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머리에 p1~3
참으로 미련한 짓,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데..|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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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넓은 창 등산모를 푹 눌러 쓰고 등산망태를 울러 맨 몰골이
영낙없는 거지꼴(?)이다.
이 몰골로 산자락 낯선 식당 문을 들어선다.
여주인 :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나그네 : 여기 음식 파는 집 아닙니까?
여주인 : 예, 그렇습니다, 몇분이시죠?
나그네 : 네, 저 혼자입니다.
그제서야 주인은 앉으라며 자리를 권하고 음식차림표와
찬물 한 컵을 내 놓는다.
반갑지 않다는 표정이 주인의 얼굴에 역력하다.
여주인 : 뭘 드시겠습니까?
나그네 : 그런데... 다음 달에 많은 산꾼들과 함께
이 집에 올까 하는데 그때 무얼 먹으면 좋겠는지....
이쯤 대화가 진행되면 그때서야 주인은 감이 잡히는지
표정이 달라지고 미안해 한다.
<산따라 맛따라> 취재길에서 수없이 연출되었던 내 모습이다.
그래도 김삿갓의 ‘四脚松盤(사각송반)’이라는
시(詩)에 비교하면 양반대접을 받는 셈이다.
개다리 소반에 죽 한 그릇 / 하늘과 구름이 얼비치는데 /
주인아! 미안하다 말하지 마소 /
청산이 물속으로 거꾸로 박힌 것이 내사 좋더라 //
‘四脚松盤粥一盃(사각송반죽일배) /
天光雲影共俳徊(천광운영공배회) /
主人莫道無顔色(주인막도무안색) /
吾愛靑山倒水來(오애청산도수래) //
(2)
동강이 흐르는 영월땅, 정선에서 흘러내린 조양강이
영월에서는 동강이 되고, 동강은 다시 서강과 만난다.
그러고는 비로소 남한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데,
남한강의 최상류가 되는 영월군 김삿갓면
마대산 자락이 김삿갓의 유적지다.
오래 전 젊은 날, 어느 월간잡지에 김삿갓 어른의 본명
‘병연(炳淵)’을 필명으로 삼고 한 2년간 겁 없이
'되지도 않는 글'을 연재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건방지고,
위대한 시선(詩仙)에게는 송구스러운 일이었다.
그 이후, 시선 김삿갓을 추모케 하는 영월땅에
들어서면 늘 등에서 식은 땀이 났다.
‘천리길 행장을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니 /
남은 돈 칠푼은 많은 편이구나 /
주머니속 깊이 깊이 넣어는 두었지만 /
주막의 석양주에 생각이 달라지네 //
(千里行裝付一柯)천리행장부일가 /
(餘錢七葉尙云多)여전칠엽상운다 /
(囊中戒爾深深在)낭중계이심심재 /
(野店斜陽見酒何) 야점사양견주하 //
- 김삿갓이 해 저무는 주막에서 쓴 ‘탄음야점(嘆飮野店)’이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 읊으며 껄껄대는
시선 김삿갓의 모습이 상상된다.
죽장에 삿갓 쓴 그 모습이
맑은 한강수 깊은 곳에 비치는 것 같다.
(3)
해거름 강물에 산영(山影)이 출렁이고 /
하늘에는 한 조각 흘러가는 구름 /
흘러가는 구름 따라 강물이 흐르고 /
흘러가는 강물 따라 세월도 흐른다 //
(우촌)
‘영월의 산’ 취재길에 적어 놓은 취재 노트의 한 꼭지다.
그 날은 운이 참 좋았다.
전국 각지의 산꾼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의 산행가이드북
<영월의 명산>을 펴낸 영월악우회 현윤기 회장이
어여쁜 ‘백조 산꾼’ 한 사람을 취재길
안내역으로 소개해 주었다.
‘백조 산꾼’은 할일 없이 산만 다니는 남자
‘백수 산꾼’의 대칭으로 여자에게 붙이는 말이다.
그 백조가 모는 차편으로 안내를 받아
여러 곳을 둘러 볼 수 있었다.
백조 산꾼 따라 찾아든 강변 / 잘 지은 민박방에 차려진 주안상 /
문전박대 항다반 하늘이 지붕 / 삿갓어른 보셨다면 무어라 하셨을까 //
(우촌)
211년 전, 1807년에 태어나 57세를 일기로 이 세상을 하직한
김립(金笠·김삿갓·본명 金炳淵 ·호 蘭皐) 어른께서
오늘을 사시면서 지금 형태의 산행을 하셨다면
어떤 모습이였을까. 재미있는 상상을 한번 해 봤다.
창가에 와서 지저귀는 저 새야
너는 어느 산에서 자고 왔느냐
산속의 소식 너는 잘 알겠구나
산에는 진달래가 피어 있더냐
問爾窓前鳥(문이창전조)
何山宿早來(하산숙조래)
應識山中事(응식산중사)
杜鵑花發耶(두견화발야)
겨울을 지낸 김삿갓은 봄이 되자 또 방랑의 끼가 발동했다.
삿갓에 지팡이 하나를 의지하고는 오라고 반기는 사람,
오지 말라고 막는 사람도 없는 곳을 향해
정처없는 길을 또 나선다.
그러고는 창문 앞에 와서 지저귀는 새를 보고
한 수 읊지 않을 수 없었겠다.
어느 해 봄이었을까. 시성(詩聖) 김삿갓 어른께서 남긴
杜鵑花消息(두견화소식)이라는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