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논어반 야외수업/예산수덕사,대흥동헌,추사고택,맹씨행단 2010.5월7일
강남구여성능력개발센터 한자전문가반(강사 노대홍)의 금년도 문화답사는 충남 예산지역에 있는 우리나라 5대종찰의 하나인 덕숭총림 수덕사를 찾기로 했다. 아울러 KBS농촌드라마 '산너머남촌에는'의 촬영지인 대 흥군 대흥면을 방문한다. 이곳에는 조선시대 현청이었던 대동동헌이 있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의좋은 형제'의 조각상과 효제각도 있다. 예당저수지의 아름다운 모습을 구경한 다음 이어서 추사고택을 찾아 학문 과 서예의 대가로서 추사 김정희선생의 위대한 업적과 작품을 감상해 본다. 마지막으로 조선 초기의 명신 맹사성 행단을 탐방하는 여정으로 진행된다.
모든 여행은 날씨가 좌우한다. 어제까지 비도 오고 날씨도 서늘하였으나 이날은 화창한 날씨에 기온도 여행 에 좋은 21도로 올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은연중에 버스수배,사진과 기행문 담당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라, 늘 신경이 쓰인다. 아침8시에 강남구민회관 앞으로 갔더니 벌써 많은 회원들이 버스에 탑승하고 있었다. 8시30분 예정시각에 서울을 출발한 버스는 34명을 태우고 서해대교까지 바로 달려 행담도휴게소에 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졌다. 박명자반장의 사전준비는 철저하다. 아침을 못먹고 나온 회원들을 위해 준비한 떡과 물을 배부해주고--차 안에서 노대홍선생께서는 오늘의 여정에 대한 설명과 유머스런 사회로 아침부터 기분을 고조시킨다. 비록 여러차례 가 본 유적지지만 노선생의 설명은 역시 재미있고 유익하다.
덕숭총림 수덕사(修德寺) 첫 방문지는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에 자리하고 있는 수덕사이다.
덕숭산 수덕사는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재위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제31 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혜근)이 중수하였다. 조선시대 제26대 고종(高宗)2년(1865)에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禪宗) 유일의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요문화재로 국보 제49호인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제18호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과 함께 현존하는 한국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다. 이 밖에 대웅전 양 옆에 승려들의 수도장인 백련당(白蓮堂)과 청련당(靑蓮堂)이 있고, 앞에는 조인정사(祖印 精舍)와 3층석탑이 있다. 그리고 1,020계단을 따라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만공탑·금선대(金仙臺)·진영각 (眞影閣) 등이 있고, 그 위에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운 정혜사(定慧寺)가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일엽스님(金一葉)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 가 있다.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설립되어 있다. 수덕사 하면 바로 생각나는 몇가지가 있다. 요즘 지병으로 와병중에 있는 소설가 최인호씨의 소설 "길없는 길"의 주인공 '경허스님'의 주무대가 이곳 수덕사이다. 그리고 그의 수제자 '만공스님'이 수덕사를 중건한 것 으로 역사가들은 말한다. 또 한가지는 화가 이응로선생이다. 1960년대 동백림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석하게 한 화가 이응로선생의 부인이 이곳에서 수덕여관을 운영하면서 유학비용을 댔었고 지금도 수덕여관이 그대 로 남아서 관광코스가 되었다. 수덕사 순례는 " 덕숭산 덕숭총림 수덕사"라는 편액이 걸려있는 일주문을 지나면서 시작된다. 보통 절에는 생략되는 금강문인데 여기서는 일주문에 이어 두번째 문으로,두 금강장사가 사악한 잡귀를 막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서 있다. 한 장사는 "아! "하고 고함을 지르고 또 한 장사는 "흥"하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이어서 사대천왕이 지키는 사천왕문을 지나게 된다. 사천왕상을 안치한 천왕문은 사찰을 지키고 악귀를 내 쫓아 불도를 닦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찰이 신성한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세워진다. 사천왕문에는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고 수행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 등의 사천왕상이 있는데 각각 불국정토의 동ㆍ서ㆍ남ㆍ북을 지키는 신들이다. 동쪽을 지키는 지 국천왕은 손에는 보검을 쥐고 있다.계절은 봄, 얼굴색은 청색을 띄고있다.서쪽을 지키는 광목천왕은 붉은 관 을 쓰고 있으며,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 있다. 가을을 주관하며, 얼굴색은 백색이다.