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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체험- 0시의 자오선/신용목 시
어제는 병실에서 자정을 맞고 오늘은
가로수 스치는 차창 안에서
자정을 지난다
그때, 휘익 내 몸을 긋고 간 것
어제와 오늘 사이
1초와 1초 사이, 나를 갈라놓는 것─별자리를 긋
고 간 것
바람이 수북이 털을 깎는다 태양의 성기에서 쏟아
지는 등고선 휜 능선 하나가 취한 망나니
단칼로 떨어지는 0시의 자오선,
이별은 그렇게 온다 죽음은
그렇게 0시
나와 나 사이의
별과 별 사이의
발자국마다 그 주인의 키로 서서 바람은 물끄러미
스러지는 순간들을 바라본다, 추억의 처형장인 몸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우주의 낱장이여, 안녕
시간의 단면이여 문을 닫는다 침대는 도마처럼 반
듯하다 문짝과 문틀과 문틈으로 누워
가만히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린다
물속에서 물풍선을 터뜨리듯─내 속의 어둠을 풀
어놓는다
아무래도 나는 부활할 것 같다
‘장엄하다’는 탄생보다 죽음에 걸맞다. 탄생이 희망이라면 죽음은 경건이다. 죽음을 소망하는 자는 두려움을 이겨낸 신앙인이거나 세상을 달관한 자다. 젊을 때는 노인들이 ‘빨리 저세상으로 가야지’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좋은 세상을 떠나려 할까, 왜 속에 없는 말을 할까. 나이가 들고서야 그 말이 진심이 아닌 줄 알았다. 죽고 싶다는 말은 현재를 지탱할 힘이 없고 고통스러워 영혼 없이 뱉는 독백일 뿐이다. 현재의 삶이 행복하고 건강하면 죽고 싶겠는가. 살날이 충분하다면 하고 싶고, 누리고 싶은 것이 많은데 죽을 이유가 없잖은가.
젊을 땐 시야가 넓지 않았다. 이제는 마음의 프리즘이 생겨 총천연색에 파스텔 색조까지 보인다. 마음이 넉넉해져 정답이 아닌 오답도 수용이 된다. 녹록하지 않게 살아온 세월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웰-빙을 추구하지만, 중요한 건 웰-다잉이다. 이 시 ‘0시의 자오선’은 죽음이 화두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할 시간과 기록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축복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예고 없이 와, 준비 없이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작가는 젊은 나이에도 인생을 관조하고 있다. 남보다 앞서 내면에 수도원 하나를 세워 수행을 쌓고 있다. 신용목의 산문집 [우리에게 일어난 기적은]에서 ‘하루는 무심히 집을 나서다가 눈송이가 검은 구두 위에서 녹는 것을 보았다. 검은색과 흰색이 닿자마자 물빛이 되는 순간, 검정과 하양이 섞여 투명을 만드는 순간, 나는 기적처럼 모든 '눈물'을 다 이해할 것 같았다.’
나는 이순이 지나서야 세상을 넉넉히 보게 되었는데, 시인은 젊은 나이에 ‘프리즘’의 속뜻을 알고 있었다. 프리즘이란 사전적 용어로 ‘광학에서 빛을 굴절, 분산, 반사하는 데 쓰이는 부품이다. 프리즘은 빛이 있는 곳에서 자기의 역할을 최대한 발휘한다. 굴절되고 분산되고 반사되면서 총천연색 빛을 발한다.’ 검은 구두 위에서 녹는 눈송이가 검은색과 만나 물빛이 되는 순간 그것을 ‘눈물’로 본 것은 배려를 의역한 심리적 표현이다. 세상을 흑백이 아닌 프리즘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극복할 무기를 갖췄다는 것이다.
