등에 업고 사는 국민들. 우리도 이제는 아픈 역사를 다시 써서는 안 된다. 회초리는 예방 백신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내가 사는 이유
“화두를 비대면으로 돌려 보자.
문자 그대로 얼굴을 마주 보지 않는 것을
비대면이라고 한다면
꼴 보기 싫은 사람들 얼굴 안 보니 좋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얼굴 안 보고는 못사는 사람들에게는
천형(天刑)이 될 수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 미운 사람, 고운 사람 있게 마련이라면
미운 사람도 자주 보면 고와질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어서 코로나 19가 종식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류의 바람이 되어버렸다.”
1. 지구의 종말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살상자가 속출한다. 그들은 왜 죽어야 하는지? 그것이 하늘이 내린 형벌인지 인간의 욕심이 자아낸 희생의 제물인지. 아니면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천수 (天壽)인지 코로나 -19로 인하여 죽어 나간 생명과 지금 계속 죽어 나가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인류의 생존이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누구도 죽는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그런 이유로 하여 살아생전 나눔과 소통으로 서로를 인정하고 베풀며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은 자신만은 평생 죽지 않고 살리라는 어설픈 믿음으로 하늘의 명령을 거역, 속이고 빼앗고 죽이고 세 치 혀끝으로 명분을 포장한다.
중국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세계무대에 공포의 산물로 확산시킨 이유를 우리는 생화학적 세균전의 전초전으로 상상할 수 있다. 지금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향해 쏘아대고 있는 미사일은 왜 만들어졌으며 더 나아가 이북에서 장거리 유도탄에 핵을 탑재하여 그들의 적대국에 쏘아댄다면 그 결과는 어떡할까? 모골이 송연하다.
남극이거나 북극의 빙산이 녹아 바다의 수온이 높아가고 육지가 바닷속으로 침하하는 생태계의 변화 조짐은 무엇으로 막아야 하나. 지구의 온난화가 가져오는 대기권 위의 오존층에 구멍이 나면 인류는 멸망한다는 사실에 대하여도 이를 적시하고자 한다. 인류의 멸망은 지구의 종말을 의미한다.
전시 작전 중 휴전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경우 이북의 김정은 정권은 이남의 대한민국에게 가져야 할 적대 감정이 무엇인가를 묻고 싶다. 대한민국 정부가 경제적 도움을 요청한 일이 있는지. 혹은 흔한 예기로 통일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하겠다고 선포했거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함박도 내어주고 국경의 감시초소 철수하고 필요할 때마다 이런저런 이유로 경제적 도움 주고 대화하자고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면 이의 응답이 미사일 도발인데 그 이유가 무엇이겠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의 이유와 맥을 같이 하는 사고라고 추정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러시아가 하고 있는 침략 행위에 대하여 분기탱천해 있지만 속수무책이다. 대결 구도로 인하여 3차 전쟁이 발발하면 세균전 생화학전 그리고 핵을 사용하게 된다.
지구의 종말이 눈에 보인다. 국경을 넘어 목숨을 보전하려는 난민의 행렬을 보라. 지상 보도에 의하면 160만이 국경을 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전남 인구다. 과거의 전쟁은 칼과 창이었다. 총포 기술이 확대하여 총과 포가 다음 단계였다, 지금은 무인 공중전이 되었고 컴퓨터가 초정밀 타격을 해댄다. 생화학 무기로 세균전으로 급기야는 핵전쟁으로 공멸을 자초한다.
그 이유가 인간의 욕심에서 시작되고 이에 동조하는 세력들의 공조가 전쟁으로 간다. 전쟁은 이겨도 공멸이고 저도 공멸이다. 국제사회의 질서도 양보 없는 과욕으로 인하여 균형이 깨지고 전쟁으로 유도된다. 자제 없는 욕심의 끝에는 공멸이 있을 뿐이다.
2. 아! 우크라이나
교과서에 국가의 3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보 국가, 발전 국가, 민주국가, 복지국가 순으로 발전단계를 거치는 것이라는 설명을 부연한다.