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 은 오른손에는 용을 움켜잡고 왼손에는 용의 입에서 빼낸 여의주를 쥐고 있다. 여름을 관장하고 얼굴은 적 색이다.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왼손으로 비파를 잡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기는 모습이다.겨울을 관장 한다. 얼굴은 흑색이다. 대웅전으로 오르기 전에 성보박물관에 들렀다. 박물관에서 경허스님의 "무이당" 친필을 감상할 수 있었다. 예불문 헌향진언에 나오는 '至心歸命來'의 글귀를 발견하고 한참 발걸음을 멈춰섰다. 경건한 예불문이 들리 는 듯하다. 법회강론을 하는 황하정루를 지나면 3단의 월단이 높다랗게 서 있다. 바로 오르지 않고 약간 좌 로 옮겨 계단을 오르게 되어 있다. 대웅전이 바로 안보이도록 가는 길의 배치를 똑바로 하지 않는 것이 가람 배치의 특징이다. 드디어 대웅전에 올랐다. 단청이 없는 크지않은 그러나 황금비로 아름답고 안정감을 주는 건축물이다. 국보 제 49호인 修德寺 大雄殿은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건축물이다. 고려충렬왕34년(1308)에 세워진 수덕사 대웅전은 연대가 확실하고 조형미가 뛰어나다는 점에서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건물이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4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 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특히 소꼬리모양의 우미량(牛尾양)은 그 중 백미로 꼽을 수 있다.
외부에 그대로 노출된 그대로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수덕 사 대웅전은 건물의 기능미와 조형미가 잘 조화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이다. 그리고 특히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가 만들어내는 구도는 수덕사 대웅전이 보여주는 아름다 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이러한 조형미와 역사적 가치로 인해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은 현존하는 건물 중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목조건축물이다.
삼층석탑과 7층석탑 3층석탑-신라 문무왕 5년에 건립, 원효대사가 중수하였다고 전해지나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지닌 고려 초기 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7층석탑-1931년 滿空大禪師께서 건립한 석탑으로 기단부 없이 바로 탑신과 옥개석 으로 되어 있다.
보물 1263호 수덕사 괘불 괘불은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걸어 놓고 예배하는 의식용 불화이다. 수덕사 노사나괘불은 현종 14년(1673년) 4월에 수덕사에서 조성된 것으로 三身佛(석사ㆍ비로자나ㆍ노사나) 가운데 報身인 盧舍那佛을 그린 것이다. 대웅전 뒷담에는 봄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 앙증맞은 두꺼비상이 귀엽게 대웅전을 향해 도열해 있다. 오른쪽 흰 연등이 걸려있는 명부전을 찾았다. 명부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 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이다. 노무현전대통령의 영정이 안쪽에 있었다. 마침 시간이 되어서인 지 법고각에서는 범종을 치고 있었다. 다른 사찰과는 달리 범종이 아주 작은 대신 북과 목어,운판은 원래의 모습대로 컸다. 운판은 뭉게구름과 같은 형태로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새)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매는 영 혼을 천도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목어는 물 속의 중생(물고기)을 제도하며 항상 눈을 뜨고 있는데 인간은 항 상 혼침과 산란에서 깨어있어야함을 의미한다. 법고각을 지나 마당의 약샘에서 시원한 물 한잔을 마시고 백 련당 뒷편으로 갔다. 백련당 뒷편의 바위에 얽힌 수덕사 전설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 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줄 것을 조건으로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계 하고 예배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나고-- 세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지었다. 그후 낭자는 결혼을 허락하였으나 결혼후 에도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되자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사라지고 낭자의 한쪽 버선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그 옆에는 하얀꽃이 피어 있었다. 이꽃을 버선꽃이 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며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는 전설이다.
