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어쩜 이리도 나날이 즐거워지는지 모르겠네요. 아마 <북촌방향> 즈음이 아닐까 하는데요. 어느 시점 이후로 감독의 작품들에서 자조적인 냉소가 줄고, 뭔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명료해진 느낌이 들어요.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누구나 다 이렇게 구질구질한 거지.'와 같은 일상의 군상들의 찌질함에 대한 객관적이고 직설적인 묘사와 그로 인해 유발되는 씁쓸한 유쾌함이 홍상수 감독의 기존작들을 대표하는 감상이었다면, 이 영화는 관객의 시선이 조금 다른 지점을 겨냥하게끔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 삶에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답변의 형태입니다.
감독이 이 영화에서 묘사하는 우리 삶의 모습은 정확하게 내러티브입니다. 내러티브는 문학적 효과를 위해 시간순에 따라 의도적으로 배열된 이야기에요. 우리가 삶을 인식하는 자연스러운 형태는 바로 시간순에 의해서잖아요. 나는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은 어떤 사람이며, 미래에는 어떻게 변화해갈 것이다와 같은 시간대의 변화에 기초해, 우리는 우리 삶을 인식하고 있죠.
즉, 우리의 삶 자체가 마치 책 속의 이야기와 같은 하나의 내러티브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내러티브인 까닭에, 우리는 우리 삶의 다양한 사건들이 우리 삶의 완성적인 결말을 향해 이끌어주는 합목적적인 요소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요. 대표적으로 기억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현재 삶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잖아요. 많은 심리치료가 그러한 방향성을 따르고 있고요. 현재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온전한 형태로 재구축해야 합니다. 과거라는 벽돌들이 없이는 현재의 집은 형태를 유지할 수 없으니까요.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인식이 완벽한 착각이라는 사실을 전합니다. 영화의 내적인 주제와 외적인 구성은 모두 다 이 전통적인 시간관을 해체하기 위한 의도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그건 굉장히 선(禪)적인 질감과 닮아 있어요.
영화가 하나의 내러티브적 사태를 해체해, 서로 연결되지 않은 파편적인 장면들로 각각의 사건들을 보여줄 때, 이는 그 각각의 사건들이 그 자체로 완결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즉, '지금-여기'가 끝이고 전부라는 거죠. 여기에서 없으면, 영원히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있으면, 영원히 있는 거고요. 지금 이 순간의 사건들이 더 커다란 내러티브의 완성을 위해 종속되어 봉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에 살고, 이 순간에 죽는다는 찰나생 찰나멸의 관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내러티브로 살고 있을 때, 여기에서는 하나의 내러티브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그 안에서 특정한 역할을 해야 하는, 마치 연극과도 같은 삶의 형태가 출현합니다. 이게 그동안 홍상수 감독이 보여주었던, 삼류 연극 속에 들어가 있는 것 같은 궁상스러운 캐릭터들의 모습이에요. 그리고 이게 또한 홍상수 감독이 제시하는 답변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내러티브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삶에 바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모든 내러티브는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코미디입니다. 그것도 우주적 코미디에요. 그래서 우리가 시간축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내러티브를 살고 있는 한, 우리는 모두 희극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최고의 희극인 찰리 채플린은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로고테라피를 창안한 빅토르 프랑클은 아우슈비츠에서도 이 사실을 발견했죠. 그의 접근은 바로 이 삶의 양면성을 그대로 직시함으로써, 비극의 내러티브에 빠진 사람들이 웃으면서 깨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이었어요.
마찬가지로, 이러한 삶의 양면성을 정확하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 홍상수 감독의 시선입니다. 그건 또한 틈새의 시선이고, 경계의 시선이에요. 붉은 빛이 만물을 감싸안는 그 낮과 밤의 틈새와 경계 속에서, '낮이라는 게 있구나! 밤이라는 게 있구나!'를 확인하고 있는 시선인 거죠. 삼라만상의 온전성은 바로 이 틈새의 시선을 통해서만 확인됩니다. 노자가 그러한 것처럼, 칼의 한쪽면은 날카롭지만, 그 반대쪽면은 무디다는 것을, 그리고 그 두 사실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거예요.
삼라만상의 온전성을 정확하게 발견해서, 그 온전성만을 확인하며 살아내는 자리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라고 하면, 결코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즉, 깨달음은 틈새에서만 발견된다는 얘기죠.
이 얘기를 내러티브와 연결지어 보면, 깨달음은 내러티브가 아닌 자리, 즉 내러티브와 내러티브의 틈새에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그 얘기는 또 다시 표현하면, 깨달음은 시간축이 아닌 자리에서 만나진다는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가.'와 같은 시간축에 의거한 과거사의 기억이 구성해 온 '나'라는 정체성 속에서는 결코 발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지금-여기'가 늘 완결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깨닫지 않으면 영원히 깨닫지 못해요. 시간이 지나 내가 좀 더 영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깨달음이 찾아오고 완성되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가 '깨달음'이라는 내러티브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할 때, 그 내러티브가 완성되면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에요. 내러티브의 완성은 그저 내러티브의 완성일 뿐입니다. 연극 하나가 끝난 거예요. 연극에서의 역할을 맡아 연기를 하는 그 주체, 즉 배우가 누구인가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저 다른 하나의 연극이 또 작동할 뿐인 거예요.
