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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편들기의 절대법칙>의 줄거리: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누군가, 어느 쪽인가의 편을 들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삶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편들기에 따라 내 인생의 흥망이 결정 된다는 것은 얼마든지 경험적으로 증명 되는 일입니다. 이렇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는 편들기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절대법칙이 있습니다. 절대법칙이란 상대적으로 약화 될 수도 없고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도 없이 적용 되어야 하는 법칙을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내편을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편들기의 절대법칙
(창31:30~55)
30. 이제 네가 네 아버지 집을 사모하여 돌아가려는 것은 옳거니와 어찌 내 신을 도둑질하였느냐
31.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생각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여 두려워하였음이니이다
32.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우리 형제들 앞에서 무엇이든지 외삼촌의 것이 발견되거든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소서 하니 야곱은 라헬이 그것을 도둑질한 줄을 알지 못함이었더라
33. 라반이 야곱의 장막에 들어가고 레아의 장막에 들어가고 두 여종의 장막에 들어갔으나 찾지 못하고 레아의 장막에서 나와 라헬의 장막에 들어가매
34.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 그 위에 앉은지라 라반이 그 장막에서 찾다가 찾아내지 못하매
35. 라헬이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하니라 라반이 그 드라빔을 두루 찾다가 찾아내지 못한지라
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37. 외삼촌께서 내 물건을 다 뒤져보셨으니 외삼촌의 집안 물건 중에서 무엇을 찾아내었나이까 여기 내 형제와 외삼촌의 형제 앞에 그것을 두고 우리 둘 사이에 판단하게 하소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편들기의 절대법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편들기의 절대법칙’
가정교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어느 대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몇 년 됐는데 김연아 선수가 고대에 입학한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서 나올 무렵이었습니다. 이 대학생 가정교사가 가르치는 여고생이 있었는데, 수업을 하다가 잠깐 쉬는 동안에 김연아 선수의 고대입학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 여고생이 “공부도 못하는 애가 운동 좀 한다고 고대에 거저 들어가는 것 보니까 정말 재수 없다. 꼴 보기 싫어 죽겠는데 자꾸 TV에 나온다. 김연아 빨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라고 이야기를 했답니다.
대학생 가정교사가 이야기를 듣다가 “야, 피겨 불모지에서 세계 1위의 선수가 되는 것이 공부 잘하는 것보다 쉬워 보이냐? 그럼 너도 운동하지 그랬냐? 나는 김연아가 정말 대단해 보인다. 몇 달 동안 숙제 한 번을 안 한 너랑 비교해보면, 네가 어떻게 김연아를 향해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느냐?”라고 했답니다.
쉽게 말하면 김연아의 편을 들어준 것이고,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의 말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지요.
운동하는 게 공부하는 것 보다 쉽습니까?
김연아 선수가 운동으로 이룬 실력과 업적으로 말하면 사실은 고대가 횡재한 것이죠.
뭘, 김연아 선수가 고대 들어간 정도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해야겠습니까?
대학생 가정교사가 김연아 편들어 준 것이 정당했는데 바로 다음날 잘렸습니다. 그 엄마가 딸로부터 이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는 그 대학생의 행동이 기분 나빠서 자기 딸을 맡길 수 없다며 다음날 바로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편 잘 들어야 돼요.
편 잘못 들면 정말 내 인생의 생각하지도 못했던 원치 않는 길로 접어들 수가 있습니다.
2015년 들어서 미국의 NBA농구 선수였던 데니스 로드먼이 또 북한을 방문했습니다.
CNN기자가 데니스 로드먼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물어봤습니다.
“왜 당신은 독재자 김정은을 친구라고 부르느냐?”
북한에 대한 미국 전체의 여론은 적대적이지 않습니까?
