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령~조령샘 : 2.12 km. ~조령산 : 0.75 km. ~깃대봉 갈림길 : 5.1 km. ~조령 3관문 : 1.0 km. ~마패봉 : 0.91 km. ~동암문 : 3.41 km. ~주흘산 갈림길 : 1.5 km. ~탄항산 : 1.75 km. ~하늘재 : 1.82 km. 총 22.96 km.
3. 18회차.
(이화령~조령 3관문) 11.27km. (3:27/8:18)
이화령에 도착하니 서늘한 바람이 분다. 벌써 입추 지났다고 바람이 달라지는 것인가?
엊그제 七夕이 지났으니 견우와 직녀가 건넜을 은하수는 어느 때보다 선명할 계절이다. 이 때쯤 불빛 없는 이런 곳에서 여름 하늘을 보면 별이 우박으로 쏟아진다. 하늘을 본다. 아, 그러나 아쉽게도 안개와 구름뿐이다. 아쉽구나. 하늘 가득한 별의 江을 오늘 이 새벽하늘에서는 포기해야 한다.
嶺마루에서 북으로 뻗어 나간 漆黑의 대간길을 향하여 출발이다.(3:27) 조령산 정상에서 여명 속 산줄기의 멋진 모습을 보자고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여 이제 오르는 것이다. 우리의 정성 생각하시어 5시 경에는 구름과 안개 걷어가 주시옵소서.
선두부터 列을 지어 기슭으로 이어진 길로 전진이다. 그런데 잠시 후 일단 스톱하란다. 줄줄이 백해서 다시 출발지로 돌아온다.(3:39)
다시 재출발이다. 좌측 능선길으로 치고 오르니 풀 많이 우거진 헬기장이다.(3:41) 여기서부터 마루금을 차고 오른다. 오른쪽 바로 아래 문경쪽 첫마을 불빛이 보인다. 아마도 要光院골일 것이다. 이화령이 번성하여 관원들이 이 고개로 工務를 보러 넘나들 때, 이들이 묵는 숙소 요광원이 있던 곳이라 요광원골이다.
/그런데 이 요광원골에는 맏거나 말거나 지명과 관련해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숙종조에, 최대감이란 양반이 있었는데 어느날 이 곳에 유숙하게 되었다. 출출도 하여 술 한잔 하러 나섰는데 객주집 주모(아마도 관가였는지도 모르겠다)가 절색이 아닌가. 도저히 그냥 잠을 청할 수 없던 이 양반 객기를 발휘하여 이 주모와 하룻밤 雲雨之樂을 나누었다.
일은 여기서 끝났으면 하룻밤 멋진 로맨스였는데 일이 꼬일려해서 그랬는가,. 최대감의 아들 Junior 崔 누가 그 애비에 그 자식 아니랄까 봐, 이 곳 지나다가 그 주모와 情을 통하였으니.. 이 일을 어쩌나?
최대감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가 애비와 자식의 寸數를 따지려 해도 따질 수가 없이 되어 버렸다. 한 번 흘러간 일이지만 자신의 파트너가 며느리격이 되었으니.. 딱하고 딱하도다. Junior 崔 또한 이만 저만 고민이 아니었다. 아이, 영감님도 연세 드셨으면 거시기 좀 잘 간수하실 일이지, 내 원참..
이리하여 동서지간이 된 부자, 날이 갈수록 서로 얼굴 마주 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역시 지혜는 나이든 양반이 있는 법, 아들을 불렀다. ‘얘야, 너와 내가 한 요강에 오줌을 누었구나. 허허 ’ 아들도 허허. ‘요강’이라는 절묘한 단어로 매듭을 잘라 내었다.