수덕여관과 고암 이응로화백 수덕사 매표소 근처에있는 수덕여관은 고암(顧庵) 이응로(李應魯, 1904~1989)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작품 활동을 하던 고택으로,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인 라혜석씨가 삼년간 기거하였다. 또한 이응로 화백이 1959년 이화여대 제자였던 박인경과 함께 프랑스로 가기 전까지 머물렀다. 그리고 이 응로 화백이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룬후 프랑스로 가기전에도 잠시 머문 곳으로, 이때 이화백 은 1969년 바위에 직접 추상문자 암각화를 바위에 새겼다. 그런데 감옥생활 할 때 옥바라지 한 사람은 버 림받은 본부인 박귀희씨였다. 그러나 이응로는 수덕여관에 잠시 머물다가 미련없이 다시 프랑스로 떠났다 고한다. 이응로 화백이 프랑스로 다시 떠난후 본부인인 박귀희씨가 시어머니를 모시며 여관을 운영하다 가 2001년에 사망하였다. 그 후 주인없는 빈집으로 방치되다가 2007년 수덕사에서 이응로 화백의 손자로 부터 수덕여관을 증여받아서, 옛 수덕여관의 원형을 복원하여 지금은 각종 문화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 다.
대흥동헌을 찾아서 두번째로 찾은 곳은 예산군 대흥면이다. 대흥면은 농촌드라마 '산너머남촌에는'의 촬영지이다. 우리가 찾은 동헌은 물론 학교 우체국 가게 그리고 과수원 모두 촬영현장이다. 마을입구로 들어서니 큰 동 상이 서 있다. 초등학교 2학년 교과서에 나왔던 "의좋은 형제"이야기의 실존인물(이성만,순)이 살았던 마을 이다. 효제비와 "의좋은형제 석상"이 큼직하게 서 있다.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한 동헌은 임성아문으로 들어 가야 모습을 나타낸다. 동헌 앞마당에는 형틀이 자리하고 있고 마당 구석에 함거도 있었다. 마당 뒤쪽은 드 라마 '산너머남촌에는'의 촬영장으로 쓰이는 장독대가 한마당 가득하다. 돌담도 두드려보면 프라스틱이다. 멀리 봉수산(483.9m)이 보인다. 봉수산에는 백제가 망한뒤 백제부흥에 나선 흑지상지 장군등이 12년간 나 당연합군과 싸운 격전지 임존산성(任存山城)이 있다.
대흥면 앞은 우리나라 최대의 저수지 예당저수지가 있다.1962년 만들어진 예당저수지는 1088ha로 국내 최대 규모다. 물길이 예산에서 당진까지 이어져 예당이라 붙여진 이곳은 낚시 명소로 손꼽힌다. 야영장, 조 각공원, 산책로, 수면 분수대 등 부대시설을 갖춰 쾌적하다. 예전부터 민물낚시의 사관학교로 불리는 이 저 수지는 저수지 위로 목제다리를 만들어 저수지 안으로 산책을 할 수 있는 관광코스를 만들어 놓았다. 경치가 너무 좋아 꼭 낚시로서 보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저수지 산책을 하면 서 마음의 휴식을 가진 후 다음 목적지인 추사 김정희 고택을 향했다.
