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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상사 법문 >>
2022.11.08 전화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성스러운 인도의 보드가야에서 기원전 5세기 경에 보리수 아래서 법의 본질을 관찰하시고 무상 정등각을 이루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삼매에 드시고 삼매를 통해 법의 본질을 여실하게 보시고 직접 깨달으셨습니다. 깨달으셨다는 것은 관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법의 본질을 보고 그것을 중생들에게 알려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는 언어의 분별과 희론을 넘어선 심오한 법의 본질을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어도 중생들이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법을 설하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그때 신들의 왕인 범천과 재석천 등이 와서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께 중생을 위해 법륜을 굴려달라고 청을 올렸습니다. 그렇게 청을 올리자 부처님께서 그를 허락하시고 바라나시로 가셨고 바라나시의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들에게 최초로 사성제를 설하셨습니다.
본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는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겠지’ 또는 ‘이렇게 설하면 아주 멋있고 위용이 있겠지’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먼저 법의 실상, 즉 희론을 넘어 심오하고, 분별을 넘어선 법의 실상을 직접 경험하시고 자신의 이익과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닌 대자대비로서 중생들에게 그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제자들을 해탈과 일체지의 경지에 오르게 하기 위해서 법을 전하신 것입니다.
2)
사성제와 이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처음으로 설하셨습니다.
사성제라는 것은 고제, 집제, 멸제, 도제입니다.
사제 중에 먼저 고제, ‘고’ 를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고제의 내용을 설명하셨습니다.
처음에 고제를 설하신 이유는 중생이 해탈을 향해 가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해탈하기 위해서는 먼저 출리심을 일으켜서 (방향을) 돌려야 하기 때문에 처음에 고제를 설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고제는 하나의 결과입니다. 고제는 이미 결과로서 성숙된 것이기 때문에 고제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고’의 원인인 집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집’이라는 것은 바로 업과 번뇌입니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업과 번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업과 번뇌, 즉 ‘집’을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윤회, 즉 ‘고’는 결과로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인 ‘고’를 없애기 위해서는 ‘고’의 원인인 ‘집’ 즉, 업과 번뇌를 먼저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제와 집제의 핵심적 의미를 윤회의 인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윤회의 인과를 설하신 후에 열반의 인과를 설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서 먼저 ‘멸’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멸’이라는 것은 업과 번뇌가 모두 제거되어 멸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법의 본질이며 해탈입니다. 그래서 ‘멸’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제자들에게 해탈을 추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멸제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먼저 ‘고’와 ‘집’이 사라진 다음에 ‘멸’을 성취하기 위해서 ‘도’ 즉, 도제를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도’에 의지해야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그 결과인 ‘멸’을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먼저 ‘도’에 의지해야하며 그 결과로 ‘멸’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멸’은 결과가 되고, ‘도’는 원인이 되고 (멸로 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네 가지 사제의 법륜을 설하시며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법륜을 굴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3)
법이라고 했을 때, 법은 인도 말로 ‘다르마’ 라고 하며 티벳어로는 ‘최’라고 합니다.
‘최’, 혹은 좀 더 강조해서 ‘담비최’라고 하는데 이 ‘담비최’라는 것은 정법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법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수승한 최상의 법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도어로 ‘다르마’라고 했을 때 ‘다르마’의 의미는 붙잡는다, 취착한다, 잡다는 뜻인데 붙잡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붙잡는다는 것은 떨어뜨리지 않고 잘 잡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법’, ‘다르마’는 중생들을 윤회에 떨어지지 않게 잘 붙잡아주고 해탈로 이끌어 일체 지자의 경지로 잘 잡아서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잘 붙잡아주기 때문에 바른 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음 ‘최’ 다르마라는 말의 다른 뜻을 다시 살펴보면, 티벳어로 만들다, 고치다 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여기에서는 고치다 복구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올바르게 수정하는 것일까요?
우리 마음의 흐름, 심상 속에 있는 허물들을 고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집과 번뇌와 같은 허물들을 올바르게 고치는 것입니다.
(4)
바르게 고치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 법, 다르마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실 때 법을 듣는 제자 중생들의 성향과 근기는 매우 다양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 명의 병자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병자들이 가진 병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의
사는 병자들에게 각각 알맞는 약을 주어야 합니다.
