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교계가 사분오열로 갈라지는 현상은 하나의 유행병과도 같았다. 여기저기에서 붙었다가 떨어지는 교단들은 명분도 찾지 못한 채 부끄러움만 더할 뿐이었다. 교리적으로 갈라서는 것은 그래도 명분이 있다. 하지만 교권쟁탈 때문에 교단이 분열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분열은 사탄이 좋아하는 것이다. 우리 교단의 분열도 따지고 보면 명분 없는 분열이었다. 교단의 주도권 문제가 분열의 주요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제 각자 이권이 있는 일에 몰려들었다.
총회분열을 둘러싸고 도처에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속출했다. 교회와 교회가 분열하는가 하면, 어떤 교회들은 목회자와 제직 간에 대립이 일어나 교회당 쟁탈전도 일어났다. 부모와 자녀가 갈라지고, 동역자 사이가 갈라졌다. 총회가 둘로 분열되어 양립하니 어느 파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로 교회마다 논란이 일어나고 일대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모략과 중상이 난무했고 인신공격들이 일어났다.
교단의 분열은 곧 교회의 분열로 이어졌고, 교회의 분열은 성도들을 분열시켰다. 예배당 쟁탈전이 일어나고, 상호 모략과 중상이 끊이지 않았고, 성도들 간의 상처 받은 마음은 치유할 길이 없었다. 예배당 강대상에서 목회자들이 성도들 앞에서 서로 멱살을 잡는가 하면, 집사들이 목회자를 강대상에서 끌어내리는 등 말로 할 수 없는 추태가 전국 도처에서 벌어졌다. 분열을 앞장서서 주도했던 장본인들의 상처는 더욱 심각했다.
교단 분열은 나에게 한 사람을 생각나게 한다. 그는 내가 전도사로 임명을 받고 초년 목회를 할 때 가장 많이 만났던 이봉래(李鳳來) 씨다. 그의 아버지 이인영(李仁泳) 씨는 본 교단의 전신인 대한기독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북한 회령(會嶺)에서 공산분자들 손에 학살당하셨던 인물이었다.
이봉래 전도사는 북한에서 평북지방 순회시찰 전도사로 활약하다가 6ㆍ25 전쟁을 맞이했다. 그는 9ㆍ28 수복으로 국군이 진주하자 초원(草原) 누님 댁에 숨어있다가 붙들려 흥남으로 옮긴 뒤, 삼랑진(三浪津)호를 타고 거제도로 12월 23일 송치되었고, 그곳에서 내내 반공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과감한 조치로 반공포로석방령이 반포되어 이전도사는 석방되었다.
그 뒤 그는 내가 속해 있던 충서지방회 광천교회로 부임했다. 그 까닭에 우리는 매주 한 번씩 만나 유달리 깊은 신앙의 교제를 할 수 있었다. 그 후 이전도사는 공주, 예산, 합덕 등의 교회에서 시무했다. 침례신학교를 함께 입학하여 공부했기 때문에 우리의 교제는 계속되었다.
그는 남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주체의식이 매우 강했고, 무엇이든 시작하면 집념이 강해서 끝까지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또 박학다식하고 이론이 정연했다. 월남한 이후 10여 년을 독신으로 살면서 지조를 보였던 사람이기도 했다. 조국의 통일을 바라보면서, 개인적으로나 교단적으로 한 때 큰 기대를 받았던 사람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 꿈은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이전도사의 꿈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책임의 일부는 교단분열과 비뚤어진 교회 정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교단분열 이후 그는 정치싸움에 깊이 가담하게 되었다. 급기야 선배 목사의 기관장 자리까지 탈취하는 등, 분수에 지나친 행동을 했다. 그러다가 1963년쯤 그는 그 도를 지나쳐 방종의 삶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얼마 뒤에 그를 다시 만나보니, 그는 신앙관도 변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디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는지도 석연치 않았다. 나는 그에게 처음부터 다시 출발하라고 권했다. 그가 마음을 고친 것 같기에 울진지방에 교역자가 없는 교회를 교섭하여 목회지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얼마 있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여전히 이곳저곳을 방황하며 다녔다. 그의 잘못된 인생이 꼭 주변 환경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라도, 교단 분열과 그 뒤에 전개되었던 교단의 풍토가 한 젊고 유능한 목회자를 망가뜨리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총회 분열 이듬해인 1960년에 김천에서 열린 대한기독교침례회 제50차 총회 임원들