이렇게 하여 멀정한 이 동네 요광원이 되었다 한다./
풀은 많이 우거지고 통행은 많지 않아 풀잎에 앉은 물기와 키 큰 잡초들이 발목을 잡는다. 잠시 후 헬기장이 있는 759봉 도착.(4:02)
여기서부터 길은 급히 떨어지는데 나뭇뿌리와 흙길에 물기가 그득하여 여간 미끄럽지 않다. 더구나 안개가 짙어 랜턴불 밑 발 아래가 뿌엿고 선명치가 않다. 이럴때는 작은 돌부리 하나 나뭇뿌리 하나도 조심해야 한다. 특히 나뭇뿌리는 물기 머금으면 그대로 미끄럼틀이 된다. 바위가 미끄럽다고 피하고 나뭇뿌리 밟았다가는 그대로 엉덩방아다. 이것도 다 몸으로 때워 경험한 귀한 재산이다.
노인네 걸음 걸이로 조심조심 내려오니 안부.(4:10) 이제부터 길은 임도를 가꾼 듯 넓고 편안해진다. 풀 우거진 헬기장 지나(4:15) 우측 갈림길도 지나니(4:17) 막바로 또 헬기장.(4:48) 잠시 너덜지대가 나오면서(4:34) 물기가 많은 길로 오르니 물소리가 들린다. 조령샘이다.(4:40) 토속신앙 믿는 이들이 祭를 지내는 곳인지 스텐레스 祭器가 갖추어져 있다. 물 한 박아지 들이킨다. 비 온 뒤끝이라 건수가 들어가 그런지 크게 시원하지는 않다.
여기부터 길은 다시 가파르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으나 시야가 틔여 있는 능선에 길 이정표가 서 있다.(4:51) 여기서 좌측으로 내려 가면 촛대바위 지나 괴산 절골로 내려간다고 지도는 표시하고 있다. 이정표에 조령산 10분을 알리고 있다.
잠시 후 조령남봉이라 부르는 1005봉에 도착한다.(4:53) 헬기장으로 사용하는지 공터가 있다. 여기서부터 잠시 내리막, 다시 오르니 아담한 봉우리 鳥嶺山이다.(5:01/5:14) 이 곳에서 여명을 맞겠다는 희망은 산산히 깨지고 만다. 頂上은 구름 속에 있어 아직도 어둡고 주위 산의 경관도, 여명의 기운도 없다.
본래 조령산의 이름은 公正山이다. 최근의 기록인 교남지(山+喬 南誌, 1937)에까지도 공정산으로 기록되었다는데 언제부터인가 조령 옆산이라해서 조령산이 되었다.
이제부터 하산길이 로프지대의 위험구간이라 한다. 정상에서 날 밝기를 기다려 진행할까 하다가 그대로 가되 천천히 가기로 한다. 가파른 하산길 발밑도 제대로 안 보이는데 서두르다가는 사고의 위험도 있다.
정상에서 잠시 내려서니 조그만 안부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나타난다.(5:25) 조령1관문(주흘관)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급하강길로 로프가 매어져 있다. 이 갈림길 지나니 봉우리가 하나 나타나는데 길은 이 봉우리를 좌로 우회하여 내려간다. 로프 매어 있는 하산길은 매우 가파르고 위험하다. 다행히 요소요소에 로프가 매어져 있어 이에 의지한다.
이윽고, 안부 갈림길이다.(5:41) ‘OO재’ 이렇게 이름 하나 있을 만도 한데 고개 이름은 없다. 원체 새재나 이화령이 유명하다 보니 이 정도는 이름조차 얻지 못했다. 좌로는 괴산의 절골, 우로는 새재 주막으로 내려 가는 길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119 신고처로는 9번 위치이다.
여기서 대간길은 다시 오르기 시작이다. 다 오른 작은 峰은 아마도 889봉인 듯하다.(5:49) 이제부터 대간길은 마루금을 타지 못하고 좌측(서쪽) 9부 능선으로 이어진다. 왜일까? 잠시 생각해 보는데.. 이내 그 까닭이 밝혀진다. 마루금은 암봉을 이루고 있고 암봉의 우측은 직벽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좌측은 흙길이니 9부능선길을 쉽게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본격적 암릉지대가 나타난다. 이 곳에는 말바위, 신선암 등인데 계속 이어지는 암봉이어서 어느것이 어느것인지 구별이 쉽지 않다.
