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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러시안블루의 전설 / 김진일(81학번, 1960-)
Ⅰ
옛날 옛날에 남자가 남자이고 여자가 여자이었던 시절에...한 무리의 떼가 피빛석양을 따라서 바람의 냄새를 뿌리치면서 불길을 피해 달아 나고 있었다. 남자가 남자이었던 옛날에....하물며 그 남자의 조상들은 그 아들들을 눈보라 치는 산맥 속에서 살아 남길 기다리다 산자 만을 데리고 베링해를 건너가고, 유라시아대륙을 따라 이동했다.
왜? 그산자 만이 무리의 장이되어 대자연과 큰무리의 짐승들로 부터 지어미와 처자식은 물론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데리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이동 할 수 있었다. 니 자식 내 자식이 없던 그런 시절에...
그후로 몇 만년이 지나 대구 지하철에서 수 많은 그 종족의 후예들이 그들이 말하는 문명의 이기 속에서 죽어갔다. 우리는 이제는 자연 속에서 불길을 헤쳐 우리의 종족을 구할수 있는 그 남자, 그 산자를 이제는 더이상 갖고 있지 않다.지금 우리 종족은 불길 속에서도 누군가의 명령을 기다려야 하며,자연의 도리 대로 행동하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책임에 익숙해져있다. 지금 여자와 남자의 구별이없는 이세상에서.....
2003년 2월에 프러시안블루의 전설이 시작되려고 합니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따라갑시다.
Ⅱ
몇년 전에 잘 아는 후배가 이화여대 앞에서 우동집(가게이름 : 재즈우동, 영화튀김)을 한 적이 있다. 몇 개의 계단을 내려가면 뿌연 와인빛 전등을 내뿜어 내면서 서로가 마주보는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그와 근 10년 이상을 보아 왔어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사람 인지 잘 몰랐을 때 우동집 조그만 액자에 오려 넣은 몇 장의 유화인물 초상이 눈에 띄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재즈 에세이( portrait in Jazz )책에 나오는 재즈뮤지션들 이었다. 나는 그 그림을 그린 사람까지는 몰랐는데 그는 그가 와다마코토(和田誠)라고 하였다. 아!!! 나는 그 순간 그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었고, 조금 더 그에 대해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그 우동집에서 영글지 않은 영혼들이 모여 몇 밤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였다. 그 골목의 좁은 하늘로 눈이 떨어지는 밤 만나고 싶었지만 그런 날은 오지 않았다. 너무 빨리 망했기 때문에... 그리고 이런 덕분에 나는 이대 앞에 두어 군데 단골 옷집을 지금도 알고 지낸다. 지금 생각하니 그 인물 초상 들이 그가 그린 "소와 달"과 비슷해 보였다.
지금 밖에는 어제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지금 이순간 눈물이 나려고 한다. 지금 흘러 나오는 " The House Of The Rising Sun " 이 곡이 슬퍼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모두가 보고싶기 때문 입니다. 하나하나...
오늘같은 비오는 밤에 누군가와 밤을 새워 이야기 하고싶다. New Orleans와 Jazz, 프러시안블루에 대해서 ...그리고 이 곡에 나오는 너무나 슬픈 우리 아버지 같은 가사에 대해서
"And the only time he's satisfied is when he's on a drunk"
무엇을 찾아 노력하는 사람은 방황하기 마련이고, 방황하는 사람은 구원되기 마련이다. 지금 이 순간 프러시안블루가 우리 노력과 방황의 시작 일지도 모릅니다.
Ⅲ
꿈! 작년 월드컵 이후 우리는 꿈이라는 단어를 일상 생활에서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여과되고 검증되지 않은 현란한 광고문구나, 오락 프로그램에서...
그들은 모르겠지요? " 꿈은, 이루어 지기까지는, 꿈꾸는 사람을 가혹하게 다룬 다는 것을 " 또 한가지, 꿈을 이루고 나서 그 꿈을 어떻게 분배 해야하는 것을...꿈은 우리 모두에게 가까이 있습니다. 당신 앞에 지금 않아있는 사람에게서도...