의사가 한 가지의 약으로 모든 병자들의 병을 다 치료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생들의 성격과 근기가 다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에 알맞게 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별해탈 소승의 가르침이 필요한 중생에게는 성문의 법을 가르치시고,
대승 종성을 갖춘 중생에게는 보살의 경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서도 밀교 성향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밀교의 법륜을 굴리셨는데요.
그런 식으로 각각의 중생들에게 알맞는 법문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법문을 일컬어서 8만 4000 법장이라고 합니다.
8만 4천 법장은 중생의 번뇌와 숫자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8만 4천 법문이라고 합니다.
다시 한번 요약하자면,
부처님 법에는 매우 다양하고 많은 법이 있지만
처음에는 바라나시에서 최초로 4제의 법률을 굴리셨고,
그 다음에 영취산에서는 반야의 법문을 설하셨습니다.
반야 법문은 주로 대승 보살 대중에게 설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관세음보살 등이 청하여서 보살 제자들에게 반야의 대승 법륜을 설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남인도에 있는 칼라차크라 대탑에서 문수 등이 청하셔서 그들에게 밀교의 법을 세 번째로 설하셨습니다.
그렇게 시륜승, 깔라차크라의 법과 다양한 밀법을 주시고 관정과 구전을 주심으로써
밀교의 법륜을 굴리신 것입니다.
5)
요약하자면은 부처님 법의 핵심은 <근도과> 입니다.
근도과, 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근이라는 것은 이제이고, 영어로 base, root 라고 번역합니다. ‘근’은 이제(二諦), 승이제와 속제, 이 두 가지입니다. ‘도’는 지혜와 방편, 두 가지입니다. ‘과’는 두 가지 몸, 이불신(二佛身)입니다. 몸신(身)자 써서 이신(二身)입니다.
근도과, 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없는 가르침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근’에 해당하는 내용은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일체법의 본성을 먼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二諦)는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로 설명합니다.
세속제는 우리에게 현현하는 모든 것인데,
우리의 전도된 생각과 전도 망상에 사로잡힌 마음의 대상으로 현현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세속제입니다.
세속제라는 말에서의 세속이란,
마치 본질적으로 존재는 것처럼 나타나고 또 그렇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본질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것들을 의미를 합니다.
예를 들면 눈병이 있는 사람이 허공을 보면 헛 것이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메아리나 거울 속의 영상 등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즉,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보이는 모습처럼 본질적으로는 실유로서 (실재 존재하는 것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속에는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나지만,
그것은 중생들이 무시 이래로 (쌓아온) 오랜 습기의 힘에 의해서 전도되어 현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것들은 현현하지만 실유로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로 승의제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일컬어서 세속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6)
범부들은 이러한 세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현들, 현상들이 자신에게 보이고 현현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본질적으로 실재라고 (생각하고) 집착합니다.
(자신에게 보이고 현현하기 때문에 그것이) 실재라고 여기며 강하게 집착하는 것입니다.
깊은 잠에 들어 꿈을 꿀 때 잠에서 깨기 전까지는 꿈에 나타나는 것들을 실재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하자면 황달에 걸린 사람은 흰 물건을 보았을 때 그것을 황색으로 보게 됩니다. 그래서 병이 나을 때까지는 그것이 황색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면서 정말로 황색이 있는 것처럼 그에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한 비유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세속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현들을 보고 우리는 눈앞에서 현현하는 것이 진실로 현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현현하는 것이 실재로 존재한다고 보고 그것에 집착합니다.
그것을 진짜 실재라고 (생각하고) 집착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세속의 진리, 즉 세속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생의 측면에서는 (세속에서 현현하는 것들이) 진리인 것처럼 보이고, 진실로 진실인 듯이 보이는 것들을
부처님과 보살, 성자들이 보실 때에 그것은 진실이 아닌 것, 전도된 것으로 보십니다.
성자가 평등한 지혜로써 보시는 그것이 바로
(이제의) 두 번째 진리인 승의제(勝義諦)인 것입니다.
