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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0일 주일 설교
시리즈 주제: 우리가 얻은 이 큰 구원 7
제목:
기독교인은 무엇을 기다리는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로마서 8:24~25)
설교 목적
대림절 두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기독교인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신앙인에게 기다림이 왜 중요한지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구약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것과 신약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것은 다를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다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기다림이 신자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설교 개요
1. 문제제기: 대림절에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2. 구약 백성들의 기다림
3. 언약의 성취와 새 언약 백성의 출범
4. 신약 백성들의 기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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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 대림절에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지난 화요일 해질녘에 왕십리광장에서 2023년도 성동구 성탄트리 점등식이 있었습니다. 성동구의 유력한 교회들이 비용을 들여 제작한 이 성탄트리는 왕십리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나게 할 것입니다.
이 점등식은 예배 형식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순서 중에 환영사가 있었습니다. 환영사를 맡은 분은 성락성결교회의 지형은 목사님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지형은 목사님의 성탄트리점등식 환영사를 소개함으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아직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런 기다림이 없으면, 사실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마스의 계절은 기다림과 그리움의 계절입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의 기다림을 ‘하얀 그리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얀 그리움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복된 계절이 미소지을 것입니다. ‘겨울 미소’입니다.
우리 성동구의 모든 분들이 하얀 그리움을 품고 크리스마스의 계절을 걸어가며, 서로에게서 겨울 미소를 확인하며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2023년도 성동구 성탄트리 점등식 환영사, 지형은 목사).
성탄절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대림절의 의미를 담은 환영사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다림과 그리움, 하얀 그리움과 겨울 미소같은 낱말들이 한 편의 시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행사 후에 환영사 전문을 받아서 이렇게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이 환영사의 첫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아직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런 기다림이 없으면, 사실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대림절 두번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믿고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신자가 일년 내내 할 일이지만, 대림절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을 더욱 새롭게 하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저는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즉, 주님의 재림 때에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는가 하는 점입니다.
기다리는 사람은 당연히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이겠지요. 군대에 간 아들이 건강하게 제대하기를 기다리는 부모가 있습니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자녀가 합격하여 대학생이 되는 날을 기다리는 부모도 있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일하고 돈을 모으는 사람이 기다리는 미래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토록 좋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지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지를 보여주는 두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 시므온과 안나입니다. 이 두 사람은 대림절이면 늘 소개되는 성경의 인물입니다. 신약의 백성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성경의 전체 내용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옛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다린 것은 어떤 의미였는지 성경을 보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2. 구약 백성들의 기다림
이사야의 글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하는 소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이사야 40:9~10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이사야 52:7~8
이 두 구절에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시온에 전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그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는 소식이며, 동시에 ‘하나님이 시온으로 돌아오신다’는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날은 자기 백성이 구원을 받는 날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시므로 그 백성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그것을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55:12~13
이사야 40장부터 60장까지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셔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에 대한 기도와 노래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날을 옛 언약의 백성들은 고대하고 또 고대했습니다.
그 백성들이 이렇게 하나님이 다시 오시는 날을 고대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가? 그들의 현실이 고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에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패망하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그들을 풀어주었지만 여전히 그들은 고단합니다. 페르시아 이후 그리스와 로마가 차례로 유대 땅을 짓밟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예언자들의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다시 오실 때에만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침내 그 본분을 다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옛 언약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란 하나님이 예언자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곧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니 그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신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그 백성을 다시 일으켜 열방의 빛으로 나아오게 하여 주시기를 그 백성들은 바랐습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그 백성이 본래 지으심을 받은 그 목적대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바랐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오셔서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되는 날이면 열방의 왕들도 일어나 하나님을 경배하며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은 만국 백성들의 제사장으로 가르치고 모범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부터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잘 아는 옛 언약 백성은 하나님이 다시 시온으로 돌아오시기를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옛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다린 까닭은 그들이 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먼 옛날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피의 언약을 맺었고 그 언약이 자신들에게 이어져 온 것을 배우면서 옛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런 심정을 잘 드러낸 말이 시므온의 고백입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누가복음 2:28~32
옛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영광을 얻으며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예언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시므온은 그 약속을 굳게 붙들고 평생을 살았음을 보여줍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을 기다린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기다림이란 없습니다.
3. 언약의 성취와 새 언약 백성의 출범
이제 신약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소개한 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라고 소개합니다.