어제는 병실에서 자정을 맞고 오늘은
가로수 스치는 차창 안에서
자정을 지난다
0시의 자오선은 전, 후 색깔이 같다. 그런데 시차는 어제와 오늘이다. 병실에서 맞는 자정은 사유의 깊이가 해저와 같다. 대상이 누구든지 비껴갈 수 없는 운명의 시간이다. 대수술을 앞둔 환자라면 생의 갈림길에서 한없이 오그라든 심장을 끌어안고, 내려놓기를 반복하고 있을 것이다. 심장이 멎는 기분으로 세상과 하직할 준비도 여러 날 했을 것이다. 긴 병에 장사 없다고 병원이 내 집 인양 오래 묵게 되면 감정이 담담해진다. 산소 호흡기를 꼈다 빼기를 반복하다 보면 환자도 보호자도 죽음을 소망하기에 이른다. 사람은 인내를 뛰어넘는 고통을 겪을 때 죽음 앞에 약해진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환자를 남겨둔 채, 출근하는 화자는 가로수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는다. (1연)
그때, 휘익 내 몸을 긋고 간 것
어제와 오늘 사이
정확히 내 몸을 그을 수 있는 것은 신의 영역이다. 자정을 넘어 밤하늘을 바라보면 시야로 들어오는 별자리와 은하수가 있다. 지구의 끝을 가노라면 가장 청정한 지역에서 밤하늘의 쇼를 볼 수 있다. 자정이 넘어야 볼 수 있는 신의 심판, 한두 개가 아닌 수많은 별똥별이 떨어지는 별들의 전쟁, 밤하늘을 수놓은 은하계에서 죽음을 목격할 수 있다. 그 장엄한 광경을 볼 때 내 몸도 일체가 되어 죽음이 나를 휙 긋고 간다. 어제와 오늘 사이 죽음이 예비 되어 우연도 찰나도 아닌 신의 뜻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위험한 어제와 오늘을 살고 있다. 찰나 같지만 오랜 계획이며 역사다. 어제와 오늘 사이는 시간상으로 24시간이다. 24시간이 주는 의미에 삶도 있고 죽음도 있다. 시한부 환자를 둔 어느 가장의 하루를 공감각적으로 표현했다. 화자의 24시간을 형상화했다. (2연)
1초와 1초 사이, 나를 갈라놓은 것─별자리를 긋
고 간 것
죽음을 표현한 구절이다. 오로라 체험을 할 때 밤하늘의 별들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별이 가로, 세로를 그으며 천천히 움직이거나 쏜살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우수수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그 순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음을 체험했다. ‘1초와 1초 사이, 나를 갈라놓은 것’ 1초는 삶이 죽음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별자리를 긋고 간 것’ 검정 도화지에 흰 선을 그리는 것. 동맥을 긋는 살인적인 경이로움에 경악했다. 살아서 경험한 특별한 선물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수많은 죽음을 지구의 북쪽 ‘옐로나이프’의 하늘에서 확인했다. 오늘은 어느 지구에서 누가 병실을 떠났을까, 초를 다투는 죽음이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면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주의 법칙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 이는 우주에 대한 예의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삶과 죽음에 대하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삶의 모든 움직임을 인식할 수 있으려면 아주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시간, 슬픔, 그리고 죽음이다. 시간을 이해하고, 슬픔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며, 죽음과 함께 하는 거 이것들 모두 맑고 투명한 사랑을 요구한다. 사랑은 이론도 아니고 이상도 아니다.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기 전 완전한 사랑을 경험했다면 신이 말하는 것, 죽음의 경지를 초월한 것이다. 여기서 사랑은 육의 사랑보다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해탈을 뜻한다. (3연)
바람이 수북이 털을 깎는다 태양의 성기에서 쏟아
지는 등고선 휜 능선 하나가 취한 망나니
오로라의 춤은 죽음의 예식이다. 오로라는 ‘남반구와 북반구의 고위도에서 상층 대기 중에 나타나는 빛을 발하는 현상’이며 하늘에서 역할을 한다. 이런 세레머니는 날씨가 관건이다. 하늘에 먹구름이 얼마나 꼈나, 바람이 비를 얼마나 몰고 올 것인가에 따라 별이 나오고 오로라가 출몰하기 때문이다. 낮 동안 태양의 기운을 받은 하늘이 열쇠를 쥐고 있다.
