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각기 다른 펀드에 가입한 두 명의 민원인에게 금감원이 보낸 회신문 내용. 회신문 문구가 거 의 일치한다. 이 때문에 민원인들 사이에서는‘금감원이 민원처리를 위한 모범답안을 만들 어놓고 이름만 바꿔서 회신문을 보내는 게 아니냐’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정보공개 꺼리고 무성의한 답변서 발송
대구에 사는 구모(53)씨는 "A증권사가 역외펀드를 팔면서 환차손(換差損)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않았다"며 작년 11월 금융감독원에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민원을 제기했다. 민원을 접수시킨 뒤, A증권사 본사 차원에서 펀드 판매 내부 지침서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금감원 민원 담당자에게 지침서 사본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민원 담당자는 "소송까지 갈 경우에만 재판장에서 공개할 수 있다"며 거절했다.
구씨는 나중에 정보공개청구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금감원에 정식으로 공개를 요청하고 수수료 300원을 주고 그 문서를 얻을 수 있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문서인데도 금감원 민원 담당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구씨에게 그걸 가르쳐 주지 않았다.
민원결과를 통보해주는 금감원의 회신문이 무성의한 점도 민원인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역외펀드 선물환 피해자들이 모여 만든 인터넷 카페 '중국펀드 선물환계약 피해자 소송모임' 게시판에는 금감원 회신문이 '마치 모범답안을 만들어서 똑같이 배포하는 것 같다'는 식의 불만 섞인 글이 올라오곤 한다.
실제로 본지가 역외펀드 선물환과 관련해 일부 민원 신청인들의 회신문을 비교해 본 결과 펀드명을 제외하면 본문 내용이 똑같은 사례가 발견됐다.
〈사진 참조〉◆간단한 질문에도 "정식으로 접수하라"민원인들의 또 다른 불만은 금감원이 사소한 사항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고 고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진모(여·31)씨는 은행에서 가입한 역외펀드 선물환 손실로 수천만원의 손실이 나자 작년 말 은행측으로부터 "손실금을 갚지 않을 경우 연 17%의 벌칙성 금리를 내야 하고, 신용등급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신용불량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에 두려움을 느낀 전씨가 며칠 뒤 금감원 민원실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지금 바쁘니 정식으로 민원 접수를 하라"는 말 외에 아무런 조언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진씨는 우연히 지인을 통해 쉽게 해결책을 찾았다. 그 지인은 '신용등급에 불이익을 미칠 수 있다는 등의 언급은 잘못된 협박행위'라는 자료를 건네주며 은행측에 읽어주라고 조언했다. 진씨는 "몇 마디 설명만 해주면 될 것을 굳이 정식으로 민원을 접수하라며 시간을 끄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금융회사 직원이 금감원 민원 상담 맡아금감원 민원 처리가 부실한 가장 큰 이유는 민원처리 직원들이 대부분 파견 나온 금융기관 직원들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많다. 현재 금감원 민원상담직원 24명 중 20명은 은행·보험사 등에서 파견 나온 직원들이다. 금융기관 출신들이 친정인 금융기관에 불이익을 줄 수 있는 조언을 민원인에게 해 줘야하는 일을 맡고 있는 셈이다.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민원 상담을 받는 사람들이 금융회사 파견직원이다 보니 보통 민원인들에게 '이기기 힘들 거예요'라는 식으로 민원포기를 은근슬쩍 권유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이 자기책임을 피하기 위해 투자자 보호에 소홀하다는 지적도 있다. 예컨대 최근 민원이 급증하고 있는 역외펀드 선물환의 경우 상품판매를 허가한 것이 금감원이다. 따라서 '상품에 구조적인 결함이 있다'는 민원인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상품 판매를 허용한 금감원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법무법인 한누리 김주영 변호사는 "금감원에서 기각된 민원이 거꾸로 법원 판결을 통해 인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을 정도로 금감원의 투자자 보호기능이 미흡하다"며 "투자자 보호 업무를 아예 금감원에서 분리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장 경험때문에 금융기관 직원 민원업무에 투입"
● 금감원 해명
금감원은 금융회사 직원들이 파견을 나와 민원을 처리하는 것과 관련, "파견직원들은 방문 혹은 유선으로 문의하는 민원인에 대한 '상담' 업무를 할 뿐, 정식으로 민원을 접수하고 처리하는 업무는 금감원 직원들이 직접 담당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회사 직원을 굳이 민원 업무에 투입하는 데 대해선 "(금감원 직원들과 달리) 현장에서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금융거래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례에 대해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금감원은 또 금감원 회신문이 형식적이라는 지적에 대해 "현재 민원 담당자 1인당 한 달에 처리하는 민원 건수가 100~150건에 달한다"며 "특히 (금감원은) 수사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확정된 사실관계에 대해 법리적인 적용을 할 뿐, 상이한 주장을 하는 다툼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