유독 데니스 로드먼 혼자만 김정은을 친구라고 하면서 북한 편을 들었다가 여론으로부터 뭇매를 맞게 됩니다. 미국 사람들이 데니스 로드먼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정치인들조차도 공화당, 민주당 할 것 없이 상원의원들까지 다 나서서 “이 사람이 제정신이냐? 이것은 히틀러를 점심식사에 초대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 아니냐? 정말 멍청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김정은을 자기 친구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라는 비난들이 쏟아졌습니다.
편 잘 들어야 돼요.
이렇게 편을 드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인데 편만 잘 들면 내 인생이 완전히 쭉 펼 수도 있고, 편을 잘못 들면 내 인생이 완전히 망할 수 있습니다.
편들기에서 흥하느냐, 망하느냐를 결정할 때에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둬야 될 편들기의 절대법칙이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내편을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하기 쉬운 것이 내가 내편을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편을 드는 것도 가만히 그 심중을 따져보면, 내가 내 인생에서 내편을 드느라 다른 사람의 편을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게 유리하게 인생의 방향을 틀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걸 아주 조심해야 해요. 망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망치는 것은 남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의 인생을 망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망칠 때 그 이유의 70~80% 이상은 내가 내 편을 들기 때문에 망합니다.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될 것은 내가 내편을 드는 거예요.
편들기의 절대법칙이 무엇이냐?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스스로 자기 편드는 것을 보여 주면서, 내편들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우리가 선민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갈 때에 야곱 식으로 나 자신의 편드는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임을 오늘 본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어떤 상황입니까?
몰래 도망을 가는데 라헬이 드라빔을 훔칩니다.
이 드라빔이라는 것은 밧단아람 지방에서의 가정수호신이면서, 드라빔을 갖고 있는 자가 장자권을 계승한다는 관습이 그 지역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라헬의 욕심도 야곱에 못지않아요. 드라빔을 갖고 있음으로 나중에라도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장자권이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드라빔을 훔쳤습니다.
야곱 일행이 10일 동안 길르앗 산까지 480km나 되는 먼 거리를 아이들과 양 떼를 데리고 도달했는데 꽤 빨리 걸어간 셈입니다. 도망간 것이니까요.
이에 라반이 자기 형제들을 데리고 말을 타고 추격해서 7일 만에 야곱에게 도달하게 됩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첫 번째 따진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네가 아버지 집에 돌아가는 것은 내가 이해한다. 그런데 왜 내 드라빔을 훔쳤느냐”라는 것입니다.
라헬이 훔쳤으니 야곱은 모르는 일이므로 큰 소리를 치면서 찾아보라고 합니다.
32절에 “만약에 삼촌의 드라빔을 훔친 자가 있으면 그 자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라헬이 거짓말을 해서 찾아내지 못합니다. 이 라헬이 화근입니다.
(결혼할 청년들에게 제가 한 마디 하겠습니다. 예쁜 여자를 함부로 쫓아가지 마세요. 내 눈에 예쁜 것이 정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짝이 있어요.)
어쨌든 야곱이 마음속에 집어넣은 라헬이 드라빔을 도둑질을 하고 아버지를 또 속입니다. 낙타의 안장 밑에 드라빔을 넣고 생리가 있어서 일어날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니 결국 라반이 찾아내지 못합니다.
이제부터 라반의 못난 모습이 시작되고, 야곱의 기세가 등등하고 의기양양해집니다.
라반 삼촌을 나무라는데 뭐라고 하느냐?
36절에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라고 합니다.
이 말이 맞아요.
무슨 죄가 있기에 야곱은 그렇게 도망을 간 겁니까?
라반이 와서 문제를 제기한 것은 야곱이 생각했던 그런 문제들이 아니라 드라빔을 훔쳐갔다는 것을 문제 삼았는데, 드라빔을 발견하지 못하자 야곱은 의인으로 급변합니다.