조국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를 3.8선으로 갈라 남북이 다른 이념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국민은 3.8선 이남의 경우 5천2백만, 3.8선 이북의 경우 2천5백만으로 추산 약 7천6백만이다.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대통령 중심제의 국가이고 이북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방위원장으로 호칭되는 인민 위원장제도다.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존재하면서 동족이라는 이유로 서로가 통일을 염원하면서도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주권이란 무엇인가? 과연 목숨보다 소중한 것인가? 우리가 치른 남북전쟁 6.25 전란이 발발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일본이 대동아 공영을 외치면서 36년간 수탈은 왜 이루어졌는가? 식민지로 전락되거나 패전국이 되었을 경우 국민감정은 어떤 것이며 왜 국민은 목숨을 담보 삼아 항거하여야 하는가? 집단 살육이 일어나고 힘들여 만든 도시가 파괴되고 패전이 몰고 온 무법천지를 피해 피난의 고행을 겪어야 한다.
눈앞에 전개 되고있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전쟁은 공멸이라는 생각과 전쟁의 참혹함에 치를 떨어야 하는 공포 속에 평화는 공존의 정체성이라는 각성의 시간을 갖고 있으리라 예상한다.
하필이면 이런 시국에 대한민국은 대통령 선거를 치루어야 하고 당선 가능성이 있는 여. 야간 후보의 평화관은 극명하게 대립각을 세운다. 총론은 하나지만 그들의 처방 대안은 다르다. 다를 수 있음에 대하여 인정한다. 그러나 다른 처방이 애국적 견지가 아니라 득표적 견지에서 하는 헛소리 수준이라면 이들은 대통령으로서의 철학도 비전도 없는 정치 야합꾼이다.
국가 안보의 뚝이 무너져도 대통령은 되어야 하겠다는 후보는 정리되어야 하는 이적 범죄자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데서 평화를 주창하는 것은 무인도에 가서 자유를 외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수도를 지키며 죽음을 각오하는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항전 의지는 결국 소련을 손들게 하리라. 각국에 산재해 있는 대외 국민들이 조국 수호를 외치며 전쟁을 불사하고 총을 들고 전장을 향한다면 결국 정신전력에서 침략자는 손을 들고 마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기 때문이다.
이제 시리아 난민 사태 때보다 더 많은 난민이 어제 일자로 100만이 넘었다고 한다. 이것을 보고도 평화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매력에 이끌려 무장을 해제하는 일에 손뼉을 치고 끝없는 도발과 위협으로 국민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모는데 저자세로 일관하고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비위 맞추기로 하 세월을 보낸다면 이것이 적의 오판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아! 우크라이나여!
침략자는 멸망한다는 교훈을 지구촌의 바이블이 되게 해 주려무나.
3. 팬더믹의 산물
코로나-19로 인해 받는 불편이 고통으로 치닫는 과정 속에서 팬더믹이란 용어의 의미를 찾아봤다. 전염병의 6차 단계에서 세계적 대유행으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 때 이를 이르러 팬더믹이라고 한단다.
문방구를 운영하는 막내아들 녀석한테 문자가 왔다. 아버지! 장기대출을 좀 해주세요. 이토록 어려워 보기는 처음이에요. 그는 필자가 운영하는 보통 규모의 문방구를 물려받았고 5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큰 손주는 대학을 포기해야 할 것 같다고 한다. TV 화면에는 밤하늘의 별도 달도 따다 줄 것처럼 혹세무민에 가까운 너스레를 떨고 있는 대통령 후보군과 정당의 기생충 집단들의 말장난이 한창 기세를 높이고 있다. 지지집단을 불러 모아 치고받고 빠지고 들이밀며 도탄에 빠진 국민들을 위하는 척 생쇼를 하고 있다. 적어도 필자의 눈에는 그렇게 비친다.
나는 막내아들 녀석을 위하여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어렵지만 4년제 대학을 나왔고 장교로 복무를 마친 후 가업을 물려받아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하다 손을 든 것이다. 코로나-19 탓인가? 본인의 무능인가? 부모 잘못 만난 탓인가? 정부의 정책 탓인가?
BTS는 열광하는 1억 명 이상 세계의 젊은 펜들이 뉴욕 공연을 보기 위하여 한겨울 텐트 속에서 추위를 견디어 내며 티켓 구입을 위하여 밤을 지새우고, 아프리카를 비롯한 어려운 나라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국민들은 생명을 부지하기가 어려운 처참한 형극이다.