미국에 가면 그들의 땅끝 Maiami 에 예전에 Cuba로 가는 배를 타던 Keywest란 곳이 있습니다. 그 곳에 "라 테라나"라는 카페가 있습니다. 그 곳에 들어가면,
" 일상이 전설이 되었다"
이런 어구가 있습니다. 물론 그 유명한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Ernest Hemingway를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가 좋아하는 낚시 , 술 , 담배...이러한 생활이 이루어져 전설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일상이 전설입니다. 또 그렇게 생각 해야 겠지요? 우리들 중 몇몇은 프러시안 블루가 전설의 시작 일지도 모릅니다. 아 !!! 프러시안블루.
Ⅳ
몇 주전 몇몇이 모여 프러시안블루의 태동에 관하여 추억을 더듬었습니다. 물감마다 나라 이름이 많이들 붙어있습니다. 고흐가 말년에는 일본사람에게 그림을 팔려고 노란색 (재패니스 엘로우)을 많이 사용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일본인들이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에 가 있는 김학민형, 이동순형 등 (프러시안불루의 명칭을 정한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00회, 00촌, 00공간 등 보다, 얼마나 근사한 명칭인가?
(그런데, prussianblue.co.kr 이나 com을 누르면 이태원 옷가게가 록밴드가 나온다.)
이재원 교수는 그 자리에서 프러시아인은 언어학적으로 인도-유럽에 속하며, 스스로 푸루사이(Prusai)라고 불렀다는 등등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으며, 보헤미아 적 이라고도 했습니다. Prussianblue색은 1700년경 헥사시아노철칼륨 등의 화공약품을 오래된 소 피가 든 시험관에 넣었다가 우연히 그 심오한 빛을 가진 색이 탄생되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색 처리에서 창경하고 장중한 맛을 내고, 물감을 짜놓고 보면 상당히 투명하고 깊이가 있습니다. 이동순형은 그림자 부분을 그리기에는 더없이 좋은 색깔이라고 합니다. 蒼勁이란 蒼潤하고 雄勁 하다는 말인데 "蒼"이란 深淸 혹은 深綠色 풀빛으로 화면이 가볍지 않고 무게있고 潤澤한 것을 말하며 또 웅장하고, 굳세며 연약하지 않은 색깔입니다.
"선생님은 국어를 굳건히 지키면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거나 마찬 가지라고 깨우쳐준다. 학교의 괘종소리가 12시를 알리고 프러시아병사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지자 선생님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쓰고는 수업이 끝났음을 알렸다."
- Alphonse Daudef : 1840 ~ 1897 마지막수업 中에 -
한 때는 프러시아가 프랑스를 지배 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 프러시아는 없는 나라 입니다. 참! 이 글의 주인공은 프랑스 알자스주의 "프란츠"라는 소년입니다. 꿈이 없어도 안되지만 추억이 없는 사람은 위험합니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읽은 알퐁스 도데의 "별"을 다시 읽고 싶은 날입니다.
Ⅴ
2월 중순 재원이와 주문진 형호리호수를 갔다왔다. 예전에 몇 번 곁 길을 지나다 눈이 오면 아름다울 것 같아서 가슴 속에 넣어 두었다가 눈을 보러 갔다. 날씨는 조금 추웠지만 눈싸인 호수와 다리밑으로 보이는 동해의 파도, 눈덮인 설악산이 한눈에 보였다.그 파도의 에메랄드그린의 투명함이 나를 설레게 했다. 언제나 처럼...우리는 발정난 개처럼 화구를 들고 빙빙빙 돌아다녔다. 언제나 그렇듯이...역시
" 대지는 우리에게 온갖 책들 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
그와 둘이서 가는 오랬만의 Sketch 여행이라 더 먼 거리를 돌아가는 버스를 택했다. 진부, 횡계, 평창 예전 같지는 않지만 차창 밖의 풍경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누구와 서너 시간 이상을 이야기 하는데 지루하지 않다는 것은 그 사람이 좋은 친구라는 걸꺼다. 그래서 그의 옆 모습을 볼 때 마다 행복했다.