자기가 먼저 도망갔고 그 이유는 자기의 소유들을 빼앗길까봐 도망갔는데, 라반 외삼촌이 지적한 것은 라반의 드라빔을 훔쳐간 것을 이유로 추격해왔다고 하니 갑자기 기세가 등등해지고 의기양양해져서, 20년간 지내오면서 느꼈던 모든 서러움과 라반 외삼촌에 대한 원망이 다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야곱이 라반 외삼촌 앞에서 자기의 의를 강하게 내세웁니다.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선민들에게 있어서 늘 나타나고 요즘도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인데, 어떤 식으로 자기의 의를 드러내느냐?
하나님께서 내편을 들어주시지 않았느냐며 강하게 자신의 의를 어필하게 됩니다.
42절에 보면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으리이다마는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앞부분까지는 사실이에요.
라반의 교묘한 속임수와 못된 행동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재산을 몰아주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이 기가 막혀요. 모든 말을 마지막 말이 다 덮어씌웁니다.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제 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이 말도 라반 스스로가 말했던 것입니다.
24절에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라반의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야곱과의 관계에서 잘잘못을 따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들어서 따지지 않겠다고 한 라반의 이야기를 듣고 야곱이 “보세요. 하나님도 내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내편인 이유가 뭔지 압니까?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젯밤에 내 편을 들어서 라반 삼촌을 책망하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이게 선민의 역사를 관통해서 바리새인에게까지 내려간 자기 의의 방식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가 의롭다고 이야기하는 확신을 어떻게 갖느냐?
하나님이 내편이신 것으로 갖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편이시라는 이유를 그들이 어떤 증거로 삼습니까?
그들이 돈이 많았습니다.
‘돈이 많은 것을 보면 하나님이 내편이 아니시겠느냐? 내 의의 근거가 바로 부유함이다’
세상일이 잘되고 세상적인 기준으로 형통하고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이 내편을 들어주시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며 자기 의를 주장합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 의라는 것은 내가 내편을 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선민이 갖게 되는 자기 편들기의 병폐인데, 야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한 번 따져보시죠.
20년 동안 지냈던 이야기를 하는데 뭐라고 하느냐?
38-41절에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았든지 밤에 도둑을 맞았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 내가 외삼촌의 집에 있는 이 이십 년 동안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을 외삼촌에게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셨으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모두 다 야곱만의 의는 될 수 없는 것들이에요.
무슨 이야기냐?
밧단아람에서 목동 일을 하는 사람들과 특히 돈을 받고 일을 하는 삯꾼 목동들에게는 다 주어지는 일입니다. 더위를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것도 그들의 일이고, 양이 분실되었을 때에 그것을 목동의 손에서 찾는 것도 그 당시의 경제법칙입니다. 안 그랬으면 목동들이 나태해져서 양을 잃어버려도 속수무책이라 주인들이 다 메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목동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지요. 모든 것이 다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게 다 자기 의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리고 두 딸을 위해서 14년을 일했다는 이야기를 자기 아내가 된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그것을 억울하게 여긴다면 아내들이 여전히 라반에게 남아있고 내가 그들을 위해서 일했을 때이지, 아내들을 위해서 일했는데 아내들뿐만 아니라 여종이 둘이 주어지고 아들이 11명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 아들들 11명과 아내 4명을 놓고서 ‘나는 헛된 고생만 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까? 그럴 수 없죠.
이게 야곱의 병폐이고 모든 사람들의 병폐인데, 선민의 병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가 내 편드는 것에 사용해버립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라반이 의롭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언제나 야곱이 라반을 대할 때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3자 대면의 자리가 되므로, 야곱은 라반이 드라빔을 찾지 못했다고 해서, 자기 의가 기세등등하게 일어나서는 안 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을 찾았어야 됩니다.
라반의 추측이 맞는 것 아닙니까? 라헬이 드라빔을 도둑질 했습니다.