암봉을 로프 타고 오르니 절묘한 소나무 아래 전망 좋은 큰 바위봉이 있다(6:00/6:05)
아마도 뒤쪽이 신선암인 듯하다. 그리로 오르는 길과 우회하는 길이 있다. 우회해 간다.
날씨만 맑으면 대간길 최고의 조망 중 하나일 길인데 아쉽게도 시야는 구름과 안개에 싸여 있을 뿐이다. 지나 온 악휘봉, 막장봉 구간에서도 구름 속에 산들을 다 놓쳤는데 오늘도 아쉽기 그지 없다. ‘언제 날잡아 다시 오라고 그러시는 거겠지..’ 이렇게라도 위로해 본다.
큰 봉이 바위 하나로 이루어진 듯한데 그 경사면이 직벽에 가깝다. 떨어지면 대간길은 물론, 영원히 인생길 이별길이 되는 구간이다. 다행히도 그 경사면 중간에 두세 뼘 넓이의 밟을 수 있는 공간이 있고 흙이 쌓여 있어 이 곳을 밟고 갈 수가 있다. 이 위가 신선암인 것 같다.
이 곳 지나니 안부, 좌측 원풍리의 ‘한섬지기계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6:24) 119-7번 위치이다. 무덤만한 작은 봉우리 넘으니 똑 같은 갈림길이 나타난다.(6:27) 역시 한섬지기로 내려 가는 갈림길과 만나는 길이다. 한섬지기계곡은 한섬지기 마을로 내려가는 계곡이다.
/한섬지기, 이름도 정답다. 한섬지기(一石斗落)란 열 마지기의 땅을 말한다. 한 마지기가 200 평이니 2000 평이나 되는 논이다. 이 정도면 가난하던 그 시절 꽤 쏠쏠한 농사규모이다. 예전부터 한섬지기가 넘으면 머슴을 두었으니 원풍리 한섬지기 마을은 산 속 마을치고는 배곯고 사는 마을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섬지기’라는 말이 나왔으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기억나시는지?
계용묵 선생의 소설 ‘백치 아다다’ 백치에 반벙어리이니 그 아비가 한섬지기 논을 딸려 주어 딸을 시집 보냈다. 처음에는 알콩달콩 살았는데 그 논이 뜨는 바람에 큰 돈이 되었다.
돈 생기면 남자는 딴 생각이 나는 법. 아다다의 서방은 쌕시한 여자와 눈이 맞고 아다다를 버렸다. 슬프다 아다다. 한섬지기가 아다다를 망친 것이다.
그러나, 이 아다다 이 땅에 神은 죽지 않으셨는지 다행히도 두멍같은 놈을 다시 만났다. 제발 아다다야 잘 살아라.
새로 만난 남자, 성실히 돈을 모았다. 이제 땅도 마련하고 아다다와 행복하게 살 꿈을 꾸는데.. 돈이 자신을 불행하게 한 것을 잊어버리지 못한 아다다, 그 돈을 다 버려 버린다. 눈이 확 돌아버린 새 서방, 결국은 아다다를 충동 살해한다.
한섬지기를 내려다 보면서 젊은 날, 소설 속에서 만났던 아다다가 내 마음을 다시 아프게 한다.
안녕~ 아다다. /
아다다의 배경은 아닐지라도 아다다의 맑은 영혼이 살아 있는지, 한섬지기계곡은 천혜의 깨끗함을 아직도 잘 간수하고 있다 한다.
이제부터 다시 암봉지역이다. 암봉이 많은 봉우리를 4~5개 넘는다. 아마도 말바위능선인가 보다.(6:48) 119-12 위치를 지나니(7:04) 좌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7:10) 이 길은 치마바위골 위로 지나 한섬지기마을로 갈 수 있다.
요리조리 바위길 빠져 나가는데 산부인과바위(가칭)가 나타난다.(7:13) 흔히 산꾼들 사이에서 좁은 바위 사이에 뚜껑 덮여 있는 굴형태의 길을 재미삼아 부르는 이름이 산부인과바위인데 전국에 여러 곳에 있다. 길은 이 바위 지나 우회하는 길이 있을 듯하여 지나가 보는데 아무래도 뚜렷치 않아 바위 직전 로프를 타고 암릉길로 오른다.
