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0장 7-10절
나는 양의 문이라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시고 난 뒤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사실은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기 위하여 자신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육신의 눈을 뜨게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하시는 것으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보게 되는 구원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스스로 본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이들과 관련하여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치신 사건을 통해 드러내신 것은 스스로는 본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리고 그것으로 당시 이스라엘을 지도하였지만, 사실은 전혀 보지 못하는 자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부터 말씀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여 그들 가운데 보내셨지만, 그들은 그런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부족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많은 표적과 기사들,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라고는 없었지만 저들은 눈 뜬 장님과 같은 자로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심판하기 위함이요,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기 위해 왔다고 증거 하셨던 겁니다.
이 문제를 좀 더 드러내신 것이 목자와 양의 비유입니다. 지난 시간에 살핀 요한복음 10장 1절 이하 6절은 비유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된 목자가 있는가 하면 거짓된 목자도 있는데, 누가 참된 목자인가?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자입니다. 그럼 누가 거짓된 목자인가?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로 들어가는 자가 아니라,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절도요 강도라고 칭하십니다.
조금 더 말씀하시기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참된 목자를 위하여 문을 엽니다. 그래서 참된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 양을 끌어냅니다. 시편 23편의 말씀처럼 푸른 풀밭에 누이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시23:2). 이때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냅니다. 그리고 양은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듣고 압니다. 이것이 목자와 양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참된 목자가 아니라 거짓된 목자, 다시 말해 절도요 강도가 와서 양을 끌어내고자 한다면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있기 때문에 거짓된 목자의 음성에 대해서는 따르지 않으려고 합니다. 도리어 도망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요한복음 9장에서 하신 말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요9:39)고 하실 때 그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 중에는 “...우리도 맹인인가”(요9:40)라는 반응을 보였다면, 요한복음 10장의 비유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신들을 향해 하고 있는 말씀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6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7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이 비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먼저 7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합니다. 11절에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는 말씀도 하지만, 지금 비유로 말씀하고 있는 모든 내용은 거짓된 목자인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의식하고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지도자들만 거짓된 목자로 있는가? 구약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약 시대 때도 거짓된 목자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레미야 23장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목장의 양 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렘23:1)고 하시면서 거짓된 목자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밝히시는데, 핵심은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렘23:2)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9절 이하에서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구약 시대 예레미야와 같은 참된 선지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거짓된 선지자도 있었습니다. 그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거짓된 목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처럼 구약을 비롯하여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양 떼를 위하여 목자를 세워 일하시는데, 누가 참된 목자고 누가 거짓된 목자냐?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양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참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을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목자와 거짓된 목자를 분별할 수 있는 척도가 무엇이냐?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양들에 대해서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비유에서는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자, 즉 목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면, 여기서는 ‘양의 문’으로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의미라고도 할 수 있지만, 양의 문이란 양들이 나갔다가 들어올 수 있도록 만든 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양들에 대해서도 분별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 53장에서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이 없다는 의미보다는 택한 백성으로 제한해서 이해해야 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내용이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켜 우리의 죄악을 도말하신다고 할 때 그 대상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 안에 나타난 것처럼 ‘자기 백성’(마1:21) 외에 다른 대상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 자체, 즉 양과 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다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자기 백성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3장에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양과 같이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지만, 하나님께서 참된 목자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양 떼로 부르시는 자가 있는데, 그들이 누구냐? 이사야 53장에서 말하는 ‘우리’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말하는 ‘자기 백성’입니다.