이런 이유로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눈부신 발전을 해 왔다는 대한민국도 양극화의 극점에서 제로섬 게임으로 날밤을 지새우고 나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적으로 돌리고 내 밥그릇 챙기려고 상대 집단을 도둑 집단으로 범죄 집단으로 내몰며 여론을 무기 삼아 국민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하여 그 반사이득으로 정권을 쟁취하려 하고 있다. 한마디로 양심을 저당 잡힌 양아치 집단이 되어 철면피한 언행으로 우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더 두려운 것은 저들의 행각에 네 편 내 편이 되어 휘말려 드는 국민들의 무감각과 무 경각이다. 그놈이 그놈이라는 이라는 이유로 하여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자포자기의 그늘에서 영원히 저들의 종속 집단으로 전락되어 간다는 것이다. 6단계 수준의 팬더믹 보다 더 공포스러운 것은 자포자기의 늪 속에 빠지는 일이다. 블랙홀 같은 늪 속에 빠지고 나서야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발버둥 치고 허우적거려도 이미 늦어 버리는 것이다.
필자의 막내아들 녀석은 아비 잘 둔 덕으로 도박장도. 마사지 샾에도 못 가봤고 유산 한 푼 못 받았어도 죽는소리도 죽는시늉도 안 했는데 어지간히 급하긴 급한가 보다는 생각이 잠기고 나서는 평생의 업보가 자식에게 가는 것이나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의 팬더믹은 코로나-19가 아니라 실의와 좌절의 늪 속에서 너도나도 체념의 덫에 치어 삶을 포기하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는 일이다. 선거도 빨리 끝나고 코로나도 빨리 끝나고 갈등과 대립도 이 정도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4. 독서의 계절을 맞이하여 - 문학은? -
고독은 문학을 낳고, 허무는 절망을 잉태하는 것이나 아닌지?
별 볼 일 없는 목숨이 별 볼 일 있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살만큼 살았어도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문학은 말(언어)입니다. 입속에 넣고 우물대는 말도 문학이요. 내뱉어지지 않는 설움을 눈물로 짜내다 자기 설움에 액셀을 밟아 폭풍 같은 울음이 되게 하는 것도 문학입니다. 일몰 앞에 앉아 넋을 놓고 강물을 바라보다 홀연히 그리움에 젖어 강에 몸을 던지는 정서도 문학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국민 여러분!
문학 또한 사랑과 정성의 소산입니다.
세월을 살다 보니 글사랑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사랑이 기쁨이요 만족이요 삶의 원천입니다. 하여 타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공유하며 희로애락이 글을 읽고 쓰는 과정임을 인정합니다.
사랑을 모르는 자, 독불장군입니다. 공유를 모릅니다. 문학은 일종의 마약 같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욕망과 현실의 조화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사실에 귀의할 줄 모릅니다.
함께 가면 오래 걸을 수 있습니다. 홀로 가면 쉽게 지치고 때로 짜증 나고 오래 걷지 못합니다.
아직도 필자는 기억이 생생합니다. 대전소재 대덕대학에서 문학의 산실이라는 야간 강의 시간, 제자들과 눈 덮인 대덕 벌 기슭을 오르며 밤이 온통 흰 도화지 같았던 설원은 전율이었습니다. 기억의 바다 속을 일렁이는 지워지지 않는 각인된 추억입니다. 문학은 추억의 산물이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리의 노예가 되어 쓰레기의 제물로 전락합니다. 우리의 탐욕은 절제를 모르고 부패의 늪 속을 헤맵니다.
스스로를 탄핵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으레 그러려니 하는 자포자기 속에 서서히 망가져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망가져 가고 있는 이유를 모두 내 탓 아닌 남 탓으로 돌리며 자위하고 있습니다. 문학은 남의 이야기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건져 내고 쓰다 보면 반성과 성찰의 시간과 대면하게 됩니다.
본능이 이성을 이기면 짐승이고, 이성이 본능을 좌지우지하면 神이고, 본능과 이성이 갈등하면 인간입니다. 문학은 삶입니다. 인간을 사람답게 만들어 주는 훌륭한 기능을 가졌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정진을 빌어 봅니다. 쓰기 싫으면 읽어 보시고 지치면 기록으로 끄적거리며 꼬물거리는 글자 속에서 자신을 비추어 보십시오.
문학은 삶의 길잡이요 지평입니다.
독서의 계절 코로나-19로 지친 심신에 보약이 될 것입니다.
5. 혼밥족에게 드리는 쓴소리
필자는 밥상머리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의 부재를 탓하며 가족제도의 붕괴를 안타깝게 생각해 왔다. 농업사회는 소품종 대량생산시대였다. 주식은 쌀이었고 보리는 준 주식이었다. 쌀과 보리의 소출은 농지가 아니면 안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 속에 국가 권력은 세습체제가 많았다. 사유재산 제도가 인정되기는 했지만, 절대권력의 비호 속에 탐관오리들이 득세하였고 간신배들은 권력자들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였다.
