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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그리스도를 없앤 그리스도교>의 줄거리:
현존하는 최대의 아이러니는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를 지구 상에서 없애버린 것입니다.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가톨릭과 개신교는 전체적으로 그리스도가 제거되고 예수와 그리스도라는 이름만 남은 쭉정이 상태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합니다. 그리스도 제거 상황은 오늘도 소위 교인들의 삶에서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없앤 그리스도교
(누가복음 9:37~45)
40.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4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
42. 올 때에 귀신이 그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사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라니라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길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4.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하시되
45.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없앤 그리스도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를 없앤 그리스도교’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오셨을 때에 제자들과 무리와 서기관들이 뒤엉켜 소란스러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무리 중의 한 사람이 귀신들려 간질병 걸린 외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구하였으나 제자들은 고쳐줄 수 없었습니다. 서기관들은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을 비난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를 없앤 그리스도교’라는 제목을 붙여보았습니다.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를 없앴다니 지구상에 현존하는 아이러니 중 최대의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은 당황하고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파송을 받아 나갔을 때는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가 함께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변화산에 올라가신 사이에 찾아왔던 간질병 걸린 아이에게서는 전처럼 귀신을 쫓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파송 받은 제자들의 활동은 이스라엘 내에서 꽤 큰 반향을 일으켰을 것이고 화젯거리도 되었을 것입니다. 서기관들 또한 이러한 제자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정작 서기관들 앞에서는 귀신을 쫓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이 맞느냐는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에 올라가셨던 예수님이 돌아오시자 제자들은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41절에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말씀은 제자들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무리들 전체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또한 44절에서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만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45절에 기록된 대로 제자들은 이 말씀의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하였고 오히려 깨닫기를 두려워하여 의미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생각에는 귀신을 쫓으시는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사람들 손에 넘어가는 일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사람들 손에 넘겨지리라는 말씀을 하시는 의도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 손에 넘겨지리라는 것은 결국 잡혀서 죽게 되리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서는 예수님이 잡혀 죽으시는 상황은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미래였습니다. 혹시나 그런 의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을지도 모르지만 제자들은 그러한 미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말씀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자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쪽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무지함과 두려움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이 무지함과 두려움이 바로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를 제거하는 칼이 됩니다.
앞선 20절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에 대하여 22절에서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십니다. 그리스도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버림받아 세상 밖으로 나가서 죽임을 당하고 죽은 뒤에 부활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누가는 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변화산 사건을 기록하기도 하였습니다. 31절을 보면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변화산 사건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으나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말씀의 내용을 기록한 것은 누가뿐입니다. 누가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별세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당하셔서 세상 바깥으로 나가시고 죽임 당하시고 부활하시는 세상 탈출의 이야기를 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지금도 우리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만드신 것은 세상을 탈출할 수 있는 그리스도 코스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 그리스도 코스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한편 오늘 제자들의 태도에서는 그리스도 코스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경계해야만 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교를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입니다. 하지만 입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지라도 세상을 탈출하는 통로를 만드신 예수님의 사역을 빼버리면 그리스도의 존재의미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를 없애버리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 오셔서 수난을 당하시는 과정을 통하여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으시고 죽임당하셨고 부활의 자리에 이르셨습니다. 세상에서 탈출하는 코스를 만드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사역에 대해 말씀하시는데도 제자들은 깨닫지도 못하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만드시고자 하는 그리스도 코스 자체를 두려워하고만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를 제거되게 됩니다.
물론 이때는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었기에 제자들의 믿음은 온전할 수 없었습니다. 실제로 십자가 사건 후에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코스를 따라 세상을 탈출하게 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을 탈출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졌습니다. 세상을 탈출한 제자들에 의해서 세상을 탈출하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이 모여 교회가 형성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2000년간 이어져 온 교회 역사를 보면 중간 중간 돌이킴의 시대는 있었을지언정 대부분의 기간이 그리스도가 제거된 상태였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믿음 없음과 패역함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 41절에서 제자들과 선민들의 믿음 없음과 패역함을 지적하십니다. 믿음이란 곧 세상 바깥에 있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최고로 좋으신 분으로 믿고, 어떻게 하든지 그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기 위하여 이 세상을 탈출하고자 하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을 탈출하여 세상 밖에 계시는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의 상태가 될 때에 하나님의 능력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아직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지 못했던 제자들은 적어도 세상 바깥에 계신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소망할 수는 있었고 마음을 연결시키고자 할 수는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연결이 끊어졌기에 제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 또한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지적하신 패역함입니다.