이때 누가 하나님의 양 떼요 그리스도의 양 떼인가? 그리고 누가 하나님의 양 떼가 아니요 그리스도의 양 떼가 아닌가? 그리스도라는 양의 문 안에 있는 자, 그리고 참된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라는 양의 문을 통해 나가고, 다시 그 문으로 들어가는 자, 그가 하나님의 양 떼요 그리스도의 양 떼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실 때 참된 목자와 거짓된 목자의 분별의 척도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심과 동시에, 이 말씀 안에서 무엇까지 생각할 수 있는가 하면 누가 하나님의 양 떼요 그리스도의 양 떼인지, 그리고 누가 하나님의 양 떼가 아니며 그리스도의 양 떼가 아닌지에 대한 분별까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자, 그가 그리스도의 양 떼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나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은 자기 백성, 자기 양 떼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필요한 양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10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신이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때문에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구원의 문이라는 말과 동시에 양 떼들의 양식과 영양을 공급해 주는 모든 영적인 가르침의 핵심이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 3절의 말씀처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목자요 선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참된 양 떼라면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속아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그리스도께 속한 지혜인지, 무엇이 그리스도의 진리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목사 가운데 말 잘 하는 분이 있습니다. 표현력이 굉장히 좋은 분이 있습니다. 그런 말로, 그런 표현력으로 주의 진리를 합당하게 전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로, 그 표현력으로 주의 진리를 가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지혜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지혜를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혹 일부는 그리스도께 속한 것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여기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매튜 풀 주석을 조금 참고하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양의 문은 양들이 전투하는 교회만이 아니라 승리의 교회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을 의미한다고 주석합니다. 전투하는 교회는 지상에 있습니다. 승리의 교회는 천상에 있습니다. 지상에 있는 교회는 가시적 교회입니다. 보이는 교회로서 그 안에는 알곡이 있는가 하면 가라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천상의 교회는 결코 가라지가 들어갈 수 없는 교회입니다. 바로 이 교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통과해야 하는가?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매튜 풀 주석은 양의 문에 대하여 이 땅에서 교회 속으로 들어가는 문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구약의 할례, 신약의 세례, 그리고 외적인 신앙고백 같은 것들을 눈에 보이는 교회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즉 그리스도의 영이 한 심령 속에서 역사하여 만들어내는 참되고 살아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여기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설명합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된 지체가 될 수 없다면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교회의 지체는 더더욱 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눈에 보이는 교회 안에는 있을 수 있지만, 그리고 그런 점에서 세례를 받고 외적으로 신앙을 고백할 수는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된 지체는 될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교회의 지체 역시 될 수 없습니다. 누구만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교회의 지체요, 눈이 보이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된 지체일 수 있는가? 반드시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는 자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주님께서는 자신만의 양의 문이며, 구원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에게로 나아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절하는 바리새인들, 그리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헛되게 찾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열어두신 문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 이 문 외에 다른 문은 결코 없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8절에서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나보다 먼저 온 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만약 그렇게 본다면 세례 요한도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요, 구약의 참된 선지자도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에 속합니다. 그들을 절도요 강도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습니다.
칼빈은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보다 자기를 내세우는 자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매튜 풀 주석은 그리스도보다 먼저 왔지만 그리스도에 의해 보내심을 받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종합하여 설명하면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인데, 그들은 누군가? 그리스도의 양 떼를 돌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의해 보내심을 받지 않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참된 소명을 따라 온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보다 자기를 내세웁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중심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할 때, 저들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를 하십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마6:1)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 구제를 말씀하고, 기도를 말씀하고, 금식을 말씀하는데,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누군가? 하나님 앞에서의 의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하는 자들이런 겁니다. 그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6:19-20)는 말씀으로 연결 되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25)는 교훈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는 교훈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점에서 참된 목자라면 지상의 것을 염려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못하는 자가 되어선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자신의 모든 삶을 주께 맡기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목자만이 아니라 양 떼들도 그런 자로 있어야 합니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우리는 누가 그리스도보다 먼저 온 자요, 누가 그리스도의 양 떼의 절도요 강도인지를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 중심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과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사람입니다. 물론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고 할 때 그들로부터 나타나는 열매가 자신의 영광이요, 자신을 중심으로 두고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참된 목자라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양 떼를 빼앗아 가는 절도요 강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조금 더 단순하게 말하면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교훈들은 그가 참된 목자가 아니라 거짓된 목자요, 절도요, 강도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도록 만들고, 그리스도를 가까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것으로 교훈한다면 그는 참된 목자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그리스도 없이는 구원 자체가 없습니다. 부르심도 없고, 의롭다 하심도 없고, 거룩함도 없고, 영화로움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하신다고 할 때, 이 일은 영원 전부터 정하여 실행하시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이 구속을 받고,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하심을 받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화로움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의 지혜인 것이고, 그가 우리의 의로움인 것이고, 그가 우리의 거룩함인 것이고, 그가 우리의 구원함이 되시는 것입니다(고전1:30). 한 마디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시고,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풍성하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떠나 어떻게 구원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리스도를 더욱 가까이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다시 8절을 보시면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주님의 양 떼라면 나보다 먼저 온 자들, 그리스도보다 자기를 내세우는 자들, 그리스도의 양 떼를 돌보지만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지 않는 자들, 그렇기에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을 증거 하는 것인가?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 떼가 아니라는 것을 증거 할 뿐입니다.
