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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환후사(漢桓侯祠)
조금 걷다 보니 이 랑중의 수퍼스타라고 할 수 있는 장비의 사당 한환후사(漢桓侯祠)가 보인다. 장비가 죽은 후 환후란 시호를 받아 한환후사라 이름 지었다. 유비의 명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안에는 장비의 묘, 사당, 원림으로 이루어졌고 남북으로 정문, 적만루, 정전, 동서방, 후전, 연랑 그리고 묘역으로 꾸몄다 한다.
▶ 사당 건너편에 있는 우물
▶ 한장환후사(漢張桓侯祠) 석비
▶ 장비 공덕비
사당 앞에 도착하니 돌사자상과 한장환후사(漢張桓侯祠) 석비가 문 앞에서 사당을 지키고 있고 사당 입구 길 건너엔 아주 오래돼 보이는 우물 하나가 있다.
▶ 장환후사 입구에 있는 말 조각상 - 어느 말이 옥추마일까?
장환후사로 들어가려면 통표를 보여 주어야한다. 입구에는 장비가 타던 말 두 마리가 사당 입구를 지키고 있다. 털이 붉은 말이 옥추마인지 흰 말이 옥추마인지 모르겠으나 마부가 고삐를 놓으면 금방이라도 이곳에 잠든 장비를 태우고 전장으로 달려 나갈 것 만 같다.
▶ 장환후사 내부 배치도
▶ 적만루
입구를 지나면 정면에 적만루(敵万樓)라는 이층 누각이 보인다. 이층 누각에는 만부막적(萬夫莫敵)이란 현판과 영휴사혁(靈庥寫奕?)이란 현판이 위아래로 걸려 있다. 만명의 사내도 당하지 못한다는 맘부막적은 알겠는데 아래에 걸린 현판은 일기도 어렵고 뜻도 모르겠다. 옆에 있는 중국인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중국인도 모른다고 한다. 중국인도 모르는 글을 왜 써 놓았을까?
▶ 황후가 된 장비의 두 딸
누각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장비의 예쁜 딸 둘의 조상(彫像)이 있다. 장비의 첫째 딸은 유비가 황제가 된 장무원년(221년) 세자빈이 되었고 유비가 죽자 유비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후주 유선의 황후인 경애황후가 되었으며(223년), 황후가 된지 15년 후 죽어 남릉에 묻혔다. 둘째 딸은 경애황후가 죽자 후주의 귀인으로 되었다 이듬해인 238년 황후가 되었으나 촉한이 망하자 후주와 함께 낙양에서 여생을 마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비의 인상은 털복숭이에 우락부락하다고 알고 있지만 그의 딸들이 모두 황후가 된 걸 보면 장비의 인상은 나관중에 의해 극화되지 않았나 싶다.
▶ 장비의 가계도
장비의 가계도를 보면 장비는 그의 아내 하후씨 사이에서 2남 2녀를 낳았다. 두 딸을 황후로 두 아들은 촉한의 장수와 문신으로 키운 것을 보면 삼국지에서 날이면 날마다 술타령이나 하고 전쟁에 나가 싸움을 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으나 실제론 가정에도 충실한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 장비의 장팔사모 고사
장비의 무기인 장팔사모(丈八蛇矛)에 얽힌 고사를 재미있게 그림과 글로 설명한 자료도 보인다. 유비가 황건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안희현위가 되었을 때 안희현에 출몰하는 독사가 백성들을 괴롭히자 장비가 이 독사를 잡았는데 그 독사가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만들었다고 한다. 창날의 모양이 뱀이 입을 벌리고 달려 드는 듯 구불구불하다는 의미로 '장팔사모'라 불린다.
▶ 장비 초상화
▶ 촉한의 오호상장
▶ 장비의 애마 옥추마
▶ 장팔사모
▶ 장비의 갑옷
▶ 도원결의상
▶ 장비의 전투도<장판파 전투?>
또 중앙벽에는 장비의 초상화와 장비를 중심으로 한 촉한의 오호상장<관우,장비,조자룡,황충,마초>의 초상화가 걸려 있고 방 안에는 장비의 애마 옥추마, 장비의 갑옷, 무기가 전시되어 있으며 우측에는 유비·관우·장비 삼형제의 도원결의 조상과 장비의 전투 부조도 보인다.
