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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본문<요6:16~21>
오늘은 오병이어의 표적에 바로 이어져 나오는 요한복음의 다섯 번째 표적인 주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만 표현 방식이 약간씩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서로 보완하면서 설명하면 내용 파악이 좀 더 쉽겠지요.
먼저 지난주에 본 마지막 절(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당신을 쫓아오자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주님을 좇겠다고 따라온 사람들을 기쁘게 품어 안아 주시지 않고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피하셨다고 했지요?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메시야는 정치적 메시아, 경제적 메시아, 군사적 메시아를 원했기에 주님을 찾아 왕 삼으려 한 것이고, 주님은 그렇게 세상 것을 원해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기에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도망을 가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산으로 도망하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기 위해 산으로 피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생략되었지만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마14:22-23>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그렇지요?(기도~), 그렇다면 주님은 무슨 기도를 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셨던 것일까요?
첫째는 자신을 위해서 한 기도이구, 둘째로는 택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한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위한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기도란 자신이 할수 없기에 ㅎ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고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 인간을 대표하신 것이고 또 한편이로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우리들을 대하신 것입니다. 대표라는 것은 종류와 질이 같은 것에서 나와야 당위성이 입증되는 것이지요(원숭이를 대표하려면 원숭이지 코끼리는 아님), 대표라는 것은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수반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신 완전한 인간이셔야 했고, 죄가 없다는 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당신의 신성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완전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6절 이하에 보면 그 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ㅎ님과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까지 낮아지셨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당신의 신성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 역시 당신께 임한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행하신 것이지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렇지요? 주님은 당신께서 하신 말이나 모든 행위를 스스로의 신성을 동원하셔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 그리 하셨어야 했을까요?
만일 주님께서 당신의 자랑이나 당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셔서 일을 하셨다면 십자가의 죽음도 그저 연극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안 아픈데 그냥 아픈 척하는 드라마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철저하게 인간으로 살다가 가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시험을 이겨내셨고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고난과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분의 의로운 삶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그 시험을 모두 이길 수 있으셨을까요?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매 순간을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지탱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히5:7)에서 잘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이건 주님의 33년 동안의 전 생애 동안의 삶을 조명하는 말씀임)
만일 신성을 맘대로 사용하셨다면 고난과 역경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사53장을 보면 주님은 질고와 간고를 많이 겪으셨다고 나옴/ 온 평생 고난을 달고 살았다는 말임) 그러나 그런 역경을 고스란히 감당하신 것은 신성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이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마26:38~44)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극심한 고통과 고민을 호소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이 장면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죽으러 오셨고, 당신 스스로도 얼마 있다가 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을거야-라고 장담하시던 분이 막상 죽음을 앞두고 이리도 연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가라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통과 두려움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몽땅 받아내야 하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한 번도 떨어져 본적이 없는 일체(一體)의 관계인 아버지 하나님과 잠시 단절이 되어야 한다는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시기에 마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과 동일하게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과 단절이 되어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렇게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육적인 아픔과는 비교도 안되는 ㅎ님 아버지와의 단절이 아들 예수님께는 도저히 상상조차 안되는 저주의 고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단순히 육신이 ‘얼마나 아프셨을까?’하고 너무 감상적으로 바라본다면 유아틱한 발상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로 인해 받아야 할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 영원한 진노의 불이 한꺼번에 떨어진 심판과 저주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망극하신 ㅎ님의 은혜와 구원이 담겨 있는 인류 역사의 중심축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BC와 AD라는 역사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인생, 예수 있는 인생. 역사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예수님의 육신적 고통만을 추측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상하며 얼마나 ‘아프셨을까?..’ 눈물짓는 행위는 어린애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자체도 참혹한 육적 고통을 수반하는 형벌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육신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원한 단절, 그게 바로 지옥이며 그게 바로영원한 사망인 것입니다. 그 지옥을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하여 체휼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은 그 ㅎ님 아버지와의 단절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인간이셨던 주님은 하나님 앞에 세 번이나 ‘할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좀 내게서 옮겨 주시면 안 되겠냐’고 땀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아버지의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NO~(안 된다)’ 였습니다.