이미 비유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목자인 그리스도께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3). 또한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4). 반면 타인의 음성일 경우 양들은 따라 가지 않고, 오히려 도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5). 한 마디로 목자는 자기의 양 떼를 아는 것이고, 양 떼 또한 자기 목자가 누구인지 압니다. 이런 관계 속에서 목자는 양 떼를 위합니다. 11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목자는 양 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기 양 떼를 아실뿐만 아니라, 바로 그 양 떼를 위하여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양 떼는 참된 목자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떠날 수 없는 겁니다.
앞에서 이사야 53장에 대하여 언급했지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심으로 구원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참된 목자로서 우리를 인도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다시금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성은 우리로 하여금 죄의 길로 가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알아서 크도록 내버려두시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 우리의 문을 열고 양들을 인도하여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십니다. 시편 23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시23:3).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시23:4). 오히려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이런 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양 떼는 그리스도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음성, 거기에만 머물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데, 9절입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리스도가 양의 문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구원을 위한 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습니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의 시작도 할 수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로 예수 그리스도를 두셨다고 할 때 이 길, 저 길 중에 하나로 두신 것이 아니라, 유일한 길로 두셨습니다. 즉 그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증거 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4:11-12) 사도 바울 역시 이렇게 증거 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2:5) 당연히 유일한 중보자 외에 다른 중보자를 두는 모든 교리들은 구원의 길로 제시한다 할지라도 거기에 구원을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 외에 다른 그리스도를 말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후자의 경우 주로 다른 종교들, 혹은 기독교와 관련된 이단들이 주장하는 바인데, 그들에게 구원의 문이 열려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로 세우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길을 가도록 만듭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요한복음 안에서도 가르쳤고, 또한 가르칠 내용으로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이런 말씀도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러나 구원의 시작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해서만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수 있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영적 생명의 양식을 공급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문이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문을 통과하지 않고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 가로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문을 통과하지 않고 양의 우리에 들어와 쉰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여러 번 자신이 생명의 떡임을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48절에서는 다시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그리고 51절에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물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시지만(요6:55), 그리스도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실제로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믿는 것입니다. 그의 모든 말씀에 대하여 믿고 그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이 생명의 양식으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10절 상반부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라고 말씀하시는데, 꼴을 먹인다는 것은 낮에 양들을 초장으로 인도하여 먹이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는 양을 보호하기 위해서 양 우리 안으로 들여보냅니다. 참된 목자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밤중에 양을 도둑질 하러 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 자들로부터 보호하고 지키기 위해서 보살핍니다. 돌보아 줍니다. 반면 절도요 강도요 도둑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자들입니다. 9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또 꼴을 얻는 자는 그리스도의 양 떼이지만, 곧바로 10절에서 도둑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참된 목자로부터 꼴을 먹는다고 해서 도둑과 같은 자들의 위협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위협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가 그 양 떼를 지키고 보호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주의하고, 경계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씀하기도 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은 구약에서부터 있었고,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도 그들을 의식하고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연히 절도요 강도요 도둑으로 칭할 수 있는 거짓 목자는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졸고 방심하는 틈을 타서 연약한 양 떼들을 양 우리 밖으로 도둑질 해 갑니다. 참된 목자이신 분과 함께 양 우리 밖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도둑에 의해 참된 목자로부터 분리되는 쪽으로 갑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는 수없이 많은 거짓된 가르침이 있었고, 그런 가르침 속에서 그리스도의 양 떼들은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저들의 모든 가르침은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는 가르침으로 죽음이요 멸망을 향해 가는 것으로만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다든가, 인성을 부인하는 것, 또한 성령의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는 것, 앞에서도 말했지만 구원의 모든 서정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부인하도록 하는 것 등 그런 모든 가르침이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키는 가르침입니다. 그 길은 죽음의 길이요, 멸망으로 향해 가는 길입니다.
물론 그들 스스로 이 길이 죽음의 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이 길이 멸망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이단으로 정죄된 자들이 자신의 교리를 주장할 때 죽음이요,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면서 증거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도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들 스스로는 진리 위에 서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해 들어가고 나오는 자가 아니면 다 절도요 강도요 도둑입니다. 그들의 모든 가르침은 죽이는 가르침이요, 멸망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입니다. 때문에 경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당시 교회를 어지럽히는 가르침에 대하여 경계할 것은 말씀하기도 했는데, 골로새서 2장 8절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 양 떼를 보호하시지만, 그리고 보호하실 것이지만, 그렇게 보호하신다는 것 때문에 방심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하고 경계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먹이시는 꼴이 무엇인가도 중요합니다. 그가 나가서 푸른 풀밭,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여 먹이신다고 할 때 결코 양 떼들이 먹고 해롭게 될 만한 것은 먹이시지 않습니다. 이런 것에 대한 분별이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의하는 것이요, 경계하는 것이요, 깨어 있는 것입니다.