라헬은 야곱이 가장 많이 사랑한 존재입니다. 야곱의 마음속에 가장 깊이 들어와 있는 존재가 라헬입니다. 그런데 그 라헬이 드라빔을 훔쳤는데 야곱이 너무도 자기 의가 충만하다보니 그 드라빔을 훔친 자가 발견되면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난산하면서 일찍 죽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자기 의에 충만하다 보니 라헬이 용서받을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린 것입니다.
‘외삼촌의 신을 누구에게서 찾든지 그는 살지 못할 것이요’
이 말에 야곱은 자기 의로 충만했고 어떤 용서의 여지도 없어져버린 것이고 자기가 말한 대로 라헬이 베냐민을 낳다 일찍 죽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가운데 사람을 만나고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억울한 마음이 들 때도 있고, 분한 마음이 들 때도 있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그런 마음이 들 수 있고, 언제나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를 보면서 내편을 들 것입니까?
심지어 하나님을 끌어들여서 ‘하나님은 내편이다’라고 생각하며 내가 내편을 드는 것, 이게 망하는 길입니다.
결국 야곱이 이렇게 해서 얻은 모든 재산은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에 엄청난 흉년과 기근을 통해서 다 없어져버리고 말아요. 이런 재산이 없어지는 이야기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지금 이토록 강렬하게 자기 의가 근거가 되고 있는 재산이라는 것이 허망한 것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양떼를 주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내게 주어진 물질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물질이 많아지면, 부자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좋게 보신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내가 내 편을 들고, 내가 나를 변호하고 옹호하기 시작하는데 이게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이 세상을 만나게 되는 삼자대면의 삶의 상황을 살 수 밖에 없는 선민들에게 있어서 편들기를 잘해야 돼요. 하나님 편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편을 어떻게 들겠습니까?
하나님이 라반과 야곱을 보고 계십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라반이 자기를 속였다고 하지만 자기도 라반의 양떼 중에서 건강한 양들에게만 얼룩무늬를 보여주며 새끼를 가지게 했습니다. 자기가 한 것 때문에 얼룩무늬 양들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미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짓과 도둑질을 했습니다.
지금 또 도망가는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하나님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재산과 아내와 자식들로 마음이 가득 차 있으므로 그것을 빼앗길까 불안해서 도망친 것이었습니다.
그랬던 자가 라반이 드라빔을 훔쳤다며 죄를 한정지었다가 그것을 찾지 못하게 되자 의기양양해지는 겁니다. 이후에 곧바로 에서를 만나게 되는데 그때에는 또 비굴할 정도로 굽혀버립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사람과 상대적으로 나를 규정해나가는 거예요.
‘내가 이 사람보다는 의롭다. 내가 이 사람 앞에서는 기는 것이 살 길이다.’
결국 에서 앞에서는 살기 위해서 비굴할 정도로 숙이고,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라헬이 드라빔을 훔쳤다는 것은 결국 자기의 허물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라반이 드라빔을 찾지 못하자 훔친 자는 살지 못할 것이라고 함부로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 식솔 중의 한 명이 훔쳤는데도 불구하고 기세가 등등합니다. 이게 얼마나 우스꽝스럽습니까? 라반의 추측이 맞았습니다.
결국 이런 식으로 살던 선민들이 하나님을 죽입니다.
왜?
메시아가 태어났고 메시아가 왔다면 백마를 타고 칼을 차고, 창을 들고 이방인과 로마를 무찌르며 우리 민족의 편을 들어주셔야 하는데, 로마 백부장을 보고 믿음이 좋다고 하지를 않나 도저히 로마를 무찌를 기세가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내 편이 되어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여 버리고 맙니다. 내가 내편을 드는 야곱의 유전자가 그대로 내려가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편을 드는 방법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라반과 야곱을 보시는 것 같이 나를 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비춰지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에 갖고 계신 의견과 평가에 동조하는 것이 하나님의 편을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에 갖고 계신 나에 대한 평가와 나에 대한 의견은 무엇이냐?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신 것처럼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 마땅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편을 들어야 합니까?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평가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편을 드는 거예요.