제2관문과 제3관문 갈림길이다.(7:19) 3관문길은 좌로 하강한다. 다시 올라 757봉에 도착한다. 119-10번 표지가 서 있다.(7:32)
이제부터 대간길은 암봉을 벗어난다. 비교적 전망이 트인 봉을 지나(7:37) 삼각점이 있는 822봉에 닿는다.(7:55/7:58) 매미가 심하게 울어댄다.
조령산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들꽃이 매우 귀한 구간이다. 웬만한 산에는 여름꽃이 만발했는데 이 구간에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꽃며느리밥풀과 바위 사이에 핀 돌양지꽃이었다. 아쉬운지 원추리 몇 송이 뜸뜸히 피어 있을 뿐. 그나마 매미가 울어 주니 다행스럽다.
삼각점에서 출발과 동시, 바로 깃대봉갈림길이다.(7:59) 깃대봉은 솔대배기라고 부르는 峰으로 임진란 중 가장 불행한 장수 신립이 군사훈련 하면서 깃발을 세운 곳이라 하여 깃대봉이 되었다. 이 곳에는 예전 봉수대가 있었다는데 망치등(조령원터 뒤 綾), 마성으로 연결되었다 한다.
대간길은 이 곳에서 우로 턴하여 3관문을 향하여 하산길로 들어선다. 무너진 성벽이 나오고 그 성벽 너머로 이어지는 갈림길도 있다.(8:10)
조령 3관문이 보인다. 새재길에는 세 개의 關門(城의 主 大門)이 있는데 문경쪽 초입에 主屹關(1관문), 중간에 鳥谷關(2관문), 제일 북쪽에 鳥嶺關(3관문)이 있다. 이제 조령산성 북쪽 山城길을 타고 내려 와 조령관으로 내려 선다.(8:18/8:59)
山神閣이 반겨 주신다. 새로 단장하여 깨끗하다. 오래오래 대간꾼과 새재 넘는 이들 살펴 주시옵소서.
조령약수는 이 고개가 뚫린 이 후(1414년) 고개 넘는 모든이의 목을 축여 주던 생명수였다. 단순 물로 보지 않고 신성시하여 白壽靈泉이라 불렀다. 오늘은 수리 중이어서 이 물을 마실 수 없다. 白壽를 누리기에는 나 내공이 아직 멀었나 보다.
깨끗하게 새로 보수해 놓은 3관문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어 둔다. 주막으로 가 오늘의 양식 김밥을 먹는다. 배고픔도 면했으니 이야기도 많은 새재길, 마음으로 생각해 본다.
새재길, 역사도 많고 전설도 많고 조상들의 삶의 흔적도 많아 책으로 엮어도 몇권은 될 것이다. 이제 몇 가지라고 짚어 보려 한다.
1. 새재의 이름.
새재는 일반적으로 ‘새 鳥‘자의 鳥를 쓰는데 별 이견이 없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에는 ‘草岾’으로 기록되었는데 이 또한 우리 말로 풀면 ‘새재’이다. 억새의 새, 남새(채소)의 새, 풀을 뜻하는 말이고 岾은 嶺이나 峙와 같다.
우리는 새재(鳥嶺)를 새도 쉬어가는 고개라고 풀이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새재는, 이 고개가 뚫리기 전(태종 14년 1414년) 이미 있던 伊化嶺과 鷄立嶺(하늘재) 사이에 새로 뚫은 길이라 해서 새재(新嶺, 間嶺)일 가능성이 크고, 세종실록지리지에서처럼 풀이 많아 초점(草岾)일 수도 있다. 그러나 따져서 무엇하리.
2. 고개에도 浮沈은 있다.
부란치재와 버리미기재에서 보았듯이 고개도 世上事처럼 뜨고 갈아 앉는다.
新羅初 ‘박 아달라’왕은 서기 156년 하늘재(계립령)를 열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기록에 있는 이 나라 최초 국도 1번이다. 그 후 이화령은 어느 때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열려 계립령과 함께 문경의 동서 고갯길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영남과 중원을 잇는 대표적 길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조선초 태종 14년(1414년) 새재를 나라에서 열어 官路로 정하자 계립령과 이화령은 졸지에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져 민초들의 길이 되어 버렸다.