동양에서는 이 내러티브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은 단어로 표현해왔죠.
'꿈.'
부처님이 되는 꿈이든, 하나님에게 구원받는 꿈이든, 궁극의식과 합일하는 꿈이든, 꿈은 그저 꿈일 뿐입니다.
마음은 늘 꿈꾸고 있어요. '마음이 꿈꾸고 있다.'라는 그 사실이 만나지기 전까지 마음은 늘 분주합니다. 꿈은 뜨겁고, 꿈의 완성은 달콤하거든요. 그래서 마음은 꿈의 완성을 위해 늘 바쁘게 달려 나갑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 꿈이란 게 꿈으로서 확인될 때, 거기에는 우리를 뜨겁게 달구었던 그 열망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끝내 실현한 내러티브의 완성이 우리가 기대했던 만큼 그렇게 감동적인 환희가 아니라는 사실을 영화의 구성을 통해 잘 묘사하고 있죠. 주인공이 자신의 꿈을 따라 그렇게 기다리던 연인을 만나 결합했을 때, 그 장면을 지켜보는 관객은 실상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미 시간축이 붕괴되고, 내러티브가 해체된 현실 속에서는, 그냥 다른 장면과 마찬가지의 여여함만이 존재할 뿐인 거죠. 달리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그렇고 그런 여여함.
결국 우리의 삶에 다양한 '특수효과'를 제공하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닌 내러티브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내러티브 밖으로 나왔을 때, 꿈에서 깼을 때, 그건 그냥 단순하게 온전한 사건이에요. 더 넘칠 것 없는, 더 모자랄 것 없는, 우주에서 가장 온전한 사건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지점이죠. 우리가 삶의 '특수효과'가 아닌, 온전함을 바라고 있다면, 그건 결국 내러티브 밖에서, 꿈에서 깬 자리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온전함은 내러티브 안에는 없습니다. 꿈 속에는 없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죽음은 연극 속에서는 비극이지만, 관객에게는 영원한 사랑을 대변하는 온전함이에요.
이 영화에서는 이러한 함의를 담고 있는 즐거운 몇 장면들이 묘사됩니다.
등장인물들이 영어로 서로 대화를 하고 있을 때, 그래서 그 장면이 마치 하나의 수려한 연극인 것처럼 미묘한 미학으로 느껴질 때, 게스트하우스의 주인 역할을 맡은 윤여정씨가 한국말로 이러한 대사를 합니다.
"밥 먹어."
그 순간 관객은 연극무대가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되요.
'아, 밥 먹어야지, 꿈 그만 꾸고 밥 먹어야지.'
이 장면은 정확하게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직면하게 합니다. 몽유병과 같이 부유하는 꿈이 걷힌 자리에서의 그 상쾌함과 함께 안착된 일상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대단히 즐거운 장면이죠.
또한 주인공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로부터 받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기에 왜 왔어요. 관광하러 왔어요, 일하러 왔어요?"
주인공은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러 왔어요."
맞아요. 우리는 여기에, 바로 이 지구에 관광하러 온 게 아닙니다. 즉, 보기 위해 온 게 아니에요. 관(觀)하고 알아차리기 위해 온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우리는 지구에 일하러 온 것도 아닙니다. 뭔가를 성취하고 실현하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려고 온 게 아니에요.
우리는 단지 만나러 왔습니다. 만남 그 자체가 그리워서 만나러 온 거죠.
깨달음은 만남이에요. 마음이 스스로를 만나는 거예요. 우리는 뭔가 더 거룩한 '만나주는 자'도 아니고, 뭔가 더 부족한 '만나지는 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만남의 광장'이에요. 삼라만상이 그 자체의 온전함으로 모두 만나는 자리, 그게 우리입니다. 그래서 늘 감동의 이산가족 상봉이죠.
관광도 일도 다 꿈입니다. 그러한 내러티브에요. 그럼 만남 역시 꿈이 아니냐고요?
만남은 꿈이 아니에요. 그 이유는, 우리는 꿈에서 깼을 때만, 내러티브 밖으로 나왔을 때만 만나지거든요. 꿈꾸지 않는 자리에, 내러티브가 아닌 자리에, 대신 영원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이 자주 들르는 카페 주인 역할을 맡은 문소리씨는 주인공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당신 이제 자야 돼. 빨리 자요."
잘 때 비로소 우리는 멈추게 되죠. 그렇게 멈추라고, 뜨거운 꿈은 이제 그만 꾸고 멈춰서 편히 쉬라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얘기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위대한 역설입니다.
잠든 사람만이 깨어날 수 있습니다.
잠이 없다면, 깨어남도 없을 거예요. 잠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깨어날 수 있습니다.
깨어남의 꿈을 꾸는 한, 우리는 그 꿈속에서 깨어나지 못합니다. 진정 잠들어야만 깨어날 수 있어요. 깨어남을 만나는 감동은 오직 편히 잠든 이에게만 허락된 선물입니다. 우리의 호흡 또한 그러하잖아요. 날숨이 있어야 들숨이 있죠.
그게 바로 자유에요. 잠도 있고, 깨어남도 있다는 것. 우리가 그 둘 다를 누릴 수 있다는 것. 그 자유의 언덕에서 우리는 아무 걱정없이 푹 쉴 수도 있고, 깨어나는 감동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제,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