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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눈(마 6:22-23)
많은 사람들이 현대를 가리켜 눈의 피로 시대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하루 종일 컴퓨터, TV, 스마트폰 같은 전자기기를 사용하거나 아니면 책을 읽기 때문에 눈이 피로하기 쉽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지만 눈도 많이 사용할수록 쉽게 망가지기 마련이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몸의 모든 부위가 다 중요하지만 그중에서도 눈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가능하면 눈은 피로하지 않도록 잘 지켜야 합니다.
오늘 말씀 마태복음 6장 2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이 말씀에서도 눈이 성해야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하면서 눈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인생은 무엇을 보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좌우됩니다. 사업 잘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보는 안목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틈새시장을 노리라고 하는데 틈새시장이 모든 사람에게 다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틈새시장은 보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안목을 가진 사람이 사업에서도 성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둑에서 고수와 하수의 차이를 보면 우선 하수는 한 두수의 앞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살고 죽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상대방의 돌을 먹으려고 덤벼듭니다. 그러나 고수는 열 수 또는 그 이상을 보기 때문에 지금 당장 상대방의 돌을 먹기 보다는 자신이 승리할 것에 염두를 둡니다. 이처럼 보는 안목이 다르면 결과는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둑에서만 이런 것이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서도 보면 닭이 모이를 먹을 때는 머리를 땅을 향하여 땅만 보며 가는데 독수리는 높은 하늘에서 전체를 돌아보며 먹이를 찾습니다. 닭의 눈과 독수리의 눈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일제에 동조한 친일파가 있습니다. 그런데 친일파 중에서도 처음부터 친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해방 1년을 앞두고 변절하여 친일파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해방 1년을 앞두고 변절했는가 하면, 그들은 일제 식민지의 상황이 앞으로도 최소한 몇 년, 길면 몇 십 년은 갈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변절을 했는데 1년 후에 해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과 1년 후를 내다보지 못하다 보니 그들과 그들의 후손이 부끄러운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무엇을 보느냐가 실력이고, 보는 것이 우리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이 보는 눈에는 두 종류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의 눈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육의 눈으로 보는 것과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시작은 영의 눈이 열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이어령 교수의 책 중에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간증을 보면 이어령 교수가 예수를 안 믿을 때는 자신의 세상적인 지식(육안)으로 성경과 기독교를 보았고 그래서 기독교에서 나온 기적은 신화라고 하면서 글로 기독교를 많이 비판했는데, 딸이 암에 걸려서 아픈 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다가 영안이 열렸습니다. 이전까지는 육의 눈으로 보던 것에서 벗어나 영의 시각으로 성경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지성에서 영성으로”입니다.
그 책에서 보면 과거에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독교와 성경을 비판하고 비난했던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성직자들에게 많이 미안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눈도 지성에서 영성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신자는 영의 눈이 열려야 승리의 신앙생활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오류는 아직 영의 눈이 열리지 못해서 육의 세계에 거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예가 많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을 때 화를 냈습니다. 영의 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유다가 화를 낸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을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영의 세계에 대해서는 완전한 문외한이었습니다. 구약 사무엘상을 보면 엘리 제사장은 그가 제사장이면서도 영의 세계를 몰랐습니다. 그러다보니 한나가 영의 계시를 받아 기도하는데 엘리는 그런 한나의 모습을 보고 술에 취한 줄 알았습니다. 그는 영의 눈이 닫혀 있기에 기도응답을 받은 사람을 낮술에 취한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이렇게 영의 눈이 닫혀 있었기에 그의 신앙생활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 마태복음 6장 22-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이 말씀을 원문으로 주석해 보면 “눈”은 “하나님을 향한 눈”입니다.
그리고 ‘성하다’의 희랍어는 ‘하플루스’로 이 말의 의미는 ‘순수하다’입니다.
‘밝다’는 ‘포테이노스’이며 ‘맑고 깨끗하다’
‘나쁘다’는 ‘포네로스’로 ‘병들고 사악하다’
‘어둡다’는 ‘스코테이노스’로 ‘악하다’입니다.