주님은 그 응답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기꺼이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완전한 인간으로서 받아내야 할 시험을 기도로 이겨내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지금 광야 40일 금식 후에 사단으로부터 받았던 시험, 나에게 절만 하면 내가 이 세상의 영광을 주겠노라는 바로 그 시험을 똑같이 받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왕이 되어 주소서’ 그래서 주님은 산으로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가신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는 분이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도대체 뭐라고 기도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기도 없이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 없이 거룩한 삶, 신실한 삶,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육신의 정욕, 안목~, 이생의 자랑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면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마태복음을 빌려 보니까, 다시 기도하러 올라가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 단어는 주님의 기도생활이 반복적이고 습관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시고, 또다시 기도하시고, 또다시 기도하시는 습관적인 기도생활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예수님의 기도는 습관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습관처럼 기도를 하심으로 당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영위해 가실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중요한 단어가 ‘혼자’라는 단어입니다. 그 혼자라는 단어 ‘(헬)모노스’는 ‘하나’라는 뜻도 있지만 ‘따로 구별하여’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기도는 따로 구별된 시간을 내어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특히 새벽에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하셨지요? 우리도 기도의 시간을 따로 내서 억지로라도 기도 생활이 필요 합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단어가 ‘산’이라는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따로 구별된 시간을 내어 어디로 올라가셨다고요?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산은 단순히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의 단어가 아닙니다. 이런 구절을 보시고 기도는 꼭 산에 가서 해야 하며, 산에 가서 해야 맛이 난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야 하는 산은 세상과 구별된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과 구별된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짜 산속에 들어가 기도를 하면서도 그 마음속에 온통 이세상의 걱정과 염려와 계획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세상에 있는 사람이지 산 속에 들어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 종합~ 무시로, 항상, 언제 어디서든 삶이 기도여야 함..)
이처럼 기도란 내가 죄와 싸울 수 없기에 ㅎ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을 말 합니다. 세상의 온갖 미혹들이 나를 덮쳐올 때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귀야 나 여기 있으니 날 좀 잡아가라’ 이런 뜻이 아닙니까?
그렇기에 절박한 위기감 속에서 ㅎ님을 찾는 것이지요. (나는 IX 피로 죄사함 받고 구원 받은 자인데, 왜 이리 세상이 좋게 느껴질까?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던데 죄 좀 만져볼까? 이런 미혹이 다가올 때에..이크 안 되겠다.이러다간 넘어지겠구나, 위험하다) 그래서 도움을 ㅎ님께 구하는 삶이 기도입니다.(넘어지면 간극 생김) 성도는 넘어지기 전에 기도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성도는 모범이고 필수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기도를 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는 건너편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가기 위해 자기들끼리 배를 타고 출발을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런 상세한 기술이 없기 때문에 그 배경을 이해하기기 조금 어렵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시면 그 상황을 조금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막6:45~48>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여기에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재촉에 의해 저녁나절에 떠나서 밤 사경까지 (새벽 세시 이후) 괴롭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밤을 새워 풍랑과 싸운 것입니다. 요한복음18절에서는 큰 바람이 불었다고 하는데, 주석에 보면 큰 바람은 태풍과 같은 강풍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지금 엄청난 태풍 속에서 작은 배를 타고 사투를 벌이고있는 것입니다(갈릴리 넓이 12키로..)