" 누군가 런던에서 히드로 공항까지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을 물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간다는 사람, 지하철을 이용 한다는 등등의 많은 방법이 나왔지만 정답은 가장 가까운 친구와 같이 가는 것 이라고 한다. "
우리의 노후도 마찬가지 이겠지요 ? 지루하지 않게 노후를 끌고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림도 한 방법이겠지요 ? 프러시안 블루도...
나도 그림을 그린지 20년이 넘었다. 3수를 하고, 또 대학 1년을 비판적 지성없이 보내고 2학년이 되서야 지금은 동아리, 그때는 써클이라는 것을 들었다. 지금 안국동 조계사 입구 어딘가에서 10000원도 안되는 돈에 화구박스, 붓, 물감등을 처음 구입 했을때 마음을 기억한다. 그 꽃같은 마음을...조미미라는 가수의 " 서산 갯마을 " 노래만 믿고 그 당시 용산터미날에서 서산을 갔는데 바다는 보이지 않고 시내 한복 판에 도착한 일, 그 이후 끝없이 나를 지켜주는 스케치 여행...
몇 일전, 내가 하얀 매화꽃이 만발한 하동 포구에 있는 꿈을 꾸었다. 3월이 가기 전에 한번 가고싶다. 재원이와... 스케치 여행도 가는 곳 마다 철이 있다. 3월은 역시 구례, 산동, 하동이 제철 인것 같다. 심명대형이 언제가 이런 말을 했다.
" 나는 지리산이 뒤를 바치고 섬진강이 앞을 흐르는 하동에서 살고 싶다고..."
오늘 밤 꿈이라도 다시 꾸고 싶다. 노란 산수유가 널린 그런 꿈을...
신승찬 : "진일형! 지리산자락의 구례와 하동의 매화 꽃을 보러 갔더랬습니다.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고 아직 날씨가 싸해서 산수유의 노랑은 보질 못하고 인파로 붐비는 매화송이와 섬진강 가슴시린 물결만 담고 왔습니다. 전화하라는 기억은 있었으나 화구도 펴지 못해, 다음에 물감을 펼칠 때의 설래임으로 전화할려고 그냥 왔습니다. 그래도 가슴 시원합디다. 다음에 같이 동무들해서 기시지요. (2003년 3월 19일)"
Ⅵ
언젠가 한 시인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 많은 예술가들이 술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4년 동안 정말 많은 빚을 미술반과 술에 졌다. 술에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내 노후 동반자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격조있는 술자리 대화를 할 수 있는 몇몇 친구와 함께 !
그 매개체를 이루 나열할 수 없지만 내 시대에는 80년대 중반까지 학교 앞에 곰집이란 선술집이 있었다. 술도 팔고 백반도 파는 테이블 몇 개, 그 흔한 라디오도 없고, 가장 비싼 안주라야 닭도리탕( 2500 ? )이고 그 당시 소주 한 병 400원( 밥 한공기 400원 )이었다. 무슨 할 말이 많은지 매일 우리는 곰집에 모여 그림을 이야기하고, 속내를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민주화 대열에 참여 못하고 침묵의 대다수로 침몰하는 우리 자신을 고뇌했다.
지금 돌이켜 보건데 나의 대학 4년 아름다운 보석과 같았다고 감히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곰집과 그 안에 그들이 항상 내 곁에 있었기 때문에 ! 지금도...