이 말씀을 원문대로 해석해보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눈이 순수하면 내 몸이 맑고 깨끗할 것이고 하나님을 향한 눈이 병들고 사악하면 내 몸이 악할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둡습니다. 온 몸이 어둡다는 것은 악한 죄에 빠져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눈이 밝아야 우리가 제대로 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처한 육의 세계는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 통제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다스려 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핵심은 보이지 않는 것에 있으며 또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대할 때 표면적으로 나타난 현상만 보아서는 그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알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 사건의 이면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진실은 항상 맨 나중에 나타나게 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보이지 않는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의 세계에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영의 눈을 뜰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제시한 방법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거듭나야 영의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영의 눈을 뜨는 것은 신앙생활을 오래했느냐 또는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거듭나야 영적인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3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의미를 알지 못했고 또한 니고데모는 영적인 백치(白痴), 영치(靈痴), 즉 영의 세계에는 문외한이기에 예수님과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born again”입니다. 우리는 먼저 부모로부터 태어났는데, 그것은 아래로부터 출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태어나서 신앙 가운데 살면서 한 번 더 출생을 하는데, 그것은 ‘위로부터’, 즉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하는 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하지 못하면, 그냥 땅의 자녀일 뿐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두 번 출생하는데, 땅의 자녀로 출생해서 땅에 발을 디디고 살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출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하늘의 세계, 영적인 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땅에 발을 디디고 살지만 하늘의 세계에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나지 못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또 기쁨의 세계, 하늘의 세계를 살지 못하고 땅만 쳐다보며 인생의 모든 고통을 짊어지고 땅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밤에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행한다는 소문을 익히 들었고 그 예수님이 행한 기적이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요즘말로 하면 국회의원의 신분이다 보니 낮에 대놓고 가지 못하고 밤에 몰래 찾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간 니고데모의 목적은 오직 하나, 표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왜 찾아왔는지 그 목적과 그의 마음 상태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에게 진짜 기적이 무엇인지 가르치기 위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사람의 내면이 변화되고, 인격이 변화되고, 신앙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의 세계를 보게 되는 것으로 예수님은 이것이 바로 니고데모가 기대해야 할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사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형성된 습관이나 인격이 있습니다. 이런 습관이나 마음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이 정말로 변화된다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적입니다. 사람의 내면이 변화되어 거듭나서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영의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영의 눈을 가져야 우리의 몸이 밝을 수 있습니다. 영의 눈을 가져야 우리가 어두움에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신자는 최우선적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둘째로 믿음이 있어야 영의 눈이 열립니다. 고후 5장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신자는 보는 것, 보여지는 것으로만 행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보는 것, 보여지는 것을 가지고 행하는 것은 세상 사람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보는 것, 보여지는 것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믿음을 가지면 비전이 생깁니다. 또한 비전이 생기면 환상을 보게 되고 앞날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이 열리면 사건에 대한 해석이 달라집니다. 같은 사건을 똑같이 보았는데 믿음의 유무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데 이 해석이 바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다른 무엇보다도 해석의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모든 사건 안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뜻을 해석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요셉을 보면, 그는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성경을 보면 요셉이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 요셉이 이런 삶을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모든 것을 요셉은 영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요셉에게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을 때, 형들과 보디발의 아내는 능지처참을 당했을지 모릅니다. 요셉에게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았으면 창세기의 마지막은 복수혈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요셉은 그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것은 현상입니다. 만약 요셉이 이런 현상만 보고 움직였다면 요셉의 인생은 실패작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 현상만 보지 않고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세계를 보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예수 믿는 기독신자라고 해도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즉 현상만 보게 되면 손해 본 것, 상처 받은 것만 생각합니다. 기독교인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받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것은 자기가 가해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상처받은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현상만 보기 때문에 늘 상처 받은 것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상처받은 현상만 본 것이 아니라 그 현상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았습니다. 만일 사람이 상처만 생각하면 그 사람의 삶은 원망과 불평의 삶, 악에 바친 삶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열리면 그 일들을 통해서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고난이 왜, 고난인가요?
욥기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고난이 해석이 안 되면 고난이 됩니다. 욥은 고난에 대해서 해석이 되지 않자 많은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더한 것은 욥의 세 친구가 고난을 잘못 해석해 줍니다. 세 친구는 고난을 잘못 해석해서 욥의 인생을 더 꼬이게 합니다.
신자가 명심해야 하는 것은 고난이 영적으로 해석이 되면 그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적으로 해석되면 고난은 그 순간 끝입니다. 그래서 해석이 중요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받은 그 고난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고, 그런 과정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인 중에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이 분은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였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소아마비인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 있겠으며, 감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육의 눈으로 볼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분의 시 중에서 “나”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걸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걸 갖게 하셨네“
이런 고백은 영의 눈이 열린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송명희 시인은 영의 눈이 열리자 이런 시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되자, 그녀가 비록 제대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지만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남이 듣지 못한 것을 듣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역사, 영의 세계를 바라보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송명희 시인은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돌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최선의 상황을 보아야 합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상황을 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이스라엘과 아람 나라가 전쟁을 하는데 아람 나라가 이스라엘 군대를 포위했습니다. 엘리사의 시종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아람 군대를 보자 겁이 나서 엘리사에게 이런 사정을 이야기합니다. 그 때 엘리사가 그 시종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두려워하는 시종에게 엘리사가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시종의 눈이 열려 그는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상황이 사면초가, 진퇴양난이라 할지라도 우리 주변에 우리를 돕기 위해 포진하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의 눈이 열린 사람만 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그것을 이미 보았지만 시종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워한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고 하면 그때는 반드시 영의 눈을 열어야 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는 길은 바로 영의 눈을 뜨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피곤하고 힘든 일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 피곤하고 힘이 들며 때로는 어쩌지 못하는 상황에 다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신자는 기도해야 합니다. 영의 눈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돕기 위해 포진하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신자는 육의 눈으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영의 눈으로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하기 위해서 먼저 거듭나시고 또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시고 그리고 어려운 상황 속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심으로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을 역전시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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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Amen.
아멘~~
하늘만바라보자
영의 눈아 열려라!
하나님만 바라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