이 상황을 잘 보세요. 주님의 명령으로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기 전에는 바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어난 것입니다.보통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기대하는 것이 앞으로는 인생의 폭풍은 사라지고 태평성대만 있을 것 같은 희망 입니다. 뭔가 예수 믿으면 형통함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그 분께 순종했더니 잔잔했던 바다에 오히려 풍랑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주님은 그 풍랑을 통해 제자들에게 진리를 깨우치고 하늘의 비밀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 홀로 나둔 것이 아니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세상과 싸워 이기도록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롬8:34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 답니다)동행구절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폭풍 속으로 손수 몰아넣으시고 산 위에서 그 제자들을 계속 지켜보고 계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제자들과 이 기록을 읽게 될 교회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상황을 잘 그려볼까요? 제자들은 지금 디베랴 동쪽 광야에서 서쪽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 풍랑에 빠지면 모두 죽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여 노를 젓습니다. 그런데 풍랑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 나타나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은 그 즉시 가나안 땅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지금 제자들은 요단 동편 광야에서 요단 서편 가나안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금 세상으로부터 가나안, 즉 천국으로 향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영적인 출애굽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물, 바다, 홍수는 인간의 죄악과 그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상징하는 용어들 입니다. 출애굽 당시의 홍해 도하 사건이 바로 이것을 상징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로 해방되어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됩니다.
홍해는 붉은 피바다를 상징하기에 홍해입니다. 죽음의 물, 죄악과 저주와 심판을 함축한 단어가 홍해입니다. 거기를 어떻게 건넜다구요? 마른 땅 처럼요..이스라엘은 그렇게 무사히 건넜지만 뒤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들은 다 수장되어 죽었습니다(이스라엘과 애굽 사람..둘 다 죄로 죽어야 할 자들이지만, 하나는 택한 자를, 하나는 불택 자를 상징합니다. 여기에서 생과 사가 나눠집니다.)
이 장면을 사도 바울은 고전 10장에서 이렇게 해석 합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에 속하여 바다와 구름에 세례를 받았다구요. 세례란 죽음입니다. 그런데 모세에 속하여 세례를 받았답니다. 즉 죽음의 바다를 건널 때에 모세로 상징된 IX께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주님이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고 장사될 때 혼자 죽고 장사되고 부활 한 게 아니라 우리 성도를 끌어 앉고 같이 죽고 함께 부활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IX 안에서 부활 생명을 갖게 된 것입니다. 물론 구약 백성 뿐 아니라 묵시 속에서는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으니까, 신구약의 모든 택하신 백성들이 다 IX의 십자가로 구원 받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병이어에 이어서 바다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행적은, 과거 어린양의 피로 출애굽한 후에 홍해를 건너는 사건에 대한 재해석을 하시는 일종의 시청각 교육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나눈 오병이어는 보리떡과 같이 보잘 것 없이 보이는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죄와 사망에 갇혀 있던 자기백성들이 해방되어 풀려난 것을 상징합니다. 영적인 출애굽이 오병이어의 표적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거듭남으로 구원이 종결된 건 아닙니다. 육신의 삶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인생의 바다 저편인 가나안 땅으로 상징된 천국으로 가고자 항해를 할 때에 여러 고난과 역경이 닥치는 것을 거센 풍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과 노력으로 아무리 해도 거기에 당도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깊은 밤 사경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주님이 그 거센 파도를 밟고 오실 때, 제자들이 반갑게 영접하니 풍랑이 잠잠해지고 가고자하는 목적지에 당도하는 그림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 제자들은 폭풍의 바다 속에서 건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바다의 풍랑, 즉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주님께서 밟고 올라서시니까 풍랑이 잔잔해 지고 제자들이 그들의 목적지인 가나안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20절로 가보세요.