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끝마을’.
‘핏물이 10리(4km) 넘게 흐르다 끝난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마을의 현재 정식 행정명칭은 ‘경북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다. 사과와 부석사, 소수서원과 무섬마을 외나무다리, 한우 등으로 유명한 ‘번영하는 고을 榮州시’에 어떻게 이런 섬뜩한 이름을 가진 마을이 존재할까.
사연은 1457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대왕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경상도 順興府(순흥부, 지금의 소수서원이 있는 지역)으로 귀양 온 뒤 이보흠 순흥부사와 함께 端宗(단종) 복원 운동을 벌였다. 그의 형이자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이 1453년 10월10일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癸酉靖難(계유정난)을 일으키고 2년 뒤인 1455년에 단종을 폐위시킨 뒤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거사 직전 탄로나 실패했다.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丁丑之變(정축지변)으로 기록된 이 사건 직후 영월 청룡포에 유배 보낸 단종과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리고 이보흠은 참형에 처했다. 순흥부에 살던 장정 수백명을 무참히 도륙해 소수서원 옆을 흐르는 竹溪川(죽계천)에 버렸는데, 그 피가 10리 여나 떨어진 피끝마을에서야 멈췄다고 한다. 당시 그 고장 선비들은 피 끝을 조금 부드럽게 ‘비 그늘’로 발음하고 이를 한자로 옮긴 雨陰(우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冤魂 달랜 주세붕의 ‘敬자바위’
순흥은 이 땅에 주희 성리학을 처음으로 들여온 晦軒 安珦(회헌 안향)의 고향이다. 조선 개국 사상이 된 조선성리학의 鼻祖의 고향이라 정축지변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상당히 중시되던 곳이다. 하지만 逆謀고을이란 오명은 周世鵬(주세붕)이 풍기군수가 될 때까지 3세대(90년)나 계속됐다. 주세붕은 1442년, 白雲洞(백운동, 순흥)에 안향 사당인 회헌사를, 1년 뒤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그 뒤 退溪 李滉(퇴계 이황)이 1550년 풍기군수로 부임했다. 퇴계는 明宗에게 상소를 올려 ‘紹修書院(소수서원)’이란 賜額(사액)을 받아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됐다.
주세붕은 백운동서원을 세운 뒤 죽계천 바위에 敬(경)자를 새겼다. 敬은 오경의 하나로 역사책인 『書經』을 한 마디로 표현한, 유학의 핵심 사상 가운데 하나다. 공자는 『주역』 <重地坤(䷁)괘 문언전>에서 육이효에 대해 “군자는 공경함으로써 안을 곧게 하고 의리로써 밖을 방정하게 해서 경과 의가 섬에 덕이 외롭지 않다”며 敬과 義를 강조했다. 퇴계는 이 敬 위에 白雲洞이란 글자를 다시 써 넣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白雲洞은 하얀 색, 敬은 붉은 색이다. 요즘은 많이 없어졌지만 길을 걷다 보면 문득 하얀색 천과 붉은 색 천을 달아놓은 깃발이 눈에 띈다. 점집이나 무당집에서 세워놓은 것이다. 흰색은 혼을 부르는 색이고 붉은 색은 사연 많은 혼을 정성껏 달래 다시 보내는 색이라고 한다. 훗날 사람들이 정축지변 때 억울한 죽임을 당한 백성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백운동에는 하얀 색을, 경에는 붉은 색을 칠하고 정성들여 제사지냈다고 한다. 그런 뒤에 밤만 되면 찾아오던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너희들 천국, 정치는 살리는 우리들 나라인데…
소수서원의 紹修는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는다(旣廢之學 紹而修之, 기폐지학 소이수지)”는 뜻이다. 어린 조카를 몰아내 죽이고 왕위를 簒奪(찬탈)한 세조를 겨냥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한 시절을 떨게 했던 수양대군은 말년에 凶夢에 시달리다 13년이란 짧은 기간만 왕위에 있다 52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갔다. ‘어지러움을 바로 잡는다’는 靖難(정난)을 명분으로 삼았지만, ‘조선 쿠데타의 비조’라는 악명을 지우지 못하고서 말이다.
세조는 ‘정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다’는 가르침을 알지 못했을까. 배워서 머리로는 알고는 있었지만 몸으로 실천할 정도로 수양을 덜했을까. 계강자가 공자에게 “만일 무도한 자를 죽여서 백성들이 올바른 道로 나아가도록 하면 어떠하냐”고 묻자, 공자는 “정치를 하는데 어찌 죽음을 쓰려고 하느냐. 그대가 善하다면 백성도 善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자는 이어 그 유명한 말,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공자와 계강자의 이 대화는 계강자가 정치가 무엇이냐고 묻고 공자가 “정치는 올바름이다. 그대가 올바름으로 다스린다면 누가 감히 올바르지 않겠느냐”는 대답에서 시작됐다. 계강자가 이어 도둑이 많다고 걱정하자 공자는 “그대가 스스로 탐욕스럽지 않다면 백성들은 비록 상을 준다고 해도 훔치지 않을 것”(『논어』 <안연>)이라고 지적했다. 정치란 지도자가 솔선수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거듭 밝힌 것이다.
조선 최고의 학자로 평가받으며, 1000원짜리 지폐 얼굴이 된 퇴계는 이런 공자의 가르침을 알았을까. 그는 명종에게서 받은 紹修라는 말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퇴계는 흥선대원군이 대규모 사원철거령을 내릴 때까지 기득권세력의 근거지로 오염됐던 사액서원의 이데올로기화를 내다보지 못했을까. 이황은 그의 제자들이 주희를 공자보다 더 떠받들며 붕당으로 나뉘어 민생을 도외시한 채 그들만의 권력을 위한 ‘너희들 천국’을 만드는데 혈안이 되는 위험성을 알아채지 못했을까.
◆士禍 닮은 理禍 뛰어넘어야 대한민국이 산다
조선 최대의 폭군으로 불리는 연산군은 두 차례의 士禍(사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약해진 왕권을 강화한다는 명분아래 자신을 반대하는 신하를 대규모로 숙청했다.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겠다는 反正(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도 총애하던 조광조 일파를 처벌하는 기묘사화(1519년)를 일으켰다. 중종이 승하하고 즉위한 명종 때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외척간의 갈등에 얽혀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세조와 중종의 쿠데타 이후 지배층이 된 사림들 사이에 죽고 죽이는 권력쟁탈전이 벌어졌다. 벼슬할 사람은 많고 자리는 적은데다 사람의 욕심을 끝이 없으니,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권력이었다. 왜란이 일어나든 호란이 발생하든, 두 차례의 엄청난 전란 속에서 백성들의 삶이 망가지고 나라의 운명의 바람 앞의 등불이 돼도 그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정치는 백성을 살리는 게 아니라 죽이는 것이었다.
한국은 지금 이른바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양보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다. 조선시대의 사화에 빗대 말한다면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재앙’이라는 뜻의 理禍(이화)가 벌어지고 있다고 할 정도다. 이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理禍가 아니라 먹고 입고 자고 일하는 데 걱정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일이다. 우리는 훗날 후손들에게 ‘理禍로 잃어버린 60년을 만든 세대’라는 비판을 받을지 모른다. 그런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바짝 정신 차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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