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3]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화장을 마치고 나가는 어머니에게 할머니가 은근하게 말했다.
에미야, 저녁은 꼭 집에서 먹어라.
할머니가 또 임자 없는 닭을 잡아 온 것이다. 할머니의 빨래 함지는, 빨랫거리에 비해 엄청나게 컸다. 그리고 가끔 그 큰 함지 속에는 커다란 묵은 닭이 죽은 듯 다리를 꺾고 앉아 눈을 뒤룩거리고 있곤 했다. 동네에서 떨어진 채마밭을 어정거리는 닭을 잡아 온 것이다. 할머니는 끝내 임자 없는 닭이라고 우겼다.
할머니가 그 닭의 목을 죽지 속에 파묻은 후 돌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으면 닭은 단 한마디의 비명도 없이 죽었다.
옷이 척척 들러붙게 더운 날인데도 할머니는 부엌문을 닫아걸고 흘러드는 땀에 눈을 섬벅이며 닭털을 뽑았다.
우리는 방문을 굳게 닫고 땀을 뚝뚝 흘리며 뜨거운 닭국을 마셨다.
할머니는 우리의 손이 닿기 전 먼저 닭의 다리와 똥집을 오빠의 밥 위에 얹었다.
뒤처리도 재빨랐다. 바람에 날리지 않게 재에 버무린 닭털을 오빠는 마당 구석 깊숙이 묻고 부엌 바닥의 검게 엉긴 피도 흙을 뿌려 쓸자 감쪽같았다.
할머니는 또 살이 말끔히 발린 닭뼈를 눈에 안 띄는 찬장 뒤에 놓았다. 지네를 잡아 약에 쓴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름기 번질한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방문을 열고 툇마루에 나앉았다.
처음 우리가 이사 왔을 때 동네에서는 자꾸 닭이 없어진다는 소문이 돌고 닭 임자는 잃어버린 닭을 찾아 우리 방 쪽을 기웃거렸다. 외지에서 들어온 피란민들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러나 정작 할머니가 커다란 빨래 함지를 이고 나가기 시작한 것은 일 년이나 지난 다음부터였다. 어차피 우리는 거지나 다름없는 뜨내기 피란민이었던 것이다.
오빠는 처음엔 닭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자기 몫의 국을 보아란 듯 뜨물통에 쏟아 우리를 경악게 했다. 그러나 한참 자랄 나이의 왕성한 식욕을 오랫동안 외면할 수는 없었다.
(중략)
나는 낮의 일들이 꼭 꿈속의 일처럼 아주 몽롱하고 멀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밤마다 술 취해 오는 어머니, 더러운 이불 속에서 쥐처럼 손가락을 빨아 대는 일 따위가 한바탕의 긴 꿈만 같이 여겨졌다. 진짜의 나는 안타까이 더듬어 보는 먼 기억의 갈피짬에서 단편적인 감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처럼. 아버지는 키가 몹시 컸다. 아니 그것은 덩치 큰 오빠를 향해 하던, 아버지를 쑥 빼었다는 할머니 의 말에서 비롯된 연상인지도 몰랐다.
저녁을 먹은 후 바람이 서늘해지면 아버지는 나를 목에 태우고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의 무등을 타면 어찌나 높던지 나 자신 풍선처럼 공중에 둥실 떠오르듯 눈앞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곧 동생이 태어날 거다. 아버지는 내 넓적다리를 꽉 쥐며 노래 부르듯 말했다. 엄마 뱃속에 아기가 들었단다.
[A] [꼭 잡아, 아버지의 말에 따라 아버지의 머리를 잡으면 손에서는 찐뜩찐뜩한 머릿기름이 묻어났다.
아버지는 내게 연약한 넓적다리, 혹은 발목을 잡던 악력(握力), 막연히 따스하고 부드러운 것, 보다 커다란 것, 땀으로 젖어 있던 등허리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기억 역시 내 상상이 꾸며낸 더 먼 꿈속의 일은 아니었을까.]
전쟁이 끝나면 아버지가 돌아온다. 두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지만 할머니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정다운 기억, 희망 없는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돌아온다는 사실에 우리는 모두 얼마쯤의 불안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매일 술 취해 돌아오는 어머니를 향해, 다만,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뭐라고 하실까요, 차갑게 협박하는 오빠까지도.