▶ 위세호신관 입구의 편액
적만루 옆 위세호신관으로 간다. 위세호신관 입구에는 호신양목(虎臣良牧)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데 호랑이같은 신하지만 어진 목민관이라 말이다. 삼국지연의에 나타난 장비를 잘 표현한 현판인 것 같다. 전투에선 호랑이 같았지만 랑중태수로 7년동안 랑중을 다스리면서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장비를 표현한 말인 것이다.
▶ 위세호신관 내 조각상들
안으로 들어가니 장비의 위세와 혁혁한 전공을 조각상으로 만들어 전시해 놓았는데 하나같이 생동감이 넘친다. 하나 하나 새겨보기로 한다.
▶ 장준과 오준 상
먼저 장비의 장손인 장준(張遵)과 장비의 부하였던 오반(吳班)이 우릴 맞는다. 장준은 후제 때 관직이 상서에 이르렀고 경요 6년(263년) 면죽(綿竹)을 지키다 전사한 장비의 장손이고 오반은 공조로 참군하여 장비를 따라 랑중을 지킨 장비의 부하라고 소개하고 있다.
▶ 장소와 뇌동 상
옆에는 장소(張紹)와 뇌동(雷同)이 장비에게 제물을 바치는 듯이 손에 무언가를 들고 서 있다. 장소는 장비의 둘째 아들로 장비가 죽은 후 유비가 오나라로 쳐 들어갈 때 랑중을 지켰고 나중에 관직이 시중상서복야에 이르렀고 뇌동은 랑중을 장비와 함께 지켰고 와구관 전투에서 장비와 함께 장합을 무찌른 장비의 부하 장수다.
▶ 편독우 상
한나라 영제 말년, 유비가 안위현위로 있을 때 군수 밑에서 현의 관리를 감독하던 독우가 유비에게 뇌물을 요구하자 화가 난 장비가 독우를 말뚝에 묶어 놓고 매질을 한 후 유비, 관우와 함께 관직을 버리고 떠난 이야기를 조각해 놓은 편독우(鞭督郵) 조각상이 보여 불의를 못 참는 장비의 성격을 보여 준다.
▶ 당양교 전투 상
건안 12년(207년) 조조에게 쫒긴 유비는 당양 장판파까지 후퇴하고 조조군이 이곳까지 쫒아오자 장비가 당양교에 나가 조조군을 향해 우레와 같이 "여기 익덕이 있다. 이 다리를 건너올 자 누구냐? 건너오고자 하는 자는 우선 자신의 이름부터 밝히고 목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확인하고 건너오라!" 라고 소리 지르니 조조의 병사는 대부분 오금이 저리며 도망쳤고 조조의 장수였던 하후걸은 장비가 내지른 소리에 기겁하여 말에서 떨어지며 즉사하고 조조의 대군은 도망간 장비의 용맹성을 보여주고 있다.
▶ 의석엄안(义释严顔) 상
의석엄안(义释严顔)이란 표제가 붙은 조각상도 보인다. 장비가 파군(오늘날의 충칭)을 침공하여 태수 엄안(严顔)을 생포하였으나 엄안의 인품을 존경하여 직접 포승을 풀고 그를 귀빈으로 모시자 엄안은 장비의 인품에 감동하여 촉나라에 항복한다. 장비가 성미가 급하고 좌우를 가릴 줄 모르며 술만 좋아하는 걸로 알고 있으나 장비의 훌륭한 인품을 보여 주는 예라 볼 수 있다.