그러나 생산체제가 다품종 소량생산 시대로의 전환과 더불어 가족제도는 붕괴를 걷기 시작한다. 이른바 산업 사회의 도래다. 붕괴되어 온 대 가족 시대 이후에 출현 된 가족제도를 우리는 핵가족이라고 명명한다. 핵가족 시대의 특색은 가부장적 권위가 무너지면서 다시 핵분열을 일으켜 나노가족, 독거가족, 사물인터넷 가족, 현재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가족제도로의 전환을 지속해 왔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 한 끼의 밥도 함께 먹지 않는다면 이를 나노 가족이라고 부른다. 부모와 자식을 비롯하여 가족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한집안에서 살면서 밥상 앞에 함께 앉아 지금까지 이어온 밥상머리의 만남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어 가족관계는 독거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직장이거나 학교가 원거리인 경우에 근처로 생활의 터전을 옮긴다.
혼자 사는 외로움 때문에 반려동물을 벗 삼아 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식사를 혼자서 처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족속을 혼밥족이라고 부른다. 물론 나노가족 제도의 연장 선상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식구(食口)의 개념은 새롭게 정리되어야 할 수밖에 없다.
24시간의 하루 동안 3시 세때에 세끼의 밥을 먹어야 산다는 종래의 개념 속에 밥은 식구들의 생명과 건강이 직결되어 있다고 여겨왔고 지금도 유효하다. 가족은 식사를 함께하며 밥상머리에서 가족의 소중함과 소중한 만큼 소통의 대화를 나눈다, 공동체 의식을 공유할 뿐 아니라. 생명윤리의 정체성을 깨닫게도 된다.
음식 속에 녹아있는 영양과 준비한 어머니(어머니가 아니라도)의 손길에 감사할 줄 알게 된다. 그러나 혼밥족에게는 밥상머리가 어딘지 왜 감사를 해야 하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지도 못한다. 밥상머리 교육은 영원히 실종되어 버린 것일 수도 없다. 배고프면 먹고 배부르면 굶는 인간과 구별되는 하등동물들의 그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사람과의 관계를 통하여 서로가 대등한 인격체임을 인식하면서 먹고 마시는 행위를 통하여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각인 된다. 소중한 인간관계가 정립된다.
인정의 미학이 자신에게 결여된다면 이는 혼밥족들의 불행이 아닌가. 돌이킬 수 없는 추세 속에 함께 있어도 없는것이나 똑같은 가족 개념은 비단 혼밥족에게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 모른다. 객지에 분가해 사는 자식들과 한 끼 밥을 같이 하려고 기다리는 늙은 부모님들에게는 자식과의 한 끼 밥을 같이 하는 것이 평생동안의 로망이 되어 버린 현실이지만 냉랭하기만 자식들의 모습도 목불인견이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빚어지는 아픈 현실이 혼밥족들에게는 위로가 될지 모르지만, 혼밥족들의 홀로 밥 먹기가 지속되는 한 이들의 주변과 이웃에 대한 상호 배려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옆집을 불러들여 가끔씩 식사를 하는 미풍양속이 무너지면서 옆집에 불이 나도 함께 불을 끄기보다 소방관 뒷주머니에 봉투를 찔러 넣어 주며 내 집에 불이 옮겨붙지 않게 하라는 민심이 요즘 민심이라고 한다. 기막힌 현실이다, 이유가 이웃사랑 부재라면 혼밥족에게는 불행이든 행복이든 공유의 기회가 거의 없어질 수도 있다. 가족 간의 사랑은 밥상머리에서 시작되고 신장된다.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식사가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6. 빛은 꺾이지 않는다!
명백한 사실조차 부정하고 '내로남불'을 쏟아내며 욕설과 저주로 증오만을 키우고 있다. 이성은 없고 극단의 감정만 있다. 사실은 무시되고 조롱받으며, 주장과 선동만이 힘을 얻는다. 과거에 대한 고찰, 현재의 성찰, 미래에의 통찰은 설 자리를 잃었다. 극도로 분노하는 이들이 생기고, 동시에 극도로 좌절하는 사람도 생긴다. 이렇게 상대를 쓸어버리겠다는 극단의 적대 정치가 힘을 얻는 한 이 땅에 킬링필드를 재현하는 것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다."