추사 김정희 고택 추사체를 만든 추사 김정희선생 집안은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출가한 월성위 집안으로 대대로 이 많았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로 청나라 고증학의 향을 받아 금석학을 연구하였고 문인화의 대가였다. 추사 김정희가 청나라와 개인적 연을 맺은 것은 1809년(순조 9년). 부친 김노경(金魯敬 1766~1840)을 수행 해 청나라에 간 게 중국 체험의 첫 계기다. 추사는 23세, 학자로서 감수성이 한창 예민할 나이였다. 이 때의 연행(燕行)에서 추사는 청나라 금석학·고증학의 대학자이자 명문 서예가인 옹방강(翁方綱·1733~1818)과 직 접 교유한다. 추사의 학문 깊이를 알고 놀란 옹방강은 본인은 물론 그의 자식들과 의형제를 맺게 하고 편지 로 계속 교류케 하였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의 아호는 무려 20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우리에게 잘 알려진 추사(秋史),완당(阮堂)을 비롯하여 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승련노인 등이 있다. 추사는 청나라 옹방강과 완원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옹방강의 호인 담계(覃溪)와 보소재(寶蘇齋)를 본따서 자신의 호를 보담재(寶覃齋)라 짓기도 하고, 완원의 완(阮)자를 따서 완당(阮堂)이라고 했다. 그리고 말년인 1856년 봉은사에 머무를때 지은 노융(老融) 이라는 아호가 있는데 이뜻은 불가에서 말하는 열반의 경지를 의미한다고 한다.그리고 임종을 하게된 과천 관악산 아래에서 생을 마감할때까지 쓰던 아호는 과농(果農)이었다. 과농이란 과천에 사는 농부라는 뜻이다. 참고로 추사의 자는 '원춘(元春)' 이다.
지금의 추사고택은 영조의 부마가 되는 김한신이 건립했다고 한다. 안채는 ㅁ자형이다. 사랑채 댓돌에는 석 년(石年)이라 새겨진 돌기둥이 있다. 돌기둥의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한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제작했다고 한다. 고택 기둥에는 기둥마다 많은 주련이 붙어 있고 추사 작품이 고택내에 전시되어 있어 고택을 돌며 감 상할 수 있었다. 그중 주련 몇작품을 공부하였다. 고택에서 서쪽으로 200m 떨어진 곳에 추사묘가 있고 천연 기념물 106호인 백송도 있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부마이다.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가 추사 의 증조모인 것이다. 김한신이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화순옹주는 곡기를 끊고 14일만에 남편을 따라 저세상으로 갔다. 왕가에서는 최초의 열녀로 추앙받아 정조때 화순옹주홍문(열녀정문)을 내렸다.
古佛 맹사성의 고택 맹씨행단(孟氏杏檀) 마지막 답사지는 맹사성의 고택인 맹씨행단이다. 추사고택에서 40여분 달려 아산군 배방면 중리에 위치한 맹사행단을 찾았다. 맹씨 행단이란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檀)이 있는 집이란 뜻이다. 조선 초의 명정승 고불 맹사성(1360-1438)의 옛집을 부르는 이름이거니와 우리 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사적 제109호이다. 맹씨 행단은 본래 고려말의 최영장군이 살던 집이었는데 이웃집에 살던 맹사성의 사람됨을 눈여겨 본 최영이 손녀사위로 삼고 집까지 물려주었고 그 후 맹사성 일가는 이곳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청백리로도 유명한 맹사성의 인품을 보는 듯 하다. 고택 뒷편에 자리한 사당 세덕사 에는 맹사성과 그의 부친 조부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맹사성의 시비가 별도로 있다고 하여 찾았으나 찾 지 못하고 떠났으나 차가 지나며 보니 길 옆에 시비터가 크게 보였다. 안타깝게도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짧은 시간이나 오늘의 야외수업 문화답사는 뜻있고 유익하였다. 예산의 수덕사 탐방으로 시작하여 대흥면의 대흥동헌과 의좋은형제의 조각상을 구경하고 예당저수지에서 머리를 식히며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였다. 이어 추사 김정희선생의 고택에서 추사의 작품감상과 한시공 부를 하였다. 마지막으로 조선초기 명재상 맹사성의 맹씨행단을 답사하는 것으로 오늘의 문화답사를 모두 마쳤다. 날씨가 더없이 화창하고 학생들의 열의에 힘입어 노대홍 선생님의 열강도 한층 빛을 더했다. 실내에서의 논어공부보다 야외에서의 강의는 사전에 준비를 해야하므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며 행사준비와 진행에 헌신한 박명자 반장께도 고마움을 전한다.
맹씨고택
예당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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