이후 조선조의 고갯길은 문경 새재가 대표하게 되었고, 이 고개를 넘는 이 나라 대표길이 바로 ‘嶺南大路’였으니 이는 새재의 전성기였다.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 이화령에 신작로가 뚫리고, 추풍령에 철도와 신작로가 다듬어지면서 우리나라의 대표적 고개길은 추풍령에 자리를 내어주고 문경은 급속히 조용한 시골 동네로 접어들게 되었다.
지역의 길의 패권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이화령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러나 이제 길도 역사와 문화를 중시하는 well-being의 길이 더욱 소중하게 되었으니 새재와 하늘재를 이렇게 물려 받을 수 있음은 축복이다.
3. 과거 길.
조선 시대에 유일하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은 과거에 급제하는 길밖에 없었다. 요새처럼 다양한 직업군이 없었으니..
새재는 이 書生들의 과거길이다.
秋風嶺을 넘으면 秋風落葉이요, 竹嶺을 넘으면 주욱~ 미끄러진다고 생각하였으니 모두 모두 새재로 몰려 들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慶尙右道 사람들 중 새재까지 오기 뭣한 이들은 자신의 장원급제한 이름이 枋에 걸리기를(掛)를 기원하여 괘방령을 넘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 새재길은 붐비고 사람들을 위한 院(官吏)이나 주막(민간)이 성업하게 되고 주막거리 마을이 성시를 이루었다.
더구나 문경의 옛 지명은 聞喜(기쁜 소식을 듣는다)요, 조선 시절 지명은 지금과 같은 聞慶(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이었으니 과거길에 나서는 이 한 번 넘고 싶은 고개 아니었을까?
3. 아리랑.
* 문경 새재 아리랑.
문경새재 물박달 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애기 손길에 놀아난다.
(후렴)
문경새재 넘어갈 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
* 진도 아리랑의 일부,
문경 새재는 웬 고갠가.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문경은 박달나무가 많다. 그 박달나무를 활용한 木器는 전국최고의 명품이었다. 노총각 신세, 홍두깨가 팔려 나가 어느 처자의 손에서 노는 것을 부러워 한다. 응큼도 하여라.
4. 불행한 장수 申砬(신립)
새재 이야기가 나오면 빠지지 않고 매도되는 사람이 신립 장군이다. 400 년이 넘는 오늘 날까지 이 나라 장수 중 가장 간신은 원균이요, 가장 대표적 패장은 신립으로 지탄 받는다. (연속극 불멸의 이순신 덕에 그나마 원균은 간신배에서 무대뽀 1번으로 이미지가 바뀌기는 하였으나.)
신립 그는 패장이었으나, 無腦에 교만과 똥고집의 화신이었을까?
임진란이 나자 아무 준비없던 이 나라는 6.25 때 남측이 사흘만에 서울을 잃듯 싸움도 돼지 못하고 그대로 모든 성을 내 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백두대간 남쪽 모든 땅이 함락되자 조정(선조)은 신립을 삼도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벼락 발령하여 내려 보냈다.
신립은 과거, 여진의 본진까지 기병을 몰고 쳐 들어가 그들을 복속시킨 맹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뭔 일인지 이 양반도 미움을 사 한직에 있었다.
신립이 중주에 다달았을 때 이미 이일이 패하여 상주도 적에 손에 떨어지고 이일은 도주해 온 상황이었다.
신립에게는 새재에 진을 칠 것인가? 아니면 충주에 진을 칠 것인가?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 남한강을 뒤로 배수진을 치고 결사항전의 자세로 맞섰다. 결과는 잠시 적의 예봉을 꺽었을 뿐 속절없이 무너져 전원 전사, 본인도 남한강 물귀신이 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주력부대를 잃고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으나 여러 사람이 신립이 새재에 진을 치지 않아 패했다 한다. 그러면서, 새대가리, 똥고집, 건방 이런 눈으로 본다. 그렇다면 새재에 진을 쳤다면 이겼을까?