우리가 임자 없는 닭의 맛에 길들여지듯, 어머니의 지갑을 더듬는 손길이 점차 담대해지고 빼내는 돈의 액수가 많아지듯, 할머니가 단말마의 비명도 없이 도살(屠殺)의 비기(秘技)를 익혀 가듯, 그리고 종내는 눈의 정기만으로도 닭들이 스스로 죽지 밑에 고개를 묻고 너부러지듯 아버지 역시 달라져 있을 것이 다. 아버지가 우리를 떠나 있던 그 긴 시간의 갈피짬마다 연기처럼 모호히 서린 낯설음은 새로운 전쟁으로 우리 사이에 재연(再燃)될 것이기에 차라리 그립고 정답게 아버지를 추억하며 희망 없는 기다림으로 우리 모두 아버지가 영영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거나 돌아오지 않을 사람으로 치부하고 있음을 변명 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나 아니었는지.
01. 윗글의 사건을 일어난 순서대로 정리할 때, 가장 뒤에 올 것은?
① 오빠가 자기 몫의 닭국을 안 먹고 버리다.
② 오빠가 재에 버무린 닭털을 마당에다가 묻다.
③ 할머니가 임자 없는 닭을 처음으로 잡아 오다.
④ ‘나’의 가족이 외지에서 이 동네로 피란을 오다.
⑤ 사람들이 ‘나’의 가족을 닭 도둑으로 의심하기 시작하다.
02. [보기]를 참고하여 윗글을 이해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보기]
「유년의 뜰」은 ‘나’가 일곱 살 소녀 시절의 상처를 회상하는 형식을 띤 성장 소설이다. 아버지의 부재(不在)는 남아 있는 가족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이 되며, 어머니의 부정과 할머니의 도둑질, 오빠의 폭력과 언니의 일탈 같은 왜곡된 모습을 보면서, ‘나’ 또한 도벽을 지닌 비뚤어진 아이로 성장해 나간다.
① 가족들이 겪는 고통의 근원에는 ‘전쟁’이라는 사회적 상황이 자리 잡고 있군.
② ‘나’의 성장이 왜곡된 원인 중 하나는 ‘밤마다 술 취해 오는’어머니의 모습이겠군.
③ 아버지의 부재 기간에 생겼을 변화 때문에 가족들은 ‘불안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군.
④ ‘나’가 도벽을 지니게 된 데는 ‘임자 없는 닭’에 대한 가족들의 태도도 영향을 주었겠군.
⑤ 아버지의 부재 상황이 해소되지 않을 거라는 할머니의 생각대로 ‘희망 없는 기다림’의 나날은 계속되는군.
03. [A]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환상적 사건을 통해 허구성을 강화하고 있다.
② 상징적 소재를 통해 미래의 사건을 암시하고 있다.
③ 논리적 분석을 통해 사건 발생의 원인을 밝히고 있다.
④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대상에 대한 기억을 묘사하고 있다.
⑤ 비유적 진술을 통해 대상에 대한 연민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도움자료
[2014 EBS 인터넷 수능]
(문학B)
오정희,「유년의 뜰」
01 ② 02 ⑤ 03 ④
해제 ㅣ 이 소설은 6·25전쟁 때 일가족이 피란을 온 어느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녀가 겪어야 했던 왜곡된 성장을 그린 작품이다. ‘노랑눈이’라고 불리는 일곱 살짜리 소녀 ‘나’는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의 부정, 할머니의 절도, 오빠의 폭력, 언니의 일탈 등 총체적으로 망가진 가족 상황의 영향으로 상처를 받아 비뚤게 자라나게 되며, 그 상처의 근원에는 전쟁으로 상징되는 세계의 폭력성이 자리를 잡 고 있다. 이 작품은 성인이 된 서술자가 어린 시절 ‘나’의 눈으로 당시를 회상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자신을 둘러싼 상처와 억압을 명료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이미지를 통해 장면화하는 어린 소녀의 사고와 정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제 ㅣ 전쟁의 와중에서 한 소녀가 겪는 성장의 고통
전체 줄거리 ㅣ 일곱 살짜리 소녀인 ‘나’는 ‘노랑눈이’라고 불린다. 아버지는 전쟁에 징집되어 나가고 나머지 가족, 즉 할머니, 어머니, 오빠, 작은오빠, 언니, ‘나’, 동생이 한 마을로 피란을 와서 작은 방에 산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잇기 위해 저녁마다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외출을 하고, 그때마다 오빠는 시위라도 하듯 영어책을 큰소리로 읽는다. ‘나’는 한밤중에 부네의 방을 바라보곤 하는데, 부네는 외눈박이 목수의 딸로, 집을 나가 살림을 차렸다가 목수의 손에 붙들려 와 감금되어 있는 중이며 부네에 관한 갖가지 추측만 사람들 사이에 무성하다. 오빠는 엄마가 외박을 할 때면 언니를 때려 서 코피가 나게 만들고, 언니는 저항 없이 묵묵히 맞고만 있다. 할머니는 이웃의 닭을 몰래 훔쳐와 임자 없는 닭이라며 요리한다. 전쟁이 끝나면 아버지가 돌아온다고 할머니는 늘 말했지만 가족들은 왠지 모를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아버지를 기다렸다. 어느 날 부네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사람들은 그 소식으로 인해 부네가 정말 그 방에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둘씩 마을을 떠나는 피란민들처럼 ‘나’의 가족도 이사를 해서 ‘나’는 언니가 다니는 학교 에 입학한다. 여름이 갈 무렵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오지만 ‘나’는 어쩐지 반갑지도 않고, 서러움에 자꾸 눈물만 흐른다.