▶ 입마늑명 상
장비가 말을 탄 채 장팔사모를 붓 삼아 잎필휘지로 바위에 汉将军飞,率精卒万人,大破贼首张合于八蒙,立马勒铭.(한장군비, 솔정무만인, 대파적수장합어팔몽, 입마륵명 : 한나라 장군 장비가 병사 1만 명을 이끌고 팔몽에서 적의 수장인 장합을 격파했으니 이에 말을 멈추고 글을 새기노라.)란 글을 쓰는 조각상이 있는데 이 글은 장비가 쓰촨성 팔몽산 전투에서 조조의 장합이 거느린 군사를 맞아 승리한 후 그곳에 있는 암벽에다 흥에 겨워 장팔사모를 붓 삼아 일필휘지로 말 위에서 썼다고 한 글이라고 한다.
▶ 야전마초 상
소화고성 임청문에서 있었던 야전마초(夜戰馬超) 상이다. 유비가 낙성을 함락, 면죽까지 차지하고 익주까지 위협하자 유장은 한중의 장로에게 서천 일부를 준다는 조건으로 유비의 뒤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하자 장로는 마초에게 2만의 병사를 주어 가맹관을 공격하게 하니 장비와 낮에 20여 합을 겨루어도 승부가 나지 않자 마초의 제안에 따라 불을 밝힌 채 말을 바꿔 타고 야간전투에 돌입한다. 이를 야전마초라 한다. 장비와 마초는 3일 밤낮을 겨뤘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결국 제갈량의 반간계(反間計)에 넘어간 마초가 항복을 하면서 촉군의 승리로 끝났다. 마초와 장비의 무예를 한층 고조시켜 빛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갈량은 마초의 무예를 높이 평가하고는 싸움을 말리고, 그 신출귀몰하는 계략으로 마초가 유비 쪽으로 귀순하게 만든다.
▶ 남정탈양
와구전투에서 장합에게 승리한 후 장비는 유비의 명에 따라 한천(漢川)으로 출병하는데 병사들을 백성으로 위장시켜 파서의 조조군을 공격해 남정(南鄭)을 점령한 후 군수품을 관리하는 허저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대량의 양식과 군수품을 획득한다. 장비가 힘만 센 무장이 아니라 지모와 전술에도 뛰어난 장수임을보여 주고 있다.
▶ 장비 사당 앞
▶ 장비사당 안에 있는 장비 조상(좌 아들 장포, 우 부하 마제)
전출사표
후출사표
장비 사당으로 간다. 사당 밖에는 장비를 기리는 시민들이 피워 놓은 향연이 자욱하다. 사당 안 중앙에는 장비가 금빛 관복을 입고 큰 눈를 부릅 뜬채 앉아 있다. 장비 좌우에는 장비의 맏아들 장포와 장비의 수하에서 공조를 담당하다 장비의 추천으로 상서까지 오른 마제(馬齊)가 장비를 보필하고 있다. "장장군! 내가 불원천리 당신을 찾아 왔소! 나관중이란 사람에 의해 그대의 모습이 우락부락하고 술만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려졌지만, 난 알고 있소! 당신이 진정한 남자요, 장수란 걸. 당신의 고향인 줘저우 충의점과 도원결의를 한 삼의궁에도 가 봤소. 그곳 도원 아래서 형제의 의를 맺고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아 한실부흥을 위해 함께 하다 함께 죽기로 맹세했는데 형님인 관우를 먼저 보내고 이곳에서 형님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출전을 서두르다 너무 경박하게 행동함으로서 부하인 범강과 장달에게 자다가 죽임을 당해 당신의 마지막 뜻도 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으니 죽어서도 눈이라도 감을 수 있겠소?"