패역함으로 번역된 헬라어 디아스트래포(διαστρέφω)는 어떤 이유로 인하여 방향을 돌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향해야 될 마음을 어떤 이유에서인가 세상을 향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를 예수님께서는 패역함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는 것은 세상 바깥에 계신 하나님이 최고로 좋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 하나님과 연결됨을 거부하고 거꾸로 이 세상에 밀착되기를 고집하고 그 밀착된 상태를 의도적으로 밀고 나가고자 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당연히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될 수가 없고 하나님의 능력 또한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은 귀신을 쫓을 수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간질 증세를 보이는 아이를 고치실 마음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계실지라도 제자들로부터 시작하여 그 자리에 모여 있던 무리들과 서기관들 중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소망의 형태로라도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이 없으니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흘려보낼 통로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잘 아셨기에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과 무리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믿음 없음과 패역함에 대하여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패역함으로 번역된 디아스트래포(διαστρέφω)는 “~때문에”를 의미하는 접두사 디아(δια)와 “방향을 틀다”라는 뜻의 스트래포(στρεφω)의 합성어입니다. 이는 곧 세상이 좋아서 하나님께로부터 방향을 틀고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거부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발견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자녀를 좋아하여 세상을 떠나고자 하지 않습니다. 사업하는 사람의 마음이 돈 버는 것을 재미있게 여겨서 세상을 떠나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믿음 없음이고 패역함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는 것을 아무리 모아보아도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보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지 않기에 마음은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대며 계속해서 세상에 묶이게 됩니다.
기독교는 2000년을 지나오는 동안에 껍데기만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믿음생활을 했고 독일에 가서 믿음에 관한 공부를 했고 미국과 캐나다에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깨닫기로는 제가 있었던 곳 어디에도 기독교는 껍데기만 남아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시작된 곳은 중동 땅 한복판인 팔레스타인 지방입니다. 그런데 현재 중동지방은 AD.660경에 만들어진 이슬람교가 석권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으로 불렸던 터키는 기독교의 성지였습니다. 그러나 터키 또한 이슬람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가 껍데기만 남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를 제거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교의 신자들입니다. 이슬람교도나 불교도나 힌두교도들이 제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유럽이나 북남미 지역으로 이슬람교가 굉장한 속도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껍데기만 남아버린 그리스도교가 제거되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사라진 그리스도교에는 이름과 교리와 조직과 문화만 남아있습니다. 남미에서는 그리스도교의 기념일마다 축제가 벌어지고 있지만 정작 누구도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부터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누가는 이러한 내용을 본문을 통해서 숨이 가쁠 정도로 빈틈없이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그리스도라는 단어에 세상 탈출의 코스를 연결시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자마자 버림받고 죽임당하고 부활하실 십자가 사건을 연결시킵니다. 또한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의논하셨음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탈출을 의미하는 엑소도스(ἔξοδος)입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간질병 걸린 아이에게서 귀신을 쫓으신 사건을 통하여 또 다시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시고 세상을 떠나실 것을 연결합니다. 그리고 누가는 45절에서 ‘그들이 이 말씀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들로 깨닫지 못하게 숨긴 바 되었음이라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더라’라고 당시의 제자들의 마음 상태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두려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합하여 기독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개신교와 천주교는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실은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제일 두려워하는 종교이기도 합니다. 자기부인, 날마다 자기 십자가 지기, 부활의 자리에 이르기를 할 수 없게 하는 결정적 이유는 무지와 두려움입니다. 세상을 좋아하기에 세상 탈출하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코스에 대한 무지가 다양한 몰이해와 오해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몰이해는 말 그대로 이해가 전혀 없는 상태이고, 오해는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자기부인을 예로 들어 말씀드려봅니다. 저는 두 손 모아 간절히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따지고 또 따져가며 자인부인이 무엇이며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정확히 깨달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알 때 이 땅의 삶은 공짜로 사는 것이 될 수 있다고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부인을 화날 때 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은 무엇인가를 가지고 싶은 욕망을 견디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면 자기부인을 한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자기부인에 대해 이러한 오해를 하고 있기에 그리스도 코스에 발을 들여놓지도 못하는 상태가 지속됩니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은 무효화 되고 그리스도교에서 그리스도의 존재의미를 제거하는 꼴이 됩니다. 존재의미가 없는 그리스도는 이미 제거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교를 믿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번 수요일에도 그리스도 코스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하여 말씀드릴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의 사건을 통해 자기부인이 무엇인지 사진을 찍듯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버려지셨습니다. 그 버려지신 수동태의 상황을 내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부인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려지심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수동태로 일어났습니다. 