(요6:20-21)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그 풍랑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잘 안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프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초저녁부터 새벽 세시가 넘도록 밤새 노를 저었는데도 그 풍랑 속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쪽에서 주님께서 그 물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이러한 장면이 주는 교훈은, 인간의 행위와 힘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행복을 추구하려는 자들에게 -‘너희들의 힘으로는 절대 약속의 땅(안식과 기쁨의 땅)에 도달할 수 없으니, 나를 의지하고 나를 믿어라, 오직 그 길만이 너희가 가려는 안식의 땅, 행복의 땅에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것을 성도인 교회들에게 친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거기에 폭풍이라는 환경이 등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인생에 어떤 풍랑이 일어나거든 하나님께서 또 나에게 어떤 비밀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런 폭풍을 허락하신 것일까 하고 기대와 소망 속에서 받아들이셔야지 ’왜 나한테만 자꾸 이런 폭풍이 일어나는 거야‘하고 원망의 화살을 날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의 소유나 세상의 권세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생의 복 속에서만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ㅎ님 외에 다른 것으로 심령의 배고픔과 갈증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은혜로 영생을 주시겠다는 예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영생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만을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들을 통하여 그렇게 세상의 복만을 구하려는 자들에게 ‘너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왜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나에게서 원하느냐? ‘하고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바로 그러한 우매한 인간들의 대표로 나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마14:27-31>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주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내가 바로 너희를 구원할 하나님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저도 물위를 걷게 해 주세요’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물위를 걸어보는 것이 뭐 그리 중요 합니까? 일단 살아야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가 아닌 ’주님 저희도 폼 나게 물위를 걷게 해 주세요 ‘하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건 다분히 이생의 자랑과 세상의 정욕에 기인한 요구였습니다.
마귀사단은 예수님께 시험한 것을 성도들에게도 어김없이 부추기고 있습니다. 성전 꼭데기에서 떨어져 봐라, 그러면 주께서 붙잡아서 안전하게 하실 거니까..이게 뭡니까? 은사주의 신비주의로 세상의 이목을 끌어 유명인사가 되라는 미혹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동화된 거짓 목사들이 여기저기에 창궐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신비한 기적으로 혹은 성공출세로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자랑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더럽고 추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이 죄악의 바다, 폭풍의 바다에서 저 좀 살려 주세요‘하고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으로 숨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많은 거짓 목사들이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에서도 복받아 성공출세하고 죽어서도 천국 간다고 탐심을 부추기며 거짓을 말하니 우매하고 어리석은 신자들은 그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게 내 소원 들어주는 맘씨 좋은 ㅎ님, 은혜로운 예수님이지요.. 완전히 다른 ㅎ님을 조장하여 섬기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저주의 바다, 풍랑의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이용해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어떻게 됩니까? 바다에 빠집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심판의 바다, 저주의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주님을 좇은 육적인 신자의 대표라고 보시면 맞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네가 믿음이 없어서 빠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갑자기 거기서 믿음이 등장할까요? 믿음만 있으면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을 좇아 물위를 걸으려 하는 자들, ㅎ님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을 과시함으로 행복을 찾으려 하는 자들은 모두 다 그렇게 저주의 바다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통용되는 성공주의, 물질주의, 인본주의 사상에서 빠져나와 믿음으로 죄악의 바다 위를 걷는 진짜 물 위를 걷는 자들이 되라는 것이 그 속에 메시지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히11장에서 믿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하고 합니다.’ 가시적으로는 안 보이는 ㅎ님의 나라, 그 영원한 곳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자는 이 세상의 가치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풍랑이 넘실대는 이 세상의 풍조라는 저주의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다를 밟고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게 노아처럼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게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정답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살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 높이고 자랑하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만 우리의 생명으로 삼기를 소원 합니다
본문<요6:16~21>
오늘은 오병이어의 표적에 바로 이어져 나오는 요한복음의 다섯 번째 표적인 주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에 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만 표현 방식이 약간씩 차이가 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서로 보완하면서 설명하면 내용 파악이 좀 더 쉽겠지요.