답은 No. 신립이 마주친 군대는 小西行長(고니시 유끼나가) 군이었는데 설령 이들을 새재에서 막았다 하더라도 倭軍은 세 갈래로 진격 중이었기에 막을 방법은 없었다.
또한, 신립은 정규군 기병 이외에는 오합지졸로 급히 모은 농민군밖에 가진 것이 없었고 자신이 훈련 한 번 시켜 본 일 없는 생면부지 병사들이었다. 거기에 전패의 소문에 겁먹고 도망치지, 조총과 활이라는 무기의 차가 있지 대안이 없었을 것이다.
조령에 진을 치면 지리적 이점으로 며칠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결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병사들 데리고 싸우는 길은 막다른 골목에서 죽느냐 사느냐의 길밖에 없다고 판단했고, 더구나 기병이 정예군이니 개활지에서 결판을 내려 했던 것이다. 요새 말로 하면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전법으로 올인했던 것이다.
결과는 참패. 자신의 목숨과 영영 불명예의 굴레에서 못 헤어나오고 있다.
‘불멸의 이순신’을 보면서 이순신의 승리는 철저한 준비(군비,군사,물자,지리,사기,작전,정보..)임을 알 수 있다. 신립에게는 이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비난받아야 할 일이 있다면 과거의 성공신화에서 헤어나지 못한 일일 것이다.
비난받아야 할 자들은 당시 조선의 CEO 선조와 임원진인 조정 신하들일 것이다. 그들은 아무 준비가 없었다. 처음부터 전력 상 양국은 께임이 되질 않았다. 더 이상 신립만을 매도한다면 우리는 비겁하다.
우리가 신립이었다면 과연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인가?
이 시점에서 또 다른 신립이 나올 환경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새재를 지나면서 가슴이 답답하다.
3관문을 출발하여 그 시절 이곳을 수비하던 군인들이 머물었다는 군막터를 둘러 보고 성벽길로 들어선다. 잠시 다듬어 놓은 구간이 있을 뿐 성벽 대부분은 많이 무너져 내렸다. 세월 가고 큰 물이라도 한 번 오면 속절없이 무너질 구간이 많을 것 같다.
이 조령관에서 이어지는 北쪽 城壁은 북측으로부터 침범하는 적을 막게 되어 있다. 城이 산성의 개념이다 보니 동서는 험악한 山勢에 의지하고 남쪽은 1관문, 북쪽은 3관문이 수비성으로 역할을 하게 한 것 같다.
마패봉으로 오르는 길도 간간히 암릉이 길을 막고 가파르다. 마루금에 있는 무덤 하나 지나(9:08) 땀 한 번 빼고 마패봉에 도착한다.(9:29) ‘마역봉’이라고 새로 만들어 세운 정상석이 서 있다.
어사 박문수께서 마패를 걸어 놓고 쉬셨다 하니 우리도 잠시 휴식한다. 시야가 뿌옇기에 전망이 시원치를 못하다. 좌측으로 갈라져 나가는 신선봉 능선이 있는데 숲과 뿌연 시야로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이 능선이 충주 상모면과 괴산 연풍면을 가르는 경계선이다.
이제까지 北으로 향하던 대간길은 우향우 東으로 방향을 튼다. 길은 하향길로 접어들면서 바위구간 없는 흙길이다. 무너진 성벽, 안부에 도착한다. 北暗門이다.(9:53) 여기에서는 암문 지나 북쪽 지릅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다. 남쪽은 동화원으로 내려 간다. 이 길을 이 곳 사람들은 부야문골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원래 이름은 ‘북암문골’이었을 것이다.
새재가 영남대로, 요즈음의 1번 국도이다 보니 이 고개에는 두 개의 院(국영 호텔)이 있었다. 조령원과 桐華院이다. 민간을 대상으로 하는 주막은 위푸실마을과 아랫푸실마을에 성시를 이루었다. 길 따라 동화원으로 내려 간 들 이제는 빈터만 남았다. 옛사람들의 흔적은 그 분들의 이야기로 고스란히 돌려드려야 하는 게 순리이가 보다.