도둑은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왔지만, 참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양 떼에게 오신 것은 이어지는 말씀의 목적을 위해서 오셨는데, 10절 하반부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내가’라는 말을 하십니다. 앞에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고, 비유를 말씀하실 때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 즉 참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절도요 강도요 도둑과 비교하시면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시면서 그 문으로 인도하는 자가 참된 목자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된 목자, 모든 목자들의 목자장은 누군가?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목자이십니다. 그러나 그 직무를 사도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수요일 천국 열쇠와 관련해서 살필 때 말씀드린 것처럼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게 되는 권세까지 주셨습니다(요20:23).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라는 권세까지 주셨습니다(마18:18). 그러나 그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필요한 은사를 공급하시고 성령으로 그들을 다스리시고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분이 유일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양 떼를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만이 양 떼들의 유일한 목자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위임 받은 모든 말씀 사역자는 그리스도로부터 위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은 그의 모든 사역이 그리스도의 사역이 되도록 그리스도만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참된 목자요 유일한 목자이기 때문에 그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않는 범위에서 맡기신 양 떼들을 보살펴야 합니다.
어쨌든 지금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참된 목자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자신이 양 떼의 목자로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그것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9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요, 또한 내가 주는 꼴을 먹음으로 구원에 있어 더욱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본래는 죽었던 자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더 나아가서 영생에 이르기까지 하도록 주께서 그의 말씀을 먹이심으로 풍성하게 하시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반복하여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자들이었습니다. 본성으로 하자면 양으로 있던 자가 아니라 곰과 사자, 호랑이와 같은 야수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령이 우리를 길들이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온유한 그리스도의 양으로 있게 됩니다.
이 일은 영원한 예정 안에서 작정하신 바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양으로 예정된 것에 근거합니다. 태어날 때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자, 본성으로 양이 아니라 야수와 같은 자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되어 우리를 부르심으로, 그리고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반응하게 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양이 되는 겁니다.
한 번 그리스도의 양이 되면, 그리스도에게 속한 양이 되면 그 양은 그리스도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꼴을 먹으면서 더욱 풍성하게 그 삶을 누리게 됩니다.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에 대한 유혹이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꼴을 먹는 자는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동요되지 않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에게 속한 양 떼로 있지만 길을 잃고 방황하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에스겔 34장 12절의 표현처럼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라고 말하는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양을 찾아내십니다. 찾아내셔서 더 좋은 것,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먹이시고 견고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참된 목자로 알리시면서 당시 거짓 목자가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들을 절도요 강도요 도둑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경계의 대상임을 알리십니다. 그들은 결코 양 떼를 위하는 자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들보다 더욱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자들입니다(마23:15). 한 마디로 거짓 목자는 죽이고 멸망케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자신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또한 얻은 생명으로 하여금 더욱 풍성하게 만드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자는 그의 말씀의 꼴을 먹으면서 자라난다는 것입니다. 어디까지 자라나는가? 에베소서 4장 13절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참 목자로 알고 그 안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음성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거기에 참된 구원이 있고, 또한 거기에 구원의 풍성함이 있으며,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역사가 있습니다.
특히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권세를 위임하여 주의 몸 된 교회를 다스리게 한다고 할 때 그리스도 일치되는 가르침 안에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주의 몸 된 교회, 다시 말해 가시적 교회 안에 알곡과 가라지가 있는 것처럼 참된 목자와 거짓된 목자가 있기도 합니다. 이때 참된 목자와 거짓된 목자가 전혀 반대의 가르침을 가르친다면 분별하기 쉽습니다. 교회 안의 가르침과 교회 밖의 가르침처럼 단순히 기독교의 가르침과 다른 종교의 가르침과 같은 형태를 띤다면 분별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으로 들어온 거짓 목자의 가르침은 어느 정도 참된 가르침과 함께 거짓된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치 마태복음 7장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고 하신 말씀처럼 그의 출처는 이리지만 양의 옷을 입고 온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하기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목자가 자신의 양을 아시는 것처럼 참된 목자의 양 역시 자신의 목자의 음성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게 주시는 선한 양심에 따라 무엇이 주님의 음성인지, 그리고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음성이 그리스도의 음성과 일치하는지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치하지 않는 음성에 대하여 주님의 양 떼는 그 음성이 답답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참된 목자와 거짓된 목자를 분별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양 떼라면, 그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은 자 되었다면 그의 말씀만을 주목해야 할 것이고, 그의 말씀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얻은 생명의 풍성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