‘지는 등고선 휜 능선 하나가 취한 망나니’
인간의 생로병사, 화자는 죽음을 환한 대낮에 맞이하고 싶지 않다. 0시를 기준으로 별들의 전쟁과 죽음을 동일시했다. 어쩌면 병실에서 맞이하는 죽음보다 망나니 앞에 놓여있는 죽음이 의로울 수 있다.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망나니의 춤으로 혼을 앗아가는 것과 오로라를 보고 혼이 나가는 것은 비슷한 체험이다. (4연)
단칼로 떨어지는 0시의 자오선,
이별은 그렇게 온다 죽음은
그렇게 0시
[죄와 벌]을 쓴 도스토옙스키는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나는 왜 내가 존재하는지 내가 어떤 소용이 있는지도 모른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가장 모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죽음이다.’ 인간의 생사를 가장 솔직하게 표현한 대사다. 붙잡고 싶고, 끝까지 함께 하고 싶은 인연을 생으로 끊어야 하는 이별. 노인이 지병으로 맞는 죽음, 교통사고로 인한 황당한 죽음, 가슴에 묻은 자식의 죽음, 남편과 아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죽음, 형제자매의 죽음, 천재의 요절 등 지금까지 많은 죽음을 보았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어두웠다. 딸을 해산해 온몸의 마디가 풀린 상태에서 슬픔을 접했던 경험이 있다. 아파트 위 아래층에서 잘 지내던 가정에 죽음이 급파하여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이 급성 백혈병으로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위층 엄마는 자식을 강에 뿌리고 오던 길로 우리 집 벨을 눌렀으나 퇴원한 산모를 위해 친정엄마가 들이지 않았다. 오행의 상생상극의 이치라고 해야 할까, 친정어머니는 ‘부정 탄다’고 갓 태어난 아기가 있어 안 된다고 굳게 문을 닫았다. 죽음과 탄생의 엇박자. 결혼을 앞둔 사람이 장례식을 삼가야 하는 것도 나쁜 기운을 받지 말고, 조심하라는 의미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원죄를 차치하고 인간을 살리는 방법도 있을 텐데, 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고, 조건 없이 믿으라 한다. 그렇게 단칼에 거두어야 하는 건지. ‘인간은 죽어도 그 업에 따라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는 불교 교리가 ‘0시의 자오선’을 설명할 수 있다. 죽음을 불교에서는 윤회라고 말한다. 기독교의 부활과는 분위기가 다른데 불교의 의미는 어느 생물로 태어나든 환생한다는 얘기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건 기독교나 불교나 마찬가지다. 이제는 북극과 남극을 연결한 자오선을 통해 인간도 우주의 관점에서 시간과 공간을 그릴 수 있으며,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5연)
나와 나 사이의
별과 별 사이의
체험은 진실하다. 죽음은 0시 이후에 하늘과 땅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주의 쇼다. 나와 별 사이 간극 없이 쏟아져 내리는 광경을 보았다. 부모와 자식, 평생을 같이한 부부도 죽음에 간격이 있다. 아이러니한 죽음을 하나 소개한다. 오래전 방송에서 행복의 지름길에 대해 강의하던 ‘행복 전도사’라는 방송인이 시청자들에게 긍정의 아이콘이었는데, 어느 날 남편과 함께 모텔에서 동반 자살해 국민을 격앙케 한 일이 있다. 혼자 죽는 것이 두려워 남편과 동행했다는데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 해도 죽음을 함께 엮을 수 있을까. 그 여자는 저승사자처럼 남편을 데려갔다. ‘인명은 재천’인데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동반 자살’ 이런 죽음은 병실에서 일어나는 죽음보다 못하다. (6연)
발자국마다 그 주인의 키로 서서 바람은 물끄러미
스러지는 순간들을 바라본다, 추억의 처형장인 몸
편지를 접어 봉투에 넣고