01 서사 구조에 대한 이해 ②
정답이 정답인 이유
이 동네로 가족이 피란을 왔을 때 자꾸 닭이 없어진다는 소문이 돌고, 닭 임자를 비롯한 사람들은 피란민들의 소행이 분명하다고 수군대면서 우리 방 쪽을 기웃거린다. 그러나 그로부터 1년이나 지난 다음부터야 할머니는 닭을 훔쳐 오기 시작한다. 오빠는 처음엔 그 훔쳐 온 닭을 입에도 안 대고 닭국을 뜨물통에 쏟아 버리지만, 왕성한 식욕을 오래 외면하지 못한 오빠는 다른 가족들처럼 그 닭을 잘 먹고 흔적을 지우는 일에도 적극 협조한다. 그러므로 선지의 내용들을 시간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④-⑤-③-①-②가 될 것이다.
02 외적 준거에 따른 작품 감상 ⑤
작품에 대한 간략한 해설을 바탕으로 작중 상황을 파악해 보는 문제이다. 시대적 배경과 인물들의 성격에 주목하면서 진술의 적절성을 판단해 본다.
정답이 정답인 이유
‘전쟁이 끝나면 아버지가 돌아온다. 두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지만 할머니는 끈기 있게 기다렸다.’라는 내용으로 볼 때, 할머니가 아버지의 부재 상황이 해소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볼 수 없다.
오답이 오답인 이유
① 아버지가 부재하는 것은 전쟁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면 아버지가 돌아온다.’라고 하는 것이다.
② ‘밤마다 술 취해 오는’것은 [보기]에서 말한 ‘어머니의 부정’에 해당하며, 이는 ‘나’가 비뚤어진 아이로 성장하는 원 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③ ‘아버지가 우리를 떠나 있던 그 긴 시간의 갈피짬마다 연기처럼 모호히 서린 낯설음은 새로운 전쟁으로 우리 사이에 재연될 것’이라는 점이 가족들에겐 불안과 두려움의 이유가 된다. 그래서 그립고 정답게 아버지를 추억하는 것을 통해, 차라리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거나 돌아오지 않을 사람으로 아버지를 치부해 버리는 심리를 변명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나’는 회상하고 있다.
④ 자신이 훔쳐 온 닭을 ‘임자 없는 닭’이라고 우기는 할머니, 그리고 그에 대해 가족 중 어느 누구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은밀한 식사 시간을 즐기는 모습은 [보기]에서 설명한 대로 ‘나’가 도벽을 지닌 비뚤어진 아이로 성장해 나가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03 서술상 특징 파악 ④
정답이 정답인 이유
손에 묻어나던 머릿기름의 ‘찐뜩찐뜩한’촉감, ‘나’의 넓적다리나 발목을 잡던 아버지의 ‘악력’, ‘막연히 따스하고 부드러 운’ 그리고 ‘보다 커다란’ 느낌, ‘땀으로 젖어 있던 등허리’ 같은 것은 모두 ‘나’의 기억 속 아버지의 존재를 구성하는 감각적 이미지들이다. 이를 통해 아버지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오답이 오답인 이유
① 아버지에 대한 회상일 뿐 환상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없다.
② 상징적인 소재로 볼 만한 것이 없으며, 미래의 사건을 암시 하는 것도 없다.
③ 사건 발생의 원인을 밝힌 부분이 아니며, 논리적 분석이 아니라 감각적 이미지를 매개로 한 회상이 중심을 이룬다.
⑤ 아버지에 대한 정서는 그리움이지 연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