특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마 3:16~17). 그런데 부흥2000이라는 찬송에 나오는 가사를 보면, ‘하늘 가르고 임하소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 구절은 구약성경 이사야 64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이사야 64:1~2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을 시작하시는 것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소개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가르고 임하여 달라고 구약의 백성들이 기도를 드렸는데, 예수님의 세례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의 오심은 구약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오심이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는 이것을 임마누엘의 성취라고 말했고, 요한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소개했습니다(마 1:23, 요 1:14).
신약 즉, 새 언약의 백성들은 예수께서 옛 언약을 이루시려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시라고 제자들은 믿고 전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돌아오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일들이 일어나겠지요? 그 백성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겠지요? 정말로 예수님 곁에는 기쁘고 즐거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고 죄인이 변하여 새 사람이 되며 사람들이 서로 물건을 나누고 섬겼습니다. 그런 일은 예수님의 승천 이후에 교회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의 교회는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습니다(행 2:47). 그렇게 복음의 기쁜 소식은 온 세상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보혜사를 기다리라고 말씀하신 후에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일을 섭섭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리셔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셔야 하늘과 땅을 통치하시는 주님이 되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는 이런 믿음이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사도행전 2:33~36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예수님과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그들은 자신들을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생각했습니다(갈 3:7~14). 전에 하나님이 옛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건져내시고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거기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던 것처럼, 이제 새 언약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언약에 동참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교회를 향하여 택하신 족속, 거룩한 나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렀습니다(벧전 2:9).
옛 언약의 시대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려고 성막을 만드시고 그곳에 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성막의 지성소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를 회막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건축되었을 때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장소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거룩한 장소, 그곳이 시온산이며 예루살렘이었습니다(왕상 14:21, 신 12:11, 16:2 등)
그런데 이제 새 언약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셨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우편 보좌에 앉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며 만국을 통치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성령을 교회에 보내셔서 교회와 함께하시고 교회 가운데서 일하신다고 교회는 굳게 믿었습니다. 그렇게 새 언약의 백성들이 출범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자신들 가운데 계신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치 옛 언약의 백성들이 그 대적들과 싸우며 나아갔던 것처럼 새 언약의 백성들도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대적하여 싸우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들로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것을 가로막는 세력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옛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다렸던 것처럼 새 언약의 백성들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4. 신약 백성들의 기다림
예수님의 오심으로 새로운 언약 백성이 탄생했습니다. 그들은 이전의 언약백성과는 달리 아브라함의 혈통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거기에는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까지 동참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이라고 해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새 언약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다.
옛 언약의 백성들을 괴롭게 한 세력은 내부적으로는 우상숭배와 탐욕이었고 외부적으로는 바벨론과 같은 제국이었습니다. 새 언약의 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세력은 누구였을가요? 사도 바울은 그들을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엡 2:2, 6:12). 그들도 역시 교회를 내부적으로 타락하게 하고 외부적으로 박해로써 괴롭게 했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섬기는 왕의 공동체로 자신을 인식하고 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옛 언약의 백성들이나 새 언약의 백성들 모두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온전하게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동일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옛 언약의 백성들이 고대하며 노래하던 그 동일한 예언을 자신의 노래와 기도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가 이 땅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옛 언약의 백성들은 그런 세상이 언제 임한다고 생각했는가 하면, 그 때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시는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돌아오시기를 그토록 간절하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새 언약의 백성들은 그 때가 주님의 재림의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립니다.
그러면 주님이 다시 오신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일까요? 교회는 무슨 기대를 가지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교회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목적은 옛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다리던 목적과 같습니다. 예언서를 보면, 하나님이 시온에 돌아오시는 날에 의인들에게 상을 주시고 악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새 언약의 백성들이 기다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재림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데살로니가후서 2: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디모데후서 4:8
옛 언약의 백성들이 주님의 오심을 사모한 까닭은 그 날에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합 2:14, 사 11:9). 마찬가지로 새 언약의 백성들은 예수께서 오시는 날에는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기대합니다. 그것이 요한계시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가 같은지라 그 갈대 자로 그 성을 측량하니 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더라…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요한계시록 21:10, 16, 22~23
하늘로부터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옵니다. 거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들어가기에 충분할 정도로 넓고 영광 가득한 곳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세상을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불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옛 언약의 백성들도 사모하던 곳이며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도 하나님이 장차 유업으로 물려주실 세상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믿는 사람들은 그 약속이 우리에게 주는 소망을 굳게 붙듭니다. 그것은 영혼의 닻과 같아서 성도들을 든든하게 붙들어 줍니다(히 6:19). 이 소망을 간직한 사람들은 모든 일을 참고 기다릴 것입니다(롬 8:24~25).
다음 주에는 기다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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