북극에서의 오로라 체험은 몸이 처형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유체 이탈은 환상적 체험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인간의 죽음을 바라본다는 건 형이상학적이다. 그런데 파스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곧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안다. 하지만 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죽음이란 것에 대해서 어느 무엇 하나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다.’ 파스카는 죽음에 대해 솔직하고 냉철하다. 태어나는 것도 내 뜻이 아니고 죽음도 내 뜻이 아닌 마당에, 감성적이지 않고 이성적으로 단언하니 철학자답다. (7연)
우주의 낱장이여, 안녕
시간의 단면이여 문을 닫는다 침대는 도마처럼 반
듯하다 문짝과 문틀과 문틈으로 누워
가만히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린다
초저녁에 시체처럼 누워 있다가 0시가 되면 부스스 일어나 겨울 파카를 두르고 오로라를 보러 갔는데, 이런 행동은 8연에서 보여주는 시구 하나하나를 답습하는 것과 같다. 지척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세상이 정지된 것 같다. 이 장면은 병실의 분위기와 다르다. 이 풍경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죽음을 지켜보는 체험이다. 1연에서 8연에 이르기까지 시인은 죽음을 객관적으로 정의 내린다. 죽은 사람의 영혼 일탈을 보듯이 덤덤하게 표현한다.
‘시간의 단면이고 문짝과 문틀과 문틈으로 누워 가만히 어둠 속에서 입을 벌린다.’ 비행기 안에 갇혀 있을 때면 내 영혼을 담보 잡힌 느낌이 든다. 이런 두려운 온도 차를 겪을 때면 겸손해진다. 비행기 안에서의 관속 체험은 숭엄하다. 우리는 겹겹이 쌓인 우주의 낱장에 불과하며 시간 속에 갇혀있는 단면일 뿐이다. 언제 생명의 문이 닫힐지 모른다. 준비 없이 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8연)
물속에서 물풍선을 터뜨리듯─내 속의 어둠을 풀
어놓는다
물 풍선은 터지기 직전의 공포와 터진 후 어둠을 이겨낸 소재다. 물 풍선은 위기를 드러내는 도구다. 물속에서 터지는 풍선은 충격이 작아 고난을 원만하게 버틸 수 있다. 자기 고백서처럼 죽음의 고통을 잘 이겨내고 있다.
핀란드 속담에 ‘물은 만물의 근원이다.’라는 말이 있다. 물속에서 희석되는 모든 몹쓸 것들을 물이 다 품어준다는 것이다. 인도 갠지스강에 가면 신성하다고 여기는 강물에 목욕하고 죄를 씻어버리려는 순례자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그 물을 성수라 믿고 물속에 몸을 담그고 간절히 기원한다. 종교적 행위이듯 화자 또한 물속에다 어두운 내면을 풀어내 자유를 찾는다. (9연)
아무래도 나는 부활할 것 같다
화자가 부활할 것 같다고 고백한 것은 밤하늘에서 보여주는 유성, 곧 죽음의 유형이다. 물속에서 터진 물풍선처럼 보이지 않는 화자의 영적 모습을 부활로 묘사했다. 화자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생의 갈림길을 목격하고 그 깨달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기독교에서의 부활은 영생이고, 이 시의 부활은 ‘무’다. 1연부터 10연까지의 연관성을 볼 때 종교적으로 쓴 시라기보다 자연에서 체험한 죽음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시인의 시 세계다. 죽음에 지배당했던 하루, 죽음의 고뇌를 터트린 후 정신적 자유를 얻은 묘사다. (10연)
시인과 우주를 보는 관점이 상통해 오래 전의 체험을 ‘0시의 자오선’에 병치했다. 상상만 했던 죽음을 영과 육으로 겪은 일이다. [0시의 자오선]과 오로라 체험은 죽음의 사색이었고, 내게 큰 자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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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몇 년 전 '불교신문'에
응모했던 평론.
평론 쓰기는 침묵이고, 사색이다.
부족해 퇴고를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