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기묘사화(己卯士禍) 제2
왕이 조광조를 싫어하는 눈치를 살핀 예조판서 남곤(南袞)이 이 기회를 타서 광조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그 위인이 간사하여 광조의 일파는 그를 소인이라 지목하는지라. 그가 광조에 일파에 참가하려 하여도 영접하지 않는 고로 남곤은 항상 심중에 불평을 품었다.
광조 어느 날 길에서 찬성 고형산(高荊山)을 만나 인사하지 않았더니 고형산은 광조의 무례를 책하고 남곤과 부동이 되었다. 그러던 중 또 위훈 76인이 삭제를 당한 자들과 연합하여 일당이 되어 가지고 왕 14년 11월 15일 석(夕)에 그 일당들이 신무문 밖에 모여 밀의 하였는데 그때 모인 사람들은 남양군 홍경주(洪景舟) 공주판서 김전(金佺) 예조판서 남곤(南袞) 병조판서 이장곤(李長坤) 호조판서 고형산(高荊山) 등 중신들이다.
서로 밀의하고 조광조의 죄를 구성하여 상소하되 “광조 붕당을 지여 후진을 유인하고 괴휼한 습관을 양성하여 장자를 업신여기고 귀한 자에게 무례하며 나라 형세를 넘어트리고 조정이 날로 글러지고 조신들이 다 저들의 세력을 두려워하오니 원컨대 유사에게 맡겨 죄를 다스리소서.” 하고 홍경주는 궁녀들을 시켜 나뭇잎에 밀즙(蜜汁)으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쓰고 그 이튿날 나뭇잎을 주어다 왕께 드리고 조광조 모반한다고 고하니 왕은 광조를 의심하던 끝에 이 간신들의 상소와 또 궁녀들의 드린 밀엽(密葉)을 보고 더욱 의심이 생겨 금(今) 11월 15일 밤에 광조의 일당을 체포하여 금옥에 가두고 즉시 주육하려 하니 이장곤이 극력 변호하니 왕이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을 불러 물으신대 광필이 아뢰되 나이 어린 유생들이 사리를 잘 알지 못하고 고대 일을 인증한 것뿐이요 결코 다른 악의가 없사오니 통촉 하소서.
왕의 뜻이 조금 풀어졌으나 광조 일당을 다 잡아 옥에 가두니 옥이 넘치었다. 성균관 학생 수천 명이 광화문 밖에 모여 그 무죄를 변명하려고 궐문에 들어가 통곡하니 왕이 나졸을 명하여 다 체포하고 11월 21일에 광조 등의 죄상을 들어 중외에 반포하고 광조를 능주(綾州)로 유배하였다가 그 후에 곧 죽게 하니 이것이 중종 14년 기묘의 일인고로 기묘사화라 칭한다.
조광조의 자(字)는 효직(孝直)이요 호는 정암(靜庵)이니 한양(漢陽)사람이다. 성종 13년에 낫고 부는 원강(元綱)이니 벼슬은 어천(魚川)에 찰방(察訪)이다. 광주 부를 따라 어천에 갔다가 김종직의 제자 김굉필이 마침 희천(熙川)에 귀양 와있을 때라. 광조 곧 김굉필을 좇아 학업을 닦아 높은 덕행이 있었다. 김굉필은 호는 한훤(寒暄)이니 김종직의 문인(門人)으로 평생에 소학으로 몸을 닦아 높은 행실이 있었다.
조광조(趙光祖) 절명시(絶命詩)*
애군여애부(愛君如愛父) 천일조단충(天日照丹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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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에 조광조 묘가 있고 절명시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