먼저 지난주에 본 마지막 절(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당신을 쫓아오자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왜 주님은 주님을 좇겠다고 따라온 사람들을 기쁘게 품어 안아 주시지 않고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피하셨다고 했지요?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메시야는 정치적 메시아, 경제적 메시아, 군사적 메시아를 원했기에 주님을 찾아 왕 삼으려 한 것이고, 주님은 그렇게 세상 것을 원해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기에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도망을 가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산으로 도망하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기 위해 산으로 피하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생략되었지만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마14:22-23>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그렇지요?(기도~), 그렇다면 주님은 무슨 기도를 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셨던 것일까요?
첫째는 자신을 위해서 한 기도이구, 둘째로는 택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를 한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위한 기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기도란 자신이 할수 없기에 ㅎ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온전한 인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고 완전한 하나님이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 인간을 대표하신 것이고 또 한편이로는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우리들을 대하신 것입니다. 대표라는 것은 종류와 질이 같은 것에서 나와야 당위성이 입증되는 것이지요(원숭이를 대표하려면 원숭이지 코끼리는 아님), 대표라는 것은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수반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지신 완전한 인간이셔야 했고, 죄가 없다는 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당신의 신성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완전한 인간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6절 이하에 보면 그 분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ㅎ님과 동등됨을 포기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까지 낮아지셨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당신의 신성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 역시 당신께 임한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행하신 것이지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그렇지요? 주님은 당신께서 하신 말이나 모든 행위를 스스로의 신성을 동원하셔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왜 그리 하셨어야 했을까요?
만일 주님께서 당신의 자랑이나 당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셔서 일을 하셨다면 십자가의 죽음도 그저 연극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안 아픈데 그냥 아픈 척하는 드라마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철저하게 인간으로 살다가 가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시험을 이겨내셨고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고난과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분의 의로운 삶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그 시험을 모두 이길 수 있으셨을까요?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매 순간을 아버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지탱하셨던 것입니다.
이를 (히5:7)에서 잘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이건 주님의 33년 동안의 전 생애 동안의 삶을 조명하는 말씀임)
만일 신성을 맘대로 사용하셨다면 고난과 역경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사53장을 보면 주님은 질고와 간고를 많이 겪으셨다고 나옴/ 온 평생 고난을 달고 살았다는 말임) 그러나 그런 역경을 고스란히 감당하신 것은 신성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는 반증입니다.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에서도 이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마26:38~44)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극심한 고통과 고민을 호소하십니다.
많은 분들이 이 장면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아니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죽으러 오셨고, 당신 스스로도 얼마 있다가 제사장들과 종교 지도자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을거야-라고 장담하시던 분이 막상 죽음을 앞두고 이리도 연약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가라고 실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통과 두려움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몽땅 받아내야 하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한 번도 떨어져 본적이 없는 일체(一體)의 관계인 아버지 하나님과 잠시 단절이 되어야 한다는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시기에 마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과 동일하게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과 단절이 되어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렇게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육적인 아픔과는 비교도 안되는 ㅎ님 아버지와의 단절이 아들 예수님께는 도저히 상상조차 안되는 저주의 고통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단순히 육신이 ‘얼마나 아프셨을까?’하고 너무 감상적으로 바라본다면 유아틱한 발상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로 인해 받아야 할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 영원한 진노의 불이 한꺼번에 떨어진 심판과 저주의 자리이면서 동시에 망극하신 ㅎ님의 은혜와 구원이 담겨 있는 인류 역사의 중심축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BC와 AD라는 역사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예수 없는 인생, 예수 있는 인생. 역사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예수님의 육신적 고통만을 추측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상하며 얼마나 ‘아프셨을까?..’ 눈물짓는 행위는 어린애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자체도 참혹한 육적 고통을 수반하는 형벌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육신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원한 단절, 그게 바로 지옥이며 그게 바로영원한 사망인 것입니다. 그 지옥을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하여 체휼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은 그 ㅎ님 아버지와의 단절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인간이셨던 주님은 하나님 앞에 세 번이나 ‘할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좀 내게서 옮겨 주시면 안 되겠냐’고 땀이 핏방울이 될 때까지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아버지의 응답이 무엇이었습니까? ‘NO~(안 된다)’ 였습니다.