그 과정을 통하여 자기부인의 과정을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로써 예수님이 만드신 단계를 자발적으로 걸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자기부인은 곧 혈루증 여인처럼 세상과의 접촉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혈루증 여인은 종교적 이유 때문에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유대교 자체가 잘못된 상태에 빠져 있었지만 유대교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비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이 상황이 쉽게 이해됩니다. 이 여인과의 접촉은 부정하게 여겨져서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세상과 접촉할 때에 반드시 마음에 세상이 스며들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이 스며들어온 마음은 부정한 상태가 되어서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 갈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나의 모습은 하나님과 하나 되는 상태입니다. 한편 세상에 마음이 접촉하고 세상이 스며든 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나의 모습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여기는 마음이 자기부인입니다. 이렇게 세상 것이 스며들어온 마음상태로는 더 이상 살아서는 안 된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금 어려운 이야기를 한다고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내용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그리스도 코스를 밟는 일에 집중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참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많은 분들이 신약성경의 최고봉으로 로마서로 뽑습니다. 대영박물관 관장이 말하길 로마서 8장의 원본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박물관 전체와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본문의 말씀이 더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누가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하는 고백에 잇달아 붙이고 있는 수난의 예고들은 사도 바울의 서신 전체를 각주로 여기게 할 정도입니다. 기독교 교리의 전부가 그리스도 코스에 붙어있는 각주와도 같습니다.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 지기, 부활에 이르는 것이 기독교의 전부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기부인이 무엇이고 자기 십자가 지기가 무엇이며 부활에 이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잘못된 것은 면도칼로 베어내듯이 세밀하게 알아가야만 하고, 바늘 끝으로 찌르듯이 정확하게 알아가야만 합니다.
자기부인에 있어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접촉에 대한 오해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사건이나 만남에 대해서만 자기부인을 적용하고자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안정감이라는 상황에 숨어서 이미 내 마음에 깊이 살처럼 붙어버린 대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배우자나 자녀에 대한 일은 이미 마음에 스며들어 와서 나의 살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미 살이 되어버린 안정된 상태를 나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연관된 일들에만 자기부인을 적용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문제시되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7~38절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제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에 대해서는 자기부인이 필요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 안정적 느낌 안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지경에 놓이게 됩니다. 수입과 나의 마음이 도무지 분리되지 않기에 그 상태를 전제로 하여 다른 문제에 대해서만 자기부인을 적용하고자 합니다.
평소에 배우자나 자녀를 마음에 살처럼 여기며 사는 동안에는 전혀 문제시하지 못하다가 가족에게 병이 생기고 문제가 생길 때에야 비로소 문제로 인식합니다. 재정 문제에 대해서도 집이 있고 매달 들어오는 수입이 있는 상태를 안정적 상태로 전제합니다. 그 자체가 내 마음에 스며들어 와서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고 알아채지도 못합니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신앙생활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믿음에 기쁨이 없고 재미도 없습니다. 이미 세상이 마음에 뿌리내린 상태를 토대로 삼아 예수님을 믿고자 하기에 온전한 자기부인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실상에서 십자가 온라인교회 모임은 과외와도 같습니다. 자기부인이 무엇이고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진다는 것이 무엇이고 부활의 자리에 도달하여 산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계속해서 돌아보고 다시 생각하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뼛속에 새겨질 정도로 반복해서라도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고, 그리스도 코스를 밟는 사람들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만드시고자 한 그리스도 코스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조차 묻고 싶어 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마음상태를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패역은 방향을 바꾸어서 달라붙은 것입니다. 세상 밖으로 탈출해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믿음인데, 방향을 바꾸어서 하나님을 탈출해서 세상에 달라붙고자 합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도 이 패역함을 드러내고 유지하면서 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 코스를 걸을 수는 없습니다.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 지기, 부활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코스를 정확하게 알고 날마다 반복하여 걸어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그리스도 코스를 반복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삶의 현장에서 제거하는 결과를 빚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껍데기만 남게 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코스는 자기부인, 자기 십자가 지기, 부활의 자리에 이르기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를 좁쌀알만큼의 오해의 여지도 없이 알고 또 알고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삶은 저절로 살아지게 됩니다. 기독교는 구세주 즉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좇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했던 베드로의 고백에 이어 나타난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와 변화산 사건에 기독교의 전부가 담겨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리스도 코스를 앞에 두고 무지함으로 대하거나 두려움으로 대하지 않게 하시고 작심하고 마음을 확정하고 달려들어서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제자들처럼 깨닫기를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않게 하시고 정확하게 알고 그리스도 코스를 붙잡고 날마다 반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마음은 하늘에서 기쁨을 누리고 몸은 땅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움직여가는 진정한 복지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