다른 산성과는 달리 이 곳의 암문 遺墟에는 門을 세운 흔적은 없고 도랑 같은 개구멍 흔적이 있다. 暗門이니 글자 그대로 살살 기어서 들락거렸던 것일까? 그것이 알고 싶다.
암문을 떠나 뒷봉(756봉)에 도착한다.(10:38) 길은 南東向으로 바뀐다. 잠시 후 안부, 우측으로 내려가는 갈림길을 만나고(10:03), 무덤도 만난다.(10:12)
이제부터는 그만그만한 무명봉을 여러 개 지난다. 특징은 없으나 숲도 우거져 햇빛도 가리고 그다지 힘든 길도 아니니 대간꾼들 오래걷기 훈련 코스려니 생각하고 걸으면 좋을 듯하다. 지루해질 무렵 마지막 무명봉(763봉) 지나(10:38) 길은 평탄하게 고도를 낮춘다. 그곳에 무너진 암문의 잔해가 보인다. 東暗門이다.(10:48/11:00)
고개로 말하면 느릿골재이다. 성 안으로는 동화원으로 가는 길이 연결되어 있고, 성 넘으면 평천재 넘어 평천리 달매기(月項)마을로 내려가게 된다. 이 이어지는 골자기를 이 곳 사람들은 달매기골이라 부른다.
갈 길은 꽤 가파르게 이어진다. 올려다 보니 만만치 않은 봉우리가 가파른 오르막길 위에 서 있다. 釜峰이다.
거친 숨 한 번 몰아 쉬어 부봉갈림길에 도착한다.(11:11) 좌로 가면 대간길, 우로 가파른 길로 붙으면 부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부봉이 멋 있다 하니 예서 그만 둘 수는 없다. 釜峰으로 오른다. 생각보다 가파르다. 매어 있는 로프 이용하여 부봉 도착.(11:18) 멋진 소나무가 서 있고 주흘산이 바로 코 앞에 서 있는 전망 좋은 암봉이다.
이 곳 정상에도 무덤이 한 基 있다. 陰宅에 대한 한국인의 지독한 집착을 다시 확인한다. 아는 이들은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전두환씨도, 노태우씨도, 캐토릭 신자인 DJ까지도 우연인가 영험해서 그랬던가 조상묘 移葬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하니 나도 이제라도 地官님 모시고 대간길 가 볼까나.
김천 화령지구대 그 많던 묘소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이 피앗재에서 속리산 천왕봉 오르는 능선에서였는데 오늘 다시 마루금에서 묘소들을 만난다.
釜峰은 가마봉(가매봉, 가매바위)이다. 모양이 가마처럼 생겨 가마봉인데 가마에는 두 가지가 있다. 가마솥의 가마(釜)와 탈 것의 가마(輿)가 있다. 이 곳의 가마는 아마도 가마솥의 가마인가 보다. 멀리 보이는 부봉은 가마솥으로 친다면 끝이 뾰족한 가마솥이다. 모두 1봉부터 6봉까지 있는데 1봉만 보고 돌아오기로 한다. 다시 갈림길로 내려 온다.(11:31)
김상권님과 갈림길에서 만난다. 오늘도 좋은 사진을 찍고 있다. 다리품으로 끝날 수도 있는 우리의 산행을 사진기록으로 남겨 준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길은 좌향좌, 東으로. 잠시 후 전망바위에 이르니 우리의 주력부대가 휴식 중이다. 함께 합세하여 10 분간 휴식.
이제 오늘 산행도 막바지에 이른다. 가파르지는 않으나 길게 오른다. 이곳과 부봉에는 어느 때 큰 산불이 있었는가, 나무 탄 숯 잔해가 조금 주의깊게 보면 흙속에 많이 박혀 있다. 우측으로 주흘산의 모습도 보이고 새재길이 지나가는 골자기도 보인다.
능선길 도중 갈림길을 만난다.(959봉) (12:03). 주흘산 갈림길이다. 이어지는 능선길은 주흘산. 좌로 떨어지는 길이 대간길이다.