내가 대학에 처음 입학했을 때 학교 앞 막 다방인 외대다방과 조금 고급 다방인 암다방이 있었다. 학교 정문 앞 구조도 지금은 몰라보게 변했지만... 물론 맥주집은 거의 없었고 , 그 당시 처음 광화문에 나이키 운동화 매장이 처음 생겼다. 브랜드 의류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그 이전에는 동대문, 남대문 등에서 그 당시 유행하는 똑같은 옷을 모두 사 입고 다녔다. 그후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 (?), 생맥주가 보편화되면서 고급 육류 안주를 가끔 먹었다. 어떤 독지가가 있을 때... 술친구를 찾아 도서관을 배회하다 , 곰집에서 몇몇이 어울려 술을 먹고, 밥을 먹지 말라고 ( 소주 한 병을 더 먹기 위해서 )눈을 부라리는 선배 몰래 공기 밥을 몰래 시켜 먹고 자취방으로 발을 옮기던 친구들... 그는 월말식대 정산 후 몇 장 남은 식권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곤 하였다. 그 곰집에 걸려 있던 재원이 그림은 지금 어디에 있고, 소주 한 박스에 한 병뿐이 없는 거라며 내 주시던 주인 아주머니는 무엇하시는지 궁금하다.
또, 졸업한 선배가 경제권을 앞세워 세력형성(?)을 하기 위해 2차(맥주집) 지명권에서 탈락한 그들의 깊은 호흡과 느린 시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곰집 아주머니가 어느날 사진을 한 장 보여주시더니 이화여대 다니는 학생이라고 선을 보라고 하였을 때 나는 새로운 문명의 충돌에 부딪쳤으며 나의 대학시절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졸업이 나에게는 없는 줄 알았는데 어느날 나는 까만 가운을 입고 있었다. 매우 어색하게...
그래도 20년이 지나는 지금도 그들을 만나고,그 시절 이야기를 지금도 나누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하다. 그들이 있어서...민주화이후 우리의 대학은 어떻게 되었나? 취업사관학교가 되었으며, Toefl/Toeic 만능주의가 되었다.(미국에 가서 좌절을 느낄 테지만)그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나의 대학4년의 방황이 그렇게 헛되지 않았다고. 또, 똑똑한 당신들 세대에서는 밥을 위해서 사회 생활을 영위하지 말라고 ... 제발!
그리고 당신은 지금 당신만의 곰집이 있냐고 묻고 싶다.
Ⅶ
새벽 1時 다시 일어나서 붓을 잡는다. 그림은 뭉개지고, 내 자신이 처량하다. 어떤 학우들은 써클 룸에서 밤을 세우고, 어떤 이는 미네르바에 텐트를 치고 , 그림을 그린다. 가열찬 투쟁의 밤이 1년에 두 번 정도 항상 같은 시기는 아니지만, 5月과 11月에 반복된다. 학기마다 우리는 이런 절차를 의식처럼 밟아 왔다. 마르지 않은 그림을 당일 날 들고 와서 휑한 눈으로 액자를 끼 곤 했다. 붓 하나로 그림을 그리고 , 캔버스에 덧칠을 몇 번이고 하던 시절에... 그래서 지금도 그림을 걸 때마다 전업작가에게 미안하다.
몇몇 방문객이 다녀가고 , 그림을 걸었다는 데서 오는 동료애(?) , 조직에서 떨어지지 않은 안도감을 느끼면서.... 우리는 쥐포 몇 마리와 단 소주에 몸을 맞기고 , 내부의 자아비판에 휩쓸리면서 , 테레핀 냄새 속에서 밤은 깊어갔다. 그리고 그 어설픈 그림들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마 죽을 때 까지... 그런 긴장 속에서 1년에 고작 한, 두 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 그 그림들이 우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림은 그리지 않아도 는다. 버스를 타고 지나 갈 때, 새로운 곳을 발견할 때든 우리 생활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표현할까(?) 항상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 일 전 프러시안블루의 꿈을 하나 이루었다. 낙원동에 화실을 하나 만들었다. 아!...
고흐가 말했다. "예술의 미래는 남프랑스에서 발견될 것이다." 라고. 나는 믿는다. 프러시안블루의 미래는 낙원동에서 발견될 것이다. 반드시...