▶ 장비사당 기둥에 써 있는 대련
장비는 사랑이 뭔지 알고 정이 뭔지 아는 아주 괜찮은 사람이다. 삼국지에 보면 “勇武过人,粗中有细,重情義(용무과인, 조중유세, 중정의)”라고 유비는 장비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즉, “용감함이 비범하고, 거침 속에 정교함이 있으며, 정의(情義)를 중시한다.”란 말이다. 또, 雄赳赳吓碎老曹肝胆,眼睁睁看定汉室江山(웅규규혁쇄로조간단 안정정간정한실강산)이란 말도 있다. 이 말은 ‘장비의 위풍당당한 모습은 조조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장비의 부리부리한 눈동자는 한나라 영토를 지켰다’는 의미다. 정말 장비 초상화를 보면 소 눈보다 더 큰 부리부리한 눈을 볼 수 있다. 심지어 관우는 장비를 “백만대군 속에서 대장의 목 베기를 주머니에서 물건 꺼내 듯하다(낭중취물: 中取物)”라는 말로 장비를 소개할 정도라 하니 뻥이 세기는 센 민족이지만, 그래도 대단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 관우의 원수를 갚으러 오나라 정벌에 나서는 유비
장비가 죽임을 당한 이유는 유비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유비가 좀 더 신중한 사람이었다면 관우의 원수를 갚겠다고 전혀 앞뒤 가리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오나라 정벌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고 장비의 죽음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오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겨 관우의 원수를 갚는다 해도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될 때로 소모되면 그때까지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조조가 바로 군사를 일으켜 유비 군을 초토화하면 죽 쒀 개 준 꼴이 될텐데.
▶ 장비사당에 있는 큰 글씨"義"
장비 사당 안에 들어가면 장비 조상을 모신 곳에서 바라보면 한쪽 벽면에 義라는 글을 크게 써놓았다. 의(義)란 무엇일까? 영웅이라고 하는 사람에 義란 어떤 의미일까? 사내들 세상에서 많이 회자하는 義라는 글자는 사전적으로 옳다는 말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갖게 되는 본성 가운데 자기의 나쁜 짓을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의 나쁜 짓을 미워하는 마음, 즉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있는데, 이러한 마음씨를 키워 가면 자연히 의라는 도덕규범을 실현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누구나 자신이 하는 일을 옳은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 정답인 세상이 지금 아닌가? 세상에 자기 생각에 의롭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금 이상한 좀비처럼 추하게 변질돼가는 일본 정치인들에게 물어보면 자신들이 하는 것이 세상을 바로잡는 일이라 우기니까. 그러나 그 의라는 행동도 남이 보면 불의로 보이기도 하지 않나?
▶ 장비 묘정(張飛 墓亭)
▶ 저승사자에게 잡혀 벌 받는 법겅과 장달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며 걷다보니 드디어 장비 묘정 앞에 도착한다. 이 묘정은 촉한 때 창건되어 청나라 때 재건된 것으로 정자내에는 돌로 된 아치가 있고 문 아래에는 장환후의 묘비가 있다. 비석 앞에는 눈을 부릅 뜬 장비의 문신 좌상이 있고 문 입구 양측에는 장비의 목을 잘라 오나라로 도망친 범강과 장달이 함께 촉으로 보내져 장비 사당에서 장포에 의해 목이 잘렸다고 삼국지연의에 있어서인지 장비 사당 안에 두 사람이 벌 받고 있는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 누가누구인진 모르지만, 장비상을 모신 정전 입구 양쪽에 저승사자에게 벌 받고 있는 모습을 만들어 놓았다.
▶ 장비가 부락을 돌며 순찰하는 모습
▶ 장비가 길을 넓히는 모습
▶ 장비가 랑중 곳곳에 나무를 심는 모습
▶ 千年崇祀圖
▶ 桓侯顯炅圖
묘정 옆 파서 양목관에는 장비가 랑중태수로 있던 7년간(214년-221년) 무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해 파서지방을 안정시키고 파서지방 주민들의 생활을 보듬음으로서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모습을 그린 부조들이 전시되어 있다.
▶ 장비의 몸이 묻힌 무덤
장환후사 뒤로 들어가면 제일 깊숙한 은밀한 곳에 장비의 무덤이 있다. 관우 묘보다는 작지만, 공명의 무덤보다는 조금 커 보인다. 여기 영웅이라는 장비가 잠들어 있다. 인생은 초대하지 않았어도 저 세상으로부터 찾아왔고 허락하지 않았어도 이 세상으로부터 떠난다. 찾아온 것과 마찬가지로 떠나가는 것이다. 거기에 어떠한 탄식이 있을 수 있는가! 여기 장비 무덤 앞에 서니 그래도 탄식이 나온다. 묘 옆 조당 건물에는 장비의 용맹함과 우직함을 알리려는 마초와 용호상박의 전투장면 등의 조각과 독우를 나무에 묶어놓고 때리는 조각 등이 있다.