승의라는 것은 ‘법의 본질’을 말합니다. 티벳어로는 ‘돈담 (དོན་དམ)’입니다. 한문으로는 ‘뛰어날 승’, ‘뜻 의’를 쓰는데 ‘돈’이 한자로 ‘뜻 의’자, 본질이라는 의미가 있고 티벳어로 ‘담빠’는 최상, 훌륭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승(勝)이 뛰어날 승자인데 ‘최상의 어떤 본질, 최상의 의미’ 이런 뜻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진리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 최고의 의미인 진리, 승의제라고 합니다.
(7)
일반적으로 세속에서 현현하는 것들은 그것들을 분석하고 관찰해보기 전에는
마치 실재로 있는 듯이 보이는데, 마치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성립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논리로 자세히 분석하고 지혜로 판별해보면,
그 자체의 본질적 측면에서는 성립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상호 의존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 의지하기 때문에 나타나고
명명된 것에 불과하며
본질로 성립하는 것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의 오온이나 자아, 또는 다른 사물들을 살펴볼 때에도 잘 분석해보면
그 자체의 측면에서 ‘바로 이것이다’ 라고 인식할 만한 그런 것은 없습니다.
분석해보지 않으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석해보면 얻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속의 법입니다.
이러한 일체법은 현현하면서 공한 것이고.
공하면서 현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일체법이 오근의 안이비설신,
이런 오근의 분에 나타나서 현현하지만
그것은 실유로 성립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은 공하면서 현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의미를 설명하자면,
실유로써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공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공성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허공이나 집이 텅 빈 것 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하다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현현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공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8)
반야심경에는 공성을 확립하는 네 가지 논리가 등장합니다.
그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고 합니다.
즉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색과 별개로 공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과 별개로 색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한 논리로 색을 공이라고 하는 것을 색즉시공이라고 하고,
논리로 성향미촉과 일체법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해서
모두가 같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현상과 공성이라는 것을 함께 통합하여 이해함으로써 공성을 이해하는 것,
그러한 공성이 바로 우리가 깨달아야 되는 법입니다.
우리가 공성의 의미를 체득하게 되면
모든 현현에 대해서,
모든 현상에 대해서 실재로 집착하는 실집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공성을 체득하기 전까지 실집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실집을 제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유를 해보겠습니다.
황달병에 걸린 사람은 백색을 황색으로 봅니다.
병에 걸린 사람이 무언가를 보고 황색이라고 할 때 그에게 그것은 황색이 아니라 흰색이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병에 걸려서 그 병의 위력으로 인해서 흰색을 황색을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병자 자신이 황달을 고치는 약을 먹어야 합니다. 약을 복용하고 그에 의해서 순차적으로 병이 나으면 황색으로 보이는 잘못된 현상이 점점 줄어들게 되고 마침내 최종적으로 백색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마침내 병이 나아야 그대로를 보게 됩니다.
(9)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공성의 의미를 반복해서 수습하고 수행해 나가면
그것을 통해서 실제에 대한 집착이 점점 줄어들게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일체법에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실제에 대한 집착인 실집이 줄어들고 제거됩니다.
그러한 집착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점차적으로 탐욕과 분노와 같은 번뇌의 분별도
점차 없어져서 극복하게 됩니다.
중생에게 나타나는 것, 중생에게 현현하는 것과 성자들께서 보시는 것을 비교해보면
중생들에게는 실재에 대한 집착으로서 나타나고,
성자들은 그것의 실체가 없음을 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생각해 볼 때
성자들께서 지혜로써 보시는 그것을 우리는 항상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실제로 현현하는 것처럼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그것을
주된 것으로 보어서는 안됩니다.
(10)
우리가 잘못보는 이유를 병과 비유해 보겠습니다.
황달병에 걸린 100명의 환자가 있으면 100명의 환자는 모두가 똑같이 흰색을 황색으로 잘못봅니다. 그래서 한 환자가 옆 사람에게 물어보면 옆 사람도 (원래는 흰 것이지만) 그것을 황색이라고 할 것이고. 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아도 마찬가지로 본래 흰 것을 황색이라고 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범부들은 보이는 것들이 다 실재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범부가 보는 것보다 성자가 보는 것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우위에 있는 것으로 여겨야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 즉 제행은 무상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 범부들은 모든 것들이 항상 머무는 것(상주불변)이라고 생각하며 집착합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일체의 유루법, 염오(染汚)된 일체 오염된 것들은 다 고통이라고 하시며
일체 유루 개고라고 말씀하셨는데도
우리 범부들은 여전히 그것을 행복이며 쾌락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것이 항상 머무는 상주불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집착하고 있습니다.