누구를 만나고 어떤 악한 자를 대면하고 있을 때에라도,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그 사람과 나의 관계에서 나는 의로울 수 있어요. 일단 내 의를 확정한 다음에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느끼고 확신하니까 내가 옳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편이시라고 하지 마시고, 내가 만나는 상대방보다 언제나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어떤 악행을 저지르든지 간에 나를 나로써 보고 계십니다. 그렇게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나에 대한 의견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저주받고 죽어야 마땅한 자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걸 계시해주신 거예요.
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십자가에서 드러났습니다. 그 저주받은 모습이 곧 내 모습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견에 동조할 때에 내가 하나님 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내 스스로 내 편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편을 들어야 하고 하나님 편을 들기 위해서는 나를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여야 됩니다.
20년 동안 어떻게 잘했고, 당신의 못된 처우 속에서도 참았고, 고생했더니 그 고생과 수고를 하나님이 보시고 이렇게 많은 재산을 주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내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야하는 사람인 것을 잊었음으로 할 수 없는 신앙고백입니다.
주석서들을 보니까 난리가 났어요.
라반이 나쁜 놈이고, 야곱이 라반에 대해서 승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반에 대해서 승리한 것입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패배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생활화한 사람입니다. 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내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롯과 땅을 분배할 때조차도 다투지 않은 이유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죽어야 될 사람인데 좋은 땅을 먼저 고른다는 의미가 있겠냐고 생각한 것이고 내 편을 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을 볼 때에 생각하시고 허락하시는 것들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라면 롯이 어떻게 해도 그 하나님의 계획을 막아설 수 없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 편을 들기 때문에, 롯보고 먼저 땅을 선택하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내가 내편을 드는 것은 망하는 길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고 어떤 악한 사람을 만나서 나의 의로움이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상황일지라도, 그 의를 붙잡지 말고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나를 보고 ‘내가 십자가에서 저렇게 죽어야 할 것을 주님께서 대신 죽으셨구나. 십자가에 달려서 처참하게 찢기고 창에 찔리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못 박히며 비참하게 알몸으로 창피당하고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것이 바로 나로구나’라는 것이 하나님이 가진 나의 평가라는 것을 알고 무조건 하나님 편을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은 절대적으로 옳습니다. 십자가에서 저렇게 죽어야 마땅하고 제단에서 희생되는 제물들처럼 그렇게 처참하게 불에 타서 죽어야 마땅한 자입니다’라는 사실을 하나님 편을 들며 고백해야 마땅합니다.
사도 바울이 제일 싫어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빌립보에서 벙어리 귀신들린 여종이 점을 치는데, 그 속에 있는 귀신들이 뭐라고 하느냐?
행 16:17절에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하는데 괴로워합니다.
맞는 이야기 아닙니까? 지극히 높으신 자의 종이고 구원의 길을 전하는 자가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괴로워했습니까? 마귀가 자기 편드는 것을 못 견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좋아했고 선민이 좋아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내편을 들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편을 들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 편드는 것을 기쁨으로 삼고 사는 자들이고, 이게 바로 선민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편을 듭니까?
그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동의하고 기뻐하는 것이 선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절대로 하지 말아야 될 편들기의 법칙은 내가 내편을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악한 사람을 만나고, 나에 대해서 부당한 생각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 때문에 생기는 상대적인 의에 취해서 내가 내편을 들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 안에 절대적이고 올바른 평가가 있음을 깨닫고, 또한 그것이 십자가 모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어 마땅한 자라는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편을 들 때에 생각지도 않게 하나님이 내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편들기의 절대법칙을 절대로 어기지 않음으로써 내 편들다 망하는 불행한 삶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감사합니다!!
항상 하나님편의 자리..... 그 십자가의 자리에 머물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