주님은 그 응답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기꺼이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완전한 인간으로서 받아내야 할 시험을 기도로 이겨내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지금 광야 40일 금식 후에 사단으로부터 받았던 시험, 나에게 절만 하면 내가 이 세상의 영광을 주겠노라는 바로 그 시험을 똑같이 받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왕이 되어 주소서’ 그래서 주님은 산으로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가신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는 분이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도대체 뭐라고 기도 없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기도 없이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 없이 거룩한 삶, 신실한 삶,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육신의 정욕, 안목~, 이생의 자랑을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오늘 본문 15절을 보시면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요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마태복음을 빌려 보니까, 다시 기도하러 올라가셨음을 알게 됩니다. 이 단어는 주님의 기도생활이 반복적이고 습관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시고, 또다시 기도하시고, 또다시 기도하시는 습관적인 기도생활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예수님의 기도는 습관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습관처럼 기도를 하심으로 당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영위해 가실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중요한 단어가 ‘혼자’라는 단어입니다. 그 혼자라는 단어 ‘(헬)모노스’는 ‘하나’라는 뜻도 있지만 ‘따로 구별하여’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기도는 따로 구별된 시간을 내어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특히 새벽에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하셨지요? 우리도 기도의 시간을 따로 내서 억지로라도 기도 생활이 필요 합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단어가 ‘산’이라는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따로 구별된 시간을 내어 어디로 올라가셨다고요?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산은 단순히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의 단어가 아닙니다. 이런 구절을 보시고 기도는 꼭 산에 가서 해야 하며, 산에 가서 해야 맛이 난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야 하는 산은 세상과 구별된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과 구별된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마음가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진짜 산속에 들어가 기도를 하면서도 그 마음속에 온통 이세상의 걱정과 염려와 계획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세상에 있는 사람이지 산 속에 들어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도 종합~ 무시로, 항상, 언제 어디서든 삶이 기도여야 함..)
이처럼 기도란 내가 죄와 싸울 수 없기에 ㅎ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을 말 합니다. 세상의 온갖 미혹들이 나를 덮쳐올 때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귀야 나 여기 있으니 날 좀 잡아가라’ 이런 뜻이 아닙니까?
그렇기에 절박한 위기감 속에서 ㅎ님을 찾는 것이지요. (나는 IX 피로 죄사함 받고 구원 받은 자인데, 왜 이리 세상이 좋게 느껴질까?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던데 죄 좀 만져볼까? 이런 미혹이 다가올 때에..이크 안 되겠다.이러다간 넘어지겠구나, 위험하다) 그래서 도움을 ㅎ님께 구하는 삶이 기도입니다.(넘어지면 간극 생김) 성도는 넘어지기 전에 기도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성도는 모범이고 필수입니다.
그렇게 주님은 기도를 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는 건너편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가기 위해 자기들끼리 배를 타고 출발을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런 상세한 기술이 없기 때문에 그 배경을 이해하기기 조금 어렵지만 마가복음의 기록을 보시면 그 상황을 조금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막6:45~48>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46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여기에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재촉에 의해 저녁나절에 떠나서 밤 사경까지 (새벽 세시 이후) 괴롭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밤을 새워 풍랑과 싸운 것입니다. 요한복음18절에서는 큰 바람이 불었다고 하는데, 주석에 보면 큰 바람은 태풍과 같은 강풍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지금 엄청난 태풍 속에서 작은 배를 타고 사투를 벌이고있는 것입니다(갈릴리 넓이 12키로..)