主屹山은 문경의 鎭山이다. 예부터 문경고을 主山으로 봄가을로 祭를 올린 산이다. 한 때 주흘산은 자신의 품안에 이 나라 도읍을 품고 싶어 했다 한다. 그러다 삼각산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자 아예 한양쪽을 바라보지 않고 돌아 앉아 버렸다는 지조 높은 산이다.
능선길 버리고 좌향좌, 북으로 방향을 틀어 능선에서 내려 온다. 조그만 안부 고갯길을 만난다. 평천재(월항재)이다. (12:17) 이름에 비해 너무 고개가 작다. 좌는 동암문, 우측은 평천리 월항마을(달목이->달매기)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제 오늘의 마지막 峰, 炭項山으로 향한다. 두 주 뒤에나 산행에 나설 생각을 하니 아쉬운 생각이 든다. 한 번 숨가쁘게 치고 오르기로 한다. 산행의 클라이막스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탄항산 도착.(12:36/12:45) 아담한 정상석이 서 있다.
/炭項山.(855)
역사에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없어도 위치 상 중요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주요 도로인 계립령(하늘재)을 내려다 보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는지 탄항산봉수가 있던 곳이다.
이 봉수는 남쪽으로는 禪岩山에 應하고, 서쪽으로는 연풍현 痲骨岾에 응한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기록하고 있다.
봉수의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아무 흔적이 없다.
炭項이라는 이름은 ‘숯목이’인데 혹시나 하고 부봉부터 주흘산 갈림길 사이에서 발견되는 숯 흔적이라도 있을까 곰곰 살펴 보았으나 찾을 수 없다. 혹시 숯 굽는 가마가 가까이 있었을까?
탄항의 유래에 대해서는 이런 해석이 있다. 이 산이 고개를 지켜야 하는 곳이라 ‘守(지키다)+목(項)이’ 즉 ‘수목이’였는데 어느 새 숯목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炭項.
여지승람 聞慶縣에는 炭頂山, 延豊縣에는 炭項山으로 써 있는데 아마도 炭頂의 ‘頂’은 인쇄 miss인 것 같다.
한편, 요사이 등산지도에는 다른 이름이 작명되어 있는데 구지 문헌에 있는 옛지명 버리고 작명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
하늘재 너머로 간간히 포암산이 보인다. 이제 下山이다. 흙길도 있고, 바윗길도 있다.
삼각산 비봉능선의 사모바위같이 생긴 바위도 있다.(1:05)
무명봉(766?)도 우회해 내려 온다.(1:11)
어느 지점인가, 약간의 산사태가 있었는지 작은 흙모래 경사면이 나오고 그 곳에 올라서니 앞으로는 포암산, 좌로는 월악산에서 뻣어난 연봉이 선명히 보인다. 포암산(지릅산)은 산이름이 말해 주듯이 지릅(마대 삶아 껍질 벗겨낸 나무줄기)을 세워놓은 듯한 암봉들이 당당히 서 있다.
이윽고 하늘재에 내려선다.(1:28) 신라적부터 내려 온 역사의 고개(계립령) 감회가 새롭다./
(어프로취 길)
觀音의 세계인 문경쪽(관음리)은 역시나 現世를 잊지 못하여 아스팔트길로 연결되어 있고 彌勒의 세계인 충주쪽(미륵리)은 흙길을 통해 미래로 넘어간다.
미륵의 길을 밟고 彌勒寺址로 간다. 천 년이 넘는 고찰은 빈터만 남았다. 이제 중창을 추진한다고 한다.
법당 기와불사를 한다기에 三世에 福 받을 탐욕으로 작은 시주를 한다. 봉사하는 보살님, 고마워 하는 모습이 하도 역역하여 내가 오히려 불편하다. 큰 절들 불사할 때, 큰 施主들 많다 보니 그냥 사무적인데 이 폐허에 시주하는 이들은 별로 없는가 보다.
무너진 석굴암 앞(이 곳 석굴암은 그 규모로 보아 경주 석굴암보다 더 큰 석굴암이었다.) 미륵석불이 서 계시고 그 앞에 비구니 스님 한 분, 염불을 한다. 많이 경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