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진도을 찾아
경파 이승전
강아지가 붓을 물고 다니고 빗자루 몽뎅이 만 들어도 명필이 나온다는 진도 이곳에 가서는 노래자랑, 글자랑, 그림자랑하지 말라는 속설이 전해온 최 남서쪽 면적 430.7km 인구 약 31000명 1개 읍 6개 면으로 45개의 유인도를 포함 256개의 섬으로 이루워(이루어) 졌다.
이곳은 해남 화원반도 우수영과 진도 녹진 간의 가장 짧은 거리 330m를 연결 1980년~1984년 준공한 유일한 쌍둥이 사장교로 길이 484m 폭 11.7의 대교가 완성하였고 교통량이 많아 2005년 제2 진도교를 증설, 야경이 아름다운 관광 명소다
대교가 지나간 여기는 거리가 협소하여 낮은 곳은 깊이가 19m로 격류가 부딪어 물이 흐른 소리가 우레같은 굉음을 내여 울두목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어린애가 울면 아비야 해야 무서워 울음을 끄친다 하는데 일본 애들은 울두목 하면 무서워 울움을 뚝 그치다는 속설도 있다 .
명량이란 이름은 울명(鳴) 펄펄 뛰는 량(梁)으로 울면서 뛰는 모습을 연상 했다하며 화원 반도에서 진도 녹진 사이에 흐르는 수로(水路)를 뜻한다, 임진왜란이란 1592년~1598년까지 일본군이 1차 침입을 말하고 정유재란은 1598년 2차 침입한 때를 이야기한다.
나는 중학 수학 여행지를 완도 고금 묘당을 갔다 주위에는 도서 지방에만 서식 한다는 후박나무가 몇백년을 자랐는지 울창했고 숲속에 아담한 사당 2채가 있다 다행이 설명하는 분이 있어 그분의 말에 의하면 정유재란 당시 충무공의 공적을 기록한 사당이고 또 옆에는 명나라 명장 관우 장군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설명을 들어 본즉 우리나라 장군들이 일본군과 싸우다 패하고 전사하자 우리나라에서 도움을 청해 명나라 장수 수사제독과 협세하여 일본군을 격침 시키자 명나라에서 관우를 숭배하는 사상을 전개하여 초상화를 만들어 모셨다 한다. 이런 것을 볼 때 정유재란은 명나라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해전이 있든 음력 9월 16일을 전후 최대 만조가 오전 2시 최대 간조가 오전 7시 오후에는 만조가 2시 30분 간조가 오후 7시 30분으로 저조나 만조나 1시간은 유속이 없어 평온한 바다로 변한다.
유속은 소조기에는 7노트 최강 유속은 하류인 목포 쪽은 9노트이며 남동류 완도 쪽으로는 12노트로 속도가 약간 차이가 난다.
충무공께선 유속을 이용 하기위하여 물이 최대 간조가 되었을 때 녹진과 우수영에 쇠고리를 만들어 줄을 연결하여 놓고 벽파에서 우수영을 바라보면 녹진 뒷 둥그런 독골산에 군량미처럼 마람(이엉)을 두르고 모닥불을 피며 강강수월례를 하게하고 벽파에서 12척 판목선을 우수영으로 옮겨 만만의 준비를 하고 때를 기다렸다.
음력 9월 16일 아침 7시경 해남 어란 포에서 북서쪽을 향하여 일본 군함 133척이 명량을 향해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때가 간조의 시간 이기에 일본군은 순류를 타고 우수영 주위까지 와서 양군이 전투를 개시한 시간은 간만의 물살이 잔잔하여 조금 후면 조류가 바뀌면 역류하기 시작하여 12노트의 물살이 달릴 때를 기다렸다.
이것을 모르는 일본군이 진격을 하여 연결된 줄을 올려 30 여척의 일본 군함이 침몰하여 적장 마다시고가 탄 배가 넘어지자 일본군의 사기가 꺽겨(껶여) 대패를 하고 도망을 갔단 기록, 명량 해전은 층무공의 대승지로 종식을 하고 이날을 기념 하기위해 해마다 9월이 되면 거북선을 띄어 울두목에서 거대한 행사를 한다.
1965년 우리 집을 이사를 할 때는 녹진 과 우수영에 일제 때 전기를 연결했든지 50m 높이의 철탑이 세워져 회호리 바람처럼 돌아다닌 물결을 구경하란 것인지 공원 같아 청춘 남녀가 저녁이 되면 이곳에 모여 데이트 장소가 되었고 대 조기 때 물이 빠지면 쇠고리가 보였는데 대교를 설치할 때 유실되어 아쉬움이 있었다.
또 아쉬운 것은 대교를 건너기 전 길가에 잠시 쉬워가는 기분으로 계단을 오르면 충무공의 사당이 있어 문화재로 써 70대의 집사가 있어 설명을 하면 흥미를 느끼게 한다 집사의 말! 아!~그랬드랍니까, 6.25가 일어나기 하루 전 충무공 비에서 땀이 얼마나 흘리든지 닦아도 닦아도 계속 흘리더니 뒷날 6.25가 일어났다며 실화라 한다.
엄숙한 눈으로 비문을 살펴보면 실금의 흔적이 보이는데 일본 사람들이 밧줄로 끌어 넘어져 일하는 사람들이 후한이 두려워 경북궁 뒷뜰에 묻어 버린 것을 찿아 다시 모셨지만, 원상 복구는 안 되였다 했다. 지금은 지나면서 보려고해도 도로를 확장 하면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는데 길목이 아니라 아쉬움만 남았다.
1957년 6월 16일 울두목은 일본 함대로 착각 했든지 몰라도 완도 노화에서 목포 다녔던 여객선 완도호가 옛날 여객선이라 흐르는 12 노트를 넘지 못하고 여객선이 옆으로 누워 힘센 물결에 승객 전원이 침몰의 아픔을 가졌던 곳이도 하다.
2014년 4월16일 반대편이지만 안산 단원고 학생들이 목포에서 제주로 세월호를 타고 수학 여행길에 평목 항 좀 떨어진 곳에서 304명의 고귀한 어린 생명을 앗아갔다. 이렇게 크고 작은 사고가 발생 하는 것은 태평양으로 흐른 물살이 너무 빨라 사고가 빈번이 일어나지 않을까? 유추해 볼 따름이다.
진도의 유래를 살펴보면 조선조 14대 임금이신 선조께서 세자 책봉 할 때가 되어 심의를 기울리던 차에 지금이나 옛날이나 서인과 동인의 당쟁으로 동인이 득세를 하면서 첫째인 임해군이 어릴적부터 성질이 난폭하여 폭군이 될 수 있다는 상소 글을 올려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옹립 세자로 책봉 했다한다.
이것을 지켜본 임해군의 처남 허대씨가 불만을 품고 내란을 일으키려다 실패를 하여 도리어 역모로 몰리여 멀리 다시는 되돌아 올수 없게 귀향을 보낸 곳이 이곳 진도라 한다. 생각으로는 세상이 조용해지면 상경하여 뜻을 이루려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문인들의 유배지가 되었다는 기록.
허대씨의 후손으로 소치선생 미산 남농 허백년 등 30 여명의 유명한 예능인이 탄생하였으며, 돈과 권력을 등지고 자유를 갈망한 인간성을 토대로 남종화(화파이름)의 산수화를 그리는 운림산방이 존재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