이 상황을 잘 보세요. 주님의 명령으로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기 전에는 바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어난 것입니다.보통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기대하는 것이 앞으로는 인생의 폭풍은 사라지고 태평성대만 있을 것 같은 희망 입니다. 뭔가 예수 믿으면 형통함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그 분께 순종했더니 잔잔했던 바다에 오히려 풍랑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주님은 그 풍랑을 통해 제자들에게 진리를 깨우치고 하늘의 비밀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제자들 홀로 나둔 것이 아니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세상과 싸워 이기도록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롬8:34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 답니다)동행구절인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폭풍 속으로 손수 몰아넣으시고 산 위에서 그 제자들을 계속 지켜보고 계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제자들과 이 기록을 읽게 될 교회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상황을 잘 그려볼까요? 제자들은 지금 디베랴 동쪽 광야에서 서쪽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 풍랑에 빠지면 모두 죽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여 노를 젓습니다. 그런데 풍랑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 나타나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은 그 즉시 가나안 땅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말씀 드렸다시피 지금 제자들은 요단 동편 광야에서 요단 서편 가나안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금 세상으로부터 가나안, 즉 천국으로 향하는 하나님 백성들의 영적인 출애굽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물, 바다, 홍수는 인간의 죄악과 그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상징하는 용어들 입니다. 출애굽 당시의 홍해 도하 사건이 바로 이것을 상징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로 해방되어 홍해를 마른 땅처럼 건너게 됩니다.
홍해는 붉은 피바다를 상징하기에 홍해입니다. 죽음의 물, 죄악과 저주와 심판을 함축한 단어가 홍해입니다. 거기를 어떻게 건넜다구요? 마른 땅 처럼요..이스라엘은 그렇게 무사히 건넜지만 뒤쫓아 오는 바로의 군대들은 다 수장되어 죽었습니다(이스라엘과 애굽 사람..둘 다 죄로 죽어야 할 자들이지만, 하나는 택한 자를, 하나는 불택 자를 상징합니다. 여기에서 생과 사가 나눠집니다.)
이 장면을 사도 바울은 고전 10장에서 이렇게 해석 합니다. 이스라엘이 모세에 속하여 바다와 구름에 세례를 받았다구요. 세례란 죽음입니다. 그런데 모세에 속하여 세례를 받았답니다. 즉 죽음의 바다를 건널 때에 모세로 상징된 IX께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주님이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고 장사될 때 혼자 죽고 장사되고 부활 한 게 아니라 우리 성도를 끌어 앉고 같이 죽고 함께 부활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IX 안에서 부활 생명을 갖게 된 것입니다. 물론 구약 백성 뿐 아니라 묵시 속에서는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으니까, 신구약의 모든 택하신 백성들이 다 IX의 십자가로 구원 받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오병이어에 이어서 바다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행적은, 과거 어린양의 피로 출애굽한 후에 홍해를 건너는 사건에 대한 재해석을 하시는 일종의 시청각 교육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나눈 오병이어는 보리떡과 같이 보잘 것 없이 보이는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 죄와 사망에 갇혀 있던 자기백성들이 해방되어 풀려난 것을 상징합니다. 영적인 출애굽이 오병이어의 표적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거듭남으로 구원이 종결된 건 아닙니다. 육신의 삶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자들이 인생의 바다 저편인 가나안 땅으로 상징된 천국으로 가고자 항해를 할 때에 여러 고난과 역경이 닥치는 것을 거센 풍랑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의 힘과 노력으로 아무리 해도 거기에 당도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깊은 밤 사경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주님이 그 거센 파도를 밟고 오실 때, 제자들이 반갑게 영접하니 풍랑이 잠잠해지고 가고자하는 목적지에 당도하는 그림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 제자들은 폭풍의 바다 속에서 건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바다의 풍랑, 즉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을 주님께서 밟고 올라서시니까 풍랑이 잔잔해 지고 제자들이 그들의 목적지인 가나안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20절로 가보세요.