Ⅷ
지금 미네르바 동산에서 불어오는 미풍도 없는 이 시대에 후배 화우들은 20년 전 내가 살았던 시대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그림을 시작하면서 동반된 하나의 즐거움과 괴로움은 다닌다는 것이다. 어려운 말로는 여행이다.
우리 인간은 DNA구조상 잃어버린 시간을 복원 하려고 하고, 그 시대를 엿보려는 습성이 있다.그래서 우리는 알타미라 동굴의 벽화나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 상상화, 메소포타미아 우르의 지구라이트 등을 통하여 그 시대를 추정하고 판단할 수 있다. 이름없는 화가나 예술가를 매개체로....
마치 육식동물이 상대방의 목을 물어야 자신을 생명의 연장선에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태어나는 것처럼... 그래서 중세 귀족은 자식에게 가정교사를 대동시켜 세계 여러나라를 다니면서 학습을 시키는 그랑투어(Grand Tour)를 시키지 않았던가?
창순이와 같이갔던 법성포(영광) 비린내 나는 헛간 텐트에서 비오는 몇 일의 잠과 술, 재원이와 같이하고 그뒤 몇몇 화우들과 같이한 강릉(안인)-영덕- 안동(하회마을)의 꿈같은 스케치, 후배들과 같이했던 선유도의 별밤, 동순형 내외 같이갔던 그 옛날의 내린천...
지금도 어디를 가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포유류의 눈빛처럼... 그리고 이것이사회생활에서 내 자존심을 타인으로 부터 지켜주는 성벽이다.
그래서 가고 싶다. 남프랑스의 니스에, 고흐가 그렸던 오베르, 밀레가 다닌 파리근교의 퐁텐블르의 숲에... 그리고 항상 가고 싶은 제주도 내 텐트치는 자리 애월(한담)에...
프러시안블루 갤러리에서 보는 예전 그림에서 동순형이 '놀이동산'을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렸는지, 지용이는 또 어떤 똥배짱으로 그렸는지를 생각해 본다. 또 모네가 '생 라자르역'을 그리면서 사람이 많아서 쪽팔리지 않았는지?
"시스티나 예배당을 보지 않고는 인간이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 괴 테-
우리가 그린 그림이 몇 십년 후 우리 死 후에 이 시대를 읽는 코드가 되리라 믿는다.
Ⅸ
86년 말 겨울 몇몇의 인간이 모여 또 하나의 인위적인 단체를 만들었다. 희미한 등불처럼...
그리고 그 다음 해 박종철 고문사건, 이한열 최루탄 사건, 6.29선언에 이어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 다음 88년에 올림픽을 치룬 그 겨울 그 인위적인 단체 프러시안블루의 동숭동 시대가 시작 되었다. 가열찬 등불처럼....우리 중 몇몇은 예술가의 한쪽이라는 두근거림을 가지고 97년까지 거의 매년 예총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91년에는 홍대앞 화단이 있는 사계절 화랑에서 전시회를 가졌지만 지금은 그 자리가 어딘지 몰라 안타깝다. 그리고 우리의 감정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Ce'zanne이 젊은시절 욕을 했던 그의 고향, 과거의 영화위에 잠든 Aix-en-Provence (엑상프로방스 )로 노후에 찾아 든 것처럼 우리는 학교 전시실을 서성거렸다. 1997년 11월21일 IMF 구제금융신청을 한 그 겨울 12월을 마지막으로 우리의 동숭동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기다리던 수 년이 지나 2003년 우리는 인사동 시대로 넘어 왔다. 또 지금, 우리의 화실이 또 다른 시대를 꿈꾸고 있는 것 같다.
몇 년이 되더라도 우리의 사후에 우리의 화보에 우리의 인사동 시절의 화실이 우리 할아버지의 왜정시대 사진처럼 빛바랜 사진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한 예술가의 작은 쪽으로.... (2003년 프러시안블루 게시판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