또 부처님께서는 일체법은 다 무아이고 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범부들은 유아(有我), ‘나’를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공이 아니라고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무명의 힘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에
아닌 것을 맞는 것으로 보고 아닌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공한 본질을 직접 관찰하시고
모든 실재에 대한 집착을 모두 제거하시고
우리와는 반대로 일체법을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 우리가 정말 깨닫고 보아야 하는 것은
바로 일체개공입니다.
모든 것이 공하다는 의미를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일체개공, 그것을 알지 못한다면
부처님의 경지인 불과를 이루는 것, 해탈을 이루는 것도 모두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승이제와 세속제라는 이제를 가지고 말씀드린
근도과, 근(토대, 혹은 뿌리)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11)
그런 다음에 우리는 이렇게 부처님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서 수행을 하지 않습니까?
불제자들이 수행하는 최종적인 목표는
바로 이 부처님의 경지인 불과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불과를 이루기 위한 길, 도의 방편이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은 그 방편인 대비심과 지혜인 공성, 공성의 지혜와 대비의 방편
이 두 가지를 분리되지 않게 통합해서 함께 수행을 해야합니다.
즉 방편과 지혜를 함께 닦아야 합니다.
법의 본질인 자성이 공함을 깨닫는 수행의 순서,
그것이 바로 지혜의 측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일체법이 공하지만 공하다고 해서
자비를 실천할 필요가 없고 공덕을 쌓을 필요가 없고 선을 지을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제 세속을 행하는 그것에도 속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과에도 속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할 때에는 방편과 지혜가 분리되지 않게 해야합니다.
공덕으로서의 선을 쌓아야 하고 보시와 지계 등의 수행을 해야합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끝없이 공덕을 지어야 합니다.
그렇게 공덕을 짓지만 그러한 공덕 자량인 선도 집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며,
그것은 공성이며 환영과 같은 과정임을 알고 수행을 해 나가야 합니다.
(12)
핵심적으로 말하자면 그러한 공덕의 자량과 지혜의 자량을 통합시켜서
수행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새가 하늘을 날 때 두 날개가 없으면 날아갈 수 없으며,
두 날개에 의존해야 하듯이 수행자는 방편과 지혜를 함께 통합해서 수행해야 합니다.
공덕과 지혜, 그런 방편과 지혜를 통합하는 길에 의존해서 이제 수행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지혜의 길에 의지해서 아까 말씀드린 ‘과’ 중에
두 개의 불신 중에서 법신, 결과로서의 법신을 성취하게 됩니다.
즉 지혜의 측면을 통해서 법신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식 대상이 없는, 분별이 없는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별이 없는 선을 통해서 이 지혜의 측면인 법신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분별을 수반하는 그런 선, 즉 방편을 통해서 공덕 자량에 의지에서
다른 일체 중생을 위해서 자비를 행할 수 있는 몸인 색신, 즉 이신 가운데 색신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 법신과 색신이라는 두 가지 몸, 두 가지 불신(佛身)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13)
그와 같이 불도를 닦아나감으로써
우리 모두가 자리 이타에서 자리를 위한 법신을 성취하고
이타를 위한 색신을 성취함으로써
이불신의 경지를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신을 성취함에 의해서 자리를 이루고 윤회에서 헤매거나 머물지 않게 되고,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타의 측면인 색신을 성취함으로써 열반이라는 극단에서 머무르지 않고
이 겁이 다하도록 중생을 위하여 끝없는 자비행을 성취할 수가 있고
끊임없이 자비행을 성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함께 하는 이 법문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는데 이제 법문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아무쪼록 우리가 부처님 법의 수행이 잘되고 궁극적으로는 불과를 이룰 수 있도록 그리고 또 일제 중생들이 다 성불할 수 있도록 발원하고 여러분이 이러한 공덕을 잘 회향하기를 청하는 바입니다.
남원 실상사 법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