(요6:20-21)20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그 풍랑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잘 안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프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초저녁부터 새벽 세시가 넘도록 밤새 노를 저었는데도 그 풍랑 속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쪽에서 주님께서 그 물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이러한 장면이 주는 교훈은, 인간의 행위와 힘을 통하여 구원을 받고 행복을 추구하려는 자들에게 -‘너희들의 힘으로는 절대 약속의 땅(안식과 기쁨의 땅)에 도달할 수 없으니, 나를 의지하고 나를 믿어라, 오직 그 길만이 너희가 가려는 안식의 땅, 행복의 땅에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것을 성도인 교회들에게 친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거기에 폭풍이라는 환경이 등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인생에 어떤 풍랑이 일어나거든 하나님께서 또 나에게 어떤 비밀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런 폭풍을 허락하신 것일까 하고 기대와 소망 속에서 받아들이셔야지 ’왜 나한테만 자꾸 이런 폭풍이 일어나는 거야‘하고 원망의 화살을 날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의 소유나 세상의 권세로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생의 복 속에서만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ㅎ님 외에 다른 것으로 심령의 배고픔과 갈증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은혜로 영생을 주시겠다는 예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영생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만을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들을 통하여 그렇게 세상의 복만을 구하려는 자들에게 ‘너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왜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나에게서 원하느냐? ‘하고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바로 그러한 우매한 인간들의 대표로 나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마14:27-31>27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주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은 ‘내가 바로 너희를 구원할 하나님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저도 물위를 걷게 해 주세요’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물위를 걸어보는 것이 뭐 그리 중요 합니까? 일단 살아야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가 아닌 ’주님 저희도 폼 나게 물위를 걷게 해 주세요 ‘하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건 다분히 이생의 자랑과 세상의 정욕에 기인한 요구였습니다.
마귀사단은 예수님께 시험한 것을 성도들에게도 어김없이 부추기고 있습니다. 성전 꼭데기에서 떨어져 봐라, 그러면 주께서 붙잡아서 안전하게 하실 거니까..이게 뭡니까? 은사주의 신비주의로 세상의 이목을 끌어 유명인사가 되라는 미혹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동화된 거짓 목사들이 여기저기에 창궐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신비한 기적으로 혹은 성공출세로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자랑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더럽고 추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이 죄악의 바다, 폭풍의 바다에서 저 좀 살려 주세요‘하고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으로 숨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많은 거짓 목사들이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에서도 복받아 성공출세하고 죽어서도 천국 간다고 탐심을 부추기며 거짓을 말하니 우매하고 어리석은 신자들은 그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게 내 소원 들어주는 맘씨 좋은 ㅎ님, 은혜로운 예수님이지요.. 완전히 다른 ㅎ님을 조장하여 섬기고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바로 저주의 바다, 풍랑의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이용해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어떻게 됩니까? 바다에 빠집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심판의 바다, 저주의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당시 베드로는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주님을 좇은 육적인 신자의 대표라고 보시면 맞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네가 믿음이 없어서 빠졌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갑자기 거기서 믿음이 등장할까요? 믿음만 있으면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생의 자랑, 육신의 정욕을 좇아 물위를 걸으려 하는 자들, ㅎ님을 이용하여 이 세상에서 자신을 과시함으로 행복을 찾으려 하는 자들은 모두 다 그렇게 저주의 바다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통용되는 성공주의, 물질주의, 인본주의 사상에서 빠져나와 믿음으로 죄악의 바다 위를 걷는 진짜 물 위를 걷는 자들이 되라는 것이 그 속에 메시지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히11장에서 믿음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하고 합니다.’ 가시적으로는 안 보이는 ㅎ님의 나라, 그 영원한 곳을 믿음의 눈으로 보는 자는 이 세상의 가치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풍랑이 넘실대는 이 세상의 풍조라는 저주의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다를 밟고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게 노아처럼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그게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정답입니다. 예수가 우리의 살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달린 예수만 높이고 자랑하겠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예수만 우리의 생명으로 삼기를 소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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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