▶ 장비 묘 표석
여기 장환후사라는 곳에서 장비는 219년 12월 어느 추운 날 도원 결의까지 하며 함께 죽자고 약속했던 관우가 죽었다는 급보를 받는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다. 형주에서 잘 버티던 관우가 맥성(麥城)에서 패주한 후 동오의 군대에 사로잡혀 아들 관평과 함께 죽었다는 소식에 장비는 그만 정신이 완전히 나가 실성한 사람처럼 변해버린다. 장비뿐만 아니라 익주에 관우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촉한의 문무백관 및 백성들은 모두가 매우 비통해 했을 것이다. 몇 번인가 기절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유비는 전군에 사흘 동안 상복을 입도록 영을 내린다. 상복을 입었다고 죽은 관우가 살아 돌아오진 않겠지만 그나마 그렇게라도 해야만 슬픔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고 죽은 관우에 대한 예의라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원한이 골수에 사무친 유비와 장비는 동오를 쳐 관우의 복수를 하기로 한다. 동오를 치는 일은 제갈량의 연오항위(聯吳抗魏), 즉 오나라와는 연합하고 위나라에 항전한다는 정책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공명 역시 직접 나서서 끝까지 만류하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조자룡까지 어렵게 나서서 성급하게 출병하면 안 된다고 권하였으나 이 말이 유비의 귀에 들어올 리가 있겠나? 한 황실을 원위치하고 천하의 역적 조조를 벌하려고 일어선 대의는 뒤로 미루고 오직 동생 관우의 원수를 갚겠다는 작은 일에 목숨을 건 유비는 태어나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한다. 장비야 생각이 짧고 단순 무식한 사람이기에 그렇다 하더라도 유비는 그러는 게 아니었다. 가장 큰 복수는 용서라 했지만 유비나 장비는 이 진실을 깨닫지 못하고 '용서는 무슨 얼어 죽을 용서'라 생각하고 출병을 결정함으로 삼국지의 모든 게 헝클어져 버린다.
▶ 부하를 매질하는 장비
매일 같이 직접 나서서 병사들을 훈련하더니 결국은 직접 병사들을 이끌고 출정 준비를 한다. 관우의 복수를 하려는 일념으로 불타고 있던 장비는 눈을 부릅뜬 채 "만약 둘째 형님의 복수를 하지 못한다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못 감을 것이다."라고 맹세한다. 대낮부터 술독을 들어 퍼붓고 휘하 장수인 장달과 범강에게 상복을 입고 출전할 것이니 3일 내 전군이 입을 상복을 준비하라고 재촉한다. 그러자 장달과 범강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란지라 며칠만 더 여유를 달라고 장비에게 요청하지만 이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장비는 "당장 역적 놈들을 생포하여 토막을 낸 다음 소금을 뿌려도 시원치 않을 지경인데 너희들이 어찌 이렇게 태만할 수 있단 말이냐! 내 명령을 위배하는 자는 누구라도 참수하여 여러 사람에게 보인다!" 라 소리치며 장달과 범강을 예전부터 자주 했던 방식인 나무에 묶어놓고 때린다.
▶ 술에 취해 잠든 장비의 수급을 취하는 범강과 장달
그날 마침 장비는 형님 관우 생각에 울적하여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술을 마시고는 취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장달과 범강은 장비가 지시한 날까지 모두 준비할 수 없고 장비의 불같은 성격을 아는지라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차라리 장비를 죽이고 그 목을 오나라로 가져가면 칭찬받을 것이란 생각과 장비에게 얻어맞는 일이 창피하기도 하고 더는 장비 휘하에 있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술에 취해 자는 장비의 침실에 들어가 자고 있는 장비의 수급을 취한다. 이때 장비 나이 쉰 하고도 다섯, 호랑이와 맞짱 뜰 수 있다는 사내, 만부막적(萬夫莫敵)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장비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는다. 장수가 적과 싸우다 죽어야지 술에 취해 자다가 죽는다는 일은 장수로써는 수치스러운 일이 아닌가?