위 글은 11월 9일 KBS의 황상무 앵커가 KBS에게 남긴 유언 같은 글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확실한 것은 누구도 죽는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죽기 위해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겁하게 사느니 분투 중에 쓰러짐을 택한 사람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목전의 이익에 정권의 주구가 되어 킬링필드의 죽창을 들고 설치는 사람들이 국민의 혈세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의 칼잡이 세력이 되어 국민을 2분 법적 잣대로 농단하고 진실은 은폐하고 사실을 호도하며 세치 혀끝으로 나라의 미래를 정권에 위탁하려 한다는 일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정권이 바뀌면 이들의 향배는 어느 방향으로 튈지 불을 보는 것처럼 환하다. 심지어 길 드려진 댓글 부대들은 유언처럼 남긴 그를 정치를 위하여. 정치적 토대를 마련하려는 쇼로 폄훼한다. 이것이 공영 방송 KBS의 대 내, 외적 현실이라면 우리는 수신료를 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데 내가 낸 돈으로 독약을 사서 마시는 꼴인데 1/2의 국민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어정쩡하게 노예 상태로 매달려 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통곡 문을 써서 당시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에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논설문을 게재하고 붓을 꺾었던 장지연 선생이 생각난다. 일제는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었고 신문은 90일 동안 정간되었다. 개, 돼지만도 못하다는 당시의 위정자들을 향한 그의 독립정신을 요즈음의 대한민국 위정자들은 뭐라고 표현할까? 이 또한 선택된 정신이라고 웃어넘길까? 요즈음 국민들은 매일 목 놓아 울고 있는데 저들은 보고 싶은 것 만 보고,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내뱉고 있다.
황상모 앵커? 장지연 선생이 오버랩된다. 제2의 황상모 제3의 황상모가 지속적으로 나온다면 내가 내는 수신료가 이렇게 아깝지는 않을 것 같다. 열흘 붉은 꽃 없고 단절의 역사는 없다. 빛은 꺾이지 않는다!
<빛은 꺾이지 않는다!> 편집을 마치고
스승님 글을 대하면서 미력한 제자는 감히 스승을 해부했던 허준과 비견해 보았습니다.
사람의 위는 목구멍으로부터 한자 여섯 치를 내려가면 심창골과 배꼽 중간에 각 네 치에 뻗쳐 있으며 위의 길이는 한자 여섯 치며 꾸불꾸불한 것을 모두 펼치면 두자 여섯 치이며 크기는 한 자 다섯 치라고 허준은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반위(위암)를 치료하는 허준에게 위를 어떻게 아느냐고 야유하는 사람들을 향해 스승의 뜻에 따라 스승의 몸을 해부했다고 말하면서 허준은 오열했습니다.
칼럼집 <빛은 꺾이지 않는다!> 출판을 위해 미력한 제자에게 편집을 하명하신 스승님 뜻을 감히 떨면서 받듭니다. 제자는 스승님의 글을 글자의 휙 하나 점 하나 훼손 없이 무릎 꿇고 떨리는 손길로 해부하면서 호흡조차 멈추어 버렸습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유배지에서 지방의 행정 책임자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지침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씁니다.
목민(牧民)은 백성을 가까이서 다스린다는 의미로써 수령을 목민관이라 일컬었습니다. 심서(心書)는 마음을 다스리는 글이라는 뜻입니다. 저서에서 목민할 마음만 있을 뿐 –유배된 몸이라- 몸소 실행할 수 없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 목민심서(牧民心書)입니다.
스승님 칼럼이 이 시대 목민심서(牧民心書)이십니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거절한 위태위태한 단애의 끝에서 효와 인성을 부르짖고 있는 스승님.
국민의 뜻을 내팽개치고 내로남불의 덫에 갇혀있는 위정자들을 향하여 방성대곡하는 스승님.
피를 토하는 스승님의 절규를 외면하는 현실이 스승님을 묶어 둔 유배지가 아니겠습니까!
미력한 제자는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어 오열합니다.
스승님 글을 퍼 나르는 수고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2022년 사랑과 감사의 계절에
편집실에서 影園 김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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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덕향문학 11호 특집
최기복 칼럼집 <빛은 꺾이지 않는다>로 결정했습니다.
주제별 대표 칼럼을 선별했습니다.
추후 지면을 보고 가감을 결정하겠습니다. 편집국장^^
최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