▶ 범강과 장달이 장비의 목을 가지고 도망간 가릉강 수로(녹색선)
범강과 장달은 장비의 머리를 싸들고 오나라 진영으로 도망가고 머리가 사라진 것을 그 다음 날에야 안 이곳 사람은 놀라 머리가 없는 시신만 수습하고 장사를 지내 바로 여기 장환후사에 매장한다. 가릉강까지 온 범강과 장달은 낭중에서 동오까지는 물길로 가더라도 빨라도 6, 7일은 걸리기에 장비의 수급은 급속히 썩게 되어 아무리 장비가 인상이 특이하다지만 장비의 머리임을 증명할 수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자 장비의 머리를 기름을 가득 채운 독에다 넣고 선창에 숨긴 다음 상인으로 변장하여 가릉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이윽고 배는 충칭에 이르렀는데, 그곳은 가릉강과 장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바람과 물살이 드세어 그들이 탄 작은 배는 이리저리 밀리며 더는 나가지 못하고 있을 때 갑자기 선창 안에서 "장비는 살아서도 촉한을 지키며 떠나지 않았는데, 죽어서도 이곳을 떠나 동오로 갈 수 없다."란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이 소리에 장달과 범강은 선창을 열어보니 죽은 장비의 머리가 기름독 밖으로 나와서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자 이들은 다시 장비의 머리를 기름독 안으로 쑤셔 넣고 단단히 봉한 후, 나무판으로 덮고 그 위에 돌을 올려놓았다고 한다. 장달과 범강이 탄 배가 장강에 이르자 선창 안에서 무언가 또 시끄러워져 선창을 열어보니 기름독은 큰 구멍이 나서 기름은 모두 바닥에 쏟아졌는데 장비의 머리는 밖으로 나와 이리저리 뱃전을 들이박으며 "네놈들이 나를 죽였으니 나도 배를 부수고 네놈들을 죽여 함께 물고기의 밥이 되겠다!" 성난 목소리로 소리 지르던 도중에 '펑'하고 소리가 나더니 배가 암초에 부딪혀 바닥에 구멍이 뚫려 강물이 들이닥쳤다고 한다.
손권이 관우의 수급을 조조에게 보낸 이유는 유비의 복수를 두려워해 책임을 조조에 돌리고 수습하는 과정에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려는 의도였으나, 손권의 의도를 꿰뚫고 있는 조조였기에 오히려 관우를 제후의 예로 후하게 장사지내며 온 나라에 특별히 명령을 내려 음주가무도 금한다. 손권은 다급한 나머지 공명의 형인 제갈근을 촉으로 보내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강화를 요청한다. 손권이 유비에게 공명의 형인 제갈근을 보내 이야기 한 세 가지가 다음과 같다. 하나, 관우가 양양을 공격할 때, 조조가 먼저 여러 차례 동오로 사람을 보내 배후 양쪽에서 형주를 협공하자고 제안하였으니, 오나라는 마지못해 흉내 낸 것이라 관우의 죽음은 조조의 죄이지 손권의 죄가 아니다. 둘, 여몽이 관우와 서로 의견충돌이 있어 군사를 일으켜 대사를 그르친 것으로 관우의 죽음은 여몽의 죄이지 손권의 죄가 아니다. 게다가 관우의 혼령에 놀란 조조와 여몽은 결국 모두 병들어 죽어 버렸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 연관된 사건은 덮는 게 원래 이치이니 유비는 군사를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마지막, 친정으로 온 유비의 부인인 손 부인은 다시 유비에게 돌아갈 뜻을 명백히 밝혔고 손권 역시 누이와 전투에서 항복한 촉의 장수들을 모두 돌려보내길 원한다. 아울러 형주도 다시 촉한에 돌려주고 영원히 유비와 동맹을 맺어 함께 조비의 위나라를 공략하길 원한다. 사실 세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면 비록 관우는 죽었지만, 유비로는 남는 장사다. 이미 관우는 죽었고 슬픈 일이지만, 오와 동맹도 굳건해지고 형주를 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관우의 원수를 갚는 일보다 한 황실을 되살리는 일이 유비에는 최고의 명제가 아닌가? 오나라로 향하던 장달과 범강은 오나라 손권이 유비에게 화친을 청한다는 소식을 듣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다. 장비 수급을 가져다 바치면 오나라에서 한자리 준다는 희망에 출발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 죄를 물어 장비처럼 자기들 수급도 같은 처지가 되어 짜디짠 소금 상자에 절여 촉으로 돌려보내 질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눈을 감으니 장비 머리 옆에 자기들 머리가 잘려 똑같이 혀를 내밀고 소금 상자 안에 있는 게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두 사람은 그만 장비의 머리를 강물에 던져 버리고는 배를 버린 채 깊숙이 숨어버린다.
장비의 머리는 물결을 따라 동쪽으로 떠내려가다가 산과 강이 만나는 운안에 도착한다. 이때 마침 강가에서는 늙은 어부가 고기를 잡고 있다가 강물에 무엇인가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건져보니 사람의 머리인지라 다시 강물에 던져 버렸지만, 이상하게도 그 머리는 떠내려가지 않고 계속 어부의 뱃전을 맴돌기만 해 이를 이상하게 생각해 어부는 문득 자신의 어젯밤 꿈에 장비가 나타나 한 말이 생각난다. 지난밤 꿈속에서 장비가 나타나 자기에게 절을 하며 "노인장, 나는 촉한의 장비요. 이제 이 몸은 강을 따라 흘러가면 곧 동오의 땅으로 도착하게 되오. 이 몸은 죽어도 원수의 땅을 보고 싶지 않으니 노인장은 나를 이곳에 묻어 주시오!"라고 했던 말이 생각 나 어부가 주변을 살펴보니 백제성 부근이라 조금 더 내려가면 오나라 땅이란 걸 알고 노인은 급히 장비의 머리를 건져 올려 강변에 있는 비봉산 기슭에 묻었으며 이웃 사람들을 모아 사당도 세워주었는데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이곳에는 풍랑이 일지 않아 지나다니는 배들이 안전하게 다녔다고 한다. 이 비봉산 기슭에 있는 장비의 묘가 바로 장강에 있는 장환후묘라고 한다. 지금은 쌴샤댐을 짓는 바람에 원래 있던 자리에서 32km나 떨어진 곳으로 이전하였다 하니 몸은 여기 랑중에, 그리고 머리는 양쯔강을 바라보는 객지에, 혼은 고향 땅에 묻히게 된 것이다. 머리 따로 몸 따로는 같은 형제라는 관우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
불꽃같은 화려한 삶을 살았던 장비의 죽음은 허망하다는 말 외엔 생각나는 단어가 없다. 장수란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장수답게 장렬히 죽는 게 진짜 장수의 모습인데. 삼국지라는 이야기의 시작은 조조로부터가 아니라 유비, 관우, 장비가 한 도원결의로부터라고 보면, 삼국지의 끝은 관우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도원결의를 했던 세 사람이 관우가 죽자 내리막길을 걸으며 이내 장비가 죽고 마지막으로 유비마저 따라가며 삼국지의 재미가 반감하기 시작한다. 공명이 북벌을 시작하며 대미를 장식하기는 했지만. 사실 장비가 술 때문에 유비를 만났고 술 때문에 주사를 부려 죽었지만, 막 돼 먹은 사람은 아니라고 한다. 원래 술도 팔고 돼지고기도 팔던 처지라 술과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지만, 술만 빼면 장비는 아주 냉철한 전략가이며 문학도에다 미인도를 잘 그리는 화가라고 한다.
장비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장비사당을 나선다. 비랑에는 장비의 용맹함과 충의를 흠모하는 시인 묵객들의 글이 석각되어 있지만 이곳에서 장비와의 데이트가 너무 길었던 것 같아 비랑은 그냥 휙 돌아보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